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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도 (赤道) ◈

◇ 검은 그림자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1934
현진건
1
명화는 영애의 일절을 좀처럼 버르집어 내지 않았다. 그러나 긴사설 잔사설의 모래 가운데 그 일절이 마치 사금과 같이 이따금 번뜩이었다. 모래가 많고 금알맹이가 드문 것과 마찬가지로, 그 이야기가 그리 갖지는 않았을망정 그 대신 천만 개 모래알보담 다만 한 개라도 이 금알맹이가 얼마나 더 귀하고 중한 것이냐.
 
2
"누구더러 딴전 한다더니."
 
3
하고 여해는 고개를 외우쳤다.
 
4
"듣기가 싫으시지. 듣기가 싫으셔!"
 
5
명화는 우벼내듯이 두 손으로 여해의 뺨을 끼어서 간신히 외우친 고개를 돌려놓았다.
 
6
"선생님 애인을 누가 어떡해요! 왜 고개는 돌려요. 그 애인은 뭐 눈덩인가 입김만 쏘여도 녹아나리나 왜."
 
7
명화의 숨길은 새근새근한다. 그 뺨은 영롱하게도 붉다.
 
8
"끔찍이도 위하시우, 알뜰살뜰도 한저이고! 아이 무서워라."
 
9
명화는 돌돌 말았던 혀를 끌끌 찼다. 떠들린 입술 속으로 하이얀 덧니가 배시시 내다본다.
 
10
여해는 눈으론 제 앞에 어리인 찬란한 신기루를 홀린 듯이 쳐다보며 두 손으로는 귀를 막았다.
 
11
명화의 가냘픈 손가락은 마치 오징어 발 모양으로, 여해의 손목에 달라붙었다.
 
12
"귀는 왜 막아요, 귀는 왜 막아요?"
 
13
명화는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을 입모습에 흘리면서 덤볐다.
 
14
"선생님, 귀가 무슨 죄예요? 듣기가 싫으신 말을 하는 내 입이 죄가 있다면 있지! 바루 내 입을 막는다면 몰라도. 선생님, 귀가 무슨 죄예요?"
 
15
하고 귀 막은 여해의 손을 떼려고 안간힘을 써가며 애를 부둥부둥 켠다.
 
16
"자, 떼어요. 아이, 떼셔요. 자, 내 입을 틀어막으세요."
 
17
여해는 못 이기는 듯이 손을 슬며시 떼었다. 명화는 맥 놓은 여해의 손을 치켜들더니 제 입에 갖다 막으며,
 
18
"인젠 난 벙어리 됐어요."
 
19
하고 입을 꽃봉오리처럼 오무리고 뺨에 숨을 불어 넣어 풍선처럼 볼록하게 맨들었다.
 
20
여해는 그의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명화는 킥킥하며 여해의 손가락 사이로 웃음을 돌려내었다.
 
21
"그저 막고 계시네, 이래도 안 뗄 테야요?"
 
22
명화는 제가 여해의 손목을 잔뜩 움켜잡아 제 입에 대놓고 여해의 탓만 하였다. 여해는 그 말이 괘씸하다는 듯이 손바닥에 힘을 주어 정말 틀어막았다.
 
23
"아이, 남 숨막혀 죽겠네. 어서 좀 떼어 주어요. 어서 좀 떼요."
 
24
여해는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어 명화의 입을 검쳐 막았다. 명화는 인제 말을 이루지 못하고 웅얼웅얼 하며 눈을 부릅떠 보인다.
 
25
명화의 노니는 꼴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던 여해의 눈은 갑자기 변하였다.
 
26
홱 명화의 손을 뿌리치고 제 손을 움추리고 헛것을 본 사람 모양으로 변한 그 눈은 흰자위가 많아졌다. 그는 별안간 떤다. 덜덜 왼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떤다.
 
