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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도 (赤道) ◈

◇ 사랑은 준다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1934
현진건
1
명화는, 상열의 숨을 집을 구하러 나간다 나간다 하면서도, 그 날 밤을 그대로 새우고 그 이튿날도 그양 보내고 밤이 또 깊었다.
 
2
어젯밤 상열의 결심과 비밀을 듣고 보니, 한시라도 이런 데 한만히 있을 경우가 아니건만, 그런 끔찍한 일이라면 이곳을 나가는 것이 도리어 위험도 하였다. 밖에 나갈 생각만 해도, 공연히 가슴이 덜컥덜컥 나려앉고 머리끝이 쭈볏쭈볏해진다. 다리가 떨리고 어깨가 천근같이 무거워진다.
 
3
더구나 마음이 아슬아슬해서 상열의 곁을 떠나랴 떠날 수가 없었다. 자기만 없고 보면 곧 상열의 신상에 무슨 변이 생길 것만 같았다. 한 번 갈리면 다시는 만날 수가 없을 상도 싶었다.
 
4
그는 상열의 말에 동의를 않으랴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제가 아모리 말려도 빌어도 안 될 일인 것을 알게 되었다.
 
5
10년을 쌓은 사랑의 탑은 무너졌다. 알 수 없는 커다란 힘 앞에서 너무도 하잘것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6
슬프고 애닯고 쓰리고 아프나마, 명화는 상열을 제 갈 길을 가게 하는 수밖에 어쩌는 수가 없는 줄 깨달았다.
 
7
상열은 제 무릎 위에 고개를 박고 우는 명화의 등을 흔들었다.
 
8
"자, 일어나요. 인제 밤도 깊었으니 좀 나가 보라구. 왜 동무들도 많을 테니 연줄 연줄로 구하면 그리 어렵지도 않을 것 아니냐. 그래두 기생집은 안 되거든. 꼭 염집이라야 써, 응? 내 말 알아 듣지, 응? 자, 일어나요, 응."
 
9
상열의 목소리는 달래듯 부드러웠다.
 
10
명화는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쳐들었다.
 
11
"저 나간 뒤에 무슨 일이나 생기면 어떡해요?"
 
12
"일이 무슨 일?"
 
13
"혹시 누가 찾아 오드래두 선생님 혼자만 계시면……."
 
14
혼자 " 있으면 생길 일이 둘이 있다구 안 생길 거요? 허허……."
 
15
"그래도 제가 있으면 무슨 말을 어떻게 꾸며 대드래두……."
 
16
"명화만큼 나도 말을 꾸며댈 줄 안다오."
 
17
"웬걸."
 
18
명화는 슬프게 웃었다. 그리고 상열을 가리우는 듯이 앞으로 안았다.
 
19
"암만해도 마음이 놓이지를 않아요."
 
20
귀에 뺨을 비비대며 속살거리었다.
 
21
"둘이 있다구 든든할까?……."
 
22
"그래도……."
 
23
"첫째 ○○을 숨겨 놓아야 될 것 아니야? 이렇게 몸에 지니고 있다가 335페이지 누락
 
24
"웬일이셔요? 남 놀라 죽을 뻔하게스리."
 
25
"사람을 사람이 찾아오는데 놀라 죽을 게 뭔구? 그렇게 놀랄 때면 단둘이 죽을 죄를 저질른 게지. 하핫하, 하핫하."
 
26
여해는 부자연스럽게 소리쳐 웃었다. 어데서 먹었는지 술내가 확 끼치었다.
 
27
"어째 여기 있는 줄 알고 오셨어요?"
 
28
명화는 재우쳐 물었다.
 
29
"어 어데를 간들 내가 모를 줄 아나베. 명화는 땅속으로 들어가도 찾아낼 내란 말이어. 흥 그게 사랑이란 게거든. 그게 소위 애인의 육감이란 게거든. 알았어?"
 
30
하고 삐적삐적 명화의 앞으로 대어선다.
 
