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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일지 (白凡逸志) ◈
◇ 상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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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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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권

 
 

1.1. 머리말

 
3
인, 신 두 어린 아들에게
 
4
아비는 이제 너희가 있는 고향에서 수륙 오천 리나 떨어진 먼 나라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린 너희를 앞에 놓고 말하여 들려 줄 수 없으매 그 동안 나의 지난 일을 대략 기록하여서 몇몇 동지에게 남겨 장래 너희가 자라서 아비의 경력을 알고 싶어할 때가 되거든 너희에게 보여 주라고 부탁하였거니와, 너희가 아직 나이 어리기 때문에 직접 말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지만 어디 세상사가 뜻과 같이 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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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는 벌써 쉰셋이건마는 너희는 이제 열 살과 일곱 살밖에 안되었으니 너희의 나이와 지식이 자라질 때에는 내 정신과 기력은 벌써 쇠할 뿐 아니라, 이 몸은 이미 원수 왜에게 선전포고를 내리고 지금 사선에 서 있으니 내 목숨을 어찌 믿어 너희가 자라서 면대하여 말할 수 있을 날을 기다리겠느냐. 이러하기 때문에 지금 이 글을 써 두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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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경력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기는 것은 결코 너희에게 나를 본받으라는 뜻은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바는 너희도 대한민국의 한 국민이니 동서와 고금의 허다한 위인 중에서 가장 숭배할 만한 이를 택하여 스승으로 섬기라는 것이다. 너희가 자라더라도 아비의 경력이 알 길이 없겠기로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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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유감되는 것은 이 책에 적는 것이 모두 오랜 일이므로 잊어버린 것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하나도 보태거나 지어 넣은 것이 없는 것도 사실이니 믿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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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1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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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해에서 아비
 
 

1.2. 우리 집과 내 어릴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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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어떻게 고려 왕건 태조의 따님 낙랑공주의 부마가 되셔서 우리들의 조상이 되셨는지는 <삼국사기>나 안동 김씨 족보를 보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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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의 팔세손이 충렬공, 충렬공의 현손이 익원공인데, 이 어른이 우리 파의 시조요, 나는 익원공에서 21대손이다. 충렬공, 익원공은 모두 고려조의 공신이거니와, 이조에 들어와서도 우리 조상은 대대로 서울에 살아서 글과 벼슬로 가업을 삼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 방조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려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매, 내게 11대조 되시는 어른이 처자를 끌고 서울을 도망하여 일시 고향에 망명하시더니, 그곳도 서울에서 가까워 안전하지 못하므로 해주 부중에서 서쪽으로 80리 백운방 텃골 팔봉산 양가봉 밑에 숨을 자리를 구하시게 되었다. 그곳 뒷개에 있는 선영에는 11대 조부모님의 산소를 비롯하여 역대 선산이 계시고 조모님도 이 선영에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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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우리 집이 멸문지화를 피하는 길이 오직 하나 뿐이었으니, 그것은 양반의 행색을 감추고 상놈 행세를 하는 일이었다. 텃골에 처음 와서는 조상님네는 농부의 행색으로 묵은장이를 일구어 농사를 짓다가 군역전이라는 땅을 짓게 되면서부터 아주 상놈의 패를 차게 되었다. 이 땅을 부치는 사람은 나라에서 부를 때에는 언제나 군사로 나서는 법이니 그때에는 나라에서 문을 높이고 무를 낮추어 군사라면 천역, 즉 천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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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우리나라를 쇠약하게 한 큰 원인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리하여서 우리는 판에 박힌 상놈으로, 텃골 근동에서 양반 행세하는 진주 강씨, 덕수 이씨들에게 대대로 천대와 압제를 받아왔다. 우리 문중의 딸들이 저들에게 시집을 가는 일은 있어도 우리가 저들의 딸에게 장가드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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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년에는 우리 가문이 꽤 창성하였던 모양이어서, 텃골 우리 터에는 기와집이 즐비하였고, 또 선산에는 석물도 크고 많았으며, 내가 여남은 살 때까지도 우리 문중에 혼상 대사가 있을 때에는 이정길이란 사람이 언제나 와서 일을 보았는데,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집 종으로서 속량 받은 사람이라 하니, 그는 우리 같은 상놈의 집에 종으로 태어났던 것이라 참으로 흉악한 팔자라고 아니할 수 없다.
 
16
우리가 해주에 와서 산 뒤로 역대를 상고하여 보면 글 하는 이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이름난 이는 없었고 매양 불평객이 많았다. 내 증조부는 가어사질을 하다가 해주 영문에 갇혔지만 서울 어느 양반의 청편지를 얻어다 대고 겨우 형벌을 면하셨다는 말을 집안 어른들께 들었다. 암행어사라는 것은 임금이 시골 사정을 알기 위하여 신임하는 젊은 관원에게 무서운 권세를 주어서 순회시키는 벼슬인데, 허름한 과객의 행색으로 차리고 다니는 것이 상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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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 항렬 네 분 중에 한 분은 내가 대여섯 살 때까지 생존하셨고, 조부 형제는 구존하셨고, 아버지 4형제는 다 살아계시다가 백부 백영은 얼마 아니하여 돌아가셔서 나는 다섯 살 적에 종형들과 함께 곡하던 것이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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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휘 순영은 4형제 중에 둘째 분으로서, 집이 가난하여 장가를 못 가고 노총각으로 계시다가 스물네 살 때에 삼각혼인이라는 기괴한 방법으로 장련에 사는 현풍 곽씨의 딸, 열네 살 된 이와 성혼하여 종조부 댁에 붙어살다가 2, 3년 후에 독립한 살림을 하시게 된 때에 내가 태어났다. 그때 어머님의 나이는 열일곱이요, 푸른 밤송이 속에서 붉은 밤 한 개를 얻어서 감추어 둔 것이 태몽이라고 어머님은 늘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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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년 7월 11일 자시(이 날은 조모님 기일이었다)에 텃골에 있는 웅덩이 큰댁이라고 해서 조부와 백부가 사시는 집에서 태어난 것이 나다. 내 일생이 기구할 예조였는지, 그것은 유례가 없는 난산이었다. 진통이 일어난 지 6, 7일이 되어도 순산은 아니 되고, 어머니의 생명이 위태하게 되어 혹은 약으로, 혹은 예방으로 온갖 시험을 다 해도 효험이 없어서 어른들의 강제로 아버지가 소의 길마를 머리에 쓰고 지붕에 올라가서 소의 소리를 내고야 비로소 내가 나왔다고 한다. 겨우 열일곱 살 되시는 어머님은 내가 귀찮아서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짜증을 내셨다는데, 젖이 말라서 암죽을 먹이고, 아버지가 나를 품속에 품고 다니시며 아기 있는 어머니 젖을 얻어 먹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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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촌 족대모 핏개댁이 밤중이라고 싫은 빛 없이 내게 젖을 물리셨단 말을 듣고 내가 열 살 갓 넘어 그 어른이 작고하신 뒤에는 나는 그 산소 앞을 지날 때마다 경의를 표하였다. 내가 마마를 치른 것이 세 살이 아니면 네 살 적인데, 몸에 돋은 것을 어머니가 예사 부스럼 다스리던 죽침으로 따서 고름을 빼었으므로 내 얼굴에 굵은 벼슬 자국이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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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섯 살 적에 부모님은 나를 데리시고 강령 삼거리로 이사하셨다. 거기는 뒤에는 산이요, 앞은 바다였다. 종조, 재종조, 삼종조 여러 댁이 그리로 떠났기 때문에 우리 집도 따라간 것이었다. 거기서 이태를 살았는데, 우리 집은 어떻게나 호젓한지 호랑이가 사람을 물고 우리 집 문 앞으로 지나갔다. 산 어귀 호랑이 길목에 우리 집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밤이면 한 걸음도 문 밖에는 나서지 못하였다. 낮이면 부모님은 농사하러 다니시거나 혹은 바다에 무엇을 잡으러 가시고, 나는 거기서 그 중 가까운 신풍 이 생원 집에 가서 그 집 아이들과 놀다가 오는 것이 일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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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아이들 중에는 나와 동갑되는 아이도 있었으나, 두세 살 위 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애들이 이놈 해줏놈 때려 주자고 공모하여 나는 무지하게도 한 차례 매를 맞았다. 나는 분해서 집으로 돌아와 부엌에서 큰 식칼을 가지고 다시 이 생원 집으로 가서 기습으로 그놈들을 다 찔러 죽일 생각으로 울타리를 뜯고 있는 것을, 열일고여덟 살 된 그 집 딸이 보고 소리소리 질러 오라비들을 불렀기 때문에 나는 목적을 달치 못하고 또 그놈들에게 붙들려 실컷 얻어맞고 칼만 빼앗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식칼을 잃은 죄로 부모님께 매를 맞을 것이 두려워서 어머님께서 식칼이 없다고 찾으실 때에도 나는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23
또 하루는 집에 혼자 있노라니까 엿장수가 문전으로 지나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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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유기나 부서진 수저로 엿을 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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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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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엿은 먹고 싶으나 엿장수가 아이들의 자지를 잘라간다는 말을 어른들께 들은 일이 있으므로 방문을 꽉 닫아걸고 엿장수를 부른 뒤에 아버지의 성한 숟가락을 발로 디디고 분질러서 반은 두고 반만 창구멍으로 내밀었다. 헌 숟가락이어야 엿을 주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엿장수는 내가 내미는 반동강 숟가락을 받고 엿을 한 주먹 뭉쳐서 창구멍으로 들이밀었다. 내가 반동강 숟가락을 옆에 놓고 한창 맛있게 엿을 먹고 있을 즈음에 아버님께서 돌아오셨다. 나는 사실대로 아뢰었더니, 다시 그런 일을 하면 경을 친다고 꾸중만 하시고 때리지는 아니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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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은 역시 그때의 일로, 아버지께서 엽전 스무 냥을 방 아랫목 이부자리 속에 두시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가 나가시고 나 혼자만 있을 때에, 심심은 하고, 동구 밖 거릿집에 가서 떡이나 사먹으리라 하고 그 스무 냥 꾸러미를 모두 꺼내어 허리에 감고 문을 나섰다. 얼마를 가다가 마침 우리 집으로 오시는 삼종조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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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이 녀석, 돈은 가지고 어디로 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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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삼종조께서 내 앞을 막아서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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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 사먹으러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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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였다.
 
32
"네 아비가 보면 이 녀석 매 맞는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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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삼종조는 내 몸에 감은 돈을 빼앗아다가 아버지를 주셨다. 먹고 싶은 떡도 못 사먹고 마음이 자못 불평하여 집에 와 있노라니, 뒤따라 아버지께서 들어오셔서 아무 말씀도 없이 빨랫줄로 나를 꽁꽁 동여서 들보 위에 매달고 회초리로 후려갈기시니,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다. 어머니도 밭에서 아니 돌아오신 때라 말려 줄 이도 없이 나는 매를 맞고 매달려 있었다. 이때에 마침 장련 할아버지라는 재종조께서 들어오셨다. 이 어른은 의술을 하는 이로서 나를 귀애하시던 이다. 내게는 참말 천행으로 이 어른이 우리 집 앞을 지나가시다가 내가 악을 쓰고 우는 소리를 듣고 달려 들어오신 것이었다.
 
34
장련 할아버지는 들어오시는 길로 불문곡직하고 들보에 달린 나를 끌러 내려놓으신 뒤에야 아버지께 까닭을 물으셨다. 아버지가 내 죄를 고하시는 말씀을 다 듣지도 아니하시고 장련 할아버지는, 나이는 아버지와 동갑이시지만, 아저씨의 위엄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치시던 회초리를 빼앗아서 아버지의 머리와 다리를 함부로 한참 동안이나 때리시고 나서야 비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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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것을 그렇게 무지하게 때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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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책망하셨다. 아버지께서 매를 맞으시는 것이 퍽도 고소하고 장련 할아버지가 퍽도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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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련 할아버지는 나를 업고 들로 나가서 참외와 수박을 실컷 사 먹이고 또 그 할아버지 댁으로 업고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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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련 할아버지의 어머니 되시는 종증조모께서도 그 아드님에게 내가 아버지에게 매를 맞은 연유를 들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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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비 밉다. 집에 가지 말고 우리 집에서 살자."
 
40
하고 아버지의 잘못을 누누이 책망하시고 밥과 반찬을 맛있게 하여주셨다. 나는 얼마만큼 마음이 기쁘고 아버지가 그 할아버지에게 맞던 것을 생각하니 상쾌하기 짝이 없었다. 이 모양으로 이 댁에서 여러 날을 묵어서 집에 돌아왔다.
 
41
한번은 장맛비가 많이 와서 근처에 샘들이 솟아서 여러 갈래 작은 시내를 이루었다. 나는 빨강이, 파랑이 물감 통을 집에서 꺼내다가 한 시내에는 빨강이를 풀고, 또 한 시내에는 파랑이를 풀어서 붉은 시내, 푸른 시내가 한데 모여서 어우러지는 양을 장난으로 구경하고 좋아하다가 어머니께 몹시 매를 맞았다.
 
42
종조께서 이곳에서 작고하셔서 백여 리나 되는 해주 본향으로 힘들여 행상한 것이 빌미가 된 것인지, 내가 일곱 살 되던 해에 이르러 여기 와서 살던 일가들이 한 집, 두 집 해주 본향으로 돌아갔다. 우리 집도 이 통에 텃골로 돌아올 때에 나는 어른들의 등에 업혀 오던 것이 기억난다.
 
43
고향에 돌아와서는 우리 집은 농사로 살아가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비록 학식은 기성명 정도이지만, 허우대가 좋고, 성정이 호방하고, 술이 한량이 없으셔서, 강씨, 이씨라면 만나는 대로 막 때려 주고는 해주 감영에 잡혀 갇히기를 한 해에도 몇 번씩 하셔서 문중에 소동을 일으키셨다.
 
44
인근 양반들이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때 시골 습관에 누가 사람을 때려서 상처를 내면 맞은 사람을 때린 사람의 집에 떠메어다가 누이고 그가 죽나 살아나나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한 달에도 몇 번씩 피투성이가 되어서 다 죽게 된 사람을 메어다가 사랑에 누이는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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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이렇게 사람을 때리시는 것은 비록 취중에 한 일이라 하더라도 다 무슨 불평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당신께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라도 양반이나 강한 자들이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시고는 참지 못하셔서 <수호지>에 나오는 호걸들 식으로 친불친을 막론하고 패어 주었다. 이렇게 아버지가 불같은 성정이신 줄을 알므로, 인근 상놈들은 두려워 공경하고 양반들은 무서워서 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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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세말이 되면 아버지는 달걀, 담배 같은 것을 많이 장만하셔서 감영의 영리청, 사령청에 선사를 하셨다. 그러면 그 회사로 책력이며, 해주 먹 같은 것이 왔다. 이것은 강씨, 이씨 같은 양반들이 감사나 판관에게 가 붙는 것에 대응하는 수였다. 영리청이나 사령청에 친하게 하는 것을 계방이라 하는데, 이렇게 계방이 되어 두면 감사의 영문이나 본아에 잡혀가서 영리청이나 옥에 갇히는 일이 있더라도 영리와 사령들이 사정을 두기 때문에 갇히는 것은 명색뿐이요, 기실은 영리, 사령들과 같은 방에서 같은 밥을 먹고 편히 있고, 또 설사 태형, 곤장을 맞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사령들은 매우 치는 시늉을 하고, 맞는 편에서는 죽어가는 엄살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뿐더러 만일 아버지께서 되잡아 양반들을 걸어서 소송을 하여서 그들이 잡혀오게 되면 제아무리 감사나 판관에게 뇌물을 써서 모면한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편인 영속들에게 호되게 경을 치고, 많은 재물을 허비하게 된다. 이렇게 망한 부자가 일 년 동안에 십여 명이나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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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무서워하는 인근 양반들은 그를 달래려 함인지 아버지를 도존위에 천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도존위 행공을 할 때에는 다른 도존위와는 반대로 양반에게 용서 없이 엄하고, 빈천한 사람들에게는 후하였다. 세금을 받는 데도 빈천한 사람의 것은 자담하여 내는 수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가혹히 하는 일은 없었다. 이 때문에 3년이 못 되어서 아버지는 공전 흠포(공금 횡령)로 면직을 당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인근에 사는 양반들의 꺼림과 미움을 받아서 그들의 아낙네와 아들까지도 김순영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
 
48
아버지의 어릴 적 별명은 효자였다. 그것은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에 아버지께서 왼쪽 무명지를 칼로 잘라서 할머니의 입에 피를 흘려 넣으셨기 때문에 소생하셔서 사흘이나 더 사셨다는 데서 생긴 것이었다.
 
49
아버지 4형제 중 백부(휘 백영)은 보통 농군이셨고, 셋째 숙부도 특기할 일이 없으나, 넷째 계부(휘 준영)가 아버지와 같이 특이한 편이셨다. 계부는 국문을 배우는데도 한겨울 동안에 가자에 기역자도 못 깨우치고 말았으되, 술은 무량으로 자시고, 또 주사가 대단하셔서 취하기만 하면 꼭 풍파를 일으키는데, 아버지는 꼭 양반에게 주정을 하셨으나, 준영 계부는 아무리 취하여도 양반에게는 감히 손을 못 대고 일가 사람들에게만 덤비셨다. 그러다가 조부님께 매를 얻어맞으시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50
내가 아홉 살 적에 조부님 상사가 났는데 장례 날에 이 삼촌이 상여 메는 사람들에게 야료를 하여서 결국은 그를 결박을 지어 놓고야 장례를 모셨다. 장례를 지낸 뒤에 종증조의 발의로 문회를 열고, 이러한 패류를 그대로 둘 수가 없으니 단단히 징치를 하여서 후환을 막아야 한다 하여 의논한 결과로 준영 삼촌을 앉은뱅이로 만들기로 작정하고 발뒤꿈치를 베었으나, 분김에 한 일이라 힘줄은 다 끊어지지 아니하여서 병신까지는 안 되었다. 그러나 그가 조부 댁 사랑에 누워서 호랑이처럼 영각을 하는 바람에 나는 무서워서 그 근처에도 못 가던 것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하니 상놈의 소위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때에 어머니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51
"너의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 때문이니, 두고 보아서 네가 또 술을 먹는다면 나는 자살을 하여서 네 꼴을 안 보겠다."
 
