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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도 (赤道) ◈
◇ 명화 ◇
해설   목차 (총 : 22권)     이전 4권 다음
1934
현진건
1
여름 밤 새벽, 삶고 찌는 듯하던 더위도 인제야 잠깐 물러갔다. 질식하고 만 것 같은 바람이 갑자기 생기를 얻은 듯이 살랑살랑 불기 시작하였다. 그 축축한 입김에 흔들리며 달빛은 흩어졌다. 바람에 날리는 그 밝은 가루는, 마치 눈보라 모양으로 입때껏 고이었던 땀방울을 선선하게 식히는 듯하였다.
 
2
더위에 헐떡이는 것처럼 훨씬 열린 명화의 방 미닫이는 아직도 닫히지 않았다.
 
3
병일과 단둘이 자는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그들은 불은 끄고 문을 열어 둔 것이었다 그러나 달빛이 . 기어들 줄은 몰랐다. 연옥색 생초 모기장으로 걸러 놓으니, 밝고 흰 광선은 푸르게 변하여 햇발에 은은히 비치는 바다 속도 이러할 듯. 그렇다면 사내와 계집의 손길 발길에 채이고 밀려서 꾸기고 불룽거리는 초록 생고사 겹이불은 굼실거리는 물결이라 할까.
 
4
벼개와 요 이불을 내어버리고 맨 방바닥에, 구을러 와서 자던 병일은 선선한 기운에 잠이 깨었다. 어젯밤 명월관 본점에서 맥주에다가 위스키를 타 먹은 탓인지, 눈을 뜨자마자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었다. 그는 자리끼를 찾아, 벌떡벌떡 들이키다가 보니, 화류 문갑 위에 얹힌 자개박이 체경이 번들번들하고, 그 옆에 놓인 유리 항아리에 금붕어가 빨간 비늘을 번득이며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이 역력하다. 이 밝은 빛의 원인을 알아차리자, 그는 미닫이 편으로 고개를 돌리었다.
 
5
목단화 송이처럼, 멍울멍울한 구름에 걸린 반 남아 이지러진 쪽달이 마주 들여다본다.
 
6
명화도 오른팔과 왼편 다리로 귀찮은 듯이 이불을 걷어 제치고, 벼개에서 미끄러진 머리를 벼개에 처박은 채 곤하게 잔다. 그 드러난 가슴, 다리, 팔은 은물에 적시어 놓은 듯. 그 흰 살덩이에 어른어른하는 모기장 그늘은 마치 인어(人魚) 몸에 붙은 파래(海草)인 듯하였다.
 
7
명랑하고도 몽롱한 빛 물결 위로 한껏 풍정 있게 아름답게 떠오르는 명화를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노라니 병일은 문득 처음 명화를 만나던 광경이 눈앞에 선연하게 나타났다.
 
8
작년 이맘 때 역시 달 밝은 저녁이었다. 몇몇 친구와 함께 석왕사에 피서를 갔다가 석후 산보 겸 약수터를 찾아서 어슴푸레한 솔밭 속을 더듬어 올라갔다. 자기들을 향해 마주 나려오는 기생인 듯한 여자와 마주쳤다. 묵화를 친 듯이 길길이 누운 소나무 그림자 사이로 그 여자의 간드러진 그림자는 숨바꼭질을 하며 움직이었다. 첫눈에도 유달리 숱 많은 머리 밑으로 갸름하고도 둥그스름한 흰 윤곽이 동실동실 뜨는 듯하다. '예쁜 여자다' 하는 생각이 비수같이 선득 가슴을 지나간다. 병일의 발길은 그 여자의 그림자를 밟았다. 타는 듯한 시선에 들어온 명화의 얼굴은 놀랠 만치 정밀한 사진을 남겼다. 하느적하느적 자기 옆을 지나칠 때, 풍기고 간 향기조차 며칠을 두고도 떨어지지 않았다. 사르럭거리는 그윽한 소리와 함께 조금 긴 듯한 치맛자락이 잔잔한 구비를 치던, 그 구김살까지 시방도 환하다. 그 후 요릿집에서 얼굴 바탕과 생김생김을 뽀이에게 그리다시피 일러 듣겨, 이름 모르는 명화를 불러온 것만 보아도 그 때의 인상이 얼마나 또렷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9
처음 만나던 기억이 새로워지며, 달빛에 뜬 그 자는 모양이 몇 곱절 더 아름다웠다.
 
