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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영애의 일절을 좀처럼 버르집어 내지 않았다. 그러나 긴사설 잔사설의 모래 가운데 그 일절이 마치 사금과 같이 이따금 번뜩이었다. 모래가 많고 금알맹이가 드문 것과 마찬가지로, 그 이야기가 그리 갖지는 않았을망정 그 대신 천만 개 모래알보담 다만 한 개라도 이 금알맹이가 얼마나 더 귀하고 중한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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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더러 딴전 한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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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여해는 고개를 외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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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가 싫으시지. 듣기가 싫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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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우벼내듯이 두 손으로 여해의 뺨을 끼어서 간신히 외우친 고개를 돌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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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애인을 누가 어떡해요! 왜 고개는 돌려요. 그 애인은 뭐 눈덩인가 입김만 쏘여도 녹아나리나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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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의 숨길은 새근새근한다. 그 뺨은 영롱하게도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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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이도 위하시우, 알뜰살뜰도 한저이고! 아이 무서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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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돌돌 말았던 혀를 끌끌 찼다. 떠들린 입술 속으로 하이얀 덧니가 배시시 내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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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눈으론 제 앞에 어리인 찬란한 신기루를 홀린 듯이 쳐다보며 두 손으로는 귀를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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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의 가냘픈 손가락은 마치 오징어 발 모양으로, 여해의 손목에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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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는 왜 막아요, 귀는 왜 막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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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을 입모습에 흘리면서 덤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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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귀가 무슨 죄예요? 듣기가 싫으신 말을 하는 내 입이 죄가 있다면 있지! 바루 내 입을 막는다면 몰라도. 선생님, 귀가 무슨 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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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귀 막은 여해의 손을 떼려고 안간힘을 써가며 애를 부둥부둥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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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떼어요. 아이, 떼셔요. 자, 내 입을 틀어막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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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못 이기는 듯이 손을 슬며시 떼었다. 명화는 맥 놓은 여해의 손을 치켜들더니 제 입에 갖다 막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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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젠 난 벙어리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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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입을 꽃봉오리처럼 오무리고 뺨에 숨을 불어 넣어 풍선처럼 볼록하게 맨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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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그의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명화는 킥킥하며 여해의 손가락 사이로 웃음을 돌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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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막고 계시네, 이래도 안 뗄 테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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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제가 여해의 손목을 잔뜩 움켜잡아 제 입에 대놓고 여해의 탓만 하였다. 여해는 그 말이 괘씸하다는 듯이 손바닥에 힘을 주어 정말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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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남 숨막혀 죽겠네. 어서 좀 떼어 주어요. 어서 좀 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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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어 명화의 입을 검쳐 막았다. 명화는 인제 말을 이루지 못하고 웅얼웅얼 하며 눈을 부릅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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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의 노니는 꼴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던 여해의 눈은 갑자기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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홱 명화의 손을 뿌리치고 제 손을 움추리고 헛것을 본 사람 모양으로 변한 그 눈은 흰자위가 많아졌다. 그는 별안간 떤다. 덜덜 왼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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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드는 작난에 지친 듯이 가쁜 숨을 호호 내쉬며 생글생글 웃고 있던 명화는 놀래었다. 