52
나는 이 말씀을 깊이 새겨들었다.
 
53
이때쯤에는 나는 국문을 배워서 이야기책은 읽을 줄 알았고, 천자(千字文)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얻어 배워서 다 떼었다. 그러나 내가 글공부를 하리라고 결심한 데에는 한 동기가 있었다.
 
54
하루는 어른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들었다. 몇 해 전 일이다. 문중에 새로 혼인한 집이 있었는데, 어느 할아버지가 서울 갔던 길에 사다가 두셨던 관을 밤에 내어 쓰고 새 사돈을 대하셨던 것이 양반들에게 발각이 되어서 그 관은 열파를 당하고, 그로부터 다시는 우리 김씨는 관을 못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55
나는 이 말을 듣고 몹시 울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어찌해서 양반이 되고, 우리는 어찌해서 상놈이 되었는가고 물었다. 어른들이 대답하는 말은 이러하였다. 방아메 강씨도 그 조상은 우리 조상만 못하였지마는 일문에 진사가 셋이나 살아 있고, 자라소 이씨도 그러하다고. 나는 어떻게 하면 진사가 되느냐고 물었다. 진사나 대과나 다 글을 잘 공부하여 큰 선비가 되어서 과거에 급제를 하면 된다는 대답이었다.
 
56
이 말을 들은 뒤로 나는 부쩍 공부할 마음이 생겨서 아버지께 글방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아버지도 주저하지 아니할 수 없으셨다. 우리 동네에는 서당이 없으니 이웃 동네 양반네 서당에 갈 길밖에 없었다. 그런데 양반네 서당에서 나를 받아줄지 말지도 알 수 없는 일이거니와, 또 거기 들어간다 하더라도 양반의 자식들의 등쌀에 견디어 낼 것 같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얼른 결단을 못 하다가 마침내 우리 동네 아이들과 이웃동네 상놈의 아이들을 모아서 새로 서당을 하나 만들고, 청수리 이 생원이라는 양반 한 분을 선생으로 모셔 오기로 하였다. 이 생원은 지체는 양반이지마는 글이 서툴러 양반 서당에서는 데려가는 데가 없기 때문에 우리 서당으로 오신 것이다.
 
57
이 선생이 오신다는 날, 나는 머리를 빗고 새 옷을 갈아입고 아버지를 따라서 마중을 나갔다. 저쪽에서 나이가 쉰 남짓 되어 보이는 키가 후리후리한 노인 한 분이 오시는데, 아버지께서 먼저 인사를 하시고 나서 날더러,
 
58
"창암아, 선생님께 절하여라."
 
59
하셨다. 나는 공손하게 너붓이 절을 하고 나서 그 선생을 우러러보니, 신인이라 할지 하느님이라 할지 어떻게나 거룩해 보이는지 몰랐다.
 
60
우선 우리 사랑을 글방으로 정하고, 우리 집에서 선생의 식사를 받들기로 하였다. 그 때에 내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
 
61
개학하던 첫날 나는 '마상봉한식(馬上逢寒食)' 다섯 자를 배웠는데, 뜻은 알든 모르든 기쁜 맛에 자꾸 읽었다. 밤에도 어머니께서 밀 매가리(껍질을 벗기는 것)하시는 것을 도와 드리면서 자꾸 외었다.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서 선생님 방에 나가서 누구보다도 먼저 배워서 밥그릇 망태기를 메고 먼 데서 오는 동무들을 가르쳐 주었다.
 
62
이 모양으로 우리 집에서 석 달을 지내고는 산골 신 존위 집 사랑으로 글방을 옮기게 되어서 나는 밥그릇 망태기를 메고 고개를 넘어서 다녔다. 집에서 서당에 가기까지, 서당에서 집에 오기까지 내 입에서는 글소리가 끊어지는 일이 없었다. 글동무 중에는 나보다 정도가 높은 아이도 있었으나, 배운 것을 강을 하는 데에는 언제나 내가 최우등이었다.
 
63
이러한 지 반년 만에 선생과 신 존위 사이에 반목이 생겨서 필경 이 선생을 내어보내게 되었는데, 신 존위가 말하는 이유는 이 선생이 밥을 너무 많이 자신다는 것이거니와, 사실은 그 아들이 둔재여서 공부를 잘 못하는데 내 공부가 일취월장하는 것을 시기함이었다.
 
64
한번은 월강(한 달에 한 번 보는 시험) 때에 선생이 내게 조용히 부탁하신 일이 있었다. 내가 늘 우등을 하였으니 이번에는 일부러 잘 못하고 선생이 뜻을 물어도 일부러 모른 체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하오리다 약속을 하고 그대로 하였다. 이리하여서 이 날에 신 존위의 아들이 처음으로 한 번 장원을 하였다. 신 존위는 대단히 기뻐서 이날 닭을 잡고 한 턱을 잘 내었다. 그러나 번번이 신 존위의 아들을 장원시키지 못한 죄로 이 선생이 퇴짜를 맞은 것이니, 참으로 상놈의 행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루는 내가 아침밥을 먹기 전에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셔서 나를 불러 작별 인사를 하실 때에 나는 정신이 아득하여서 선생님의 품에 매달려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선생님도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 나는 며칠 동안은 밥도 잘 아니 먹고 울기만 하였다.
 
65
그 후에도 어떤 돌림 선생 한 분을 모셔다가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으나, 이번에는 아버지께서 갑자기 전신 불구가 되셔서 자리에 누우시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공부를 전폐하고 아버지 심부름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근본 빈한한 살림에 의원이야 약이야 하고 가산을 탕진한 끝에 겨우 아버지는 반신불수로 변하여서 한쪽 팔과 다리를 쓰시게 된 것만도 천행이라고 생각하였다.
 
66
그러나 아버지가 반신불수로서는 살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여서라도 병은 고쳐야 하겠다 하여 어머니는 병신 아버지를 모시고 무전 여행을 나서게 되었다. 문전 걸식을 하면서 고명 의원을 찾아서 남편의 병을 고치자는 것이다.
 
67
집도 가마솥도 다 팔아 없어지고, 나는 백모님 댁에 맡긴 몸이 되어서 종형들과 소 고삐를 끌고 산과 들로 다니며 세월을 보내었다.
 
68
부모님이 그리워 견딜 수 없으므로 여행하는 부모님을 따라서 신천, 안악, 장련 등지로 유리하였다. 그러다가 나는 장련 대촌의 육촌 친척집에 두고 부모님만 고향으로 조부 대상제를 지내러 가시고 말았다. 그 댁도 농가인 까닭에 식구들과 같이 구월산에 나무를 베러 갔었는데, 내가 어려서는 유달리 크지를 못하여 나뭇짐을 지고 다니면 나뭇짐이 걸어가는 것과 같았고, 또한 그러한 고역을 처음 당하니 고통도 되려니와, 그 동네는 큰 서당이 있어 밤낮 글 읽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말할 수 없는 비회를 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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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유리표박하시는 동안에 아버지 병환이 신기하게도 차도가 계셔서 못 쓰시던 팔다리도 잘은 못해도 쓰게 되셨다. 그래서 내 공부를 시키실 목적으로 다시 본향에 돌아오셨다. 고향에 돌아와 보니 의식주를 기댈 만한 곳이 없었는데, 일가들이 얼마씩 추렴을 내어서 살림살이를 장만하고, 나는 또 서당에 다니게 되었다.
 
70
책은 남의 것을 빌어서 읽는다 하더라도 지필묵 값이 나올 데가 없었다. 어머님이 길품과 길쌈품을 팔아서 지필묵을 사 주실 때에는 어찌나 고마운지 이루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었다.
 
71
내 나이 열네 살이 되매, 선생이라는 이가 모두 고루해서 내 마음에 차지 아니하였다. 벼 열 섬짜리, 닷 섬짜리 하고 훈료가 많고 적은 것으로 선생의 학력을 평가하였다. 그들은 다만 글만 부족할 뿐 아니라 그 마음씨나 일하는 것에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72
그때에 아버지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밥 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고,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행문이나 배우라는 것이었다. '우명문표사단(右明文標事段)'하는 땅문서 쓰기, '우근진소지단(右謹陳訴旨段)'하는 소장 쓰기, '유세차감소고우(維歲次敢昭告于)'하는 축문 쓰기, '복지제기자미유항려(僕之第幾子未有伉儷)'하는 혼서지 쓰기, '복미심차시(伏未審此時)'하는 편지 쓰기를 배우라 하시므로 나는 틈틈이 이 공부를 하여서 무식촌 중에 문장이 되어서 문중에는 내가 장차 존위 하나는 하리라고 촉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 글은 이제야 겨우 속문 정도에 지나지 못하지만 뜻은 한 동네의 존위에는 있지 아니하였다. <통감>, <사략>을 읽을 때에 '왕후장상영유종호(王候將相寧有種乎: 왕, 제후, 장군, 재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음)'하는 진승의 말이나, 칼을 빼어서 뱀을 베었다는 유방의 일이나, 빨래하는 아낙네에게 밥을 빌어먹은 한신의 사적을 볼 때에는 나도 모르게 어깨에서 바람이 나는 것이었다.
 
73
그러나 우리 가세로는 고명한 스승을 찾아갈 수가 없어서 아버지께서도 무척 걱정을 하시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마침 공부할 길이 하나 뚫렸다. 우리 동네에서 동북으로 10리쯤 되는 학골이라는 곳에 정문재라는 이가 글을 가르치고 계셨다. 이 이는 문벌은 우리 집과 마찬가지로 상놈이었으나, 과문으로는 당시에 굴지되는 큰 선비여서 그 문하에는 사처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이 정 선생이 내 백모와 재종간이므로 아버지께서 그에게 간청하여 훈료 없이 통학하며 배우는 허락을 얻으셨다. 이에 나는 날마다 밥망태기를 메고 험한 산길을 10리나 걸어서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가는 일이 많았다.
 
74
제작으로는 과문의 초보인 대고풍 십팔구(大古風 十八句)요, 학과로는 <한당시>와 <대학>, <통감> 등이요, 습자에서는 분판만을 썼다.
 
75
이때에 임진경과를 해주에서 보인다는 공포가 났으니 이것이 우리나라의 마지막 과거였다. 어느 날 정 선생은 아버지께 이런 말씀을 하시고, 나도 과거를 보기 위하여 명지를 쓰는 연습으로 장지를 좀 쓸 필요가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천신만고로 장지 다섯 장을 구해 오셔서 나는 그 다섯 장 종이가 까맣게 되도록 글씨를 익혔다.
 
76
과거 날이 가까워오매 우리 부자는 돈이 없으므로 과거 중에 먹을 만큼 좁쌀을 지고 정 선생을 따라 해주로 갔다. 여관에 들 형편이 못 되므로 전에 아버지께서 친해 두셨던 계방에 사처를 정하였다.
 
77
과거 날이 왔다. 선화당 옆에 있는 관풍각 주위에는 새끼줄을 둘러 늘였다. 정각에 부문을 한다는데, 선비들이 접을 따라서 제 이름을 쓴 백포기를 장대 끝에 높이 들고 모여들었다. 산동접, 석담접, 이 모양이었다. 선비들은 검은 베로 만든 유건을 머리에 쓰고 도포를 입고 접기를 따라 꾸역꾸역 밀려들어, 좋은 자리를 먼저 잡으려고 앞장선 용사패들이 아우성을 하는 것도 볼만하였다. 원래 과장에는 노소도 없고, 귀천도 없이 무질서한 것이 유풍이라 한다.
 
78
또 가관인 것은 늙은 선비들의 걸과라는 것이다. 둘러 늘인 새끼그물 구멍으로 모가지를 쑥 들이밀고 이런 소리를 외치는 것이다.
 
79
"소생의 성명은 아무이옵는데, 먼 시골에 거생하면서 과거마다 참예하였사옵는데 금년이 일흔 몇 살이올시다. 요 다음은 다시 참가 못 하겠사오니 이번에 초시라도 한 번 합격이 되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80
이 모양으로 혹은 큰 소리로 부르짖고, 혹은 방성대곡도 하니 한편 비루도 하거니와 또 한편 가련도 하였다.
 
81
내 글을 짓기를 정 선생이 하시고 쓰기만 내가 하기로 하였으나, 내가 과거를 내 이름으로 아니 보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명지를 드린다는 말에 감복하여서 접장 한 분이 내 명지를 써 주기로 하였다. 나보다는 글씨가 낫기 때문이었다. 제 글과 제 글씨로 못 하는 것이 유감이었으나, 차작으로라도 아버지가 급제를 하셨으면 좋을 것 같았다.
 
82
차작으로 말하면 누구나 차작 아닌 것이 없었다. 세력 있고 재산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글 잘하는 사람에게 글을 빌고 글씨 잘 쓰는 사람에게 글씨를 빌어서 과거를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좋은 편이었다. 글은 어찌되었든지 서울 권문세가의 청편지 한 장이나 시관의 수청 기생에게 주는 명주 한 필이 진사나 급제가 되기에는 글 잘하는 큰 선비의 글보다도 빨랐다. 물론 우리 글 따위는 통인의 집 식지감이나 되었을 것이요, 시관의 눈에도 띄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진사 급제는 미리 정해놓고 과거는 나중 보는 것이었다.
 
83
이번 과거에 나는 크게 실망하였다. 아무리 글공부를 한댔자, 그것으로 발천하여 양반이 되기는 그른 세상인 줄을 깨달았다. 모처럼 글을 잘해도 세도 있는 자제들의 대서인 되는 것이 상지상(上之上: 가장 나은 경우)일 것이었다.
 
84
나는 집에 돌아와서 과거에 실망한 뜻을 아뢰었더니 아버지도 내가 바로 깨달았다고 옳게 여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85
"너 그러면 풍수 공부나 관상 공부를 하여 보아라. 풍수를 잘 배우면 명당을 얻어서 조상님네 산소를 잘 써서 자손이 복록을 누릴 것이요, 관상에 능하면 사람을 잘 알아보아서 성인군자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86
나는 이 말씀을 매우 유리하게 여겨서 아버님께 청하여 <마의상서>를 빌어다가 독방에서 석 달 동안 꼼짝 아니하고 공부하였다. 그 방법은 면경을 앞에 놓고 내 얼굴을 보면서 일변 얼굴의 여러 부분의 이름을 배우고, 일변 내 상의 길흉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내 얼굴을 관찰해 보아도 귀격이나 부격과 같은 좋은 상은 없고, 천격, 빈격, 흉격 뿐이었다. 전자에 과장에서 실망하였던 것을 상서에서나 회복하려 하였더니, 제 상을 보니 그보다도 더욱 낙심이 되었다. 짐승 모양으로 그저 살기나 위해 살다가 죽을까, 세상에 살아 있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87
이렇게 절망에 빠진 나에게 오직 한 가지 희망을 주는 것은 <마의상서> 중에 있는 다음의 구절이었다.
 
88
'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
 
89
이것을 보고 나는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좋지 못하던 사람으로서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서 <마의상서>는 아무 대답도 주지 못하였다. 이래서 상서는 덮어 버리고 <지가서>를 좀 보았으나, 거기에도 취미를 얻지 못하고, 이번에는 병서를 읽기 시작하였다. <손무자>, <오기자>, <삼략>, <육도> 등을 읽어 보았다. 알지 못할 것도 많으나, 장수의 재목을 말한 곳에,
 
90
"태산복어전심불망동 여사졸동감고 진퇴여호 지피지기 백전불패(泰山覆於前心不妄動 與士卒同甘苦 進退女虎 知彼知己 百戰不敗: 태산이 무너지더라도 마음을 동치 말고, 사졸로 더불어 달고 씀을 같이 하며, 나아가고 물러감을 범과 같이 하며,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지지 아니하리라.)"
 
91
이 구절이 내 마음을 끌었다, 이때에 내 나이가 열일곱 살, 나는 일가 아이들을 모아서 훈장질을 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병서를 읽고 1년의 세월을 보냈다.
 
92
이 때 사방에는 여러 가지 괴질이 돌았다. 어디서는 진인이 나타나서 바다에 달리는 화륜선(汽船)을 못 가게 딱 잡아놓고 세금을 받고야 놓아주었다는 둥, 머지 아니하여 계룡산에 정 도령이 도읍을 할 터이니 바른 목에 가 있어야 새 나라의 양반이 된다 하여 세간을 팔아가지고 아무개는 계룡산으로 이사를 하였다는 둥, 이러한 소리였다.
 
93
그런데 우리 동네에서 남쪽으로 20리쯤 가서 갯골이란 곳에 사는 오응선(吳膺善)과 그 이웃동네에 사는 최유현(崔琉鉉)이라는 사람이 충청도 최도명(崔道明)이라는 동학(東學) 선생에게서 도를 받아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방에 들고 나기에 문을 열지 아니하며, 문득 있다가 문득 없어지며, 능히 공중으로 걸어 다니므로 충청도 그 선생 최도명한테 밤 동안 다녀온다고 하였다. 나는 이 동학이라는 것에 호기심이 생겨서 이 사람들을 찾아보기로 결심하였다.
 
94
나는 남에게 들은 말대로 누린 것, 비린 것을 끊고 목욕하고 새 옷을 입고 나섰다. 이렇게 하여야 받아준다는 것이었다. 내 행색으로 말하면 머리는 빗어서 땋아 늘이고 옥색 도포에 끈목띠를 띠었다. 때는 내가 열여덟 살 되던 정초였다.
 