31
명화는 여해의 야릇한 태도에 불안을 느끼고 대어드는 대로 물러서며 상열에게 변명하듯,
 
32
"사랑은 무슨 경칠 사랑이구, 애인의 육감이란 또 뭐예요? 그런 말씀을랑 마시구 이리 앉으셔요."
 
33
"너의 사랑은 경을 칠지 모르지만, 내 사랑이야 왜 경을 친단 말이냐? 압다, ○○ 가진 자를 애인으로 둔 게 그리 대단하냐?"
 
34
명화는 얼른 손으로 여해의 입을 막는 시늉을 하였다.
 
35
"왜 그런 말씀을 소리소리 질러요? 글쎄."
 
36
"왜 겁이 나니? 겁날 짓을 누가 하라더냐?"
 
37
"겁이구 뭐구 이리 앉기나 해요. 두 분이 인사나 하시구."
 
38
명화는 여해의 손목을 끌어 앉히려 하였다.
 
39
여해는 명화의 손을 뿌리치고 상열을 노려보았다.
 
40
그깟 놈하고 인사를 " 하면 뭘 하누? 몇 분이 못 가서 발고랑을 찰 놈하구."
 
41
"애그 이게 무슨 사나운 말뽄이오? 전에는 안 그러시더니 미치셨소?"
 
42
"그래, 미쳤다 미쳤어. 너에게 미쳤다. 무슨 놈의 팔자가 사랑을 얻는 족족 딴 놈에게 뺏긴단 말이냐. 이번에는 안 돼, 안 될 말이어. 이번에는 또 뺏기지는 않을 테란 말이어!"
 
43
"여보! 노형"
 
44
상열이가 말을 건네었다.
 
45
"노형 애인을 누가 뺐는단 말요? 자, 이리 앉기나 하오. 우리 얘기를 좀 해 봅시다그려."
 
46
"얘기를 좀 해 보자? 그래 건방지게 네가 누굴 구슬리는 수작이냐?"
 
47
하고 여해는 상열을 후려갈기기나 할 듯이 와르르 달겨들다가, 바루 상열의 코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48
"누구시오?"
 
49
상열은 침착하게 물었다.
 
50
"난 김여해다. 너는?"
 
51
"나는 김상열."
 
52
"김상열? 옳지 인제는 성명까지 알았것다."
 
53
"성명까지 알았다니?"
 
54
"뻔한 노릇이지. 경찰에 고발을 하려면 성명을 알아야 될 것 아니냐?"
 
55
"앗!"
 
56
명화는 까무러치는 소리를 내었다.
 
57
"그래, 여해 씨가 우리를 고발한단 말예요?"
 
58
하고 명화는 여해를 흘겨보았다.
 
59
"암 그렇다 뿐이냐. 그어 두말 할 거 있나? 사랑의 원수를 갚는 데는 그게 제일 첩경이거든."
 
60
"아니, 그게 본마음으로 하는 소리요?"
 
61
"그럼 본마음이구 말구. 거짓 마음이라면 고발을 할 것도 않는다 할 것 아니냐."
 
62
"우리하고 무슨 원수로?"
 
63
"사랑이 원수지, 흥."
 
64
"여해 씨하고 나하고 사랑이 무슨 사랑이오? 나는 그저 여해 씨의 처지에 동정을 하였을 뿐인데……."
 
65
"명화야 나를 동정하였거나 말았거나 나는 명화를 사랑하였으면 구만 아니야 . 그것도 오늘부터란 말이야. 오늘밤부터란 말이야."
 
66
"무슨 사랑이 그런 천도깨비 같단 말예요?"
 
67
"천도깨비 같든, 만도깨비 같든 솟아나는 불길을 너면 어떡할 테냐?"
 
68
그리고 상열을 향하여,
 
69
"그 좋은 상해에서 뭘 얻어먹자고 조선에를 들어왔느냐 말이야. 나 같으면 만 년을 있어도 돌아오지를 않을 게다. 그래, 이 요리 접시나 얻어먹으려고 돌아왔단 말이냐?"
 