10
귀까지 휩싸서 너울너울 뒤로 넘긴 그 독특한 머리쪽짐은 얼마나 풍정이 있는가. 동그스럼한 뺨의 곡선은 얼마나 연연한가. 그 곡선은 양양히 뼈 위에 와서 볼록하게 일어나 볼샘(보조개)을 지을 언저리를 장만하였다. 연꽃 봉오리 같은 턱, 하붓이 열린 입은 생글생글 웃는 듯.
 
11
한동안 어린 듯이 들여다보다가, 눈으로만 보기에는 너무도 아깝다는 듯이, 사내는 계집의 곁으로 다가 누우며 손으로 만지기 시작하였다. 손바닥에 보들보들한 촉감을 일으키는 살결은 거짓같이 녹아버릴 듯하였다. 아늘 아늘 터질 것 같은 뺨을 꼬집고, 턱을 스치고 젖가슴을 더듬었다. 살덩이의 꽃밭 가운데 사내의 손길은 나비와 같이 헤매며 넘놀며 지척거리며 달라붙었다.
 
12
사내의 손길이 계집의 팔뚝에 올라간 막이었다. 살 아닌 헌겊 같은 것이 손길에 닿았다. 아모리 만져 보아도 맨살은 아니다. 사내는 고개를 번쩍 들어 들여다보니, 희미한 달빛에도 거기는 명주 헌겊으로 휘휘 감아둔 것을 발견하였다. 그 헌겊이 감긴 위아래의 살은 성난 듯이 부르퉁하다. 처음에는 헐미를 매어둔 것이거니, 가볍게 생각해 버리려 하였으나, 명주 오라기로 감아둔 것이 조금 이상스러웠다. 몇 번 만적만적해 보았건만 감긴 오라기는 붕대가 분명 아니다. 어쩐지 헐미도 아닌 듯한 생각이 났다. 약간 호기심이 움직여 끌러 보려 들었다. 그러나 아모리 손가락을 휘저어 보아도 매인 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병일은 일어나 전등을 켰다. 희미하게 조는 듯하던 방안은 살기를 띠듯이 부시게 밝아졌다. 자세히 본즉 맨 것이 아니요, 가는 실로 정성스럽게 감쳐 놓은 것이었다. 호기심은 부쩍 났다. 무슨 큰 비밀의 봉투를 뜯으려는 사람 모양으로 정신을 모으고 가만가만히 떼 보려 하였건만 감쳐 둔 헌겊이 그렇게 호락호락히 떨어질 리 없었다. 사내는 조급증이 났다. 손가락을 감친 어름에 집어넣어 잡아제쳤다. 실밥은 쉽사리 터졌으되 그 서슬에 명화가 잠을 깨고 말았다.
 
13
명화는 그 자리를 훔켜쥐고 깜짝 놀래며 일어 앉았다.
 
14
"안 주무시고 무얼 하셔요?"
 
15
하면서 덜 깨인 눈을 부빈다.
 
16
"팔뚝에 감아둔 게 뭐야?"
 
17
병일도 마주 일어 앉으며 다짜고짜로 물었다.
 
18
"뭐 말씀예요?"
 
19
명화는 팔뚝을 움켜쥔 채로 뒤집어 묻는다.
 
20
"팔뚝에 명주를 감아둔 것."
 
21
"팔뚝에 감아둔 것?"
 
22
잠깐 생각을 돌리는 듯하더니,
 
23
"응, 그것 말씀예요?"
 
24
한다.
 
25
"그게 뭐람?"
 
26
"저 그거, 저 그거."
 
27
대답하기 난처해 하며 상긋이 웃어 보인다. 이 웃음으로 변하는 제 얼굴빛을 얼렁뚱땅하려는 듯하였다.
 
28
"저, 그것이 뭐람?"
 
29
"몰라, 몰라요!"
 
30
어리광 피듯 한 마디 하고, 명화는 자리적삼을 도사려 입고 그대로 누우며 이불을 푹 뒤집어쓴다.
 
31
"그게 뭐야? 응 그게?"
 
32
하고 병일은 대어들었다.
 
33
"몰라, 몰라요!"
 
34
또 한 마디 쏘고 명화는 몸을 옹송그리며 돌아눕는다.
 
35
"모르는 게 뭐야, 응?"
 
36
사내는 더욱 대들어 이불 자락을 벗기려고 애를 썼다.
 
37
"아이 왜 이러셔요? 남 곤해 죽겠는데."
 
38
계집은 더욱 몸을 옹송그리며 짜증을 냈다.
 
39
"뭐냐? 얘 응, 좀 보자, 응?"
 
40
사내는 더욱 몸이 달았다.
 