95
갯골 오씨 집 문전에 다다르니 안에서 무슨 글을 읽는 소리가 나오는데, 그것은 보통 경전이나 시를 외우는 소리와는 달라서 마치 노래를 합창하는 것과 같았다. 공문에 나아가 주인을 찾았더니 통천관(通天冠)을 쓴 말쑥한 젊은 선비 한 사람이 나와서 나를 맞는다. 내가 공손히 절을 한즉 그도 공손히 맞절을 하기로, 나는 황공하여서 내 성명과 문벌을 말하고 내가 비록 성관을 하였더라도 양반 댁 서방님인 주인의 맞절을 받을 수 없거늘, 하물며 편발(編髮) 아이에게 이런 대우가 과도한 것을 말하였다. 그랬더니 선비는 감동하는 빛을 보이면서, 그는 동학 도인이라 선생의 훈계를 지켜 빈부귀천에 차별이 없고, 누구나 평등으로 대접하는 것이니, 미안해할 것 없다고 말하고 내가 찾아온 뜻을 물었다. 나는 이 말을 들으매 별세계에 온 것 같았다. 내가 도를 들으러 찾아온 뜻을 고하니 그는 쾌히 동학의 내력과 도리의 요령을 설명하였다. 이 도는 용담(龍潭) 최수운(崔水雲) 선생께서 천명(闡明)하신 것이나, 그 어른은 이미 순교하셨고, 지금은 그 조카님 최해월(崔海月) 선생이 대도주(大道主)가 되셔서 포교를 하신다는 것이며, 이 도의 종지(宗旨)로 말하면 말세의 간사한 인류로 하여금 개과천선하여서 새 백성이 되어가지고 장래에 진명지주(眞命之主: 하늘의 뜻을 받아 어지러운 세상을 평정하고 통일한다는 참된 임금)를 뫼시어 계룡산에 새 나라를 세우는 것이라 하는 것 등을 말하였다. 나는 한번 들으매 심히 환희심이 발하였다. 내 상호가 나쁜 것을 깨닫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맹세한 나에게는 하느님을 몸에 모시고 하늘 도를 행하는 것이 가장 요긴한 일일뿐더러, 상놈인 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로서는 동학의 평등주의(平等主義)가 더할 수 없이 고마웠고, 또 이씨의 운수가 다하였으니 새 나라를 세운다는 말도 해주의 과거에서 본 바와 같이 정치의 부패함에 실망한 나에게는 적절하게 들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나는 입도할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서 입도 절차를 물은즉 쌀 한 말, 백지 세 권, 황초 한 쌍을 가지고 오면 입도식을 행하여 준다고 하였다. <동경대전(東經大全)>, <팔편가사(八編歌詞)>, <궁을가(弓乙歌)> 등 동학의 서적을 열람하고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께 오씨에게서 들은 말을 여쭙고 입도할 의사를 품하였더니 아버지께서는 곧 허락하시고 입도식에 쓸 예물을 준비하여 주셨다. 이렇게 하여서 내가 동학에 입도한 것이다.
 
96
동학에 입도한 나는 열심히 공부를 하는 동시에 포덕(전도)에 힘을 썼다. 아버지께서도 입도하셨다. 이 때의 형편으로 말하면 양반은 동학에 오는 이가 적고 나와 같은 상놈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내가 입도한지 불과 몇 개월 만에 연비(連臂: 포덕하여 얻은 신자라는 뜻)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이렇게 하여 내 이름이 널리 소문이 나서 도를 물으러 찾아오는 이도 있고, 내게 대한 무근지설(無根之說)을 전파하는 사람도 있었다.
 
97
"그대가 동학을 하여보니 무슨 조화가 나던가?"
 
98
하는 것이 가장 흔히 내게 와서 묻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도를 구하지 아니하고, 요술과 같은 조화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99
"악을 짓지 말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 도의 조화이니라."
 
100
이것이 나의 솔직하고 정당한 대답이건마는 듣는 이는 내가 조화를 감추고 자기네에게 아니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김창수(金昌洙 - 창암[昌岩]이라는 아명을 버리고 이때부터 이 이름을 썼다) 가 한 길이나 떠서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노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모양으로 있는 소리 없는 소리 섞어 전하여서 내 명성이 황해도 일대뿐만 아니라 멀리 평안남도에까지 퍼져서 당년에 내 밑에 연비가 무려 수천에 달하였다. 당시 황평 양서 동학당 중에서 내가 나이가 어린 사람으로서 많은 연비를 가졌다 하여 나를 아기접주라고 별명지었다. 접주(接主)라는 것은 한 접의 수령이란 말로서 위에서 내리는 직함이다.
 
101
이듬해인 계사년(癸巳年) 가을에 해월(海月:최시형) 대도주로부터 오응선, 최유현 등에게 각기 연비의 성명 단자(명부)를 보고하라는 경통(敬通:공함이라는 뜻)이 왔으므로 황해도 내에서 직접 대도주를 찾아갈 인망 높은 도유(道儒) 15명을 뽑을 때에 나도 뽑혔다. 편발로는 불편하다 하여 성관하고 떠나게 되었다. 연비들이 내 노자를 모아 내고, 또 도주님께 올릴 예물로는 해주 향묵도 특제로 맞추어 가지고 육로, 수로를 거쳐서 충청도 보은군 장안(長安)이라는 해월 선생 계신 데 다다랐다. 동네에 쑥 들어서니 이 집에서도 저 집에서도
 
102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始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103
하는 주문 외우는 소리가 들리고, 또 일변으로는 해월 대도주를 찾아서 오는 무리, 일변으로는 뵈옵고 가는 무리가 연락부절하고, 집이란 집은 어디나 사람으로 가득 찼었다. 우리는 접대인에게 우리 일행 15명의 명단을 부탁하여 대도주께 우리가 온 것을 통하였더니, 1시간이나 지나서 황해도에서 온 도인을 부르신다는 통지가 왔다. 우리 일행 열다섯은 인도자를 따라서 해월 선생의 처소에 이르러 선생 앞에 한꺼번에 절을 드리니, 선생은 앉으신 채로 상체를 굽히고 두 손을 방바닥에 짚어 답배를 하시고, 먼 길에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다며 간단히 위로하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가지고 온 예물과 도인의 명단을 드리니, 선생은 맡은 소임을 부르셔서 처리하라고 명하셨다. 우리가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온 뜻은 선생의 선풍도골(仙風道骨)도 뵈오려니와, 선생께 무슨 신통한 조화 줌치(주머니의 방언)나 받을까함이었으나 그런 것은 없었다. 선생은 연기(年紀)가 육십은 되어 보이는데, 구레나룻이 보기 좋게 났으며, 약간 검게 보이고, 얼굴은 여위었으나 맑은 맵시다. 크고 검은 갓을 쓰시고 동저고리 바람으로 일을 보고 계셨다. 방문 앞에 놓인 무쇠 화로에서 약탕관이 김이 나며 끓고 있었는데, 독삼탕 냄새가 났다. 선생이 잡수시는 것이라고 했다. 방 내외에는 여러 제자들이 옹위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친근하게 모시는 이는 손응구, 김연국, 박인호 같은 이들인데, 손응구는 장차 해월 선생의 후계자로 대도주가 될 의암 손병희로서 깨끗한 청년이었고, 김은 연기가 사십은 되어 보이는데 순실한 농부와 같았다. 이 두 사람은 다 해월 선생의 사위라고 들었다. 손씨는 유식해 보이고, 천을천수(天乙天水)라고 쓴 부적을 보건대 글씨 재주도 있는 모양이었다.
 
104
우리 일행이 해월 선생 앞에 있을 때에 보고가 들어왔다.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이가 벌써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뒤이어 또 후보(後報)가 들어왔다. 어떤 고을의 원이 도유(동학 도를 닦는 선비)의 전 가족을 잡아 가두고 가산을 강탈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를 들으신 선생은 진노한 낯빛을 띠고 순 경상도 사투리로,
 
105
"호랑이가 몰려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서서 싸우자!"
 
106
하시니 선생의 이 말씀이 곧 동원령(動員令)이었다. 각지에서 와서 대령하던 대접주(大接主)들이 물 끓듯 살기를 띠고 물러가기 시작하였다. 각각 제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싸우자는 것이었다.
 
107
우리 황해도에서 온 일행도 각각 접주라는 첩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두건 속에 '해월인(海月印)'이라고 전자로 새긴 인이 찍혀 있었다.
 
108
선생께 하직하는 절을 하고 물러나와 잠시 속리산을 구경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벌써 곳곳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이고, 평복에 칼 찬 사람을 가끔 만나게 되었다. 광혜원 장거리에 오니 1만 명이나 됨직한 동학군이 진을 치고 행인을 검사하고 있었다. 가관인 것은 평시에 동학당을 학대하던 양반들을 잡아다가 길가에 앉혀놓고 짚신을 삼기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증거를 보이고 무사히 통과하였다. 부근 촌락에서 밥을 짐으로 지어가지고 도소(都所: 이를테면 사령부)로 날라 오는 것을 무수히 길에서 만났다. 논에서 벼를 베던 농민들이 동학군이 물밀듯 모여드는 것을 보고 낫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도 보았고, 서울에 이르러서는 경군(서울 군사)이 삼남을 향해서 행군하는 것도 만났다. 해주에 돌아왔을 때는 9월이었다.
 
109
황해도 동학당들도 들먹들먹하고 있었다. 첫째로는 양반과 관리의 압박으로 도인들의 생활이 불안하였고, 둘째로는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으로부터 향응하라는 경통이 빗발치듯했다. 그래서 15접주를 위시하여 여러 두목들이 회의한 결과 거사하기로 작정하고, 제 1회 총소집의 위치를 해주 죽천장으로 정하고 각처 도인에게 경통을 발하였다. 나는 팔봉산 밑에 산다고 하여서 접 이름을 팔봉이라고 짓고 푸른 갑사에 팔봉도소라고 크게 쓴 기를 만들고, 표어로는 척양척왜 넉 자를 써서 높이 달았다. 그러고는 서울서 토벌하러 내려올 경군과 왜병과 싸우기 위하여 연비 중에서 총기를 가진 이를 모아서 군대를 편제하기로 하였다. 나는 본시 산협잡쟁이요, 또 상놈인 까닭에 산포수 연비가 많아서 다 모아본즉 총을 가진 군사가 700명이나 되어 무력으로는 누구의 접보다도 나았다. 인근 부호의 집에 간직하였던 약간의 호신용 무기도 모아들였다.
 
110
최고회의에서 작성한 전략으로는 우선 황해도의 수부인 해주성을 빼앗아 탐관오리와 왜놈을 다 잡아 죽이기로 하고, 팔봉 접주 김창수로 선봉장을 삼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평소에 병서에 소양이 있고, 또 내 부대에 산포수가 많은 것도 이유겠지마는 자기네가 앞장을 서서 총알받이가 되기 싫은 것이 아마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쾌히 '선봉'이라고 쓴 사령기를 들고 말을 타고 선두에 서서 해주성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해주성 서문 밖 선녀산에 진을 치고 총공격령이 내리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111
이윽고 총지휘부에서 총공격령이 내리고, 작전 계획은 선봉장인 나에게 일임한다는 명령이 왔다. 나는 이렇게 계획을 세워서 본부에 아뢰고 곧 작전을 개시하였다. 지금 성내에 아직 경군은 도착하지 아니하고 오합지중으로 된 수성군 200명과 왜병 7명이 있을 뿐이니, 선발대로 하여금 먼저 남문을 엄습케 하여 수성군의 힘을 그리로 끌게 한 후에 나는 서문을 깨뜨릴 터인즉 총소(총사령부)에서 형세를 보아서 허약한 편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총소에서는 내 계획을 채용하여 한 부대를 남문으로 향하여 행진케 하였다.
 
112
이 때에 수 명의 왜병이 성 위에 올라 대여섯 방이나 시험사격을 하는 바람에 남문으로 향하던 선발대는 도망하기 시작하였다. 왜병은 이것을 보고 돌아와서 달아나는 무리에게 총을 연발하였다. 나는 이에 전군을 지휘하여서 서문을 향하여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돌연 총소에서 퇴각하라는 명령이 내리고, 우리 선봉대는 머리도 돌리기 전에 따르던 군사가 산으로 들로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한 군사를 붙들어 퇴각하는 까닭을 물으니 남문 밖에서 도유 서너 명이 총에 맞아 죽은 까닭이라고 했다.
 
113
이렇게 되니 선봉대만 혼자 머물 수도 없어서 비교적 질서 있게 퇴각하여 해주에서 서쪽으로 80리 되는 회학동 곽 감영 댁에 유진하기로 하였다. 무장한 군사는 축이 안 나고 거의 전부 따라와 있는 것이 대견하였다.
 
114
나는 이번의 실패에 분개하여서 잘 훈련된 군대를 만들기에 힘을 다하기로 하였다. 동학 도유거나 아니거나 전에 장교의 경험이 있는 자는 비사후폐(秘事厚幣:말을 정중히 하고 예물을 후하게 함)로 초빙하여 군사를 훈련하는 교관을 삼았다. 총 쏘기는 말할 것도 없고 행보하는 법이며 체조며 온갖 조련을 다하였다. 좋은 군대를 만드는 것이 싸움에 이기는 비결이라고 믿은 것이다. 하루는 어떤 사람 둘이 내게 면회를 청하였다. 구월산 밑에 사는 정덕현, 우종서라는 사람들이었다. 찾아온 까닭을 물었더니 그 대답이 놀라웠다. 동학군이란 한 놈도 쓸 것이 없는데 들은즉 내가 좀 낫단 말을 듣고 한번 보러 왔다는 것이다. 옆에 있던 내 부하들이 두 사람의 말이 심히 불공함을 분개하였다. 나는 도리어 부하를 책망하여 밖으로 내보내고, 이상한 손님과 셋이서 마주앉았다. 나는 공손히 두 사람을 향하여 '선생'이라 존칭하고, 이처럼 찾아와 주시니 무슨 좋은 계책을 가르쳐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런즉 정씨가 더욱 교만한 태도로 말하기를, 비록 계책을 말하기로니 네가 알아듣기나 할까, 실행한 자격이 없으리라고 비웃은 뒤에, 더욱 호기 있는 어성으로, 동학 접주나 하는 자들은 어줍지 않게 호기가 충전하여 선비를 초개와 같이 보니 너도 그런 사람이 아니냐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더욱 공손한 태도로,
 
115
"이 접주는 다른 접주와 다르다는 것을 선생께서 한 번 가르쳐보신 뒤에야 알 것이 아닙니까?" 하였다. 그들은 둘 다 나보다 10년은 연상일 것 같았다.
 
116
그제야 정씨가 흔연히 내 손을 잡으며 계책을 말하였다. 그것은 이러하였다.
 
117
1. 군기를 정숙히 하되 비록 병졸을 대하더라도 하대하지 아니하고 경어를 쓸 것.
 
118
2. 인심을 얻을 것이니, 동학군이 총을 가지고 민가로 다니며 집곡이니 집전이니 하고 강도적 행위를 하는 것을 엄금할 것.
 
119
3. 초현이니, 어진 이를 구하는 글을 돌려 널리 좋은 사람을 모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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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군을 구월산에 모으고 훈련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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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재령, 신천 두 고을에 왜가 사서 쌓아둔 쌀 2000석을 몰수하여 구월산 패엽사에 쌓아두고 군량으로 쓸 것.
 
122
나는 곧 이 계획을 실시하기로 하고 즉시 전군을 집합장에 모아 정씨를 모주라, 우씨를 종사라고 공포하고 전군을 지휘하여 두 사람에게 최경례를 시켰다. 그러고는 구월산으로 진을 옮길 준비를 하던 차에, 어느 날 밤 신천 청계동 안 진사로부터 밀사가 왔다. 안 진사의 이름은 태훈이니, 그의 맏아들 중근은 나중에 이등박문을 죽인 안중근이다. 그는 글 잘하고 글씨 잘 쓰기로 이름이 서울에까지 떨치고, 또 지략도 있어 당시 조정의 대관들까지도 그를 무섭게 대우하였다. 동학당이 일어나매 안 진사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인 청계동 자택에 의려소를 두고, 그의 자제들로 하여금 모두 의병이 되게 하고 포수 300명을 모집하여서 벌써 신천 지경 안에 있는 동학당을 토벌하기에 많은 성공을 하여서 각 접이 다 이를 두려워하고 경계하였던 터이다.
 
123
나는 정 모주로 하여금 이 밀사를 만나게 하였다. 그의 보고에 의하면, 나의 본진이 있는 회학동과 안 진사의 청계동이 불과 20리 상거이나, 만일 내가 무모하게 청계동을 치려다가 패하면 내 생명과 명성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니, 그러하면 좋은 인재를 하나 잃어버리게 될 것인즉, 안 진사가 나를 위하는 호의로 이 밀사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이에 곧 나의 참모회의를 열어서 의논한 결과, 저편에서 나를 치지 아니하면 나도 저편을 치지 아니할 것, 피차에 어려운 지경에 빠질 경우에는 서로 도울 것이라는 밀약이 성립되었다.
 
124
예정대로 나의 군사는 구월산으로 집결하였다. 재령, 신천에 있던 쌀도 패엽사로 옮겨왔다. 한 섬을 져오면 서 말을 준다고 하였더니 당일로 다 옮겨졌다. 날마다 군사 훈련도 여행(勵行: 힘써 행함)하였다. 또 인근 각 동에 훈령하여 동학당이라고 자칭하고 민간에 행패하는 자를 적발하여 엄벌하였더니 며칠이 안 가서 질서가 회복되고 백성이 안도하였다. 또 초현문을 발표하여 널리 인재도 수탐하여 송종호, 허곤 같은 유식한 사람을 얻었다. 패엽사에는 하은당이라는 도승이 있어서 수백 명 남녀 승도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나는 가끔 그의 법설을 들었다.
 
125
이러는 동안에 경군과 왜병이 해주를 점령하고, 옹진, 강령 등지를 평정하여 학령을 넘어온다는 기별이 들렸다. 그들의 목표가 구월산일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화근은 경군이나 왜병에 있지 아니하고 나와 같은 동학당인 이동엽의 군사에 있었다. 이동엽은 구월산 부근 일대에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접주로서, 그의 부하는 나의 본진 가까이까지 침입하여 노략질을 함부로 하였다. 우리 군에서는 사정없이 그들을 체포하여 처벌하였기 때문에 피차간에 반목이 깊어진데다가, 우리 군사들 중에 우리 군율에 의한 형벌을 받고 앙심을 품은 자와 노략질을 마음대로 하고 싶은 자들이 이동엽의 군대로 달아나는 일이 날로 늘었다. 이리하여 이동엽의 세력은 날로 커지고 내 세력은 날로 줄었다. 이에 최고회의를 열어 의논한 결과, 나는 동학접주의 칭호를 버리기로 하고, 내 군대를 허곤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이는 나의 병권을 빼앗으려 함이 아니요, 나를 살려내고자 하는 계책이었다. 이에 허곤은 송종호로 하여금 평양에 있는 장호민에게 보내는 소개 편지를 가지고 평양으로 떠나게 하였으니, 이것은 황주 병사의 양해를 얻어서 일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함이었다.
 