27
힘드는 작난에 지친 듯이 가쁜 숨을 호호 내쉬며 생글생글 웃고 있던 명화는 놀래었다. 돌변한 환자의 용태에 그의 눈은 호동그래졌다.
 
28
"왜 이러셔요, 왜 이러셔요?"
 
29
환자는 아모 대꾸도 않고 더욱 격렬하게 떤다.
 
30
"갑자기 한기가 드셔요, 네? 이불을 더 덮어 드려요?"
 
31
환자는 턱까지 까불며 떨었다.
 
32
"이를 어째, 이를 어째!"
 
33
명화는 쩔쩔매었다.
 
34
여해는 얼마쯤 떨다가 이내 지식(止息)이 되었으나 그 이마에는 식은땀이 방울방울 맺히었다 명화는 . 손수건을 꺼내어 땀방울을 자근자근이 누르며 닦아내었다.
 
35
"왜 그러셨어요. 네?"
 
36
아직도 놀람이 가라앉지 않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명화는 물었다. 여해는 가위눌린 사람 모양으로 눈만 멀뚱멀뚱하며 아모 대답이 없다.
 
37
"병이 더치시나. 웬일일까?"
 
38
명화는 진정으로 걱정을 하였다.
 
39
열 재일 시간이 되었다. 문을 가볍게 뚜드리고 간호부가 들어왔다. 명화는 간호부를 보고 구세주나 나타난 듯이 반색을 하며,
 
40
"이 어른이 금방 한기가 몹시 나셨어요. 웬일일까요?"
 
41
당황히 물었다.
 
42
동글납작한 흰 얼굴에 코끼리같이 왕청되게 굵은 종아리를 띠룩띠룩하는 그 간호부는 명화의 말은 들은 척도 아니하고 조심성도 없이 이불자락을 휙 제치고 훔칫훔칫 환자의 겨드랑 밑을 찾아서 체온기를 꽂아둔다.
 
43
"금방 몹시 떠셨어요. 병환이 더치신 게 아녜요?"
 
44
명화는 그 간호부의 태도에 반감을 가지면서도 울 듯이 또 한 번 물었다.
 
45
간호부는 이마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한번 쓰다듬어 올리고 환자의 팔목을 꺼내어 맥을 짚어보더니,
 
46
"글쎄요, 맥박도 도수가 좀 잦으신 듯합니다마는 큰 염려는 없어요."
 
47
하고 심드렁하게 잡았던 환자의 팔목을 놓고 곧 발길을 돌리려 하였다. 환자의 가족이나 위문객이 있는 병실치고 자기를 보면 병이 더치었다고 호소를 않는 방이 몇이나 되는가. 그는 눈물과 한숨과 걱정을 보기에 지쳤다.
 
48
제 할 일만 하고 나면 빨리빨리 달아나려 한다.
 
49
명화는 간호부에게 매달리다시피,
 
50
"몹시 떠셨는데 괜찮을까요?"
 
51
하고 또 채치었다.
 
52
간호부는 귀찮은 듯이,
 
53
"글쎄요, 뭐 대단찮아요."
 
54
퉁명스럽게 한 마디 던지다가 명화의 너무 근심스러운 빛을 대접하듯 다시 한번 환자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55
"아모튼지 체온기를 꽂아두었으니 나종에 봐야 알아요."
 
56
하고 몸을 돌리려다가 여해가 덮고 있는 이불을 슬쩍 치켜 들어보았다. 이것은 병원에서 주는, 담요에 흰 양달령 호청만 뒤집어씌운 명색만 이불이었다. 무겁기는 천근 같고 널조각 같이 뻣뻣하게 버성기어 몸과는 따로 돌고, 도모지 덥지를 않은 것이었다.
 
57
이불을 이것 하나만 " 덮으셔요? 그러니 한기가 드시지. 두터운 이불을 좀 갖다가 덮지 못하시나요?"
 
58
명화의 몸치장을 훑어보듯 보고 비양스럽게 이런 말을 남기고 간호부가 나가 버렸다.
 