돌변한 환자의 용태에 그의 눈은 호동그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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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러셔요, 왜 이러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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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는 아모 대꾸도 않고 더욱 격렬하게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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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한기가 드셔요, 네? 이불을 더 덮어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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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는 턱까지 까불며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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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어째, 이를 어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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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쩔쩔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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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얼마쯤 떨다가 이내 지식(止息)이 되었으나 그 이마에는 식은땀이 방울방울 맺히었다 명화는 . 손수건을 꺼내어 땀방울을 자근자근이 누르며 닦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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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셨어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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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놀람이 가라앉지 않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명화는 물었다. 여해는 가위눌린 사람 모양으로 눈만 멀뚱멀뚱하며 아모 대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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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 더치시나. 웬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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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진정으로 걱정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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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재일 시간이 되었다. 문을 가볍게 뚜드리고 간호부가 들어왔다. 명화는 간호부를 보고 구세주나 나타난 듯이 반색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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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른이 금방 한기가 몹시 나셨어요. 웬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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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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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글납작한 흰 얼굴에 코끼리같이 왕청되게 굵은 종아리를 띠룩띠룩하는 그 간호부는 명화의 말은 들은 척도 아니하고 조심성도 없이 이불자락을 휙 제치고 훔칫훔칫 환자의 겨드랑 밑을 찾아서 체온기를 꽂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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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몹시 떠셨어요. 병환이 더치신 게 아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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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그 간호부의 태도에 반감을 가지면서도 울 듯이 또 한 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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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부는 이마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한번 쓰다듬어 올리고 환자의 팔목을 꺼내어 맥을 짚어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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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맥박도 도수가 좀 잦으신 듯합니다마는 큰 염려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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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심드렁하게 잡았던 환자의 팔목을 놓고 곧 발길을 돌리려 하였다. 환자의 가족이나 위문객이 있는 병실치고 자기를 보면 병이 더치었다고 호소를 않는 방이 몇이나 되는가. 그는 눈물과 한숨과 걱정을 보기에 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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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할 일만 하고 나면 빨리빨리 달아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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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간호부에게 매달리다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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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떠셨는데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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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또 채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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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부는 귀찮은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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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뭐 대단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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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명스럽게 한 마디 던지다가 명화의 너무 근심스러운 빛을 대접하듯 다시 한번 환자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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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튼지 체온기를 꽂아두었으니 나종에 봐야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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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몸을 돌리려다가 여해가 덮고 있는 이불을 슬쩍 치켜 들어보았다. 