126
이때에 내 나이가 열아홉, 갑오년 섣달이었다. 나는 몸에 열이 나고 두통이 심하여서 자리에 눕게 되었다. 하은당 대사는 나를 그의 사처인 조실에 혼자 있게 하고 몸소 병구완을 하였다. 며칠 후에 내 병이 홍역인 것이 판명되어서 하은당은,
 
127
"홍역도 못한 대장이로군."
 
128
하고 웃었다. 그러고는 홍역을 다스린 경험이 있는 늙은 승수자 한 분을 가리어 내 조리를 맡게 하였다.
 
129
이렇게 병석에 누워 있노라니, 하루는 이동엽이 전군을 이끌고 패엽사로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있고, 뒤이어 어지러이 총소리가 나며 순식간에 절 경내는 양군의 육박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원래 사기가 저상한데다가 장수를 잃은 나의 군사는 불의의 습격을 받아서 일패도지하고, 나의 본진은 적의 제압한 바 되고 말았다. 나의 군사들은 보기도 흉하게 도망하여 흩어지는 모양이었다.
 
130
이윽고 이동엽의 호령이 들렸다.
 
131
"김 접주에게 손을 대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영장 이종선 이놈만 잡아 죽여라."
 
132
하고 외쳤다.
 
133
이 말을 듣고 나는 이불을 차고 마루 끝에 뛰어 나서서,
 
134
"이종선은 내 명령을 받아서 무슨 일이나 행한 사람이니 만일 이종선이가 죽을 죄를 지었거든 나를 죽여라."
 
135
하고 외쳤다.
 
136
이동엽이 부하에게 명하여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게 하고 이종선만을 끌고 나가더니, 이윽고 동구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이동엽의 부하는 다 물러가고 말았다.
 
137
이종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동구로 달려 내려갔다. 과연 그는 총에 맞아 쓰러졌고, 그의 옷은 아직도 불이 붙어 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안고 통곡하다가 내 저고리를 벗어 그 머리를 싸주었다. 그 저고리는 내가 남의 윗사람이 되었다 하여 어머니께서 지어 보내신, 평생에 처음 입어보는 명주 저고리였다. 동민들은 백설 위에 내가 벌거벗고 통곡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의복을 가져다 입혀주었다. 나는 동민들을 지휘하여 이종선의 시체를 매장하였다.
 
138
이종선은 함경도 정평 사람으로, 장사차 황해도에 와서 살던 사람이다. 총사냥을 잘하고, 비록 무식하나 사람을 거느리는 재주가 있어서 내가 그를 화포령장으로 삼았던 것이다.
 
139
이종선을 매장한 나는 패엽사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부산동 정덕현 집으로 갔다. 내게서 그 동안 지낸 일을 들은 정씨는 태연한 태도로,
 
140
"이제 형은 할 일 다 한 사람이니 나와 함께 평안히 유람이나 떠나자."
 
141
하고 내가 이종선의 원수 갚을 말까지 눌러버리고 말았다. 이동엽이 패엽사를 친 것은 제 손으로 저를 친 것과 마찬가지다, 경군과 왜병이 이동엽을 치기를 재촉할 것이라고 하던 정씨의 말이 그대로 맞아서, 정씨와 내가 몽금포 근처에 숨어 있는 동안에 이동엽은 잡혀가서 사형을 당하였다. 구월산의 내 군사와 이동엽의 군사가 소탕되니 황해도의 동학당은 전멸이 된 셈이었다.
 
142
몽금포 근동에 석 달을 숨어 있다가 나는 정씨와 작반하여 텃골에 부모를 찾아뵈옵고, 정씨의 의견을 좇아 청계동 안 진사를 찾아 몸을 의탁하기로 하였다. 나는 패군지장으로서 일찍 적군이던 안 진사의 밑에 들어가 포로 신세가 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였으나, 정씨는 안 진사의 위인이 그렇지 아니하여 심히 인재를 사랑한다는 말과, 전에 안 진사가 밀사를 보낸 것도 이런 경우를 당하면 자기에게 오라는 뜻이라고 역설함에 나는 그 말대로 한 것이었다.
 
143
텃골 본향에서 부모님을 뵈온 이튿날, 정씨와 나는 곧 천봉산을 넘어 청계동에 다다랐다. 청계동은 사면이 험준하고 수려한 봉란으로 에워 있고, 동네에는 띄엄띄엄 4, 50호의 인가가 있으며, 동구 앞으로 한 줄기 개울이 흐르고, 그곳 바위 위에는 '청계동천(淸溪洞川)'이라는 안 진사의 자필 각자(刻字: 새긴 글자)가 있었다.
 
144
동구를 막을 듯이 작은 봉우리 하나가 있었는데, 그 위에는 포대가 있고, 길 어귀에 파수병이 있어서 우리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명함을 내주고 얼마 있노라니 의려장의 허가가 있다 하여 한 군사가 우리를 안내하여 의려소인 안 진사 댁으로 갔다. 문전에는 연당이 있고 그 가운데에는 작은 정자가 있었는데, 이것은 안 진사 6형제가 평일에 술을 마시고 시를 읊는 곳이라고 했다. 대청 벽상에는 의려소 석 자를 횡액으로 써 붙였다. 안 진사는 우리를 정청에 영접하여 수인사를 한 후에 첫말이,
 
145
"김 석사가 패엽사에서 위험을 면하신 줄을 알았으나 그 후 사람을 놓아서 수탐하여도 계신 곳을 몰라서 우려하였더니 오늘 이처럼 찾아주시니 감사하외다."
 
146
하고 다시,
 
147
"들으니 구경하(具慶下:부모님 두 분이 다 살아계심)시던데 양위분은 안접하실 곳이 있으시오?"
 
148
하고 내 부모에 관한 것을 물으신다.
 
149
내가 별로 안접하실 곳이 없는 뜻을 말하였더니, 안 진사는 즉시 오일선에게 총 멘 군사 30명을 맡기며,
 
150
"오늘 안으로 텃골로 가서 김 석사 부모 양위를 뫼셔오되, 근동에 있는 우마를 징발하여 그 댁 가산 전부를 반이해 오렸다."
 
151
하고 영을 내렸다.
 
152
이리하여 우리 집이 청계동에 우접하게 되니, 내가 스무 살 되던 을미년 2월 일이었다.
 
153
내가 청계동에 머문 것은 불과 4,5 개월이었지만, 그 동안은 내게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것은 첫째로는 내가 안 진사와 같은 큰 인격에 접한 것이요, 둘째로는 고 산림과 같은 의기 있는 학자의 훈도를 받게 된 것이었다.
 
154
안 진사는 해주 부중에 10여 대나 살아오던 구가의 자제였다. 그 조부 인수가 진해 현감을 지내고는 세상이 차차 어지러워짐을 보고 세상에서 몸을 숨기고자 하여, 많은 재산을 가난한 일가에게 나누어주고 약 300석 추수하는 재산을 가지고 청계동으로 들어오니, 이는 산천이 수려하고 족히 피난처가 될 만한 것을 취함이었다. 이 때는 장손인 중근이 두 살 때였다. 안 진사는 과거를 하려고 서울 김종한의 문객이 되어 다년 유경하다가 진사가 되고는 벼슬할 뜻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형제 여섯 사람이 술과 시로 세월을 보내고, 뜻있는 벗을 사귀기로 낙을 삼고 있었다. 안씨 6형제가 다 문장재사라 할 만하지마는, 그 중에서도 셋째인 안 진사가 눈에 정기가 있어 사람을 누르는 힘이 있고, 기상이 뇌락하여, 비록 조정의 대관이라도 그와 면대하면 자연 경외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는 내가 보기에도 퍽 소탈하여서, 비록 무식한 하류들에게까지도 조금도 교만한 빛이 없이 친절하고 정녕하여서 상류나 하류나 다 그에게 호감을 가졌었다. 얼굴이 매우 청수하나 술이 과하여 코끝이 붉은 것이 흠이었다. 그는 율을 잘하여서 당시에도 그의 시가 많이 전송되었고, 내게도 그가 득의의 작을 흥 있게 읊어주는 일이 있었다. 그는 '황석공소서'를 자필로 써서 벽장문에 붙이고, 취흥이 나면 소리를 높여서 그것을 낭독하였다.
 
155
그때 안 진사의 맏아들 중근은 열세 살로, 상투를 짜고 있었는데, 머리를 자주색 수건으로 질끈 동이고 돔방총이라는 짧은 총을 메고 날마다 사냥을 일삼고 있어 보기에도 영기가 발발하고, 청계동 군사들 중에 사격술이 제일이어서 짐승이나 새나 그가 겨눈 것은 놓치는 일이 없기로 유명하였다. 그의 계부 태건과 언제나 함께 사냥을 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잡아오는 노루와 고라니로는 군사들을 먹이고, 또 진사 6형제의 주연의 안주를 삼았다. 진사의 둘째 아들 정근과 셋째 공근은 다 붉은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땋아 늘인 도련님들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진사는 이 두 아들에 대해서는 글을 읽지 않는다고 걱정도 하였으나 중근에 대해서는 아무 간섭도 아니하는 모양이었다.
 
156
고 산림의 이름은 능선인데, 그는 해주 서문 밖 비동에 세거하는 사람으로서, 중암 조중교의 문인이요, 의암 유인석과 동문으로서, 해서(海西:황해도 지역)에서는 행검으로 굴지되는 학자였다. 이 이도 안진사의 초청으로 이 청계동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157
내가 고 산림을 처음 대한 것은 안 진사의 사랑에서였다. 그런데 자기의 사랑에 놀러오라는 그의 말에 나는 크게 감복하여 이튿날 그의 집에 찾아갔다. 선생은 늙으신 낯에 기쁨을 띠시고 친절하게 나를 영접하시며 맏아들인 원명을 불러 나와 상면케 하였다. 원명은 나이 서른 살쯤 되어 보였는데 자품(資稟:사람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은 명민한 듯하나 크고 넓음이 그 부친의 뒤를 이을 것 같지는 아니하였다. 원명에게는 15, 6세나 된 맏딸이 있었다.
 
158
고 선생이 거처하시는 방은 작은 사랑이었는데, 방 안에는 책이 가득 쌓여있고, 네 벽에는 옛날에 이름난 사람들의 좌우명과 선생 자신의 심득 같은 것을 둘러 붙였으며, 선생은 가만히 꿇어앉아서 마음을 가다듬는 공부를 하시며 <손무자>, <삼략> 같은 병서도 읽으셨다.
 
159
고 선생은 나더러, 내가 매일 안 진사의 사랑에 가서 놀더라도 정신 수양에는 효과가 적을 듯하니, 매일 선생의 사랑에 와서 세상사도 말하고 학문도 토론함이 어떠냐고 하였다. 나는 이러한 대 선생이 나에게 대하여 이처럼 특별한 지우(知遇:학식이나 인격을 인정하여 잘 대우함)를 주시는 것을 눈물겹게 황송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나는 좋은 마음 가진 사람이 되려던 소원을 말씀드리고 모든 것을 고 선생의 지도에 맡긴다는 성의를 표하였다. 과거에 낙심하고 관상에 낙심하고 동학에 실패한,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리를 가지게 되었는데, 나 같은 것도 고 선생과 같으신 큰 학자의 지도로 한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있을까? 스스로 의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런 말씀을 아뢰었더니 고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160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남의 일을 어찌 알랴. 그러므로 내가 그대의 장래를 판단할 힘은 없으나, 내가 한 가지 그대에게 확실히 말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성현을 목표로 하고 성현의 자취를 밟으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힘써 가노라면 성현의 지경에 달하는 자도 있고, 못 미치는 자도 있거니와, 이왕 그대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될 뜻을 가졌으니 몇 번 길을 잘못 들더라도 본심만 변치 말고 고치고 또 고치고, 나아가고 또 나아가면 목적지에 달할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괴로워하지 말고 행하기만 힘쓰라."
 
161
이로부터 나는 매일 고 선생 사랑에 갔다. 선생은 내게 고금의 위인을 비평하여 주고, 당신이 연구하여 깨달은 바를 가르쳐주고, <화서아언>이며 <주자백선>에서 긴요한 절구를 보여주셨다. 선생이 특히 역설하시는 바는 의리에 관해서였다. 비록 뛰어난 재능이 있더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그 재능이 도리어 화단이 된다고 하셨다.
 
162
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치는 방법을 취하지 아니하고, 내 정신과 재질을 보셔서 뚫어진 곳은 깁고 빈 구석을 채워주는 구전심수의 첩경을 택하셨다. 선생은 나를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보셨음인지, 아무리 많이 알고 잘 판단하였더라도 실행할 과단력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고 말씀을 하시고,
 
163
'득수반지무족기 현애철수장부아(得樹攀枝無足奇 縣崖撤手丈夫兒:나뭇가지를 잡아도 발에는 힘주지 않고, 벼랑에 매달려도 손을 놓을 수 있는 것이 장부다)'
 
164
라는 글귀를 힘있게 설명하셨다.
 
165
가끔 안 진사가 고 선생을 찾아오셔서 두 분이 고금의 일을 강론하심을 옆에서 듣는 것은 참으로 비할 데 없이 재미있는 일이었다.
 
166
나는 가끔 고 선생 댁에서 놀다가 저녁밥을 선생과 같이 먹고, 밤이 깊어 인적이 고요할 때까지 국사를 논하는 일이 있었다.
 
167
고 선생은 이런 말씀도 하셨다.
 
168
"예로부터 천하에 흥하여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고, 망해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도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어느 나라 국민이 의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며, 그와는 반대로 백성이 여러 패로 갈라져 한 편은 이 나라에 붙고 한 편은 저 나라에 붙어서 외국에는 아첨하고 제 동포와는 싸워서 망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이다. 이제 왜의 세력이 전국에 충만하여 궐내에까지 침입하여서 대신도 적의 마음대로 내고 들이게 되었으니 우리나라가 제 2의 왜국이 아니고 무엇인가. 만고에 망하지 아니한 나라가 없고, 천하에 죽지 아니한 사람이 있던가.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일건사가 남아있을 뿐이다."
 
169
선생은 비감한 낯으로 나를 보시며 이 말씀을 하셨다. 나는 비분을 못 이겨 울었다.
 
170
망하는 우리나라를 망하지 않도록 붙들 도리는 없는가 하는 내 물음에 대해서 선생은 청국과 서로 맺는 것이 좋다고 하시고, 그 이유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171
"청국이 갑오년 싸움(청일전쟁, 1894년)에 진 원수를 반드시 갚으러 할 것이니, 우리 중에서 상당한 사람이 그 나라에 가서 그 국정도 조사하고 그 나라 인물과도 교의를 맺어두었다가 후일에 기회가 오거든 서로 응할 준비를 하여두는 것이 필요하다."
 
172
나는 선생의 이 말씀에 감동하여 청국으로 갈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나와 같이 어린 것이 한 사람 간다고 해서 무슨 일이 되랴 하는 뜻을 말씀드린즉 선생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책망하시고, 누구나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혼자만이라도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니, 저마다 남이 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저마다 제 일을 하면 자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라, 어떤 사람은 정계에, 또 어떤 사람은 학계나 상계에, 이처럼 자기가 합당한 방면으로 활동하여서 그 결과가 모이면 큰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셨다.
 
173
이 말씀에 나는 청국으로 떠날 결심을 하고, 그 뜻을 고 선생께 아뢰었다. 선생은 크게 기뻐하셔서 내가 떠난 뒤에는 내 부모까지 염려 마라 하셨다.
 
174
나는 의리로 보아 이 뜻을 안 진사에게 통함이 옳을까 하였으나, 고 선생은 이에 반대하셨다. 안 진사가 천주학을 믿을 의향이 있는 모양인데, 만일 그렇다면 이는 양이를 의뢰하려 함이니 대의에 어긋나는 일인즉 지금 이런 큰일을 의논할 수 없다. 그러나 안 진사는 확실한 인재니, 내가 청국을 유력(遊歷:여러 고장을 돌아다님)한 뒤에 좋은 일이 있을 때에 서로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아니하니, 이번에는 말없이 떠나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엇이나 고 선생의 지시대로 하기로 결심하고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하였다.
 
