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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도 (赤道) ◈
◇ 파랑새 오던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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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
현진건
1
병일은 그 날 밤 이슥해서 집을 나가더니, 그 이튿날도 그 사흗날도 돌아오지 않았다.
 
2
영애는 혼자 애를 켜다가 못하여 넌지시 회사와 은행으로 알아보았다. 남편은 평일과 다름없이 일을 보는 줄 알고 적이 안심은 되었으나마 암만해도 남편의 행동이 위태위태해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암만해도 무슨 일을 낼 것만 같았다. 새벽 늦게라도 꼭 집을 찾아들고 명화 년 때문에 근래에 와서는 이따금 왼 밤을 새우는 수도 혹 있었지마는 그 이튿날 아침을 절대로 넘기는 법은 없었다. 동녘이 환해서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일부러 술이 더 취한 척을 하고 너스레를 치며 미안쩍어 하지 않았던가. 그러하였거늘 왼 밤은커녕 연일을 거퍼서 들어오지 않을 뿐인가. 사흘 만에 들어온다는 것도 오정 때나 겨워 고주망태가 되어 가지고 안에는 들어오지도 않고 사랑에 그대로 쓰러졌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왼 종일 누워 있다가 밤늦게 또 집을 나가 버렸다. 이틀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큰 변으로 알았더니 이번에는 사흘이 되어도 나흘이 되어도 들어오지를 않았다. 인제 와서는 나흘 닷새 예사로 집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3
그의 행동은 분명히 상궤를 벗어났다. 마치 돛대 잃은 배 모양으로 비틀거렸다.
 
4
영애는 남편의 번민을 짐작하였다. 짐작하면 할수록 그의 고통은 컸다. 회사나 은행으로 전화를 걸어 보아 분명히 남편이 거기 있는 줄을 알았다. 있는 줄 알면서도 전화를 대어 달라는 말이 선뜩 나오지 않았다. 그는 남편의 목소리가 얼마나 그리웠던가. 그 목소리만 들어도 조바심을 하는 마음을 얼마쯤 놓을 것을! 그러나 안타깝게 전화를 끊는 수밖에 없었다. 떳떳한 부부간이 아니요, 마치 뒷전에서 은근히 사내의 안부를 걱정하는 둘째나 셋째 계집처럼. 영애는 이것이 끝없이 슬펐다.
 
5
모처럼 돌아오는 남편이라도 그는 반색을 하며 맞을 수도 없었다. 혹시 남편이 돌아왔나 하고 그는 열 번 스무 번 사랑에 부리는 계집애를 내어 보내 보았다. 깊은 밤과 새벽녘에는 제가 몸소 몇 차례씩 사랑까지 나와 보았다.
 
6
얼마 전까지도 사랑을 기웃거리는 것은 점잖은 부인이 못할 짓인 줄 여겼었다. 인제 그런 체모를 돌아볼 마음의 여유조차 남지 않았는가.
 
7
이렇게 기다리는 남편이건만 정작 남편의 들어오는 기척만 나면 기겁을 하고 몸을 피하는 영애였다 . 째기 발을 디디고, 남편의 숨소리를 들으면서도 와락 들어가 보지 못하는 영애였다. 내켜지지 않는 발길을 종용히 옮겨 안으로 들어올 제, 샐 무렵의 봄바람은 유난히 목덜미에 쓰리었다.
 
8
무슨 낯으로 남편을 대할 것인가. 무슨 말로 남편을 위로할 것인가. 제 얼굴만 보여도 남편의 역정을 더 돋울 것만 같았다. 남편을 위로하기는커녕 남편을 보기만 하면 제가 먼저 울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9
하로는 애저녁에 병일이가 황황히 돌아왔다. 허둥지둥하며 쉰길로 안방에 들어온다. 그 걸음걸이로 보아 오랫동안 두고 고민하던 것을 귀정을 내려고 서두는 듯하였다.
 
10
영애는 기름기가 쭉 빠진 듯한 남편의 얼굴이 무서웠다.
 
11
"여보, 여보!"
 
12
병일은 채 자리도 잡기 전에 황급하게 불렀다.
 
13
"네?"
 