이것은 병원에서 주는, 담요에 흰 양달령 호청만 뒤집어씌운 명색만 이불이었다. 무겁기는 천근 같고 널조각 같이 뻣뻣하게 버성기어 몸과는 따로 돌고, 도모지 덥지를 않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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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을 이것 하나만 " 덮으셔요? 그러니 한기가 드시지. 두터운 이불을 좀 갖다가 덮지 못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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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의 몸치장을 훑어보듯 보고 비양스럽게 이런 말을 남기고 간호부가 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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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건성으로 간병을 한답시고 방정만 떨지 말고 정신을 좀 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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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속은 이렇게 명화를 꾸짖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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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그렇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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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도 이불을 쳐들어 보고 혼자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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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멀쩡한 겹이불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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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이랍시고 스팀까지 떼어 놓으니 이른 봄의 병실은 겨울보담 더 음산하고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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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불현듯 집으로 돌아가서 이불을 가져올까 하였으나 꽂아둔 체온기가 몇 도나 되었는지 그것이 궁금해서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는 조바심을 하며 간호부가 다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간호부는 세상 들어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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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의 눈은 무슨 무서운 것을 보는 것처럼, 검은 창은 한데로 쏠리고 흰 창만 희번득희번득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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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부가 대단치 않다는 말에 적이 안심은 되었으되, 명화는 여해의 눈자위가 암만해도 심상치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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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여해의 병이 털썩 덧들면 이 꾸준한 방문의 목적이 어느 때 성공을 할지 모르는 것이 걱정은 걱정이었다. 밤새도록 놀음에 시달리고 아침녘은 실실이 피로한 몸에 구정물같이 걸쭉한 잠이 들락 깰락 하며 보내고, 한가한 시간이라야 오정 때쯤 조반을 먹고 나서 저녁 단장 전 오후 두어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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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로동안 ─ 아니 하롯밤 하로 낮 동안에 자기를 위해 남는 오직 이 두어 시간 동안을, 이 귀중한 시간을, 이 아까운 시간을 그는 온전히 여해에게 바치었다. 친한 동무도 못 찾아보고 진고개로 물건 사러도 못 가고 퀴퀴한 약 냄새도 떠도는 병원에서 내버렸다. 이것만 해도 여간 낭비가 아니요, 여간 정성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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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없이 늦장을 부리면서도 속마음이 죄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병이 덜썩 덧들이면! 그야말로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느냐! 그러나 하로 이틀 여해와 접촉을 하는 사이에 그는 가끔 제 목적을 잊어 버린다. 그는 까닭 없이 이 기괴한 운명에 번롱되는 환자에게 끄을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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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호기심이 반 이상이나 거들었다. 차차 호기심보담 동정심이 앞을 섰다. 인제는 그 흉물스럽게도 진하고 검던 눈썹이 사내다워 보이고, 두 볼의 살이 빠져서 미어기 주둥아리처럼 넙적한 그 입이 애교가 있어 보이고, 굴속을 거쳐 나오는 듯한 그 웅얼웅얼하는 쉰 목소리에도 정이 붙었다. 그 외에는 자세히 뜯어보면, 그 툭 티인 이마라든지 우뚝한 콧마루라든지 얼굴 판국은 호남자 부러웁지 않게 생기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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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지레짐작을 해서는 안 된다. 그는 결코 여해와 소위 연애를 할 생각은 꿈에도 없다. 그 까닭은 간단하다. 그는 가슴속 깊이 감추어 둔 애인이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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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는 여해가 떠는 것을 보고 참으로 놀래었다. 병이 더치지 않았나 하고 여자답게 가슴을 졸이었다. 여해를 위해 진정으로 근심하였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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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부는 들어왔다. 체온기를 빼 보더니 찰랑찰랑 흔들어 제 갑에 도로 집어 넣고 다시 맥을 짚고 팔뚝 시계를 보아 맥박의 도수를 적은 다음에 아까 명화에게 한 체온기 본 뒤에 결과를 알으켜 주겠다 하던 약속은 잊어 버린 듯이 그대로 홱 나가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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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겠어요? 몇 도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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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붙드는 듯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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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칠 도 이 분! 조금 있을까 말까 한 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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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 무어 그 열쯤을 가지고 그렇게 수선을 떠느냐 ─ 하는 듯이 턱을 한번 씻뚝하고 간호부는 무거운 다리를 재바르게 놀리며 나갔다. 