 

1.3. 기구한 젊은 때

 
176
내가 청국을 향하여 방랑의 길을 떠나기로 작정한 바로 전날, 나는 넌지시 안 진사를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속으로만이라도 하직하는 정을 표현하려고 안 진사 댁 사랑에 갔다가 참빗장수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언어동작이 아무리 보아도 예사 사람이 아닌 듯하여 인사를 청한즉 그는 전라도 남원 귓골 사는 김형진이란 사람이요, 나와 같은 안동 김씨요, 연치는 나보다 8,9 세 위였다. 나는 참빗을 사겠노라고 그를 내 집으로 데리고 와서 하룻밤을 같이 자면서 그의 인물을 떠보았다. 과연 그는 보통 참빗장수가 아니요, 안 진사가 당시에 대문장, 대영웅이라는 말을 듣고 한 번 찾아 보러 일부러 떠나온 것이라고 한다. 인격이 그리 뛰어나거나 학식이 도저한 인물은 못 되나 시국에 대하여서 불평을 품고 무슨 일이나 하여보자는 결심은 있어 보였다. 이튿날 그를 데리고 고 선생을 찾아 선생에게 인물 감정을 청하였더니, 선생은 그가 비록 주뇌가 될 인물은 못 되나 남을 도와서 일할 만한 소질은 있어 보인다는 판단을 내리셨다. 이에 나는 김씨를 내 길동무 삼기로 하고, 집에서 먹이던 말 한 필을 팔아 여비를 만들어 청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177
우리는 백두산을 보고 동삼성(만주)을 돌아서 북경으로 가기로 하였다. 평양까지는 예사대로 가서, 거기서부터는 나도 김형진 모양으로 참빗과 황화장수(행상)를 하기로 하고, 참빗과 붓, 먹과 기타 산읍에서 팔릴 만한 물건을 사서 둘이서 한 짐씩 걸머졌다. 그리고 평양을 떠나서 을밀대와 모란봉을 잠시 구경하고 강동, 양덕, 맹산을 거쳐 함경도로 넘어서서 고원, 정평을 지나 함흥 감영에 도착하였다. 강동 어느 장거리에서 하룻밤을 자다가 칠십 늙은이 주정뱅이한테 까닭 모를 매를 얻어맞고 한신이 회음에서 어떤 젊은 놈에게 봉변당하던 것을 이야기하고 웃은 일이 있었다. 고원 함관령에서 이 태조(조선 태조)가 말갈을 쳐 물리친 승전비를 보고, 함흥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길다는 남대천 나무다리와 네 가지 큰 것 중에 하나라는 장승을 보았다. 이 장승은 큰 나무에 사람의 얼굴을 새긴 것인데, 머리에는 사모를 쓰고 얼굴에는 주홍칠을 하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이 매우 위엄이 있었다. 장승은 2개씩 남대천 다리 머리에 갈라 서있었다.
 
178
옛날에 장승은 큰 길목에는 어디나 서있었으나 함흥의 장승이 그 중 가장 크기로 유명하여서 경주의 인경과 은진의 돌미륵과 연산의 쇠가마와 함께 사대물이라고 꼽히던 것이었다.
 
179
함흥의 낙민루는 이 태조가 세운 것으로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180
흥원, 신포에서는 명태잡이 하는 것을 보고, 어떤 튼튼한 아낙네가 광주리에 꽃게 한 마리를 담아서 힘껏 이고 가는데, 게의 다리가 모두 내 팔뚝보다도 굵은 것을 보고 놀랐다.
 
181
함경도에 들어서서 가장 감복한 것은 교육제도가 황해도나 평안도보다 발달된 것이었다. 아무리 초가집만 있는 가난한 동네에도 서재와 도청은 기와집이었다. 흥원 지경 어느 서재에는 선생이 세 사람이 있어 학과를 고등, 중등, 초등으로 나눠서 각각 한 반씩 담당하며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옛날 서당으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서당 대청 좌우에는 북과 종을 달고 북을 치면 글 읽기를 시작하고, 종을 치면 쉬었다. 더구나 북청은 함경도 중에서도 글을 숭상하는 고을이어서 내가 그곳을 지날 때에도 살아있는 진사가 30여 명이요, 대과에 급제한 조관이 일곱이나 있었다. 과연 문향이라고 나는 크게 탄복하였다.
 
182
도청이라는 것은 동네에서 공용으로 쓰는 집이다. 여염집보다 크기도 하고 화려하기도 하다. 사람들은 밤이면 여기 모여서 동네 일을 의논도 하고, 새끼 꼬기, 신 삼기도 하고, 이야기도 듣고, 놀기도 하고, 또 동네 안에 뉘 집에나 손님이 오면 집에서 식사만 대접하고 잠은 도청에서 자게 하니, 이를테면 공동 사랑이요, 여관이요, 공회당이다. 만일 돈 없는 나그네가 오면 도청 예산 중에서 식사를 공궤하기로 되어 있다. 모두 본받을 미풍이라고 생각하였다.
 
183
우리가 단천 마운령을 넘어서 갑산읍에 도착한 것이 을미년 7월이었다. 여기 와서 놀란 것은 기와를 인 관청을 제외하고는 집집마다 지붕에 풀이 무성하여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빈 터와 같았다. 그러나 뒤에 알고 보니 이것은 지붕을 덮은 봇껍질을 흙덩이로 눌러놓으면 거기에서 풀이 무성하게 자라 아무리 악수가 퍼부어도 흙이 씻기지 아니한다고 한다.
 
184
봇껍질은 희고 빤빤하고 단단하여서 기와보다도 오래간다 하며, 사람이 죽어 봇껍질로 싸서 묻으면 1만년이 가도 해골이 흩어지는 일이 없다고 한다.
 
185
혜산진에 이르니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만주를 바라보는 곳이라 건너편 중국 사람의 집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서는 압록강도 걸어서 건널 만하였다.
 
186
혜산진에 있는 제천당은 우리나라 산맥의 조종이 되는 백두산 밑에 있어 예로부터 나라에서 제관을 보내어 하늘과 백두산 신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그 주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187
'유월설색산백두이운무 만고유성수압록이흉용(六月雪色山白頭而雲霧 萬古流聲水鴨綠而洶湧:눈 쌓인 6월의 백두산에 운무가 감돌고 만고에 끊이지 않고 흐르는 압록강이 용솟음친다)'
 
188
우리는 백두산 가는 길을 물어가면서 서대령을 넘어 삼주, 장진, 후창을 거쳐 자성의 중강을 건너서 중국 땅인 마울산에 다다랐다.
 
189
지나온 길은 무비 험산준령이요, 어떤 곳은 7, 80 리나 무인지경도 있어서 밥을 싸가지고 간 적도 있었다. 산은 심히 험하나 맹수는 별로 없었고, 수풀이 깊어서 지척을 분별치 못할 때가 많았다. 나무는 하나를 벤 그루터기 위에 7, 8 명이 모여 앉아서 밥을 먹을 만한 것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내가 본 것 중에도 통나무로 곡식 넣는 통을 파느라고 장정 하나가 그 통 속에 들어서서 도끼질을 하는 것이 있었다. 장관인 것은 이 산봉우리에 섰던 나무가 쓰러져서 저 산봉우리에 걸쳐 있는 것을 우리가 다리 삼아서 건너간 일이었다.
 
190
이 지경은 인심이 대단히 순후하고, 먹을 것도 넉넉하여서 나그네가 오면 극히 반가워하여 얼마든지 묵게 한 뒤에 보냈다. 곡식은 대개 귀밀과 감자요, 산의 개천에는 이면수라는 물고기가 많이 나는데 대단히 맛이 좋았다. 옷감으로 짐승의 가죽을 쓰는 것이 퍽이나 원시적이었다. 삼수 읍내에는 민가가 겨우 30호 밖에 없었다.
 
191
마울산에서 서북으로 노인치라는 영(嶺)을 넘고 또 넘어 서대령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100리에 두어 사람 정도 우리 동포를 만났는데, 대부분 금점꾼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더러 백두산 가는 것이 향마적 때문에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하므로 우리는 유감이나마 백두산 참배를 중지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방향을 돌려 만주 구경이나 하리라 하고 통화로 갔다.
 
192
통화는 압록강 연변의 다른 현성과 마찬가지로 설립된 지 얼마 아니 되어서 관사와 성루의 서까래가 아직도 흰빛을 잃지 아니하였다. 성내에 인가가 모두 500호라는데, 그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의 집도 하나 있었다. 남자는 변발을 하여서 중국 사람의 모양을 하고 현청에 통사로 있다는데, 그의 처자들은 우리의 옷을 입고 있었다. 거기서 10리쯤 가서 심 생원이라는 동포가 산다 하기로 찾아갔더니 정신없이 아편만 먹는 사람이었다.
 
193
만주로 돌아다니는 중에 가장 미운 것은 호통사였다. 몇 마디 한어를 배워가지고는 불쌍한 동포의 등을 긁어 피를 빨아먹는 것이었다. 우리 동포들은 갑오년 난리를 피하여 생소한 이 땅에 건너와서 중국 사람이 살 수가 없어서 내버린 험한 산골을 택하여 화전을 일구어서 조나 강냉이를 지어 근근이 연명하고 있었다. 호통사라는 놈들은 중국 사람들에게 붙어서 무리한 핑계를 만들어가지고 혹은 동포의 전곡을 빼앗고, 혹은 부녀의 정조를 유린하는 것이었다. 어떤 곳에를 가노라니 중국인의 집에 한복을 입은 처녀가 있기에 이웃사람에게 물어본즉 그 역시 호통사의 농간으로 그 부모의 빚값으로 중국인의 집에 끌려온 것이라고 하였다. 관전, 임강, 환인, 어디를 가도 호통사의 폐해는 마찬가지였다.
 
194
어디나 토지는 비옥하여서 한 사람이 지으면 열 사람이 먹을 만하였다. 오직 귀한 것은 소금이어서, 이것은 의주에서 물을 거슬러 올라와 사람의 등으로 져 나르는 것이라 한다. 동포들의 인심은 참으로 순후하여, 본국 사람이 오면 '앞대 나그네'가 왔다 하여 혈속과 같이 반가워하고, 집집이 다투어서 맛있는 것을 대접하려고 애를 쓰고, 남녀노소가 모여와서 본국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다. 대부분이 청일 전쟁 때 피난 간 사람들이지만 간혹 본국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 온 사람이 있었다. 그 중에는 민요에 장두가 되었던(민란을 주도했던) 호걸도 있고, 공금을 포흠한 관속도 있었다.
 
195
집안의 광개토왕비는 아직 몰랐던 때라 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거니와, 관전의 임경업 장군의 비각을 본 것이 기뻤다.
 
196
'삼국충신임경업지비(三國忠臣林慶業之碑)'라고 비면에 새겨 있는데, 이 지방 중국 사람들은 병이 나면 이 비각에 제사를 드리는 풍속이 있다고 한다.
 
197
이 지방으로 방랑하는 동안에 김이언이란 사람이 청국의 도움을 받아서 일본에 반항할 의병을 꾸미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이언은 벽동 사람으로서, 기운이 있고 글도 잘하여 심양자사에게 말 한 필과 <삼국지> 한 질을 상으로 받았기 때문에 중국 사람 장령들에게도 대접을 받는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을 찾아보기로 작정하고, 먼저 그 인물이 참으로 지사인가, 협잡꾼인가 아닌가를 염탐하기 위하여 김형진을 먼저 떠나보내고 나는 다른 길로 수소문을 하면서 따라가기로 하였다.
 
198
하루는 압록강을 거의 100리나 격한 노중에서 궁둥이에 관인을 찍은 말을 타고 오는 젊은 청국 장교 한 사람을 만났다. 그의 머리에 쓴 마라기(청국 군인의 모자)에는 옥로가 빛나고 붉은 솔이 너풀거렸다. 나는 덮어놓고 그의 말머리를 잡았다. 그는 말에서 내렸다. 나는 중국말을 몰랐으므로 내가 여행하는 취지를 적은 글을 만들어서 품에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을 그 장교에게 내어 보였다. 그는 내가 주는 글을 받아 읽더니 다 읽기도 전에 소리를 내어 울었다. 내가 놀라서 그가 우는 까닭을 물으니 그는 내 글 중에,
 
199
'통피왜적여아불공대천지수(痛彼倭敵與我不共戴天之讐:왜적과는 더불어 평생을 같이 살 수 없는 철천지 원수로다)'
 
200
라는 구절을 가리키며 다시 나를 잡고 울었다. 내가 필담을 하기 위해 필통을 꺼냈더니, 그가 먼저 붓을 들어 왜가 어찌하여 그대의 원수냐고 도리어 내게 묻는다. 나는 일본이 임진으로부터 세세에 걸쳐 원수일 뿐만 아니라, 지난달에 왜가 우리 국모를 불살라 죽였다고 쓰고, 다음에 그대야말로 무슨 연유로 내 글을 보고 이토록 통곡하는가 하고 물었다. 그의 대답을 듣건대, 그는 작년 평양 싸움에서 전사한 장수, 서옥생의 아들로서, 강계 관찰사에게 그 부친의 시체를 찾아주기를 청하였던 바, 찾았다 하기로 가본즉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시체가 아니므로 허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나는 평양 보통문 밖에 '서옥생전사지지'라는 목패를 보았다는 말을 하였다. 그의 집은 금주요, 집에는 15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아버지 옥생이 그 중에서 1000명을 데리고 출정하여서 전멸하였고 지금 집에는 500명이 남아 있으며, 재산은 넉넉하고, 자기의 나이는 서른 살이요, 아내는 몇 살이며, 아들이 몇, 딸이 몇이라고 자세히 가르쳐준 뒤에 내 나이를 물어, 내가 그보다 연하인 것을 알고는 그는 나를 아우라고 부를 터이니 그를 형이라고 부르라 하여 피차에 형제의 의를 맺기로 청하고, 서로 같은 원수를 가졌으니 함께 살면서 시기를 기다리자 하여 나더러 그와 같이 금주로 가기를 청하고,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내 등에 진 짐을 벗겨 말에 달아매고 나를 붙들어 말안장에 올려놓고 자기는 걸어서 뒤를 따랐다.
 
201
나는 얼마를 가며 곰곰이 생각하였다. 기회는 썩 좋은 기회였다. 내가 원래 이 길을 떠난 것은 중국의 인사들과 교의를 맺자는 것이었으니, 이제 서씨와 같은 명가와 인연을 맺은 것은 고소원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김형진에게 알릴 길이 없는 것이었다. 만일 김형진만 같이 있었던들 나는 이때에 서를 따라갔을 것이다.
 
202
나는 근 1년이나 집을 떠나 있어 부모님 안부도 모르고, 또 서울 형편도 못 들었으니, 이 길로 본국에 돌아가 근친도 하고, 나라 일이 되어가는 양도 알아본 뒤에 금주로 형을 따라갈 것을 말하고 결연하게 그와 서로 작별하였다.
 
203
나는 참빗장수의 행세로 이집 저집에서 김이언의 일을 물어가며 서와 작별한 지 5, 6일 만에 김이언의 근거지 삼도구에 다다랐다.
 
204
김이언은 당년 50여 세에, 심양에서 500근 되는 대포를 앉아서 두 손으로 들었다 놓았다 할 만큼 기운이 있는 사람이었다. 보기에 용기가 부족한 것 같고, 또 자신이 과하여 남의 의사를 용납하는 도량이 없는 것 같았다. 도리어 그의 동지인, 초산에서 이방을 지냈다는 김규현이란 사람이 의리도 있고 책략도 있어 보였다.
 
205
김이언은 자기가 창의의 수령이 되어서 초산, 강계, 위원, 벽동 등지의 포수와, 강 건너 중국 땅에 사는 동포 중에 사냥총이 있는 사람을 모집하여서 약 300명가량 무장한 군사를 두고 있었다. 창의의 명의로는 국모가 왜적의 손에 죽었으니 국민 전체의 욕이라 참을 수 없다는 것이요, 이 뜻으로 글 잘하는 김규현의 붓으로 격문을 지어서 사방에 산포하였다. 나와 김형진 두 사람도 참가하기로 하여 나는 초산, 위원 등지에 숨어 다니며 포수를 모으는 일과 강계 성중에 들어가서 화약을 사오는 일을 맡았다. 거사할 시기는 을미년 동짓달 초생, 압록강이 얼어붙을 때로 하였다. 군사를 얼음 위로 몰아서 강계성을 점령하자는 것이었다.
 
206
나는 위원에서 내가 맡은 일을 끝내고 책원지인 삼도구로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을 건너다가 엷은 얼음을 밟아서 두 팔만 얼음 위에 남고 몸이 온통 강 속으로 빠져버렸다. 나는 솟아오를 길이 없어서 목청껏 사람 살리라고 소리 지를 뿐이었다. 내 소리를 들은 동민들이 나와서 나를 얼음 구멍에서 꺼내어 인가로 데리고 갔을 때에 내 의복은 벌써 딱딱한 얼음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207
마침내 강계성을 습격할 날이 왔다. 우선 고산리를 쳐 거기 있는 무기를 빼앗아서 무기 없는 군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이 첫 실책이었다. 나는 고산리를 먼저 치지 말고 곧장 강계성을 엄습하자고 주장하였다. 우리가 고산리를 쳤다는 소문이 들어가면 강계성의 수비가 더욱 엄중할 것이니, 고산리에서 약간의 무기를 더 얻는 것보다는 출기부의(出其不意)로 강계를 덮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김규현, 백 진사 등 참모도 내 의견에 찬성하였으나 김이언은 종시 제 고집을 세우고 듣지 아니하였다.
 
208
고산전에서 무기를 빼앗은 우리 군사는 이튿날 강계로 진군하여 야반에 독로강 빙판으로 전군을 몰아 선두가 인풍루에서 10 리쯤 되는 곳에 다다랐을 때에 강남 쪽 송림 속에서 화승불이 번쩍번쩍하는 것이 보였다. 그때에는 모두 화승총이었으므로 군사는 불붙은 화승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송림 속으로부터 강계대 장교 몇 명이 나와 김이언을 찾아보고 첫말로 묻는 말이, 이번에 오는 군사 중에 청병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김이언은 이에 대하여 이번에는 청병은 아니 왔다, 그러나 우리가 강계를 점령하였다고 기별하는 대로 오기로 하였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정직한 말일는지는 모르거니와 전략적인 대답은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우리 중에 몇 사람이 청국 장교로 차리고 선두에 설 것을 주장하였으나, 김이언은 우리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는 이 싸움에 청병의 위력을 가장하는 것은 옳지 아니하니, 강계성 점령은 당당하게 흰 옷을 입은 우리가 할 것이요, 또 강계대의 장교도 이미 내응할 약속이 있으니 염려 없다고 고집하였다.
 
209
나는 이에 대하여 강계대의 장교라는 것이 애국심으로 움직이기보다도 세력에 쏠릴 것이라 하여 청국 장교로 가장하는 것이 전략상 극히 필요하다고 하였으나, 김이언은 끝까지 듣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랬던 차에 이제 강계대 장교가 머리를 흔들고 돌아가는 것을 보니 나는 벌써 대세가 틀렸다고 생각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장교들이 그들의 진지로 돌아갈 때쯤 하여 화승불들이 일제히 움직이더니 탕탕 하고 포성이 진동하고 탄알이 빗발같이 이리로 날아왔다. 잔뜩 믿고 마음을 놓고 있던 이 편의 1000여 명 군마는 얼음판 위에서 대혼란을 일으켜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달아나기를 시작하고, 벌써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자,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고 우는 자가 여기저기 있었다.
 