14
"여보, 여보! 여해 군 가 봤수?"
 
15
"아녜요."
 
16
"아니라니?"
 
17
남편은 버럭 화를 냈다.
 
18
"가 보란 제가 언젠데 입때 가 보지를 않았단 말이오? 왜 말을 듣지 않는 게야."
 
19
"……."
 
20
생트집이다. 영애는 어이없이 도적질하듯 남편의 기색만 살피었다.
 
21
'무슨 일을 내려는고?' 영애는 속으로 생각하며 몸을 오그라 붙이었다.
 
22
"왜 가보라니까 안 가는 거야."
 
23
병일은 눈까지 부라린다.
 
24
영애는 웬 영문인지 곡절을 알 길이 없었다. 그런 몹쓸 짓을 저지른 여해를 병문 않았다고 이대도록 역정을 낼 리야 있을 것인가. 아모리 예수와 같은 거룩한 마음을 가진 이라 한들 그 짓까지야 용서를 할 수 있을 것인가.
 
25
남편의 뜻은 분명 딴 데 있는 것이다. 나를 골리려고 일부러 말 허두로 꺼낸 것이다.
 
26
영애는 정말 벼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우레 소리를 흘려들었다.
 
27
"지금이라도 가우."
 
28
남편은 내던지듯 또 한 마디 뇌까린다.
 
29
"어딜 가요?"
 
30
"여해 군 병원 말야. 입때 한 말은 뭘루 들었누?"
 
31
"지금 가란 말씀예요?"
 
32
"그럼, 지금 당장이라도 다녀와!"
 
33
"참 말씀예요?"
 
34
"그럼, 내가 거짓말할까. 얼핏 가요, 가."
 
35
"지금 어떻게……."
 
36
"지금 어떻게라니 아직 아홉 시도 못 되었는데 가면 어떻단 말요?"
 
37
"왜 별안간에……."
 
38
"왜 별안간은? 내가 가 보라고 한 제가 그래 시방이 처음이란 말요?"
 
39
"가 보면 뭘 해요?"
 
40
"어 가보라도 또 그러는군. 글쎄 좀 가 봐요."
 
41
남편의 화증은 조금 수그러지는 듯하였다.
 
42
"무슨 전할 말씀이나 계셔요?"
 
43
"전할 말이 무슨 전할 말이람? 그저 가 보는 게지. 입원한 지도 하두 오래고 하니, 인정간에 가 봐야 될 것 아니오?"
 
44
"그저 다녀만 와요?"
 
45
"그래, 그저 다녀만 오란밖에."
 
46
암만해도 남편의 참뜻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47
영애는 있는 용기를 다 내어 남편의 말을 거절하기로 결심하였다.
 
48
"난 싫어요. 가기 싫어요."
 
49
영애는 재바르게 말을 끊고 남편의 호통을 기다렸다.
 
50
"어, 가 보라도 그러는군. 좀 가 보아요."
 
51
병일의 성은 웬일인지 짚불처럼 사그라졌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줄 알았더니 나직나직하게 마치 사정을 하는 듯하다. 남편의 태도는 갈수록 수수께끼였다.
 
52
"왜 그러셔요? 가 봐야 될 일이 뭐예요?"
 
53
영애도 도지게 먹었던 마음을 풀고 은근히 물어보았다.
 
54
"그 까닭은 차차 말할 테니, 위선 가 봐요. 가서……."
 
55
"가서?"
 
56
"가서 눈치나 좀 보고 오구려."
 
57
"무슨 눈치를 봐요?"
 
58
"어, 그 눈치가 아니라……."
 
59
병일은 더듬거린다.
 
60
"어, 그…… 그 어떻게 하고 있는 꼴이나 보고. 어, 그 입원비도 오래 치르지 못했을 테니, 이걸 갖다 주고……."
 
61
219페이지 이미지 없음
 
62
"뒷집 큰애기 단봇짐 쌀 때구려, 흥."
 
63
"큰애기 아니라도 가슴이 술렁술렁해지는걸!"
 
64
여해는 빙그레 웃었다.
 
65
"참, 봄이 되면 왜 가슴이 술렁거릴까요?"
 