59
"괜히 건성으로 간병을 한답시고 방정만 떨지 말고 정신을 좀 차려!"
 
60
그 말속은 이렇게 명화를 꾸짖는 듯하였다.
 
61
"참! 그렇구먼!"
 
62
명화도 이불을 쳐들어 보고 혼자 중얼거렸다.
 
63
"이건 멀쩡한 겹이불일세."
 
64
삼월이랍시고 스팀까지 떼어 놓으니 이른 봄의 병실은 겨울보담 더 음산하고 치웠다.
 
65
명화는 불현듯 집으로 돌아가서 이불을 가져올까 하였으나 꽂아둔 체온기가 몇 도나 되었는지 그것이 궁금해서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는 조바심을 하며 간호부가 다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간호부는 세상 들어오지 않았다.
 
66
환자의 눈은 무슨 무서운 것을 보는 것처럼, 검은 창은 한데로 쏠리고 흰 창만 희번득희번득 돌았다.
 
67
간호부가 대단치 않다는 말에 적이 안심은 되었으되, 명화는 여해의 눈자위가 암만해도 심상치를 않았다.
 
68
명화는 여해의 병이 털썩 덧들면 이 꾸준한 방문의 목적이 어느 때 성공을 할지 모르는 것이 걱정은 걱정이었다. 밤새도록 놀음에 시달리고 아침녘은 실실이 피로한 몸에 구정물같이 걸쭉한 잠이 들락 깰락 하며 보내고, 한가한 시간이라야 오정 때쯤 조반을 먹고 나서 저녁 단장 전 오후 두어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69
하로동안 ─ 아니 하롯밤 하로 낮 동안에 자기를 위해 남는 오직 이 두어 시간 동안을, 이 귀중한 시간을, 이 아까운 시간을 그는 온전히 여해에게 바치었다. 친한 동무도 못 찾아보고 진고개로 물건 사러도 못 가고 퀴퀴한 약 냄새도 떠도는 병원에서 내버렸다. 이것만 해도 여간 낭비가 아니요, 여간 정성이 아니다.
 
70
그는 한없이 늦장을 부리면서도 속마음이 죄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병이 덜썩 덧들이면! 그야말로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느냐! 그러나 하로 이틀 여해와 접촉을 하는 사이에 그는 가끔 제 목적을 잊어 버린다. 그는 까닭 없이 이 기괴한 운명에 번롱되는 환자에게 끄을리었다.
 
71
처음엔 호기심이 반 이상이나 거들었다. 차차 호기심보담 동정심이 앞을 섰다. 인제는 그 흉물스럽게도 진하고 검던 눈썹이 사내다워 보이고, 두 볼의 살이 빠져서 미어기 주둥아리처럼 넙적한 그 입이 애교가 있어 보이고, 굴속을 거쳐 나오는 듯한 그 웅얼웅얼하는 쉰 목소리에도 정이 붙었다. 그 외에는 자세히 뜯어보면, 그 툭 티인 이마라든지 우뚝한 콧마루라든지 얼굴 판국은 호남자 부러웁지 않게 생기지 않았느냐.
 
72
그렇다고 지레짐작을 해서는 안 된다. 그는 결코 여해와 소위 연애를 할 생각은 꿈에도 없다. 그 까닭은 간단하다. 그는 가슴속 깊이 감추어 둔 애인이 있기 때문에.
 
73
그러므로 그는 여해가 떠는 것을 보고 참으로 놀래었다. 병이 더치지 않았나 하고 여자답게 가슴을 졸이었다. 여해를 위해 진정으로 근심하였던 것이었다.
 
74
간호부는 들어왔다. 체온기를 빼 보더니 찰랑찰랑 흔들어 제 갑에 도로 집어 넣고 다시 맥을 짚고 팔뚝 시계를 보아 맥박의 도수를 적은 다음에 아까 명화에게 한 체온기 본 뒤에 결과를 알으켜 주겠다 하던 약속은 잊어 버린 듯이 그대로 홱 나가려 하였다.
 