210
나는 일이 다 틀렸음을 알고, 또 김이언으로 보면 이번에 여기서 패하고는 다시 회복 못할 것으로 보고 김형진과 함께 슬며서 떨어져서 몸을 피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군사들이 달아나는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도리어 강계성에 가까운 쪽으로 피하였다. 인풍루 바로 밑의 동네로 갔더니 어느 집에도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그 중에 가장 큰 집으로 갔다. 밖에서 불러도 대답이 없고 안에 들어가도 사람은 없는데, 빈 집에 큰 제상이 놓이고, 그 위에는 갖은 음식이 벌여져 있고, 상 밑에는 술병이 있었다. 우리는 우선 술과 안주를 한바탕 배불리 먹었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그 아버지 대상제를 지내다가 총소리에 놀라서 식구들과 손님들이 모두 산으로 피난하였던 것이라 한다.
 
211
우리는 이튿날 강계를 떠나 되넘이 고개를 넘어 수일 만에 신천으로 돌아왔다. 청계동으로 가는 길에 나는 호열자로 하여서 고 선생의 맏아들 원명의 부처가 구몰하였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나는 집에도 가기 전에 먼저 고 선생 댁을 찾았더니, 선생은 도리어 태연자약하셨다. 나는 어색하여 말문이 막혔다. 내가 부모님 계신 집으로 가려고 하직을 할 때에 고 선생은 뜻 모를 말씀을 하셨다.
 
212
"곧 성례를 하게 하자."
 
213
하시는 것이었다. 집에 와서 부모님의 말씀을 듣잡고 비로소 내가 없는 동안에 고 선생의 손녀, 즉 원명의 딸과 나와 약혼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부모님은 번을 갈아서 약혼이 되던 경로를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은 이러하였다.
 
214
하루는 고 선생이 집에 찾아오셔서 아버지를 보시고 요새는 아들도 없고 고적할 터이니 선생의 사랑에 오셔서 담화나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아버지께서 고 선생 댁 사랑에를 가셨더니 고 선생은 아버지께 내가 어려서 자라던 일을 물으셨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어려서 공부를 열심히 하던 일, 해주에 과거보러 갔다가 비관하고 돌아오던 일, 상서를 보고는 제 상이 좋지 못하였다고 낙심하던 일, 상이 좋지 못하니 마음이나 좋은 사람이 된다고 동학에 들어가 도를 닦던 일, 이웃 동네에 사는 강씨와 이씨는 조상의 뼈를 파는 죽은 양반이지마는 저는 마음을 닦고 몸으로 행하여 산 양반이 되겠다던 일 등을 말씀하셨다.
 
215
또한 어머님의 말씀은, 내가 어렸을 때 강령에서 살 적에 칼을 가지고 그 집 식구를 모두 찔러 죽인다고 신풍 이 생원 집에 갔다가 칼을 빼앗기고 매만 맞고 돌아왔다는 것, 돈 스무 냥을 허리에 두르고 떡을 사먹으러 가다가 아버지께 되게 매를 맞은 것, 푸른 물감을 온통 꺼내다가 개천에 풀어놓은 것을 보고 어머니가 단단히 때려주셨다는 것 같은 것 등이었다.
 
216
이랬더니 하루는 고 선생이 아버지께, 나와 고 선생의 장손녀와 혼인하면 어떠냐고 말을 내시고, 아버지께서는 문벌로 보나, 덕행으로 보나, 또 내 외모로 보나 어찌 감히 선생의 가문을 욕되게 하랴 하여 사양하셨다. 그런즉 고 선생은 아버지를 보시고 내가 못생긴 것을 한탄 말라고, 창수는 범의 상이니 장차 범의 냄새를 피우고 범의 소리를 내어 천하를 놀라게 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리하여서 내 약혼이 된 것이었다.
 
217
나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고 선생께서 나 같은 것을 그처럼 촉망하셔서 사랑하시는 손녀를 허하심에 대하여 큰 책임을 감당키 어렵게 생각하였다. 더구나 선생께서,
 
218
"나도 맏아들 부처가 다 죽었으니 앞으로는 창수에게 의탁하려오."
 
219
하셨다는 것과 또,
 
220
"내가 청계동에 와서 청년을 많이 대하여보았으나 창수만한 남아는 없었소."
 
221
하셨다는 말씀을 듣자올 때에는 더욱 몸 둘 곳이 없었다. 그 규수로 보더라도 그 얼굴이나 마음이나 가졍교훈을 받은 점으로나 나는 만족하였다.
 
222
이 약혼에 대하여 부모님이 기뻐하심은 말할 것도 없었다. 외아들을 장가들인다는 것만도 기쁜 일이거늘, 하물며 이름 높은 학자요, 양반의 집과 혼인을 하게 된 것을 더욱 영광으로 생각하시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비록 없는 살림이라도 혼인 준비에 두 집이 다 바빴다.
 
223
아직 성례 전이지마는 고 선생 댁에서는 나를 사위로 보는 모양이어서, 혹시 선생 댁에서 저녁을 먹게 되면 그 처녀가 상을 들고 나오고, 6, 7세 되는 그의 어린 동생은 나를 아재라고까지 부르고 반가워하였다. 이를테면 내 장인 장모인 원명 부처의 장례도 내가 조력하여서 지냈다.
 
224
나는 선생께 이번 여행에서 본 바를 보고하였다. 두만강, 압록강 건너편의 땅이 비옥하고, 또 지세도 요새로 되어 있어 족히 동포를 이식하고 양병도 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곳 인심이 순후한 것이며, 또 서옥생의 아들과 결의(結義)형제가 되었다는 것 등을 낱낱이 아뢰었다.
 
225
때는 마침 김홍집 일파가 일본의 후원으로 우리나라 정권을 잡아서 신장정이라는 법령을 발하여 급진적으로 모든 제도를 개혁하던 무렵으로서, 그 새 법의 하나로 나온 것이 단발령이었다. 대군주 폐하라고 부르는 상감께서 먼저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으시고는 관리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깎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 단발령이 팔도에 내렸으나 백성들이 응종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서울을 비롯하여 감영, 병영 같은 큰 도회지에서는 목목이 군사가 지켜져서 행인을 막 붙잡고 상투를 잘랐다. 이것을 늑삭(억지로 깎는다는 뜻)이라 하여 늑삭을 당한 사람은 큰일이나 난 것처럼 통곡을 하였다. 이 단발령은 크게 민원을 일으켜서 어떤 선비는 도끼를 메고,
 
226
"이 목을 자를지언정 이 머리는 깎지 못하리라"
 
227
하는 뜻으로 상소를 올렸다. '차라리 지하에 목 없는 귀신이 될지언정, 살아서 머리 깎은 사람은 아니 되리라'는 글이 마치 격서 모양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파하여서 민심을 선동하였다.
 
228
이처럼 단발을 싫어하고 반대하는 이유가 다만 유교의 '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孝之始也:내 온몸을 부모로부터 받았으니 감히 이를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에서 나온 것만이 아니요, 이것은 일본이 시키는 것이라는 반감에서 온 것이었다.
 
229
군대와 경찰관은 이미 단발이 끝나고 문관도 공리에 이르기까지 실시하는 중이었다.
 
230
나는 고 선생께 안 진사와 상의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진언하였다. 이를테면 단발 반대의 의병이었고, 단발 반대를 곧 일본 배척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231
회의는 열렸으나 안 진사의 뜻은 우리와 달랐다. 이길 가망이 없는 일을 일으킨다면 실패할 것밖에 없으니 천주교나 믿고 있다가 시기를 보아서 일어나자는 것이 안 진사의 의사였다. 그는 머리를 깎이게 된다면 깎아도 좋다고까지 말하였다.
 
232
안 진사의 말에 고 선생은 두말하지 않고,
 
233
"진사, 오늘부터 자네와 끊네."
 
234
하고 자리를 차고 일어나 나갔다. 끊는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선비가 절교를 선언하는 말이다.
 
235
이 광경을 보고 나도 안 진사에 대하여 섭섭한 마음이 났다. 안 진사 같은 인격으로서, 되었거나 못 되었거나 제 나라에서 일어난 동학은 목숨을 내어놓고 토벌까지 하면서 서양 오랑캐의 천주학을 한다는 것은 괴이한 일이거니와, 그는 그렇다 하더라도 목을 잘릴지언정 머리를 깎지 못하겠다는 생각은커녕 단발할 생각까지 가졌다는 것은 대의에 어긋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236
안 진사의 태도에 실망한 고 선생과 나는 얼른 내 혼인이나 하고 청계동을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나는 금주 서옥생의 아들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237
그런데 천만 염외에 불행한 일이 또 하나 생겼다. 어느 날 아침 일찍이 고 선생이 나를 찾아오셔서 대단히 낙심한 얼굴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
 
238
"어제 내가 사랑에 앉았노라니 웬 김가라는 자가 찾아와서 '당신이 고 아무개요?' 하기로 그렇다 한즉, 그 자가 내 앞에 다가와 칼을 내어놓으며 하는 말이, '들으니 당신이 손녀를 김창수에게 허혼을 하였다 하니, 그러면 첩으로 준다면 모르되 정실로는 아니 되리다. 김창수는 벌써 내 딸과 약혼한 지가 오래요.' 그러기로 나는, '김창수가 정혼한 데가 없는 줄 알고 내 손녀를 허한 것이지, 만일 약혼한 데가 있다면야 그러할 리가 있는가. 내가 김창수를 만나서 해결할 터이니 돌아가라'고 해서 돌려보내기는 했으나 내 집안에서는 모두 큰 소동이 났네."
 
239
나는 이 말을 듣고 모든 일이 재미없이 된 줄을 알았다. 그래서 선생께 뚝 잘라 이렇게 여쭈었다.
 
240
"제가 선생님을 사모하옵기는 높으신 가르침을 받잡고지 함이옵지 손서가 되는 것이 본의는 아니오니 혼인하고 못 하는 것에 무슨 큰 상관이 있사오리까. 저는 혼인은 단념하고 사제의 의리로만 평생에 선생님을 받들겠습니다."
 
241
내 말을 듣고 고 선생은 눈물을 흘리시고, 나를 얻어 손서를 삼으려다가 이 괴변이 났다는 것을 자탄하시고, 끝으로,
 
242
"그렇다면 혼인 일사는 갱무거론일세. 그런데 지금 관리의 단발이 끝나고는 백성에게도 단발을 실시할 모양이니 시급히 피신하여 단발화를 면하게. 나는 단발화가 미치면 죽기로 작정했네."
 
243
하셨다.
 
244
나는 마음을 지어먹고 고 선생의 손녀와 혼인을 아니 하여도 좋다고 장담은 하였으나 내심으로는 여간 섭섭하지 아니하였다. 나는 그 처녀를 깊이 사랑하고 정이 들었던 것이었다.
 
245
이 혼사에 훼사를 놓은 김가라는 사람은 함경도 정평에 본적을 둔 김치경이다. 10여 년 전에 아버지께서 술집에서 그를 만나 술을 같이 자시다가 김에게 8, 9세 되는 딸이 있단 말을 들으시고 취담으로, "내 아들과 혼사하자"하여 서로 언약을 하고, 그 후에 아버지는 그 언약을 지키셔서 내 사주도 보내시고 또 그 계집애를 가끔 우리 집에 데려다 두기도 하셨는데, 서당 동무들이 '함지박장수 사위'라고 나를 놀리는 것도 싫었고, 또 한 번은 얼음판에 핑구를 돌리고 있는데 그 계집애가 따라와서 제게도 핑구를 하나 만들어달라고 나를 조르는 것이 싫고 미워서,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떼를 써서 그 애를 제 집으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그러나 약혼을 깨뜨린 것은 아니었다.
 
246
그 후 여러 해를 지내어서 갑오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아들딸을 혼인이나 시켜야 한다고 어린 것들까지도 부랴부랴 성례를 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그때 동학 접주로 동분서주하던 내가 하루는 여행을 하고 돌아오니 집에서는 그 여자와 나와 성례를 한다고 술과 떡을 마련하고 모든 혼구를 다 차려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사코 싫다고 버티어서 마침내 김치경도 도리어 무방하게 생각하여 아주 이 혼인은 파혼이 되고, 김은 그 딸을 돈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정혼까지 한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고씨 집에 장가든다는 소문을 듣고 김은 돈이라도 좀 얻어먹을 양으로 고 선생 댁에 와서 야료를 한 것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크게 분노하여 김치경을 찾아가서 김과 한바탕 싸우셨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서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이리하여 내 혼인 문제는 불행한 끝을 맺고, 고 선생도 청계동에 더 계실 뜻이 없어 해주 비동의 고향으로 돌아가시고, 나는 금주 서씨의 집으로 가느라고 역시 청계동을 떠났다. 이리하여서 내 방랑의 길은 다시 계속되었다.
 
247
평양 감영에 다다르니 관찰사 이하로 관리 전부가 벌써 단발을 하였고, 이제는 길목을 막고 행인을 막 붙들어서 상투를 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머리를 아니 깎이려고 슬몃슬몃 평양을 빠져나와 촌으로 산읍으로 피난을 가고, 백성이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찼다. 이것을 보고 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하여서라도 왜의 손에 노는 이 나쁜 정부를 들어 엎어야 한다고 주먹을 불끈불끈 쥐었다.
 
248
안주 병영에 도착하니 게시판에 단발을 정지하라는 영이 붙어있었다. 임금은 개혁파가 싫어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하시고, 수구파들은 러시아 세력에 등을 대고 총리대신 김홍집을 때려죽이고, 개혁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려놓은 것이었다. 이로부터 우리나라에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다툼이 시작되고, 친아파와 친일파의 갈등이 벌어지게 되었다.
 
249
나는 한성 정국의 변동으로 심기가 일전하였다. 구태여 외국으로 갈 것이 무엇이냐, 삼남에서는 곳곳에 의병이 일어난다고 하니 본국에 머물러 시세를 관망하여서 새로 거취를 정하기로 하고, 길을 돌려 용강을 거쳐서 안악으로 가기로 하였다.
 
250
나는 치하포 나룻배에 올랐다. 때는 병신년 2월 하순이라, 대동강 하류인 이 물길에는 얼음산이 수없이 흘러내렸다. 남녀 15, 6명을 태운 우리 나룻배는 얼음산에 싸여서 행동의 자유를 잃고 진남포 아래까지 밀려 내려갔다가 조수를 따라서 다시 상류로 오르락내리락하게 되었다. 선객은 말할 것도 없고 선부들까지도 이제는 죽었다고 울고불고하였다. 해마다 이 때 이 길목에서는 이런 참변이 생기는 일이 많았는데, 우리가 지금 그것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배에는 양식이 없으니 비록 파선하기를 면하더라도 사람들이 얼어 죽거나 굶어죽을 것이다.
 
251
다행히 나귀 한 마리가 있으니 이 모양으로 여러 날이 가게 될 경우에는 잔인하나마 잡아먹기로 하고, 한갓 울고만 있어도 쓸데없으니 선객들도 선부들과 함께 힘을 써보자고 내가 발론하였다. 여럿이 힘을 합하여서 얼음산을 떠밀어 보자는 것이다.
 
252
나는 몸을 날려 성큼 얼음산에 뛰어 올라서 형세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큰 산을 의지하여 작은 산을 떠밀고, 이러한 방법을 반복하여서 간신히 한 줄기 살 길을 찾았다. 이리하여 치하포에서 5리쯤 떨어진 강 언덕에 내리니, 강 건너 서쪽 산에 지는 달이 아직 빛을 남기고 있었다. 찬바람 속에 밤길을 걸어서 치하포 배 주인 집에 드니 풍랑으로 뱃길이 막혀서 묵는 손님이 삼간방에 가득히 누워서 코를 골고 있었다.
 
253
우리 일행도 그 틈에 끼어 막 잠이 들려 할 즈음에 벌써 먼저 들었던 사람들이 일어나서 오늘 일기가 좋으니 새벽물에 배를 건너게 해달라고 야단들이다. 이윽고 아랫방에서부터 벌써 밥상이 들기 시작하였다.
 
254
나도 할 수 없이 일어나 앉아서 내 상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방 안을 휘 둘러보았다. 가운뎃방에 단발한 사람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가 어떤 행객과 인사하는 것을 들으니 그의 성은 정씨요, 장연에 산다고 한다. 장연에서는 일찍 단발령이 실시되어서 민간인들도 머리를 깎은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 말씨가 장연 사투리가 아니요, 서울말이었다. 조선말이 썩 능숙하지마는 내 눈에는 분명 왜놈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의 흰 두루마기 밑으로 군도집이 보였다. 어디로 가느냐 한즉 그는 진남포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보통으로 장사나 공업을 하는 일인 같으면 이렇게 변복, 변성명을 할 까닭이 없으니 이는 필시 국모를 죽인 삼포오루(三浦梧樓:미우라 고로) 놈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그의 일당일 것이요, 설사 이도 저도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국가와 민족에 독균이 되기는 분명한 일이니,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하나의 수치를 씻어보리라고 나는 결심하였다. 그리고 나는 내 힘과 환경을 헤아려 보았다. 삼간방 40여명 손님 중에 그놈의 패가 몇이나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열일고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총각 하나가 그의 곁에서 수종을 들고 있었다.
 
255
나는 궁리하였다. 저놈은 둘이요, 또 칼이 있고, 나는 혼자요, 또 적수공권이다. 게다가 내가 저놈에게 손을 대면 필시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달려들어 말릴 것이요, 사람들이 나를 붙잡고 있는 틈을 타서 저놈의 칼은 필시 내 목에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망설일 때에 내 가슴은 울렁거리고 심신이 혼란하여 진정할 수가 없어서 심히 고민하였다. 그때에 문득 고 선생의 교훈 중에,
 
256
'득수반지부족기 현애철수장부아(得樹攀枝不足奇 懸崖撤手丈夫兒)'
 
257
라는 글이 생각났다. 벼랑을 잡은 손을 탁 놓아라. 그것이 대장부다. 나는 가슴속에 한 줄기 광명이 비침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문자답하였다.
 