41
"얘, 좀 보이렴, 뭐냐?"
 
42
사내는 또 졸른다.
 
43
"아이 참, 선생님도! 왜 주무시다가 말고 남의 신체검사는 하셔요? 헐미난 걸 다 보자고 야단이시어."
 
44
계집은 이불 속에서 중얼거린다.
 
45
"미인의 몸에 나는 헐미도 호강이로구나, 명주로 감았으니."
 
46
"왜 비꼬아요?"
 
47
"어데 그 팔자 좋은 헐미란 놈을 좀 만나 보자."
 
48
"아이, 참, 죽겠네."
 
49
"고만 일에 죽어?"
 
50
"그건 봐서 뭘해요? 고만 주무셔요."
 
51
계집은 애원하는 듯이 어루더듬는 듯이 '요' 자를 길게 뺀다.
 
52
"그예 보고야 말걸."
 
53
사내도 응석하는 소리를 낸다.
 
54
"그건 뭘 다 보셔요? 글쎄."
 
55
"안 보이려니 더 수상쩍지."
 
56
"원 수상쩍을 일도 다 많으이, 제가 강도질을 했어요? 수상쩍게."
 
57
"강도보담 더 수상한걸."
 
58
"에그머니나! 저를 어째? 못 하실 말이 없네."
 
59
"나를 어린앤 줄 알아, 말도 할 줄 모르게."
 
60
"글쎄, 헐미 난 게 수상쩍을 게 뭐요? 예사지."
 
61
"예사 헐미가 아닌 듯한데."
 
62
"아이, 왜 사람을 들볶아요?"
 
63
"볶기는 누가 볶아, 보이라는 걸 보이면 고만이지."
 
64
"안 보셔도 괜찮아요. 염려 놓으십사."
 
65
"염려가 되는 걸 어떡하나?"
 
66
"아이, 걱정도 팔자시지."
 
67
"내 애인을 내가 걱정 않고 누가 하노?"
 
68
"에그, 애인! 이름이 좋아서 하늘 수박."
 
69
"너는 이름이 좋아서 명화로구나."
 
70
"애인도 알뜰살뜰하시네!"
 
71
"알뜰살뜰하기에 헐미라도 보자는 거 아니야."
 
72
"그예 보시겠어요?"
 
73
"그럼, 보다 뿐이야."
 
74
"자, 누우셔요, 보여 드릴게."
 
75
"누웠다가 안 보이면 또 누구더러 일어나란 말야."
 
76
"그러기에 고만두셔요."
 
77
"그만 안 둘걸."
 
78
사내는 와락 달겨들었다. 이불자락을 걷어 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계집은 더욱 이불을 칭칭 감고 자반뒤집기를 한다. 사내는 간지르기 시작하였다. 계집은 쌀벌레 모양으로 몸을 오그렸다가 폈다가 한다. 필경엔 사내는 헐미 났다는 팔을 잡아 비튼다.
 
79
"아야아!"
 
80
계집은 비명을 치고, 장말 아픈 듯이 이내 훌쩍훌쩍 운다. 무슨 고역이나 치른 듯이 씨근씨근하는 사내는 잠깐 손을 떼며,
 
81
"정말 아프냐?"
 
82
하고 묻는다.
 
83
"아프기만 해요!"
 
84
계집은 톡 쏘고 잉잉 운다.
 
85
"아프기는 뭐이 아파!"
 
86
"……."
 
87
계집은 그 말엔 대척도 않고 울음 소리가 점점 높아간다. 거짓 울음이 참 울음으로 변한 모양이다. 몸을 들먹거리며 느껴 운다.
 
88
사내는 조금 머쓱해지며 내다 앉았다.
 
89
계집은 한동안 자지러질 듯이 울다가 이윽고 죽은 듯이 소리가 없다.
 
90
"무슨 엄살이냐?"
 
91
사내는 계집을 흔들었다.
 
92
명화는 별안간 이불을 홱 걷어치고 발딱 일어 앉았다. 그 얼굴엔 어리광기와 엄살티가 사라지고 살기가 돈다. 눈썹을 꼿꼿이 세우고 무슨 매서운 결심을 하는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 어린 눈에 붉은 발이 섰다. 그는 불쑥 팔뚝을 병일의 코앞으로 내밀었다. 여러 겹 쌓인 헌겊을 펴고 또 펴고 보니 그것은 헐미도 아니었다, 상처도 아니었다.
 
93
뽀얀 살 위에 먹실로 '백년랑군 김' 이라고 떠놓은 것이었다.
 