체머리 흔들리는 듯하는 그 벌어진 엉덩이를 바라보며 명화도 못마땅한 듯이 고개를 씻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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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근심스러운 얼굴을 또 여해의 얼굴 위에 갸웃이 디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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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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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정신을 차리려는 것처럼 고개를 흔들고 몇 번 눈을 감았다 떴다 하였다. 눈자위에는 아까보담은 생기가 나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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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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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일어섰던 몸을 도로 의자에 주저앉히어 여해의 머리를 짚으며 채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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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여전히 눈만 떴다 감았다 하였다. 그의 눈엔 아직도 명화가 보이지 않고 다른 무슨 헛것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제게로 덤벼드는 헛것을 쫓으려고 애를 쓰는 모양이었다. 한기는 가라앉은 듯하였으나 큰 지진이 지나간 뒤의 남은 진동 모양으로 간간이 그는 몸을 떨었다. 마치 간기(癎氣) 든 어린애처럼 이따금씩 깜짝깜짝 놀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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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왜 떨었는가 몸이 ? 극도로 쇠약해진 탓도 탓이리라. 음산한 병실이 치운 탓도 탓이리라. 그러나 이보담도 그의 눈이 헛것을 본 탓이다. 언제든지 뻥긋하면 그를 괴롭게 하는 무서운 환영을 본 까닭이다. 그가 외로울 때 호젓할 때 피로한 눈을 감을 때 더구나 밤 저녁으로 덤벼들던 이 환영의 때는 인제 백주 한낮 뜬 눈에도 보이게 되었다. 모든 고통을 잊는 가장 즐거운 시간, 장마 날처럼 우중충하고 흐리터분한 가운데 가장 명랑한 시간, 무덤 속같이 덤덤하고 괴괴한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시간 ─ 명화와 수작하는 시간에도 환영은 그 무서운 얼굴을 나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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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발같이 번쩍이는 명화의 얼굴 앞에는 그 추근추근한 환영들도 안개 녹듯 걷히었었다, 봄눈 슬듯 사라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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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종달새 모양으로 재깔거리는 말씨는 잡것을 물리치는 진언과 같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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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만화경 모양으로 변화스러운 표정은 요귀를 몰아내는 부적과 같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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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였거늘! 이 명화의 얼굴 자체가 환영으로 변하고 말았다. 명화의 얼굴 속에서 은주의 얼굴이 뛰어나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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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명화의 하자는 대로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었다. 작난이 지나쳐 손에 힘까지 주고 틀어막았었다. 명화는 숨도 옳게 못 쉬고 손아귀 밑에서 웅얼웅얼하며 눈을 부릅떠 보이던 그 순간! 여해의 멀거니 뜬 눈에는 명화의 얼굴이 별안간 은주의 얼굴로 변하고 만 것이다. 부릅뜬 그 눈은 여상스럽게 질겁을 한 그때의 그 눈이다. 진저리 나는 그 눈이다. 새근새근하는 숨길, 터질 듯한 가슴에서 찢어나오는, 피비린내가 나는 듯한 그 불덩이 같은 숨길! 격류(激流)를 지질러 놓은 커단 바위 같은 제 손등을 뚫고 솟아 나오는 그 소리 없는 부르짖음! 더구나 입을 막은 손은 그 때의 그 손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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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가 번쩍할 순간처럼, 그 무서운 광경이 무섭게 역력하게 나타났다. 그것은 결코 환영이 아니다. 흐릿한 환영이 아니었다. 분명한 현실이었다. 현실보담도 더 또렷한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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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그 무서운 광경이 번개처럼 번쩍할 그 순간! 여해의 넋엔 벼락이 떨어졌다. 무서운 경련이 왼몸을 뒤흔들며 지나간 것이다. 칩고 매운 칼날 같은 겨울날, 바람맞이에 발가벗고 선 것처럼 온몸의 근육이 오그라붙고 떨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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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이라도, 그가 환영에 쪼달리기는 하였다. 그러나 열이 높고 머리가 몽롱할 무렵에는 흐릿하게 나타나는 그 환영이 단조롭고 막막한 그에게 도리어 심심치 않았었다. 도화색 꿈을 꾸었었다. 정신이 차차 돌아나면서부터 아름답던 그 환영이 지긋지긋해지기는 하였지마는 수술한 자리의 육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두려운 정신의 번민을 얼마쯤 완화할 수 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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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하로하로 아물리어 간다. 본마음은 제 자리를 찾아 들어선다. 환영은 더욱 선명해졌다. 날이 갈수록 환영의 면사포는 한 겹 두 겹 벗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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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한 현실성을 띠고 대질른다. 찌르면 붉은 피가 콸콸 쏟아질 듯하다. 성욕의 제단에 흘린 처녀의 피가 그의 심장을 향해 소용돌이를 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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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와서는 자나깨나 그 무서운 가책의 불채쪽에 아야! 소리를 치고 몸을 틀며 마음을 쥐어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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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적한 밤, 고요한 병실, 그는 제 심장의 뛰는 소리를 들을 때 새하얀 벽 위에서 지척거리며 버르적거리며 몸부림치는 제 넋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날 밤 달 그림자를 밟으며 달아나던 제 검은 그림자를 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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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를 만나는 순간에만, 이 고통을 잊었었다. 무서운 가책의 불채쪽을 피하는 피난소는 오직 이 명화이었다. 