66
"그걸 누가 아오? 술렁거리는 가슴에게 물어 보구려."
 
67
"선생님, 가슴은 왜 술렁거려요?"
 
68
" 내 가슴 술렁거리는 건 내가 알아 할 테니, 명화 씨 가슴이나 물어 보구려."
 
69
"내 가슴 술렁거리는 까닭이야 나도 안답니다."
 
70
"옳거니, 그 까닭을 좀 들읍시다."
 
71
"그 까닭이야 뭐, 그 까닭이야 뭐……."
 
72
명화는 말을 얼버무린다. 그는 전에 없이 얼굴을 붉히었다.
 
73
"에이, 그 얼버무리는 것, 왜 똑똑히 말을 못해요?"
 
74
여해는 전날 명화의 말씨를 고대로 흉내내었다.
 
75
"남의 말 책이야 잘 잡으시지. 남의 말 되풀이하기도 고만이구."
 
76
"말 배우는 사람이 말 잘하는 사람의 말본이나 떠야 될 것 아니오?"
 
77
"에그머니나 선생 뺨치겠네."
 
78
"황송합니다. 선생님께옵서 너무 제자를 꾸중만 하시니 어데 견디어나겠소? 가슴 술렁거리는 까닭이나 일러 주소서."
 
79
"잘한다, 잘한다. 왜 오늘밤에는 까짜만 올리셔?"
 
80
명화는 성을 내며 딱새같이 소리를 질렀다.
 
81
"까짜는 누가 올려요? 그 까닭이나 좀 들읍시다그려."
 
82
"까닭이 무슨 까닭예요? 온 참."
 
83
"압다, 그러지 말고. 왜 기껏 얘기를 하다가 그 까닭만 말 못할 게 뭐란 말이오?"
 
84
여해는 명화가 자기를 졸르던 그대로 성화를 바치었다.
 
85
"참 사람 죽겠네."
 
86
"그만 일에 죽을건 천부당만부당한 일, 그 까닭만 좀 들읍시다그려. 요새 병일이와 밤마다 밤새움을 한다더니 그 까닭이 그 까닭이오?"
 
87
"병일 씨하고, 흥."
 
88
하고 명화는 입을 비쭉하였다.
 
89
"그런데, 참 그 어른이 요새 웬일이예요? 밤마다 고주망태가 돼 가지고 사람을 못살게 구니."
 
90
"봄바람에 놀아나는 게지."
 
91
"놀아나는 것도 아녜요. 오만상이나, 찌푸리고, 그저 술 술, 술타령만 하겠지. 요릿집에서 밤을 뻐언히 밝히고."
 
92
"아름다운 마누라에 아름다운 기생에 왜 술맛이 안 날거요? 더구나 봄이 것다,"
 
93
"그런 것도 아닌가 보던데. 아마 무슨 걱정이 있던가 보던데요."
 
94
"팔자 좋은 사람이 걱정이 무슨 걱정이오? 그야말로 걱정도 재미겠지."
 
95
빈정거리고 여해는 한숨을 내어쉬었다.
 
96
"아녜요. 걱정도 이만저만한 걱정이 아닌 것 같아요. 까닭 없이 골딱지를 내고, 성미를 부르고, 술 주정을 마구 하고. 전에 없이 사람을 잡으면 놓지 않고."
 
97
"명사것다, 부자것다, 잡히면 좀 좋겠소? 그래서 가슴이 술렁거리는 게로군!"
 
98
"아이 선생님도 자그마치 비꼬아요. 돈에만 눈 어두운 명화 년은 아니랍니다. 가슴 술렁거리는 까닭은 따로 있답니다."
 
99
"정말 가슴 술렁거리는 까닭이 있구려."
 
100
"있기만 있어요."
 
101
명화는 자랑스럽게 되받았다.
 
102
바람은 더욱 몹시 불어제친다. 우지끈 뚱땅 들부수는 듯한 가운데 껄껄거리는 호탕한 봄의 웃음소리가 높게 들리는 듯하였다. 유리창은 물결처럼 구비를 치며 울렁거리었다.
 