75
"괜찮겠어요? 몇 도에요?"
 
76
명화는 붙드는 듯이 물었다.
 
77
"삼십 칠 도 이 분! 조금 있을까 말까 한 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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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 무어 그 열쯤을 가지고 그렇게 수선을 떠느냐 ─ 하는 듯이 턱을 한번 씻뚝하고 간호부는 무거운 다리를 재바르게 놀리며 나갔다. 체머리 흔들리는 듯하는 그 벌어진 엉덩이를 바라보며 명화도 못마땅한 듯이 고개를 씻뚝하였다.
 
79
명화는 근심스러운 얼굴을 또 여해의 얼굴 위에 갸웃이 디밀었다.
 
80
"괜찮으셔요?"
 
81
여해는 정신을 차리려는 것처럼 고개를 흔들고 몇 번 눈을 감았다 떴다 하였다. 눈자위에는 아까보담은 생기가 나는 듯하였다.
 
82
"괜찮으셔요?"
 
83
명화는 일어섰던 몸을 도로 의자에 주저앉히어 여해의 머리를 짚으며 채쳐 물었다.
 
84
여해는 여전히 눈만 떴다 감았다 하였다. 그의 눈엔 아직도 명화가 보이지 않고 다른 무슨 헛것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제게로 덤벼드는 헛것을 쫓으려고 애를 쓰는 모양이었다. 한기는 가라앉은 듯하였으나 큰 지진이 지나간 뒤의 남은 진동 모양으로 간간이 그는 몸을 떨었다. 마치 간기(癎氣) 든 어린애처럼 이따금씩 깜짝깜짝 놀래기도 하였다.
 
85
여해는 왜 떨었는가 몸이 ? 극도로 쇠약해진 탓도 탓이리라. 음산한 병실이 치운 탓도 탓이리라. 그러나 이보담도 그의 눈이 헛것을 본 탓이다. 언제든지 뻥긋하면 그를 괴롭게 하는 무서운 환영을 본 까닭이다. 그가 외로울 때 호젓할 때 피로한 눈을 감을 때 더구나 밤 저녁으로 덤벼들던 이 환영의 때는 인제 백주 한낮 뜬 눈에도 보이게 되었다. 모든 고통을 잊는 가장 즐거운 시간, 장마 날처럼 우중충하고 흐리터분한 가운데 가장 명랑한 시간, 무덤 속같이 덤덤하고 괴괴한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시간 ─ 명화와 수작하는 시간에도 환영은 그 무서운 얼굴을 나타내었다.
 
86
햇발같이 번쩍이는 명화의 얼굴 앞에는 그 추근추근한 환영들도 안개 녹듯 걷히었었다, 봄눈 슬듯 사라졌었다.
 
87
그 종달새 모양으로 재깔거리는 말씨는 잡것을 물리치는 진언과 같았었다.
 
88
그 만화경 모양으로 변화스러운 표정은 요귀를 몰아내는 부적과 같았었다.
 
89
그러하였거늘! 이 명화의 얼굴 자체가 환영으로 변하고 말았다. 명화의 얼굴 속에서 은주의 얼굴이 뛰어나오고 말았다.
 
90
여해는 명화의 하자는 대로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었다. 작난이 지나쳐 손에 힘까지 주고 틀어막았었다. 명화는 숨도 옳게 못 쉬고 손아귀 밑에서 웅얼웅얼하며 눈을 부릅떠 보이던 그 순간! 여해의 멀거니 뜬 눈에는 명화의 얼굴이 별안간 은주의 얼굴로 변하고 만 것이다. 부릅뜬 그 눈은 여상스럽게 질겁을 한 그때의 그 눈이다. 진저리 나는 그 눈이다. 새근새근하는 숨길, 터질 듯한 가슴에서 찢어나오는, 피비린내가 나는 듯한 그 불덩이 같은 숨길! 격류(激流)를 지질러 놓은 커단 바위 같은 제 손등을 뚫고 솟아 나오는 그 소리 없는 부르짖음! 더구나 입을 막은 손은 그 때의 그 손이 아니냐!
 