70
상열은 무슨 좋은 일이나 생긴 듯이 싱글벙글 웃었다.
 
71
"자네 말이 그럴 듯도 하네마는, 고향을 오래 그리면 생각도 나는 법이니."
 
72
"요 알뜰한 고향이 생각이 무슨 생각이란 말이냐. 바른 말로 계집이 보고 싶어 나왔다구나 해라."
 
73
"아모렇게나 상관이 있느냐?"
 
74
"그럴 게다. 이러나 저러나 상관이 무슨 상관이냐. 어차피 계집의 꽁무니나 따라다니는 바에야. 저 따위가 무슨 일을 한답시구 돌아다니니, 참 기가 막혀. 그래 기생년을 보고 ○○을 어쩌느니, 숨을 집을 구하느니. 참 알뜰도 한 비밀인걸."
 
75
"자네가 벌써 와서 우리 얘기를 죄다 들은 모양일세그려."
 
76
"듣다 뿐이냐. 그렇지 않고야 고발을 할 수 있느냐."
 
77
명화는 별안간 상열의 무릎에 쓰러졌다.
 
78
"십 년을 그리다가 만나 보니 이 꼴이 될 줄이야. 저 때문에 경륜하시는 일도 다 틀리구. 우리 그걸로 죽어나 버립시다. 잡히기 전에 죽어 버립시다. 우리 시첼랑은 여해 씨께나 맡기고……. 여해 씨야 고발을 하든지 뜯어 자시든지……."
 
79
명화는 울기 시작하였다.
 
80
"이왕 틀린 바에야 한 자리에서나 죽어 버립시다. 네 선생님, 제 목숨을 먼저 끊어 주셔요. 참 정말이지 저는 선생님이 끌려가는 건 죽어도 보기 싫어요. 네, 선생님. 그걸 꺼내셔요. 네, 선생님. 우리 둘이 죽어 버려요. 네 선생님."
 
81
멀거니 명화의 얘기를 듣고 있던 여해는 별안간 몸을 벌떡 일으켰다.
 
82
그는 쏜살같이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83
명화는 울다가 말고 놀라 일어나 앉았다.
 
84
"어데를 갔을까요?"
 
85
"어데를 가긴? 고발을 하러 간 게지."
 
86
"무슨 원수로, 설마?"
 
87
"고발을 하면 대수냐. 이왕 죽을 목숨이니 이러나 저러나 마찬가지지."
 
88
"그럼 여기 이러구 잡으려 오기를 기다린단 말예요?"
 
89
"이 일을 어떡하면 좋아요? 모두가 제 탓이에요."
 
90
명화는 상열을 바루 보지도 못한다.
 
91
"지금 와서 네 탓 내 탓을 찾으면 무얼 할 테요? 탓을 하자면 내 몸 탓이나 할 밖에. 만일 내 몸이 웬만만 했으면 정거장에 나리는 길로 할 일을 해 버릴 것을 어디 발길이나 바루 놓여야지. 명화의 따뜻한 손에서 단 하로라도 소복을 해 보겠다는 것이 틀린 생각이거든. 그리던 정을 백 분의 일이라도 풀어 보자던 것이 잘못이야, 잘못."
 
92
상열은 명화의 들먹거리는 등을 어루만지었다.
 
93
"그래, 그자를 그대로 내버려 둔단 말씀예요?"
 
94
"내버려 안 두면 어떡할 거요? 지금 쫓아가서 요정을 낸다면 까닭 없는 인명만 상할 뿐이지, 일은 벌써 탄로가 되고 말 것 아니오?"
 
95
"정말 고발을 할까요? 괜히 얼러보는 것 아닐까요?"
 
96
"글세, 그건 나보담도 명화가 잘 알겠지. 그자의 평소 사상이라든지 성격이라든지, 난 어떤 위인인지 초대면이니 짐작도 할 수 없지 않아?"
 