103
명화는 품안에 손을 넣어 훔척훔척한다. 품속 깊이 든 무엇을 찾아내는 모양이다. 이윽고 찾기는 찾았으나 이것을 꺼내 보일까 말까 망설이는 듯하며, 지그시 가슴을 누르고 얼른 손을 빼려고 하지 않았다.
 
104
"뭘 가지고 그러우?"
 
105
여해는 조급한 듯이 채쳤다.
 
106
그제야 명화는 말없이 손을 빼내는데 그 손에는 네모난 양 봉투 한 장이 쥐어 있었다. 제 품속을 떠나 바람을 쏘이는 것이 차갑기나 하다는 듯이 다시 제 뺨에 대고 비비다가 여해를 준다.
 
107
그 편지는 땀기에 젖고 살의 온기에 녹아서 녹신녹신하였다.
 
108
겉봉에는 '조선 경성 무교정 ○○번지 이명화 씨 앞(朝鮮京城武橋町○○番地 李明花氏 앞)' 또박또박하게 여무진 먹 글씨로 썼고, 뒷장엔 편지 부친 이의 주소 성명은 적지 않고, 편지 봉한 어름에 정(情)자 한 자만 큼직하게 쓴 것이었다.
 
109
여해는 '이명화 씨 앞'이란 앞 자를 한글로 쓴 것이 눈에 조금 서툰 듯 하면서도 어쩐지 정다웠다.
 
110
여해는 곧 편지 알맹이를 뽑았다. 편지는 해사하나 능란한 철필 글씨다.
 
111
명화는 이 사연을 열 번 스무 번 읽고 또 읽어 보았으련마는, 여해의 보는 것을 또 한번 더 보겠다는 듯이 여해의 턱밑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112
그러나 그 편지에는 명화가 그렇게 심심장지할 만한 특별한 사연은 없었다.
 
113
허두에는 오랫동안 청조(靑鳥)가 끊어졌으니, 필적도 잘 몰라보리라는 걱정을 하였다. 그것은 자기가 무정한 탓만이 아니요, 해외 생활이란 자연 바쁘고 총총해서 편지 한 장 부치기에도 여간 힘이 안 드는 것이라고 순순히 가르치듯 하였고, 수이 귀국을 하게 되어 만날 날이 멀지 않다는 사연이었다. 연애편지답게 아기자기한 잔사설도 없고 흐무러진 정열의 형용사도 찾을 수 없었다. 화류계의 정찰에 흔히 쓰는 멋질린 근경도 없었다. 그러나 담담한 가운데에도 아끼고 생각하는 정은 번뜩였다.
 
114
─ 몸이나 건강하오? 고달픈 생애에 남달리 부대끼는 양, 눈앞에 보는 듯 하오. 너무 눈살을 찌푸려 그 숱한 눈썹이 줄지나 않았는지 ─.
 
115
하는 것이라든지, 자기가 온다고 너무 조바심을 하고 기다릴까 보아, ─ 이 파랑새가 그대의 손에 잡힐 무렵에는 내가 벌써 이 곳을 떠났을는 지도 모를 것이오. 그렇다고 조급하게 기다리지는 마오. 한 달 두 달 지체될는지도 모르니―.
 
116
아주 마음을 턱 눅혀준 것이라든지, 유야랑과 기생 사이에 오고가는 예사 사연뿐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러한 두 사이로 여러 해포 만에 만나게 되는 것을 조금도 기뻐하는 듯한 구절이 없는 것이었다. 도리어 처량하고 절망적이요, 비장한 울림이 떠올랐다.
 
117
우리의 만날 날이 멀지 ─ 않았소 나에게는 슬픈 일이지만 우리에겐 기쁜 일이라 할지. 나는 이 곳을 떠나려 하오. 육칠 년을 제 이의 고향으로 정들인 이 곳을 나는 길이 작별하려 하오. 내 몸은 해외 풍상을 겪기에 너무 지치고 약해진 것이오. 내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그리운 고토로 돌아갈 길뿐이오. 그리운 애인의 품속으로 뛰어들 길뿐이오. 그 부드러운 살이 나를 받아 주게 못 된다면은 그 맑은 공기 가운데서나 사라진들 어떠하겠소. ─ 여해는 편지 사연을 여러 번 훑어보고 나서 편지를 접어 다시 봉투에 넣고 유심히 일부인을 보았다.
 
