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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여름 나는 창작집 「목숨」을 자비로 출발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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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출판사에서 출판하자고 교섭이 있었지만 무책임한 출판사가 무책임하게 출판하는 것은 나의 프라이드가 허락치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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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인쇄소(한성도서주식회사)에 갔다가 내 처소(태평여관)로 돌아오는 길에 그 도중에 있는 청진동 안서의 여관에 들렀더니, 그때 안서는 웬 손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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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린넬 쓰메에리 양복을 입은 얼굴에 굴곡 많은, 나이의 나보다 한두살 아래로 보이는 키는 작은 편인 젊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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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젊은이의 입은 옷이며 얼굴 생김이 마치 형사 같으므로 형사인가 하여 도로 돌아설까 하는데 안서가 그 젊은이를 나도향이라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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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꿈은 창백하더이다」라는 도향의 소설을 본 기억이 있는지라, 이 친구가 도향인가 호기심은 났으나, 그 형사 같은 첫 인상이 불쾌하여 나는 뚱한 채 그다지 말도 사괴지 않고 그냥 내 처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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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튿날 도향이 여관으로 찾아왔다. 와서는 서슴지 않고 린넬 저고리를 벗어서 병풍에 걸고 마루에 장기판을 보고 장기둘 줄 아느냐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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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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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제의 인상이 좋지 못한 찌꺼기가 있어서 흥미없는 듯이 대답하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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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놉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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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장기판을 들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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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 놀았는지 그 승부가 어땠는지는 4반 세기를 지난 옛날이라 기억이 없지만, 서로 수가 비슷비슷하였다고 기억한다. 장기를 몇 차례 논 후에 도향은 나에게도 눕기를 권하며 자기도 보료 위에 번뜻 자빠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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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담배를 한참 뻐근뻐근 빨다가 문득 어두운 데 홍두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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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형, 사람의 세상은 왜 이리 외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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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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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네거리에 우두커니 서 있노라면 사람들이 곁으로 앞으로 휙휙 지나 갑니다. 그들이 내 얼굴을 보면 마주보며 미소해 주려고 벼르지만, 눈만 마주치면 얼른 외면해 버리고 그냥 씁쓸히 지나가니 사람의 세상이란 꼭 그렇듯 서로 무관심히 지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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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소설 「옛날 꿈은 창백하더이다」에 나타난 적적미를 나는 여기서 그 본인에게서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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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향, 우리 술 먹으러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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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찬성! 대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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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불쾌하던 인상이 기억을 깨끗이 씻고 두 젊은 소설학도는 작반하여 청량리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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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매일 도향은 나의 처소에 와서 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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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당(최남선)이 《시대일보》의 주인이 되며 염상섭이 《시대일보》 사회부장이 되면서 빙허(현진건)와 도향이 사회부 기자가 되어 《시대일보》 사회부는 소설작가로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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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에 나는 무슨 일로 상경하여 저녁에 우리는 어떤 술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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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란 염상섭, 나도향 및 朱鍾健(주종건)이라는 공산주의자(역시 《시대일보》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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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서 주종건은 주로 내게 향하여 공산주의의 설법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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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은 소위 ‘진보적 사상’이라 하여 얼마만치 공산주의를 시인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설법을 만나면 또한 그의 성격상 반대의 입장에 서는 사람이었다. 내게로 향한 주종건의 설법에 대하여 상섭이 대맡아 논전이 시작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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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문득 한 마디 끼어 보았다. 소위 체면이든가 체재라든가 하는 것을 공산주의에서는 어떻게 보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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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재라든 체면이라든, 그런 건 다 소부르조아적 근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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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주 공, 이건 내 눈이 무딘 탓인지는 모르겠소마는, 주 공 가슴에 걸려 있는 싯누런 시계줄을 나는 도금줄이라 봤는데, 설사 도금이 아니고 진정한 금이라 한들, 니켈이나 그저 쇠줄이나 노끈을 쓰지 않고 싯누런 줄을 쓰는 건 무슨 까닭이오? 또 실례지만 그 줄 끝에 시계가 있기는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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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맹이 없이 누런 줄만 가슴에 장식한 건 아니오? 