97
"제 생각 같애서는 무슨 업원으로 그런 끔찍한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마는."
 
98
"대관절 명화하고는 어떤 관계요?"
 
99
"그 말을 하자면 길어집니다. 나는 저를 구해 주고 은혜를 입혔지, 털끝만치라도 무슨 원한 먹을 노릇을 한 기억이 없답니다."
 
100
"사랑은 하였소?"
 
101
"사랑이 무슨 사랑이에요?"
 
102
"그러면 저편의 짝사랑인가?"
 
103
"그건 몰르지만!"
 
104
"은혜를 경계하오, 짝사랑을 경계하오. 둘이 다 위험성이 있는 거요. 은혜가 원수 된단 말은 자고로 있는 말이지만, 더구나 짝사랑이란 물불을 헤아리지 않으니까……."
 
105
"그럼 어떡해요?"
 
106
"어떡하기는! 기다리는 수밖에……."
 
107
"잡으러 오기를?"
 
108
"혹은 그자가 돌쳐올는지도 모르지. 내가 걸리는 것보담 제 애인이 걸리는 게 궁금도 할 테니."
 
109
"제가 뒤를 밟아볼걸."
 
110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았을 거요."
 
111
"나간 지가 오랜데……."
 
112
"만일 그자에게 정말 사랑이 있었다면 바른 길로 뛰어가지는 않았을 거요. 저도 번민이 있을 테지."
 
113
"그럼 가 볼까요?"
 
114
"그건 마음대로 하오마는 아모튼 일은 틀렸소."
 
115
"뒤를 쫓아갔다가 길이 외우나서 그자를 못 만나고, 저 없는 새 무슨 일이 일어나면……."
 
116
명화는 차마 말 뒤끝을 맺지 못한다.
 
117
"또 그 걱정이구려."
 
118
"어떻게 걱정이 안 돼요? 구만 선생님을 잃어버리게 될걸."
 
119
"설마."
 
120
"설마가 사람 죽인답니다. 저는 일시 반시라도 선생님 곁을 떠나기 싫어요. 서로 보는 이 짤막한 동안에 그나마 또 이별을 해요. 같이 있어 보아요. 고발이야 하든 마든 같이 있다가 같이 잡혀 가요. 선생님을 모시고 가는 바에야 어데를 간들."
 
121
상열은 말없이 명화의 손을 꼭 쥐었다. 오냐, 아모 데도 가지 말아라, 내 곁을 떠나지 말고 있으라는 듯이.
 
122
장지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하였다.
 
123
여해는 비틀비틀 쓰러질 듯한 걸음걸이로 또다시 들어왔다.
 
124
"그걸 나를 주시오."
 
125
여해는 털썩 주저앉으며, 거의 성난 듯이 부르짖었다.
 
126
"그게라니?"
 
127
상열은 여해가 다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안심의 빛을 감추지 못하며, 채쳐 물었다.
 
128
"왜 시침을 따시오? ○○말이오. 그걸 쓸 사람은 노형이 아니요, 내가 가장 적임자란 말이오. 그러니 그걸 나에게 맡기시오. 그리고 노형의 사명을 나에게 일러 주시오."
 
129
"그게 될 말인가?"
 
130
"안 될 말은 뭬요? 제 몸도 옳게 가누지 못하는 노형이 그걸 어떻게 사용한 단 말이오? 쓰다가 옳게 써 보지도 못하고 실패할 것은 뻔한 노릇 아니오?"
 
131
"아모리 내 몸이 약해졌다 하드래도 내 맡은 일을 남에게 미룰 내가 아니오."
 
132
노형이 나를 못 믿는구려 " . 그걸 증거삼아 정말 노형을 고발이나 할 줄 아시오? 아깟 말은 이 자리에서 취소하겠소. 나는 지금 당장 죽는다 하여도 이 세상에 끼일 것이 아모 것도 없는 사람이오. 부모가 있나, 형제가 있나, 애인이 있나.……."
 