118
그것은 중국 상해 우편국 일부인이 찍힌 것이었다.
 
119
명화는 여해가 다 보고 난 그 편지를 받아서 도루 가슴속 깊이 감추었다.
 
120
기껏 보이고 나서 누구에게 들킬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121
"편지한 이가 누구요?"
 
122
한동안 묵묵히 말이 없다가 여해는 힘없이 물었다.
 
123
"누구라면 아실 테요?"
 
124
명화의 대답은 비양스럽다. 저절로 떨어지는 입귀에는 웃음이 방싯방싯 터져 나왔다.
 
125
수이 그이와 만난다는 행복에, 그는 거의 압도가 되었던 것이다. 혼자 속에 접어 넣어두기엔 너무 크나큰 기쁨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이런 애인이 있는 것을 자랑이 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아름답고 거룩한 비밀! 이날 이때까지 아모에게도 알리지 않은 이 비밀은 인제 더 그의 좁은 가슴속에 갇혀 있기 싫다고 발버둥질을 하는 듯하였다. 사바세계와 인연이 끊어진 여해 같은 사람이야말로 제 속의 비밀을 흘리기에 가장 적당한 대수가 아닌가.
 
126
편지한 그이는 바루 김상열 그 사람이었다. 제 팔뚝에 뚜렷이 백년 랑군이라 새겼던 그 사람이었다.
 
127
그이는 야학교 선생이었다. 명화는 얼마나 여학생이 되기를 원하였던가.
 
128
그러나 가난한 그의 부모는 그의 소원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빨랫줄 같은 희망을 걸고 하나 딸을 기생에 집어넣었다. 딸의 살점을 파는 뉘도 오래 못 보고 일찍 죽을 것을.
 
129
명화는 양금을 치고 승무를 배우면서도, 생각은 학교로 달리었다. 그는 틈만 있으면 제 집에서 멀지 않은 보통학교 문에 붙어 섰다. 운동장에 헤어져 뛰노는 제 동무들! 그는 그 조그마한 목마와, 일렁일렁 움직이는 방아 같은 '부랑꼬' 를 꿈에도 보았다.
 
130
"기생, 기생, 콩까리, 방구 돼지 네 돼지."
 
131
그는 애들에겐 이런 놀림을 받고 몇 번이나 울었던가.
 
132
가정부인과 학교에 못 가는 애들을 위해 그 야학교가 설립되자 그는 부모도 몰래 입학을 해 버렸다. 그 때는 그의 나이 벌써 머리 얹기가 늦었지만, 어릴 때의 꿈이 그때도 그리웠던 것이다. 부모도 기를 쓰고 말리지는 않았다. 별로 큰 돈 드는 노릇도 아니요, 기생이란 식자가 있어야 장래에도 잘 불린다는 바람에.
 
133
명화는 저녁마다 얼굴의 분때를 지우고 야학에를 갔다. 그는 다 아는 본문과 아라비아 숫자를 다시 배우는 것이 그리 신통치는 않았으되, 나도 학교에 왔다! 하는 기쁨에 가슴은 울렁거렸다. 더구나 교단에 나타나는 젊은 선생들이 딴 세상 사람같이 보이었다. 자기를 보고 놀리고 시달리지 않는 남자도 있고나 하고 그는 스스로 놀래었다. 그 중에도 얌전스럽고 자랑스러운 김상열의 일거일동은 까닭 없이 그의 마음을 끌었다.
 
134
이런 행복도 명화에게는 길지 않았다. 그가 쭈뼛쭈뼛하던 본색은 그예 탄로가 나고 말았다. 기생년이 다니는 학교에 귀한 딸과 며느리를 보낼 수 없다고 부형들이 떠들고 일어났다.
 
135
학교는 명화를 퇴학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에 불려 가서 이 말을 들을 때 어떻게 무안하고 설웠던가. 땅바닥이나 진배없는 몬지투성이 마룻장에 그대로 울고 쓰러졌다.
 