그런데 이 오직 하나밖에 남지 않은 피난소에도 환영의 떼는 쫓아오고야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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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가 훨씬 진정이 된 뒤에야 명화는 그 눈 속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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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셨어요? 괜히 내가 그런 말을 끄집어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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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후회하는 빛을 보이었다. 그는 여해가 별안간 한기가 든 것이 영애의 말을 끄집어낸 탓이어니 한다. 애인이란 말이 날 때에 환자의 눈꼴은 벌써 틀리었던 것 같았다. 귀까지 막는 것을 고만둘 것을! 너무 실없어서 큰일을 저질렀구나 싶었다. 실상 그는 귀 막은 손을 떼었을 뿐이 아닌가? 그 손을 갖다가 제 입에 가리웠을 뿐이 아닌가? 입을 가리웠다는 하찮은 작난이 환자의 신상에 하상 대사를 일으킬 줄이야 그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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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명화는 귀를 막고 입을 가리운 다음에도 여해를 괴롭게 구는 짓궂은 장난을 많이많이 한 듯이 생각되었다. 듣기 싫은 소리를 노끈이 실이 되도록 되풀이한 듯이 생각되었다. 이것은 분명 명화의 착각이었다. 속으로 생각한 것을 행동에나 말에 미처 나타내지도 않고 나타내었거니 하는 데서 일어나는 착각이었다. 그만큼 그는 여해의 한기 든 것이 애처로웠다. 애가 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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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해가 불쌍한 생각이 더럭 났다. 알뜰히 사랑하는 애인을 여의고 아까운 청춘을 철창에서 썩히고, 그 빌미로 중병까지 들어 병상에 신음하는 몸이 되었건만, 그래도 그 애인을 못 잊는 그 정상! 자기를 헌신짝같이 내 어버리고 남의 사람이 된 그 애인을 그저 그리워하며 그의 흉이라면 치를 떠는 그 정상! 그 말만 이렁성거려도 병이 더치는 그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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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란 더러운 것이다!' 명화는 속으로 한탄하였다 . 핼쓱하게 싄, 그 뼈다귀만 남은 얼굴을 들여다보며, 명화는 눈물을 떨굴 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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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내가 그런 말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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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여해가 들으라 하는 것처럼 제 자신을 꾸짖는 듯이, 또 한 번 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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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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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겨우 바루 박인 눈을 내둘리는 듯하며 채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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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아뿔싸! 싶었다. 아직도 영애에게 관련되는 말이 아닌가? 간신히 환자에게 또 아까 말을 이렁성거렸다가는 또 얼마나 그에게 고통을 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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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요, 내 혼자 한 말예요. 인제 아주 괜찮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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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는 뻐언히 위문객을 쳐다보다가, 싱겁다는 듯이 눈길을 돌려 천정을 본다. 그 눈은 아까 모양으로 또 홉떠지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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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황급하였다. 그는 여해의 눈두덩을 나리 쓰다듬었다. 임종하는 사람의 눈을 감기듯이 그리고 두 손 새로 얼굴을 끼어서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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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또 봐요? 나를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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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울 듯이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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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선잠을 깨는 사람 모양으로 눈을 섬벅섬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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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걸핏하면 허공을 노려요? 옆에다가 사람을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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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짐짓 짜증을 내며, 큰 소리로 외었다. 그리고 뺨에 대었던 손을 떼어 어깨를 잡아 제법 힘을 들여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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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리셔요, 좀. 정신을 차려요,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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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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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환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간호하는 이의 뜻을 안다는 웃음이었다. 자기를 위해 진국으로 걱정해 주는 간호하는 이의 맘을 누그리려고 억지로 지은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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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라니요? 천장에 떡이 붙었나 밥이 붙었나 뭐, 왜 천장만 쳐다봐요? 나를 똑바로 좀 보시고, 자 자, 이러고 나만 좀 보고 계셔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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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여해의 고개를 제 앞으로 들어놓고 깔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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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는 눈을 슬며시 감았다. 간호하는 이의 손을 움키는 듯이 잡아당기어 제 가슴 위에 올려 놓고 으스러지라고 쥐었다. 그 감은 눈시울이 실룩실룩 떠는 것은, 그 속에서 눈물이 서물거리는 탓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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