94
"그예 보셨으니 속이 시원하시죠?"
 
95
시무룩해진 사내를 말끄러미 건너다보며, 계집은 이윽고 납덩이 같은 침묵을 깨뜨렸다.
 
96
바위에 머리를 부딪친 사람처럼 멍하니 사내는 아모 대척이 없다.
 
97
"그까짓 걸 보시고 왜 정신이 빠졌수?"
 
98
하고 계집은 문득 떽떼글 웃는다. 그 웃음소리는 방안의 공기를 쪼각쪼각 찢뜨리며, 창 밖의 달빛과 어우러져 싸늘하게 흩어졌다.
 
99
"아이 참, 우스워 죽겠네."
 
100
명화는 방바닥에 구을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한참 웃다가 다시 일어나 사내의 턱밑에 바싹 다가앉으며,
 
101
"저 좀 보세요, 이것 좀 보세요."
 
102
하고 입을 나팔같이 맨들어 뛰하게 내어밀어 보이고, 그 다음에는 두 뺨에 바람을 넣어 불룩하게 맨들어 보였다.
 
103
"이걸 보셔요, 선생님이 이러고 계셔요."
 
104
사내는 게집의 아양 떠는 꼴을 보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외우친다.
 
105
"에그 역정이 되우 나셨는데."
 
106
하고 계집은 사내의 통퉁 부은 뺨을 새끼 손가락으로 퉁기었다.
 
107
"이년! 버릇 없이."
 
108
사내는 소리를 빽 질렀다.
 
109
"아이그 깜짝이야, 경풍을 하겠네. 왜 남더러 이년 저년 하세요?"
 
110
계집도 뽀르퉁하게 성을 내며 앵돌아진 듯이 돌아앉았다.
 
111
"입때 나하고 정이니 사랑이니 하던 것은 죄 거짓말이었군?"
 
112
사내는 계집의 등뒤에서 혼자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113
"거짓말인 줄을 인제 아셨수?"
 
114
계집은 홱 다시 돌아앉으며 진국으로 대어들다가 또 한 번 깔깔 웃었다.
 
115
"흥! 우스꽝스런 일도 많네. 팔뚝에 새긴 것을 보시고야 거짓말인 줄 황연대각을 하였구료. 어릴 때 쑥스런 장난도 이런 때에는 꽤 유조하구만, 흥." 하고 입을 비슥한다.
 
116
"흥, 사랑이란 워낙 장난이거든."
 
117
사내도 따라서 빈정거린다.
 
118
"암, 그렇지요, 사랑이란 장안이죠, 팔뚝에 새겨야 쓰죠, 그렇지요?"
 
119
"그렇구 안 그런걸 누구더러 묻는 게야?"
 
120
"열 네 살 적에 이웃에 사는 탓으로 동무 삼아 놀다가 팔뚝에 먹실을 넣은 것이 그대로 백년랑군이나 될 말로야 걱정이 무슨 걱정, 미쳤다고 이 노릇을 할까……."
 
121
"사랑이란 워낙 팔자가 기구한 법이거든."
 
122
"늙어 죽을 때나 만날는지, 칠 년 동안에 코빼기라도 얼른해야지."
 
123
"칠 년! 얘 꽤 오래다. 고래도 햇수는 또박또박 꼽아두었군."
 
124
사내와 계집은 제각기 제 말만 한다.
 
125
"햇수만 꼽아요, 날짜까지 꼽느라고 열 손가락이 물러날 지경인데."
 
126
"사랑도 고역이로군."
 
127
"사랑은 설워요, 사랑은 눈물이예요."
 
128
비비꼬아서 팔뚝에 먹실 넣은 변명을 하던 계집은 이 말도 역시 비꼬는 수작이었으되, 어쩐지 그 눈시울은 울먹울먹한 듯하였다.
 
129
"야, 사랑도 술과 같구나! 술이란 눈물인가, 한숨이런가……."
 
130
"선생님!"
 
131
"응."
 
132
"선생님, 그러지 마셔요. 제발 그러지 마셔요."
 
133
"내가 어쩌나?"
 
134
"글쎄, 그러지 마세요. 네, 선생님! 선생님마저 그러시면 저는 저는……."
 
135
하고 계집은 사내의 무릎에 엎더지며 또다시 훌쩍훌쩍 운다.
 