136
그의 손길을 잡아 일으켜 준 사람은 상열이었다. 선생의 체면도 돌아보지 않고 우는 그를 집까지 데려다 준 사람도 상열이었다. 상열은 입에 침이 없이 그를 위로해 주었다. 학교에 다니는 것이나 다름없이 자기가 틈나는 대로 와서 가르쳐 주겠다고까지 약속하였다.
 
137
상열은 날마다 왔다. 아침 일찌감치도 오고 야학 파한 밤늦게도 왔다.
 
138
그의 행동은 어디까지 점잖았다. 가르칠 것을 가르치고 나면 그는 언제든지 선선히 일어났다. 그 때 상열의 나이도 어렸다. 서울서 중학교를 갓 마치고 시골에 나려와 있던 터로, 명화와 네 살밖에 틀리지 않았다. 그는 명화를 가르치는 데 청춘의 정열과 감격을 쏟는 듯하였다.
 
139
처음에는 상열의 태도가 어디까지 의젓하고 다정하게만 보였지만, 차차 날이 갈수록 너무 점잔만 빼는 듯하였다. 물같이 싱거운 듯하였다. 명화에게 이것이 미협하였다. 미협하면 할수록 그에 대한 마음은 더 쓰이었다. 올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애가 마르는 듯하였다. 명화는 상열에게 홑으로 선생만 되지 말고, 다른 무엇도 되어 주기를 은근히 바라게 된 탓이리라.
 
140
그러자 명화와 상열의 두 사이에 정분 났다는 소문이 높아졌다. 이 소문은 마치 될 듯 말 듯한 그들의 사랑의 꽃에 봄바람과 같았다. 명화는 자기가 그에게 누가 된다고 울었다. 상열은 무어 상관이 있느냐고 웃었다.
 
141
이러하여 그들의 인연은 맺어졌다.
 
142
그 뒤로 상열은 몹쓸 놈이 되고 명화는 싹수 없는 기생이 되었다. 세상의 조소와 박해를 입으면 입을수록 단둘의 세상은 더욱 훗훗하고 오붓하였다.
 
143
그러나 상열은 아녀자의 사랑에만 매여 있을 녹록한 장부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안타까운 이별의 날은 왔다. 상열은 표연히 상해로 건너가게 된 것이다. 그때 상열은 열 아홉, 명화는 열 다섯. 애송이 남녀는 풋사랑에 쓰라린 작별에 울고 또 울었다. 명화는 그리 변하지 않을 이 사랑을 맹서하고 싶었다. 그는 푸른 점쯤 뜨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대규모로 백년 랑군이란 말과 김 상열이란 성명 삼 자를 제 팔뚝에 먹실을 넣기로 결심하였다. 어린 그는 옛날 열녀의 본을 받아 이 살이 썩을지언정 이 정절은 지키리라 결심하였다.
 
144
상열도 그 결심을 말리지 않았다. 그도 제 사랑의 자최가 명화의 살 속에 뚜렷이 남는 것을 깊이 감동하였다.
 
145
명화는 아픈 것을 기쁘게 참았다. 바늘 끝에 비치는 피를 보며 눈물 걸씬 걸씬한 눈에 웃음의 그림자를 띠었다.
 
146
'백년랑군 김'까지 새기고는 상열은 애처로워서 바늘을 뽑아 버렸다.
 
147
그들은 으스러지도록 서로 안으며 또 한번 울었다.
 
148
처음 떠난 뒤 얼마 동안은 편지가 거의 날마다 오다시피 하였다. 그들은 이 편지를 두 사이에 넘나드는 '파랑새'라고 불렀다. 사람 없는 어둑한 들판에 외로이 남은 듯한 명화에게는 이 파랑새가 얼마나 그립고 아쉬웠던가. 하로 한 번을 와도 도수가 뜬 듯하였다. 그러나 한두 달 지나는 사이에 이 파랑새의 나래는 점점 쉬었다. 날마다가 이틀 사흘을 건너게 되고 일주일이 되고 잊은 듯이 달을 넘기는 수도 있었다. 명화는 그의 무정을 원망하였다. 그럴수록 세월은 흘러가고 편지의 동안은 더욱 떴다. 명화는 야속하였다. 슬퍼하였다. 못 믿을 것은 사내라고.
 