133
여해는 후 한숨을 내쉬었다.
 
134
"앞날이 창창한데 그렇게 비관할 것은 없소.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을 가지기 바라오."
 
135
"몸뚱아리는 튼튼할지 모르나, 건전한 정신이 들기는 벌써 틀린 지 오래요. 이 튼튼한 육체가 걱정이오. 이 불길같이 타오르는 성욕 때문에 하마하더면 꽃다운 생명까지 하나 죽일 뻔하였소.
 
136
"참, 은주 씨가 어찌 됐어요?"
 
137
명화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138
"건져내기는 내었소. 살리기도 살리었소."
 
139
"정말 한강에 빠졌습디까?"
 
140
"빠지다 뿐이오."
 
141
"그래, 어떡하셨습디까?"
 
142
"그대로 물에 뛰어들었지."
 
143
"저런, 같이 빠지면 어쩌자구."
 
144
"같이 빠지면 대수요. 내 죽는 거야 내 벌역을 내가 받는 것이니 아까울 것이 없는 목숨이지만, 은주야 죽을 까닭이 있소? 무슨 죄가 있다구. 말하자면 은주의 죄 없는 덕에 나도 죽지 않고 살아난 셈이오."
 
145
"은주 씨와 그런 깊은 까닭이 있었던가요?"
 
146
"깊은 까닭이 있었다 뿐이오? 내 성욕의 제단에 어여쁜 희생이었소."
 
147
"에그머니나!"
 
148
"그래도 다시 살아난 그 눈에는 나에게 대한 감사의 빛이 역력히 움직였소. 나는 차마 그걸 볼 수가 없었소."
 
149
"그래, 지금 은주 씨는 어데 있어요?"
 
150
"용산 ˟˟병원이오."
 
151
"그럼 병일 씨도 거기 있겠구려."
 
152
"있기는 거기 있습디다마는 은주가 죽어도 제 오빠의 집에는 가기 싫답디다."
 
153
"그건 또 웬일일까?……."
 
154
"천진난만한 마음은 거짓과 건성으로 속이지 못하는 것이오. 그는 제 오빠의 심사를 바루 알아본 모양이오. 참, 상열 씨, 이 불쌍한 처녀의 운명도 맡아 주시오. 저의 오빠의 집에 아니 간다면 은주는 갈 곳도 없소. 해외로 데리고 나가서 그 운명을 개척해 주시오. 총명한 자질을 가졌으니 잘 가르치면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오."
 
155
"내가 어떻게 맡을 수 있나? 나는 내 할 일이 따루 있는 사람인데…….
 
156
차라리 여해 씨가 명화의 운명을 맡아 주시오. 내가 없어진 뒤는 명화도 마음의 의지를 잃을 테니 여해가 맡아 가지고 그야말로 해외로 데리고 나가든지 해서 신생의 길을 열어 주시오."
 
157
여해는 상열의 말에 머리를 흔들었다.
 
158
"그것은 안 될 말이오. 내가 해외에 나간다 한들 어디가 어디인지 알 길이 있소? 내가 형만큼 지경을 닦자면 또 십 년의 세월이 걸릴 것 아니오?
 
159
그러니 차라리 형이 가 주시오. 명화 씨를 데리고 그렇게도 깨끗한 사랑, 그렇게도 열렬한 사랑이 꽃도 피기 전에 그대로 이울어진다는 건, 차마 못할 일이오. 입술에 발린 말뿐이 아니오. 참으로, 참으로 죽음으로 맹서한 사랑, 죽음을 향하여 눈을 딱 부릅뜨고 뛰어드는 사랑, 그야말로 죽음보담 몇 백 곱절 강한 사랑을 나는 내 눈 앞에서 보았소. 내 귀로 들었소. 당신네의 사랑은 이 못된 놈의 비틀어진 심장도 뒤흔들어 놓고야 말았소. 이 못된 놈의 고개도 숙여놓고야 말았소."
 
160
마츰내 여해는 제 말에 스스로 감격된 듯이 훌쩍훌쩍 운다.
 