136
만일 명화의 어깨와 등어리가 들먹거리지 않았던들 그가 우는 것이 아니요, 그대로 기절한 줄 알았으리라. 그는 숨길조차 이따금 막혀지고 소리 없이 운다. 결코 입술에나 눈시울에 발린 울음이 아니요 가슴속 깊이 우러나오는 울음인 듯하였다. 아까의 울음이 소리로 울었다면 이번 울음은 왼몸으로 우는 듯하였다. 뼈가 저리며 녹아나리는 듯한 울음, 넋의 마디마디가 발버둥을 치는 울음!
 
137
싸아 싸아, 마치 소다수 모양으로 쏟는 눈물은 뒤미처 걷잡을 사이도 없는 듯하였다. 병일의 무릎은 뜨거운 눈물로 처근처근하게 적시어졌다.
 
138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러는 거야?"
 
139
병일은 사납게 물결치는 명화의 잔등이를 가볍게 흔들었다.
 
140
병일은 이 울음의 뜻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지 몰랐다. 먹실 넣은 것을 들킨 것을 슬퍼함인가, 병일의 변한 태도와 꼬집는 말을 설워함인가?
 
141
한참 만에야 명화는 얼굴을 들었다. 물 펑덩이에서 나온 듯한 그 얼굴은 피가 묻은 듯이 붉다. 가닥가닥 늘어진 머리칼이 세로 모로 달라붙은 것이 애처롭다기보담 차라리 무서웠다.
 
142
"선생님! 거짓의 탈을 벗겨 주세요, 네?"
 
143
명화는 울음에 껄덕거리는 목을 가다듬어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진다.
 
144
"선생님! 거짓으로 뭉친 이 몸뚱어리를 불에 살라 주세요, 네?"
 
145
멱을 감고 난 눈은 말뚱말뚱 영채가 도는 듯하다.
 
146
"제가 왜 선생님을 호리려 할까요? 떳떳한 백년랑군이 있는 년이 왜 선생님 같으신 어른을 호리려 할까요? 네, 선생님?"
 
147
병일은 무에라 대꾸를 해야 좋을지 몰랐다.
 
148
"왜 마음에 없는 아양을 떨고 마음에 없는 사랑 타령을 늘어놓을까요?
 
149
네, 선생님?"
 
150
명화의 넋두리는 그대로 계속되었다.
 
151
"왜 참말도 제 입만 거쳐 나오면 거짓말이 될까요 네? 왜 진정을 쏟아놓아도 저부텀 믿어지지를 않을까요 네? 선생님, 말씀을 좀 하셔요. 웬일일까요, 네?"
 
152
명화는 발버둥이라도 칠 듯이 보채다가 문득 병일을 껴안으며 가슴에 얼굴을 비벼댄다.
 
153
저는 저는 " 진정으로 참말 진정으로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154
목 메인 소리를 짜내는 듯이 이런 말을 더듬거리고 고개를 떼어 병일을 쳐다본다. 그 얼굴은 부끄러워한다는 것보담 차라리 엄숙하다.
 
155
"말로만 한다고 선생님이 믿으실 테요? 증거를 보여 드릴게."
 
156
명화는 불현듯 모기장을 떠들고 나가더니 서랍 속에서 무엇을 찾아 손에 쥐고 다시 들어왔다. 그는 널찍한 백통 재떨이를 당기어 제 무릎 앞에 놓고 먹실로 뜬 팔뚝을 그 위에 세웠다. 병일은 명화의 뜻을 번개같이 깨닫고 말리려 서둘렀으나 때는 벌써 늦었다. 싸극 하는 그윽한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칼날은 어느 결에 살 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새빨간 핏줄기가 재떨이 위에서 춤을 춘다.
 
157
"이것 보세요, 이 증거를 보세요."
 
158
명화는 꽃잎 같은 입술을 왼편으로 조금 비뚤어지게 열며 싸늘하게 웃었다.
 
159
"그만 것에도 피가 꽤 나는구먼요."
 
160
명화는 피 흐르는 팔뚝을 짤레 흔들다가, 어비야! 하는 듯이 병일의 코앞에 내어 밀었다.
 
161
병일은 진저리를 치며 뒤로 물러앉았다.
 
162
"아이, 선생님도. 그게 그렇게 무서우세요? 도려내는 사람도 있는데. 인젠 백년랑군도 멀리 멀리 가 버렸군!"
 
163
갸웃이 병일을 바라다보며 명화는 또 한 번 싸늘하게 웃었다.
 
164
이 말이 병일의 입으로 퍼지어 그 후부터 명화는 '백년랑군 기생'이란 별명을 듣게 되었다.
【원문】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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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 적도 [제목]
 
  현진건(玄鎭健) [저자]
 
  1933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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