149
그러나 명화 자신도 그에게 대한 정절을 일 년 나마를 지키지 못하였다.
 
150
부모가 욱대겨서, 촌부자 상투배기에게 첫 남편을 하고는, 죽고만 싶었다.
 
151
그는 정말 목숨 끊을 자리를 찾아 방천둑까지 나갔다. 푸르게 넘실거리는 물결에 눈물을 떨구고 있노라니 찾아 나선 부모에게 들키어 개 패듯 맞고 집으로 끌려왔다.
 
152
첫 번을 치르고 나서는 그는 수 없는 사내에게 쉽사리 몸을 내맡기었다.
 
153
그럴 적마다 팔뚝에 넣은 먹실은 그를 비웃는 듯하였다.
 
154
육체의 정절은 지키랴 지킬 수 없다. 차라리 마음의 정절이나 지키리라.
 
155
그는 마음을 곤쳐 먹었다.
 
156
이 마음의 정절조차 이따금 흔들리었다. 부자도 겪고 건달도 겪고 호화자제며 해뚝해뚝한 학생이며 우락부락한 부랑자와 달착지근한 시인을 겪는 사이에 하마하더면 마음의 정조도 잃을 뻔하였다. 다행하게도 이런 유혹은 오래지 않았다. 자주 만나는 화류계의 사랑은 파탄이 쉬웠다.
 
157
그리울수록 떨어져 있을수록 첫사랑은 더욱 깊어가고, 깨끗해지는 듯하였다. 하늘이 높을수록 공기가 맑아지는 모양으로 처음 동안이 떠가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주 끊어질 듯하던 상열의 서신은 여러 해를 지나도 그저 그만치 계속되었다. 해가 바뀐다든지 주소가 변경이 된다든지 할 때면 꼭 파랑새를 날리었다. 무상심심장류수! 옛말 그른 데는 없었다.
 
158
명화 저도 슬픈 경우와 설은 사정을 당할 적마다 만지장서를 늘어놓았지만, 인제 와서는 저도 제 집이나 옮길 때가 아니고는 별로 편지질을 하지 않았다. 편지질보담 마음속에 넣어두고 종용히 생각하는 것이 더욱 깊숙한 맛이 날 것 같아서였다. 두 속은 피차에 환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듯하여 잔사설을 늘어놓는 것이 도리어 군더더기 같아서였다.
 
159
기생으로 환갑을 지낸 오늘날, 한 해 두 해 지내갈수록 그는 기생 노릇을 서둘렀다.
 
160
돈냥이나 걷어쥐면! 그는 상해로 멀리 뛸 작정이었다. 그래 가지고 상열과 사랑의 둥우리를 엮는 것이 그의 최고 이상이었다. 세상은 반드러워졌다.
 
161
기생에게 그렇게 어수룩하게 돈을 쓰는 사내가 어디 그리 쉬운가.
 
162
이 목적을 달해 볼까 하고, 그는 요새 갖은 재조와 수단을 있는 대로 다 부려 병일을 얼르는 판이었다.
 
163
그런데 그이가 온다고 하지 않는가. 조선 땅에는 아주 나오지 못할 줄 알았던 그이가 이편에서 가기 전에 저편에서 먼저 온다고 하지 않는가. 죽었던 사람이 살아온다 한들 이에서 더 반가우랴, 이에서 더 기쁘랴.
 
164
명화는 생시가 아니고 꿈이나 아닌가 하였다. 편지 사연이 누가 곁에서 보아도 좋을 만큼 잔재미가 없고 어떤지 비창한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걸리었다. 거기서 부접지를 못할 무슨 탈이 생겼는가. 몹쓸 병이나 생기지 않았는가. 그러나 몸이 약해졌으면 대수인가. 병이 들었으면 대수인가 도리어 자기의 있는 정성과 마음을 다할 좋을 기회가 아닌가. 만나기나 하면! 마주 앉기만 하면! 쌓이고 쌓인 회포, 그리고 그리던 정이 봄바람 쏘인 얼음처럼 풀어질 것이 아닌가.
 