161
"명화 씨가 왜 병원으로 나를 찾았는지 나는 그 본 뜻을 모르오. 영애에 대한 단순한 여성의 질투였든지 또는 병일을 농락하는 한 수단이었든지 나는 모르오. 이랬거나 저랬거나 명화 씨는 나의 마음의 태양이었소. 연소하는 내 생명의 태양이었소. 나는 죽어도 이 태양을 놓치기 싫었소. 가장 비열한 수단, 가장 천착한 방법으로라도 나는 나의 최후의 광명을 움켜쥐랴 하였소. 구축축하고 더러운 심사! 오직 죽음으로 용서를 빌 뿐이오."
 
162
여해는 명화와 상열의 앞에 두 팔을 짚고 푹 꼬꾸라지는 듯이 고개를 숙이었다.
 
163
상열은 여해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164
"형은 충정은 잘 알았소. 무쇠라도 녹일 그 열정, 잠깐 그 방향을 그르쳤을 뿐이지, 나는 그 열정을 취하오. 그 열정을 개인의 감정에만 쓰지 말기를 바랄 뿐이오……."
 
165
"그러니 형의 사명을 나에게 맡겨 주시오. 부족하나마 내 힘껏 정성껏 다 해서 형에게 누를 끼치지 않을 테니……."
 
166
"내 사명은 내 사명이지, 형의 사명은 아니오. 내가 왜 형을 희생시키고……."
 
167
"또 그런 말씀을 하는구려. 입때껏 말씀을 해도 내 말을 못 알아듣는구려."
 
168
여해는 화증을 버럭 내었다.
 
169
"그러면 내야말로 형의 최후의 광명을 빼앗는 게 아니오?"
 
170
상열은 목소리를 떨어뜨린다.
 
171
"아니오, 아니오. 인제는 형의 사명을 대신 맡는 것이 나의 최후의 광명이오. 이 최후의 희망을……."
 
172
"우리 모두 같이 달아나요."
 
173
명화는 딱해서 못 견디는 듯이 말을 넣었다.
 
174
"그건 안 될 말이오."
 
175
상열과 여해가 일시에 부르짖었다.
 
176
"일은 작정이 되었소. 긴 말은 구만둡시다. 인제 나에게 어떻게 할 것만 일러 주시오."
 
177
상열은 입을 다물고 무엇을 이윽히 생각한다.
 
178
"참 한 마디 부탁할 것을 잊었소."
 
179
여해는 다시 말을 꺼내었다.
 
180
"여기 불쌍한 여성 하나가 있소. 그는 아귀 같은 성욕의 제단에 불쌍한 희생이 된 처녀요. 그는 죽음으로 뛰어들다가 모든 인생의 허위를 느끼고, 지금 쓸쓸한 병원에서 울고 있소. 그는 이 세상의 오직 하나 동기인 오라비의 정도, 올케의 정도 거짓에 싸인 것인 줄 깨닫고 지난날의 제 원수에게 도리어 눈물겨운 손을 내어 미는구려. 세상에 이런 가련한 희생이 또 어데 있을거요? 두 분이 해외에 떠나시는 날 이 불쌍한 희생도 데려가 주시오.
 
181
좋은 공부도 시키시고, 잘 지도하시어 훌륭한 일꾼을 맨들어 주시오."
 
182
"은주 씨 말씀이구려."
 
183
명화가 목메이는 소리를 낸다.
 
184
"맡아 주시겠소?"
 
185
상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186
여해는 상열의 손을 굳게 굳게 쥐었다.
 
187
세 남녀는 소리 없이 감격의 눈물을 떨구었다.
백과사전 연결하기
▣ 인용 디렉터리
백과 참조
대한민국의 소설(일제강점기)
현진건
목록 참조
 
외부 참조
 
▣ 기본 정보
◈ 기본
# 적도 [제목]
 
현진건(玄鎭健) [저자]
 
1933년 [발표]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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