258
"저 왜놈을 죽이는 것이 옳으냐?"
 
259
"옳다."
 
260
"네가 어려서부터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느냐?"
 
261
"그렇다."
 
262
"의를 보았거든 할 것이요, 일의 성불성을 교계하고 망설이는 것은 몸을 좋아하고 이름을 좋아하는 자의 일이 아니냐."
 
263
"그렇다. 나는 의를 위하는 자요, 몸이나 이름을 위하는 자가 아니다."
 
264
이렇게 자문자답하고 나니 내 마음의 바다에 바람은 자고 물결은 고요하여 모든 계교가 저절로 솟아올랐다. 나는 40명 객과 수백 명 동민을 눈에 안 보이는 줄로 꽁꽁 동여 수족을 못 놀리게 하여놓고, 다음에는 저 왜놈에게 티끌만한 의심도 일으키지 말아서 안심하고 있게 하여 놓고, 나 한 사람만이 자유자재로 연극을 할 방법을 취하기로 하였다.
 
265
다른 손님들이 자던 입에 새벽 밥상을 받아 아직 삼분지 일도 밥을 먹기 전에 그보다 나중 상을 받은 나는 네댓 술에 한 그릇 밥을 다 먹고 일어나서 주인을 불러 내가 오늘 해 전으로 700리 길을 걸어야 하겠으니, 밥 일곱 상을 더 차려오라고 하였다. 37, 8세 됨직한 골격이 준수한 주인은 내 말에 대답은 아니 하고 방 안에 있는 다른 손님들을 둘러보며,
 
266
"젊은 사람이 불쌍하다. 미친놈이로군."
 
267
하고 들어가 버렸다.
 
268
나는 목침을 베고 한편에 드러누워서 방 안의 무리와 그 왜놈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어떤 유식한 듯한 청년은 주인의 말을 받아 나를 미친놈이라고 하고, 또 어떤 담뱃대를 붙여 문 노인은 그 젊은 사람을 책하는 말로,
 
269
"여보게, 말을 함부로 말게. 지금인들 이인(異人)이 없으란 법이 있겠나. 이러한 말세에 이인이 나는 법일세."
 
270
하고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그 젊은 사람도 노인의 눈을 따라 나를 흘끗 보더니 입을 삐죽하고 비웃는 어조로,
 
271
"이인이 없을 리야 없겠죠마는, 아 저 사람 생긴 꼴을 보세요. 무슨 이인이 저렇겠어요."
 
272
하고 내게 들려라 하고 소리를 높였다.
 
273
그러나 그 왜는 별로 내게 주목하는 기색도 없이 식사를 필하고는 밖으로 나가 문설주에 몸을 기대고 서서 방 안을 들여다보면서 총각이 연가(밥값) 회계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274
나는 때가 왔다 하고 서서히 일어나 '이놈!' 소리를 치면서 발길로 그 왜놈의 복장을 차니 그는 한 길이나 거진 되는 계하에 나가떨어졌다. 나는 나는 듯이 쫓아 내려가 그놈의 모가지를 밟았다. 삼간 방문 네 짝이 일제히 열리며 그리로 사람들의 모가지가 쑥쑥 내밀어졌다. 나는 몰려나오는 무리를 향하여,
 
275
"누구나 이 왜놈을 위하여 감히 내게 범접하는 놈은 모조리 죽일 테니 그리 알아라!"
 
276
하고 선언하였다.
 
277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발에 채이고 눌렸던 왜놈이 몸을 빼쳐서 칼을 빼어 번쩍거리며 내게로 덤비었다. 나는 내 면상에 떨어지는 그의 칼날을 피하면서 발길을 들어 그의 옆구리를 차서 거꾸러뜨리고 칼을 잡은 손목을 힘껏 밟은즉 칼이 저절로 언 땅에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278
나는 그 칼을 들어 왜놈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를 쳤다. 2월 추운 새벽이라 빙판이 진 땅 위에 피가 샘솟듯 흘렀다. 나는 손으로 그 피를 움켜 마시고, 또 왜의 피를 내 낯에 바르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검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면서, 아까 왜놈을 위하여 내게 범하려던 놈이 누구냐 하고 호령하였다. 미처 도망하지 못한 행객들은 모조리 방바닥에 넙적 엎드려, 어떤 이는,
 
279
"장군님, 살려주십시오. 나는 그놈이 왜놈인 줄 모르고 예사 사람으로 알고 말리려고 나갔던 것입니다."
 
280
하고, 또 어떤 이는,
 
281
"나는 어저께 바다에서 장군님과 함께 고생하던 사람입니다. 왜놈과 같이 온 사람이 아닙니다."
 
282
하고 모두 겁이 나서 벌벌 떨고 있는 사람들 중에 아까 나를 미친놈이라고 비웃던 청년을 책망하던 노인만이 가슴을 떡 내밀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283
"장군님, 아직 지각없는 젊은 것들이니 용서하십시오."
 
284
하였다.
 
285
이 때에 주인 이 선달 화보가 감히 방 안에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문 밖에 꿇어앉아서,
 
286
"소인이 눈깔만 있고 눈동자가 없사와 누구신 줄을 몰라뵈옵고 장군님을 멸시하였사오니 죽어도 한이 없사옵니다. 그러하오나 그 왜놈과는 아무 관계도 없삽고, 다만 밥을 팔아먹은 죄밖에 없사옵니다. 아까 장군님을 능욕한 죄로 그저 죽여줍소서."
 
287
하고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내가 주인에게 그 왜가 누구냐고 물어서 얻은 바에 의하면, 그 왜는 황주에서 조선 배 하나를 얻어 타고 진남포로 가는 길이라 했다. 나는 주인에게 명하여 그 배의 선원을 부르고 배에 있는 그 왜의 소지품을 조속히 들이라 하였다. 이윽고 선원들이 그 왜의 물건을 가지고 와서 저희들은 다만 선가를 받고 그 왜를 태운 죄밖에 없으니 살려달라고 빌었다.
 
288
소지품에 의하여 조사한즉 그 왜는 육군 중위 토전양량(土田讓亮:쓰치다 조스케)이란 자요, 엽전 600냥이 짐에 들어있었다. 나는 그 돈에서 선인들의 선가를 떼어주고, 나머지는 이 동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라고 분부하였다. 주인 이 선달이 곧 동장이었다.
 
289
시체의 처치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분부하였다. 왜놈은 다만 우리나라와 국민의 원수가 될 뿐만 아니라 물속에 있는 어별들에게도 원수인즉, 이 왜의 시체를 강에 넣어 고기들로 하여금 나라의 원수의 살을 먹게 하라 하였다.
 
290
주인 이 선달은 매우 능간하게 일변 세수 제구를 들이고, 일변 밥 일곱 그릇을 한 상에 놓고 다른 상 하나에는 국수와 찬수를 놓아서 들였다. 나는 세수를 하여 얼굴과 손에 묻은 피를 씻고 밥상을 당기어서 먹기 시작하였다. 밥 한 그릇을 다 먹은 지가 10분밖에 안 되었지마는 과격한 운동을 한 탓으로 한두 그릇은 더 먹을 법 하여도 일곱 그릇을 다 먹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까 한 말을 거짓말로 돌리기도 창피하여서, 양푼을 하나 올리라 하여 양푼에 밥과 식찬을 한데 쏟아 비비고 숟가락을 하나 더 청하여 두 숟가락을 포개어가지고 한 숟가락 밥이 사발통만하도록 보기 좋게 큼직큼직하게 떠서 두어 그릇 턱이나 먹은 뒤에 숟가락을 던지고 혼잣말로,
 
291
"오늘은 먹고 싶은 왜놈의 피를 많이 먹었더니 밥이 아니 들어가는고."
 
292
하고 시치미를 뗐다.
 
293
식후에 토전의 시체와 그의 돈 처치를 다 분별하고 나서, 주인 이화보를 불러 지필을 대령하라 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를 죽였노라'하는 뜻의 포고문을 한 장 쓰고, 그 끝에 해주 백운방 기동 김창수'라고 서명까지 하여 큰길가 벽상에 붙이게 하고, 동장인 이화보더러 이 사실을 안악 군수에게 보고하라고 명한 후에 유유히 그곳을 떠났다.
 
294
신천읍에 오니 이 날이 마침 장날이라 장꾼들이 많이 모였는데, 이곳저곳에서 치하포를 이야기하는 것이 들렸다. 어떤 장사가 나타나서 한 주먹으로 일인을 때려죽였다는 둥, 나룻배가 빙산에 끼인 것을 그 장사가 강에 뛰어들어서 손으로 얼음을 밀어서 그 배에 탄 사람을 살렸다는 둥, 밥 일곱 그릇을 눈 깜짝할 새에 다 먹더라는 둥 말들을 하고 있었다.
 
295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지난 일을 낱낱이 아뢰었더니, 부모님은 날더러 어디로 피하라고 하셨으나, 나는 나라를 위하여서 정정당당한 일을 한 것이니 비겁하게 피하기를 원하지 않을뿐더러, 만일 내가 잡혀가 목이 떨어지더라도 이로써 만민에게 교훈을 준다 하면 죽어도 영광이라 하여 집에서 잡으러 오기를 기다렸다.
 
296
그로부터 석 달이나 지나서 병신년 5월 열하룻날 새벽에 내가 아직 자리에 누워 일어나기도 전에 어머니께서 사립문을 여시고,
 
297
"얘, 우리 집을 앞뒤로 보지 못하던 사람들이 둘러싸누나."
 
298
하시는 말씀이 끝나자 철편과 철퇴를 든 수십 명이,
 
299
"네가 김창수냐?"
 
300
하고 덤벼들었다.
 
301
나는,
 
302
"그렇다. 나는 김창수여니와 그대들은 무슨 사람이관대 요란하게 남의 집에 들어오느냐?"
 
303
한즉 그제야 그 중의 한 사람이 '내부훈령등인(內部訓令等因)'이라 한 체포장을 내어 보이고 나를 묶어 앞세웠다. 순검과 사령이 도합 30여명이요, 내 몸은 쇠사슬로 여러 겹을 동여매고 한 사람씩 앞뒤에서 나를 결박한 쇠사슬 끝을 잡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후좌우로 나를 옹위하고 해주로 향하여 길을 재촉했다. 동네 20여 호가 일가이지마는 모두 겁을 내어 하나도 감히 문을 열고 내다보는 이가 없었다. 이웃동네 강씨, 이씨네 사람들은 김창수가 동학을 한 죄로 저렇게 잡혀 간다고 수군거리는 것이 보였다.
 
304
이틀 만에 나는 해주옥에 갇힌 몸이 되었다. 어머니는 밥을 빌어다가 내 옥바라지를 하시고, 아버지는 영리청, 사령청 계방을 찾아 예전 낯으로 내 석방운동을 하셨으나, 사건이 워낙 중대한지라 아무 효과도 없었다.
 
305
옥에 갇힌 지 한 달이나 넘어서 목에 큰 칼을 쓴 채로 선화당 뜰에 끌려들어가서 감사 민영철에게 첫 심문을 받았다. 민영철은,
 
306
"네가 안악 치하포에서 일인을 살해하고 도적질을 하였다지?"
 
307
하는 말에 나는,
 
308
"그런 일이 없소."
 
309
하고 딱 잡아떼었다.
 
310
감사가 언성을 높여서,
 
311
"이놈, 네 행적에 증거가 소연하거든 그래도 모른다 할까? 여봐라, 저놈을 단단히 다루렷다."
 
312
하는 호령에 사령들이 달려들어 내 두 발목과 무릎을 칭칭이 동이고 붉은 칠을 한 몽둥이 2개를 다리 새에 들이밀고 한 놈이 1개씩 몽둥이를 잡고 힘껏 눌러서 주리를 틀었다. 단번에 내 정강이의 살이 터져서 뼈가 하얗게 드러났다. 지금 내 왼편 정강이 마루에 있는 큰 허물은 그 때에 상한 자리다. 나는 입을 다물고 대답을 아니 하다가 마침내 기절하였다.
 
313
이에 주리를 그치고 내 면상에 냉수를 뿜어서 소생시킨 뒤에 감사는 다시 같은 말을 물었다. 나는 소리를 가다듬어서,
 
314
"민의 체포장을 보온즉 내부훈령등인이라 하였은즉 이것은 관찰부에서 처리할 안건이 아니오니 내부로 보고하여 주시오."
 
315
하였다. 나는 서울에 가기 전에는 내가 그 일인을 죽인 동기를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작정한 것이었다. 내 말을 듣고 민 감사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다시 내려 가두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7월 초승에 나는 인천으로 이수가 되었다. 인천 감리영으로부터 4, 5명의 순검이 해주로 와서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316
일이 이렇게 되니 내가 집에 돌아올 기약이 망연하여서, 아버지는 집이며 가장 집물을 모두 방매하여가지고 서울이거나 인천이거나 내가 끌려가는대로 따라가셔서 하회에 보시기로 하여 일단 집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나를 따라오셨다.
 
317
해주를 떠난 첫날은 연안읍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나진포로 가는 길에 읍에서 5리쯤 가서 길가 어느 무덤 곁에서 쉬게 되었다. 이 날은 일기가 대단히 더워서 순검들도 참외를 사먹으며 다리 쉼을 하였다. 우리가 쉬고 있는 곁 무덤 앞에는 비석 하나가 서 있었다. 앞에는 효자이창매지묘라고 하고 뒤에는 그의 사적이 적혀 있었다. 그 비문에 의하건대, 이창매는 본래 연안부의 통인으로서 그 어머니가 죽으매 춥거나 덥거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한결같이 그 어머니의 산소를 모셨다 하여 나라에서 효자정문을 내렸다 하였고, 또 이창매의 산소 옆의 그 아버지의 묘소 앞에는 그가 신을 벗어놓고 계절 앞으로 걸어 들어간 발자국과 무릎을 꿇었던 자리와 향로와 향함을 놓았던 자리에는 영영 풀이 나지 못하였고, 혹시 사람들이 그 움푹 패인 자리를 메우는 일이 있으면 곧 뇌성이 진동하여 큰 비가 퍼부어 그 흙을 씻어내고야 만다고 한다.
 
318
그 근처 사람들과 순검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귀로 듣고 돌비에 새긴 사적을 눈으로 보매 나는 순검들이 알세라 어머님이 알세라 하고 피섞인 눈물을 흘렸다. 저 이창매는 죽은 부모에 대하여서도 저처럼 효성이 지극하였거늘 부모의 생전에야 오죽하였으랴. 그런데 거의 넋을 잃으시고 허둥허둥 나를 따라오시는 내 어머니를 보라. 나는 얼마나 불효한 자식인가. 나는 쇠사슬에 끌려서 그 자리를 떠나면서 다시금 다시금 이 효자의 무덤을 돌아보고 수없이 마음으로 절을 하였다.
 
319
내가 나진포에서 인천으로 가는 배를 탄 것이 병신년 7월 25일, 달빛도 없이 캄캄한 밤이었다. 물결조차 아니 보이고 다만 소리뿐이었다. 배가 강화도를 지날 때쯤 하여 나를 호송하는 순검들이 여름 더위 길에 몸이 곤하여 마음 놓고 잠든 것을 보시고 어머니는 뱃사공에게도 안 들릴 만한 입안의 말씀으로,
 
320
"얘야, 네가 이제 가면 왜놈의 손에 죽을 터이니 차라리 맑고 맑은 물에 나와 같이 죽어서 귀신이라도 모자가 같이 다니자."
 
321
하시며 내 손을 이끄시고 뱃전으로 가까이 나가셨다. 나는 황공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면서 이렇게 여쭈었다.
 
322
"제가 이번 가서 죽을 줄 아십니까. 결코 안 죽습니다. 제가 나라를 위하여 하늘에 사무친 정성으로 한 일이니 하늘이 도우실 것입니다. 분명히 안 죽습니다."
 
323
어머니는 그래도 바다에 빠져 죽자고 손을 끄시므로, 나는 더욱 자신있게,
 
324
"어머니, 저는 분명히 안 죽습니다."
 
325
하고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그제야 어머니도 죽을 결심을 버리시고,
 
326
"나는 네 아버지하고 약속했다. 네가 죽는 날이면 양주가 같이 죽자고."
 
327
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두 손을 비비시면서 알아듣지 못할 낮은 음성으로 축원을 올리셨다. 여전히 천지는 캄캄하고 보이지 않는 물결소리만 들렸다.
 
328
나는 인천옥에 들어갔다. 내가 인천옥에 이수된 것은, 갑오경장에 외국사람과 관련된 사건을 심리하는 특별재판소를 인천에 둔 까닭이었다.
 
329
내가 들어있는 감옥은 내리에 있었다. 마루터기에 감리서가 있고, 그 좌익이 경무청, 우익이 순검청인데, 감옥은 순검청 앞에 있고, 그 앞에 이 모든 관아로 들어오는 2층 문루가 있었다. 높이 둘러쌓은 담 안의 나지막한 건물이 옥인데, 이것을 반으로 갈라서 한 편에는 징역하는 전중이와 강도, 절도, 살인 등의 큰 죄를 지은 미결수를 가두고, 다른 편에는 잡수를 수용하였다. 미결수는 평복이지마는 징역하는 죄수들은 퍼런 옷을 입고 있었고, 저고리 등에는 강도, 살인, 절도, 이 모양으로 먹으로 죄명을 썼다. 이 죄수들이 일하러 옥 밖에 끌려 나갈 때에는 좌우 어깨를 아울러 쇠사슬로 동여서 이런 것을 둘씩 둘씩 한 쇠사슬에 잡아매어 짝패를 만들고, 쇠사슬 끝 매듭이 죄수의 등에 가게 하였는데, 여기를 자물쇠로 채웠다. 이렇게 한 죄수를 압뢰(간수)가 몰고 다니는 것이 보였다.
 