91
번개가 번쩍할 순간처럼, 그 무서운 광경이 무섭게 역력하게 나타났다. 그것은 결코 환영이 아니다. 흐릿한 환영이 아니었다. 분명한 현실이었다. 현실보담도 더 또렷한 현실이었다.
 
92
그 순간 그 무서운 광경이 번개처럼 번쩍할 그 순간! 여해의 넋엔 벼락이 떨어졌다. 무서운 경련이 왼몸을 뒤흔들며 지나간 것이다. 칩고 매운 칼날 같은 겨울날, 바람맞이에 발가벗고 선 것처럼 온몸의 근육이 오그라붙고 떨린 것이다.
 
93
이전이라도, 그가 환영에 쪼달리기는 하였다. 그러나 열이 높고 머리가 몽롱할 무렵에는 흐릿하게 나타나는 그 환영이 단조롭고 막막한 그에게 도리어 심심치 않았었다. 도화색 꿈을 꾸었었다. 정신이 차차 돌아나면서부터 아름답던 그 환영이 지긋지긋해지기는 하였지마는 수술한 자리의 육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두려운 정신의 번민을 얼마쯤 완화할 수 있었었다.
 
94
상처는 하로하로 아물리어 간다. 본마음은 제 자리를 찾아 들어선다. 환영은 더욱 선명해졌다. 날이 갈수록 환영의 면사포는 한 겹 두 겹 벗겨졌다.
 
95
생생한 현실성을 띠고 대질른다. 찌르면 붉은 피가 콸콸 쏟아질 듯하다. 성욕의 제단에 흘린 처녀의 피가 그의 심장을 향해 소용돌이를 치는 듯하다.
 
96
인제 와서는 자나깨나 그 무서운 가책의 불채쪽에 아야! 소리를 치고 몸을 틀며 마음을 쥐어뜯었다.
 
97
적적한 밤, 고요한 병실, 그는 제 심장의 뛰는 소리를 들을 때 새하얀 벽 위에서 지척거리며 버르적거리며 몸부림치는 제 넋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날 밤 달 그림자를 밟으며 달아나던 제 검은 그림자를 보듯이…….
 
98
명화를 만나는 순간에만, 이 고통을 잊었었다. 무서운 가책의 불채쪽을 피하는 피난소는 오직 이 명화이었다. 그런데 이 오직 하나밖에 남지 않은 피난소에도 환영의 떼는 쫓아오고야 만 것이다.
 
99
여해가 훨씬 진정이 된 뒤에야 명화는 그 눈 속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100
"왜 그러셨어요? 괜히 내가 그런 말을 끄집어내어서……."
 
101
몹시 후회하는 빛을 보이었다. 그는 여해가 별안간 한기가 든 것이 영애의 말을 끄집어낸 탓이어니 한다. 애인이란 말이 날 때에 환자의 눈꼴은 벌써 틀리었던 것 같았다. 귀까지 막는 것을 고만둘 것을! 너무 실없어서 큰일을 저질렀구나 싶었다. 실상 그는 귀 막은 손을 떼었을 뿐이 아닌가? 그 손을 갖다가 제 입에 가리웠을 뿐이 아닌가? 입을 가리웠다는 하찮은 작난이 환자의 신상에 하상 대사를 일으킬 줄이야 그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 아닌가?
 
102
그러나 명화는 귀를 막고 입을 가리운 다음에도 여해를 괴롭게 구는 짓궂은 장난을 많이많이 한 듯이 생각되었다. 듣기 싫은 소리를 노끈이 실이 되도록 되풀이한 듯이 생각되었다. 이것은 분명 명화의 착각이었다. 속으로 생각한 것을 행동에나 말에 미처 나타내지도 않고 나타내었거니 하는 데서 일어나는 착각이었다. 그만큼 그는 여해의 한기 든 것이 애처로웠다. 애가 쓰이었다.
 