주 공이 싯누런 시계줄을 가슴에 걸고 있는 동안은 공산주의 선전의 자격이 없다고 나는 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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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향이 연해 발가락으로 내 무릎을 꾹꾹 찌르는 것은 통쾌하다는 뜻인지 너무 심하다는 뜻인지는 모르지만 주씨는 더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닫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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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를 파한 뒤에 염(상섭)은 나더러 너무 심하다고 나무랐지만 도향은 소년처럼 올라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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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형 만세! 김 형 아니면 못할 말, 김 형만이 할 수 있는 말 ― 김 형, 만만세!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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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좋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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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젊은 사람, 더우기 경제적으로 불순한 환경에 있는 사람은 아주 감염치기 쉬운 공산주의로되, 도향은 불순한 환경의 젊은이이면서도 끝끝내 거기 대립하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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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겨울 춘해가 《조선문단》을 창간하였다. 원고료를 200자 한 장에 50 전씩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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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고료는 《개벽》에서 먼저 시작한 일로서 《창조》 잔당들은 돈으로 글을 팔랴 하여 도리어 불쾌하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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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만은 강청에 못이기어 글을 썼지만, ‘개벽사’건 ‘조선문단사’ 애당초 내게는 원고료를 낼 생각도 안했고, 나도 받을 생각도 안했고, 그런 만치 글쓰는 데 자셋상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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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재경 문사들은 이 두 잡지사의 원고료가 술값 도움에 적잖은 보탬이 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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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대해서는 뒤에 더 쓸 기회가 있겠거니와 도향은 여기서 약간 여유가 생긴 모양으로 공부하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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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경에 얼마 있지 못하고 다시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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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서도 異鄕(이향)의 적적함을 여러번 엽서로 하소연하던 도향이라, 그가 귀국한 뒤에 나는 일부러 상경하여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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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을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도향의 하소연에 꼭 오라고, 오면 술과 기생은 싫도록 대접하마고, 도향이 下壤(하양)할 날까지 약속하고 나는 평양으로 돌아와서 도향의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는데 그 날을 당하여 도향에게서 사정때문에 못 간다는 엽서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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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정이란 물론 찻삯 등 경제사정일 것이 짐작이 가서, 이 뒤 상경할 기회가 생길 때 함께 데리고 오리라고 벼르는 동안 그 뒤 한 달쯤 지나서 신문지는 도향의 죽음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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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신문보도를 보고 소리없이 울었다. 총각으로 죽은 도향이었다. 굴곡 많은 얼굴이며, 땅딸보 키며, 가난이 여인의 사랑을 끌 매력이 없는 것이라 살틀하고 다정한 도향이었지만 그의 짧은 생애를 고적하고 쓸쓸하게 마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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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얼마 지나 역시 고인 曙海(서해)(崔鶴松(최학송))에게서 도향의 비석을 해 세우려 하니 얼마간 찬조하라는 편지가 왔다. 나는 그때 왜 이런 태도를 취하였는지 지금까지도 생각날 때마다 스스로 부끄러이 여기고 후회하는 바이지만, 그때의 서해의 간곡한 편지에 대하여 나는 내가 《조선문단》에 글을 쓸 터이니 그 원고료를 받아서 비석 비용에 보태라고 회답하였다 (서해는 그때 조선문단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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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서해가 조선문단사에서 내 원고료라는 명목으로 얼마 받아서 비석 비용에 보태 썼는지 어떤지는 따져 본 일이 없지만, 뒷날 사진으로 본 도향의 비석(작다란 화강석 비석이었다) 따위는 도향에게 대한 우정 관계로든 서해에게 대한 의리 관계로든, 나 혼자의 힘으로라도 넉넉히 해 세울 수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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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는 내 태도를 불쾌히 여겼는지, 혹은 조선문단사에서 내 원고료라는 명목으로 얼마 꺼냈는지는 모르지만 도향의 비석은 서해의 힘으로 건립되었다. 가장 기대 크던 도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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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어리니만치 아직 미성품 채로 사라진 도향이지만, 여러 각도로 뜯어 보아서 가장 기대 크게 가질 작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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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향 죽기 전후의 조선문단(주로 소설단)을 개괄적으로 살펴 보자면 최서해는 조선문단사의 식객으로, 사원으로, 서기로, 하인으로, 명목 모호한 존재로 겨우 몇 편의 창작으로 출발하려던 무렵이라 말할 바이 없고, 빙허(현진건)는 질보다 재간이 과승하여 재간으로 메꾸어 나가던 사람이요, 염상섭은 그 풍부한 어휘와 아기자기한 필치는 당대 독보지만 끝막이가 서툴러 ‘미완’혹은 ‘계속’이라고 달아야 할 작품의 꼬리에 ‘끝’자를 놓는 사람이요, 월탄(박종화)은 《개벽》에 창작 몇 편을 실어 보았지만 습작 정도에 지나지 못하고, 중일전쟁 전후에야 《매일신문》에 ‘신문소설’을 써서 비로소 대중적으로 알린 사람이요, 춘해(방인근)는 그때부터 오늘까지 전진, 후퇴 전혀 없는 사람이요, 나 역 시 그 시절 작품은 모두 묻어 버리고 싶은 형편이니 말할 것도 없고, 이러 한 문단 형편에서 도향을 잃었다는 것은 조선문학 발전에 지대한 손실이라 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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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향의 죽음의 가장 큰 원인은 영양부족한 창자에 독한 냉주를 끊임없이 사발로 들이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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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하며, 도향하며, ‘조선’이란 땅은 천재를 내려주기는 너무도 아까운 땅이다. 성경의 귀절에 있나니 가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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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야지에게 진주를 던져 주지 말라. 도야지는 진주의 그 무엇임을 알지 못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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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부족으로 죽은 도향의 비석에 이 구(句) 한 귀를 새겨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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