165
명화는 뺄 것을 빼고 추릴 것을 추리면서도 제법 자세하게 제 경력을 늘어 놓았다.
 
166
"그러면 팔뚝에 새겼다는 것이 아직도 남았겠구려."
 
167
여해는 재미있다느니보담 차라리 처참한 표정으로 명화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물었다.
 
168
"사내들은 다 저러겠다. 팔뚝에 새긴 것 새긴 것하고 사죽들을 못 쓰니, 온 별일야."
 
169
명화는 대번에 골을 낸다.
 
170
"아모라도 그게 궁금할 게 아니오?"
 
171
"그 궁금하다는 심사가 밉쌀맞단 말예요. 남의 팔뚝에야 뭘 새겼거나 왜들 상관이야?"
 
172
명화는 더욱 성을 낸다.
 
173
"대관절 있단 말이요, 없단 말이오?"
 
174
"그게 입때 남아 있어요? 사내들의 짓궂은 심사가 그걸 입때 남겨둘 줄 아슈?"
 
175
명화는 별안간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였다.
 
176
"남의 정표를, 그렇게 아픈 것을 참고 떠둔 남의 정표를 갖다가 …… 그이가 나오면 뭘 보이누……."
 
177
명화는 넋두리를 넣어가며 흐득여 울었다.
 
178
"살에 넣어둔 게 없어졌단 말이오?"
 
179
"사내들 등쌀에 오려내고 말았다우."
 
180
"오려내다께?"
 
181
여해는 놀라며 일어 앉았다.
 
182
"칼로……칼로……도려 내었다우……. 내손으로……."
 
183
명화는 울며 여해의 무릎에 쓰러졌다.
 
184
"그걸 두자니 놀림감만 되고, 세상 사내들이 마음을 턱 주지 않는구려.
 
185
그이를 위한 정표가 도리어 우리 일에 방해만 되는 그걸 두면 뭘 해요?"
 
186
"그러면 도려낸 것도 그이를 위한 탓이구려."
 
187
"그야 그렇다 뿐예요? 그렇지만……."
 
188
"어디 좀 봅시다."
 
189
명화는 저고리 고름을 끌르고 팔쭉지를 걷어내었다. 보얀 살 위에 한 뼘만치나 찌그러붙은 자욱이 천연 굵은 지렁이가 기는 듯하다.
 
190
"이럴 수가!"
 
191
여해는 끔찍스러워하였다.
 
192
"이걸 보면 그이의 마음이 어떠하겠어요? 제가 남기고 간 사랑의 자최가 이 꼴이 된 걸 보면 그이가 용서를 해 줄까요? 내 마음을 믿어 줄까요? 내 마음이 변해서 이런 끔찍스러운 짓을 한 걸로 오해나 않을까요?"
 
193
명화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들어 물끄러미 여해를 바라보며 근심스럽게 물었다.
 
194
바람은 여전히 분다. 와글와글 유리창에 발버둥질을 치는 듯하였다.
 
195
여해의 가슴속에는 분화산이 탁 터지는 듯하였다. 뜨거운 김이 전신에 확 끼쳤다. 그는 명화를 으스러지라고 안았다.
 
196
명화는 몸을 빼려고도 하지 않았다. 여해의 쇠깍지 같은 팔 속에서 조그마한 새 모양으로 할딱거리며 입술을 쳐들어 여전히 근심스럽게 물었다.
 
197
"그이가 용서를 해 줄까요? 마음을 알아 줄까요?"
 
198
여해의 눈 밑에는 눈물을 들이마신 명화의 입술이 이슬 머금은 꽃잎같이 떨리었다. 여해의 팔깍지는 더 좁아들었다. 그의 입술은 명화의 입술을 쥐어뜯을 듯이 달라붙었다…….
 
199
바람 소리는 지동을 일으키는 듯하다. 병원 부속 건물의 양철 지붕을 벗기는 지 야단스러운 음향을 내었다.
 
200
그들은 자기들 병실 문을 뚜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문이 열리는 것도 몰랐다. 영애가 들어선 것도 얼른 알아보지를 못하였다.
【원문】파랑새 오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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