103
그는 여해가 불쌍한 생각이 더럭 났다. 알뜰히 사랑하는 애인을 여의고 아까운 청춘을 철창에서 썩히고, 그 빌미로 중병까지 들어 병상에 신음하는 몸이 되었건만, 그래도 그 애인을 못 잊는 그 정상! 자기를 헌신짝같이 내 어버리고 남의 사람이 된 그 애인을 그저 그리워하며 그의 흉이라면 치를 떠는 그 정상! 그 말만 이렁성거려도 병이 더치는 그 정상!
 
104
'정이란 더러운 것이다!' 명화는 속으로 한탄하였다 . 핼쓱하게 싄, 그 뼈다귀만 남은 얼굴을 들여다보며, 명화는 눈물을 떨굴 뻔하였다.
 
105
"괜히 내가 그런 말을 했어."
 
106
명화는 여해가 들으라 하는 것처럼 제 자신을 꾸짖는 듯이, 또 한 번 뇌이었다.
 
107
"무슨 말?"
 
108
여해는 겨우 바루 박인 눈을 내둘리는 듯하며 채쳐 물었다.
 
109
명화는 아뿔싸! 싶었다. 아직도 영애에게 관련되는 말이 아닌가? 간신히 환자에게 또 아까 말을 이렁성거렸다가는 또 얼마나 그에게 고통을 줄 것인가?
 
110
"아녜요, 내 혼자 한 말예요. 인제 아주 괜찮으셔요?"
 
111
환자는 뻐언히 위문객을 쳐다보다가, 싱겁다는 듯이 눈길을 돌려 천정을 본다. 그 눈은 아까 모양으로 또 홉떠지려 하였다.
 
112
명화는 황급하였다. 그는 여해의 눈두덩을 나리 쓰다듬었다. 임종하는 사람의 눈을 감기듯이 그리고 두 손 새로 얼굴을 끼어서 흔들었다.
 
113
"뭘 또 봐요? 나를 봐요."
 
114
명화는 울 듯이 부르짖었다.
 
115
여해는 선잠을 깨는 사람 모양으로 눈을 섬벅섬벅한다.
 
116
"왜 걸핏하면 허공을 노려요? 옆에다가 사람을 두고."
 
117
명화는 짐짓 짜증을 내며, 큰 소리로 외었다. 그리고 뺨에 대었던 손을 떼어 어깨를 잡아 제법 힘을 들여 뒤흔들었다.
 
118
"정신을 차리셔요, 좀. 정신을 차려요, 글쎄!"
 
119
"왜?"
 
120
하고 환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간호하는 이의 뜻을 안다는 웃음이었다. 자기를 위해 진국으로 걱정해 주는 간호하는 이의 맘을 누그리려고 억지로 지은 웃음이었다.
 
121
"왜라니요? 천장에 떡이 붙었나 밥이 붙었나 뭐, 왜 천장만 쳐다봐요? 나를 똑바로 좀 보시고, 자 자, 이러고 나만 좀 보고 계셔요. 제발……."
 
122
명화는 여해의 고개를 제 앞으로 들어놓고 깔깔 웃었다.
 
123
환자는 눈을 슬며시 감았다. 간호하는 이의 손을 움키는 듯이 잡아당기어 제 가슴 위에 올려 놓고 으스러지라고 쥐었다. 그 감은 눈시울이 실룩실룩 떠는 것은, 그 속에서 눈물이 서물거리는 탓이리라.
【 】검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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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 적도 [제목]
 
현진건(玄鎭健) [저자]
 
1933년 [발표]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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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성 작품 (쪽별)
백과 참조
대한민국의 소설(일제강점기)
현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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