330
처음 인천옥에 갇힐 때에 나는 도적으로 취급되어서 아홉 사람을 함께 채우는 기다란 차꼬에 다른 도적 8명의 한복판에 발목을 잠갔다. 한 달 전에 잡혀왔다는 치하포 주인 이화보가 내가 옥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가워하였다. 그 날 내가 토전양량을 죽인 이유를 써서 이화보의 집 벽에 붙인 것을 일인이 떼어서 감추고 나를 완전히 강도로 몬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가 옥문 밖까지 따라오셔서 눈물을 흘리고 서 계신 것을 나는 잠깐 고개를 돌려서 뵈었다.
 
331
어머니는 향촌에서 생장하셨으나 무슨 일에나 과감하시고, 더욱 침선이 능하시므로 감리서 삼문 밖 개성 사람 박영문의 집에 가서 사정을 말씀하시고 그 집 식모로 들어가셔서 이 자식의 목숨을 살리시려 하였다. 이 집은 당시 인천항에서 유명한 물상객주로, 살림이 크기 때문에 식모, 침모의 일이 많았다. 어머니는 이런 일을 하시는 값으로 하루 삼시 내게 밥을 들이게 한 것이었다. 하루는 옥사정이 나를 불러서 어머니도 의접할 곳을 얻으시었고 밥도 하루 삼시 들어오게 되었으니 안심하라고 일러주었다. 다른 죄수들이 퍽 나를 부러워하였다. 나는 옛 사람이
 
332
'애애부모 생아구로 욕보기은 호천망극(哀哀父母 生我劬勞 欲報基恩 昊天罔極:부모님께서 나를 낳으시고 기르신 고생하심이 커서 그 은혜에 보답코자 하나 하늘처럼 높아 다할 길이 없음이 슬프도다)'
 
333
이라 한 것을 다시금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먹여 살리시느라고 천겹 만겹의 고생을 하셨다. 불경에 부모와 자식은 천천생의 은애의 인연이라는 말이 진실로 허사가 아니다.
 
334
옥 속은 더할 수 없이 불결하고 아직도 여름이라 참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장질부사가 들어서 고통이 극도에 달하였다. 한 번은 나는 자살을 할 생각으로 다른 죄수들이 잠든 틈을 타서 이마에 손톱으로 '충'자를 새기고 허리띠로 목을 매어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숨이 끊어진 동안의 일이었다. 나는 삽시간에 고향으로 가서 내가 평소에 친애하던 재종제 창학과 놀았다.
 
335
'고원장재목 혼거불수초(故園長在目 魂去不須招: 오랜 세월 고향을 눈앞에 그리며 지내니, 굳이 부르지 않아도 내 영혼은 이미 가 있구나)'
 
336
가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337
문득 정신이 드니 옆에 있는 죄수들이 죽겠다고 고함을 치고 야단들을 하고 있었다. 내가 죽은 것을 걱정하여 그자들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아마 인사불성 중에 내가 몹시 요동을 하여서 차꼬가 흔들려서 그자들의 발목이 아팠던 모양이었다.
 
338
그 후로는 사람들이 지켜서 내가 자살할 기회도 주지 아니하였거니와, 나 자신도 병에 죽거나 원수가 나를 죽여서 죽는 것은 무가내하라 하더라도 내 손으로 내 목숨을 끊는 일은 아니하리라고 작정하였다.
 
339
그러는 동안에 병은 나았으나 보름 동안이나 음식을 입에 대어보지 못하여서 기운이 탈진하여 갱신을 못하였다. 그런 때에 나를 심문한다는 기별이 왔다.
 
340
나는 생각하였다. 해주에서 다리뼈가 드러나는 악형을 겪으면서도 함구불언한 뜻은 내부에 가서 대관들을 대하여 한 번 크게 말하려 함이었지마는, 이제는 불행히 병으로 인하여 언제 죽을는지 모르니, 부득불 이곳에서라도 왜를 죽인 취지를 다 말하리라고.
 
341
나는 옥사정의 등에 업혀서 경무청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도적 문초하는 형구가 삼엄하게 벌여 놓인 것을 보았다. 옥사정이 업어다가 내려놓은 내 꼴을 보고 경무관 김윤정은 어찌하여 내 형용이 저렇게 되었느냐고 물은즉, 옥사정은 열병을 앓아서 그리 되었다고 아뢰었다.
 
342
김윤정은 나를 향하여,
 
343
"네가 정신이 있어, 족히 묻는 말에 대답할 수 있느냐?"
 
344
하고 묻기로 나는,
 
345
"정신은 있으나 목이 말라붙어서 말이 잘 나오지 아니하니 물을 한 잔 주면 마시고 말하겠소."
 
346
하고 대답하였다. 그런즉 김 경무관은 술을 들이라 하여 물 대신에 술을 먹여주었다.
 
347
김 경무관은 청상에 앉아 차례대로 성명, 주소, 연령을 물은 뒤에, 모월 모일 안악 치하포에서 일인 하나를 살해한 일이 있느냐고 묻기로 나는,
 
348
"있소."
 
349
하고 분명히 대답하였다.
 
350
"그 일인을 왜 죽였어? 그 재물을 강탈할 목적으로 죽였다지?"
 
351
하고 경무관이 묻는다. 나는 이때로다 하고 없는 기운이건마는 소리를 가다듬어,
 
352
"나는 국모 폐하의 원수를 갚으려고 왜구 1명을 때려죽인 사실은 있으나, 재물을 강탈한 사실은 없소."
 
353
하였다. 그런즉 청상에 늘어앉은 경무관, 총순, 권임 등이 서로 맥맥히 돌아볼 뿐이요, 정내는 고요하였다.
 
354
옆 의자에 걸터앉아서 방청인지 감시인지 하고 있던 일본 순사(뒤에 들으니 와타나베라고 한다)가 심문 벽두에 정내에 공기가 수상한 것을 보았음인지 통역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 모양인 것을 보고 나는 죽을힘을 다하여,
 
355
"이놈!"
 
356
하는 한 소리 호령을 하고 말을 이어서,
 
357
"소위 만국공법 어느 조문에 통상, 화친하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임금이나 왕후를 죽이라고 하였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 폐하를 살해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들을 씨도 없이 다 없이해서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 것이다."
 
358
하고 소리를 높여 꾸짖었더니 와타나베 순사는 그것이 무서웠던지 "칙쇼, 칙쇼"하면서 대청 뒤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칙쇼'는 짐승이란 뜻으로 일본말의 욕이란 것을 나중에 들어서 알았다. 정내의 공기는 더욱 긴장하여졌다.
 
359
배석하였던, 총순인지 주사인지는 분명치 아니하나, 어떤 관원이 경무관 김윤정에게 이 사건이 심히 중대하니 감리 영감께 아뢰어 친히 심문하게 함이 마땅하다는 뜻을 진언하니, 김 경무관이 고개를 끄덕여 그 의견에 동의한다. 이윽고 감리사 이재정이 들어와서 경무관이 물러난 주석에 앉고 경무관은 이 감리사에게 지금까지의 심문 경과를 보고한다. 정내에 있는 관속들은 상관들의 분부 없이 내게 물을 갖다가 먹여준다.
 
360
나는 이 감리사가 나를 심문하기 시작하기 전에 먼저 그를 향하여 입을 열었다.
 
361
"나 김창수는 하향(遐鄕) 일개 천생이건마는 국모 폐하께옵서 왜적의 손에 돌아가신 국가의 수치를 당하고서는 청천백일 하에 제 그림자가 부끄러워 왜구 한 놈이라도 죽였거니와, 아직 우리 사람으로서 왜왕을 죽여 국모 폐하의 원수를 갚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거늘, 이제 보니 당신네가 몽백(국상으로 백립을 쓰고 소복을 입었다는 말)을 하였으니, 춘추대의에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는 몽백을 아니 한다는 구절은 잊어버리고 한갓 영귀와 총록을 도적질하려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단 말이오?"
 
362
감리사 이재정, 경무관 김윤정, 기타 청상에 있는 관원들이 내 말을 듣는 기색을 살피건대 모두 낯이 붉어지고 고개가 수그러졌다. 모두 양심에 찔리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363
내 말이 끝난 뒤에도 한참 잠자코 있던 이 감리사가 마치 내게 하소연하는 것과 같은 언성으로,
 
364
"창수가 지금 하는 말을 들으니 그 충의와 용감을 흠모하는 반면에 황송하고 참괴한 마음이 비길 데 없소이다. 그러나 상부의 명령대로 심문하여 올려야 하겠으니 사실을 상세히 공술해주시오." 하고 말에도 경어를 썼다. 이때에 김윤정이 아직 내 병이 위험상태에 있다는 뜻으로 이 감리사에게 수군수군하더니, 옥사정을 명하여 나를 옥으로 데려가라고 명했다. 내가 옥사정의 등에 업혀 나가노라니 많은 군중 속에 어머니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그 얼굴에 희색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아마 군중이나 관속들에게서 내가 관청에서 한 일을 듣고 약간 안심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중에 어머니께 들은 말씀이거니와 그날 내가 심문을 당한다는 말을 들으시고 어머니는 옥문 밖에 와서 기다리시다가 내가 업혀 나오는 꼴을 보시고 '저것이 병중에 정신없이 잘못 대답하다가 당장에 맞아 죽지나 않나'하고 무척 근심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가 감리사를 책망하는데 감리사는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는 둥, 내가 일본 순사를 호령하여 내쫓았다는 둥, 김창수는 해주 사는 소년인데 민 중전마마의 원수를 갚느라고 왜놈을 때려죽였다는 둥 하는 말을 듣고 안심이 되셨다고 하셨다. 나를 업고 가는 옥사정이 어머니 앞을 지나가며,
 
365
"마나님, 아무 걱정 마시오. 어쩌면 이런 호랑이 같은 아들을 두셨소?"
 
366
하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367
나는 감방에 돌아오는 길로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나를 전과 같이 다른 도적과 함께 차꼬를 채워두는 데 대하여 나는 크게 분개하여 벽력같은 소리로,
 
368
"내가 아무 의사도 발표하기 전에는 나를 강도로 대우하거나 무엇으로 하거나 잠자코 있었다마는 이왕 내가 할 말을 다 한 오늘날에도 나를 이렇게 홀대한단 말이냐. 땅에 금을 그어놓고 이것이 옥이라 하더라도 그 금을 넘을 내가 아니다. 내가 당초에 도망할 마음이 있었다면 그 왜놈을 죽인 자리에 내 주소와 성명을 갖추어서 포고문을 붙이고 집에 와서 석 달이나 잡으러 오기를 기다렸겠느냐. 너희 관리들은 왜놈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내게 이런 나쁜 대우를 한단 말이냐."
 
369
하면서 어떻게나 내가 몸을 요동하였던지 한 차꼬 구멍에 발목을 넣고 있는 8명 죄수 모두가 말을 더 보태어서, 내가 한 다리로 차꼬를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자기네 발목이 다 부러졌노라고 떠들었다. 이 소동을 듣고 경무관 김윤정이 들어와서,
 
370
"이 사람은 다른 죄수와 다르거늘 왜 도적 죄수와 같이 둔단 말이냐. 즉각으로 이 사람을 좋은 방으로 옮기고 일체 몸은 구속치 말고 너희들이 잘 보호하렷다."
 
371
하고 옥사정을 한편 책망하고 한편 명령하였다. 이로부터 나는 옥중에서 왕이 되었다.
 
372
그런 지 얼마 아니하여서 어머니가 면회를 오셨다. 어머니 말씀이, 아까 내가 심문을 받고 나온 뒤에 김 경무관이 돈 150냥(30원)을 보내며 내게 보약을 사 먹이라 하였다 하며, 어머니께서 우거하시는 집주인 내외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랑손님들까지도 매우 나를 존경하여서, "옥중에 있는 아드님이 무엇을 자시고 싶어하거든 말만 하면 해드리리다"하더라고 말씀하셨다.
 
373
내가 아홉 사람의 발목을 넣은 큰 차꼬를 한 발로 들고 일어났다는 것은 이화보를 여간 기쁘게 하지 아니하였다. 대개 그가 잡혀 와서 고생하는 이유가 살인한 죄인을 놓아 보냈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밥 일곱 그릇 먹고 700리 가는 장사를 어떻게 결박을 지우느냐고 변명하던 그의 말이 오늘에야 증명된 것이었다.
 
374
이튿날부터는 내게 면회를 구하는 사람들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감리서, 경무청, 순검청, 사령청의 수백 명 관속들이 내게 대한 선전을 한 것이었다. 인천항에서 세력 있는 사람 중에도, 또 막벌이꾼 중에도 다음 번 내 심문날에는 미리 알려달라고 아는 관속들에게 부탁을 하였다고 한다.
 
375
둘째 심문날에도 나는 전번과 같이 압뢰의 등에 업혀서 나갔는데, 옥문 밖에 나서면서 둘러보니 길에는 사람이 가득 찼고, 경무청에는 각 관아의 관리와 항내의 유력자들이 모인 모양이요, 담장이나 지붕이나 내가 심문을 받을 경무청 뜰이 보이는 곳에는 사람들이 하얗게 올라가 있었다.
 
376
정내에 들어가 앉으니 김윤정이 슬쩍 내 곁으로 지나가며,
 
377
"오늘도 왜놈이 왔으니 기운껏 호령을 하시오."
 
378
한다. 김윤정은 지금은 경기도 참여관이라는 왜의 벼슬을 하고 있으나 그 때에 나는 그가 의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설마 관청을 연극장으로 알고 나를 한 배우로 삼아서 구경거리를 만든 것일 리는 없으니, 필시 항심 없는 무리의 일이라 그때에는 참으로 의기가 생겼다가 날이 감에 따라서 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379
두 번째 심문에서 나는 할 말은 전번에 다 하였으니 더 할 말은 없다고 한마디로 끝내고, 뒷방에 앉아서 나를 넘겨다보고 있는 와타나베를 향하여 또 일본을 꾸짖는 말을 퍼부었다.
 
380
그 이튿날부터는 더더욱 면회하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대개 내 의기를 사모하여 왔노라, 어디 사는 아무개니 내가 출옥하거든 만나자, 설마 내 고생이 오래랴, 안심하라, 이런 말을 하였다. 이렇게 찾아오는 사람들은 거의 다 음식을 한 상씩 잘 차려 가지고 와서 나더러 먹으라고 권하였다. 나는 가져온 사람이 보는 데서 한두 젓가락 먹고는 나머지는 죄수들에게 차례로 나누어 주었다.
 
381
그때의 감옥 제도는 지금과는 달라서 옥에서 하루 삼시 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수가 짚신을 삼아서 거리에 내다 팔아서 쌀을 사다가 죽이나 끓여먹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내게 들어온 좋은 음식을 얻어먹는 것은 그들의 큰 낙이었다.
 
382
제 3차 심문은 경무청에서가 아니요, 감리서에서 감리 이재정 자신이 하였는데, 인천 인사가 많이 모인 모양이었다. 요샛말로 하면 방청이다. 감리는 내게 대하여 매우 친절히 말을 묻고, 다 묻고 나서는 심문서를 내게 보여 읽게 하고 고칠 것은 나더러 고치라 하여 수정이 끝난 뒤에 나는 '백(白)' 자에 이름을 두었다. 이 날은 일인이 없었다.
 
383
수일 후에 일인이 내 사진을 박는다 하여 나는 또 경무청으로 업혀 들어갔다. 이 날도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다. 김윤정은 내 귀에 들리라고,
 
384
"오늘 저 사람들이 창수의 사진을 박으러 왔으니,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딱 부릅뜨고 박히시오."
 
385
한다.
 
386
그러나 우리 관원과 일인 사이에 사진을 박히리, 못 박히리 하는 문제가 일어나서 한참 동안 옥신각신하다가 필경은 청사 내에서 사진을 박는 것은 허할 수 없으니 노상에서나 박으라 하여서 나를 노상에 앉혔다. 일인이 나를 수갑을 채우든지, 포승으로 얽든지 하여 죄인 모양을 하여달라고 요구한 데 대하여 김윤정은,
 
387
"이 사람은 계하죄인인즉 대군주 폐하께서 분부가 계시기 전에는 그 몸에 형구를 댈 수 없다" 하여서 딱 거절하였다.
 
388
그런즉 일인이 다시 말하기를,
 
389
"형법이 곧 대군주 폐하의 명령이 아니오? 그런즉 김창수를 수갑을 채우고 포승으로 얽는 것이 옳지 않소?"
 
390
하고 기어이 나를 결박하여놓고 사진박기를 주장하였다. 이에 김윤정은,
 
391
"갑오경장 이후에 우리나라에서는 형구는 폐하였소."
 
392
하고 잡아뗀다. 그런즉 왜는 또,
 
393
"귀국 감옥 죄수들을 본즉 다 쇠사슬을 하고 다니는데……."
 
394
하고 깐깐하게 대들었다.
 
395
이에 김 경무관은 와락 성을 내며,
 
396
"죄수의 사진을 찍는 것은 조약에 정한 의무는 아니오. 참고 자료에 불과한 세세한 일에 내정 간섭은 받을 수 없소"
 
397
하고 소리를 높여서 꾸짖는다. 둘러섰던 관중들은 경무관이 명관이라고 칭찬하고 있었다.
 
398
이리하여서 나는 자유로운 몸으로 길에 앉은 대로 사진을 박게 되었는데, 일인이 다시 경무관에게 애걸하여서 겨우 내 옆에 포승을 놓고 사진을 박는 허가를 얻었다.
 
399
나는 며칠 전보다는 기운이 회복되었으므로 모여 선 사람들을 향하여 한바탕 연설을 하였다.
 
400
"여러분! 왜놈들이 우리 국모 민 중전마마를 죽였으니 우리 국민에게 이런 수치와 원한이 또 어디 있소? 왜놈의 독이 궐내에만 그칠 줄 아시오? 바로 당신들의 아들과 딸들이 필경은 왜놈의 손에 다 죽을 것이오. 그러니 여러분! 당신들도 나를 본받아서 왜놈을 만나는 대로 다 때려죽이시오. 왜놈을 죽여야 우리가 사오."
 
401
하고 나는 고함을 쳤다.
 
402
와타나베가 내 곁에 와서,
 
403
"네가 그렇게 충의가 있으면 왜 벼슬을 못하였나?"
 
404
하고 직접 내게 말을 붙였다.
 
405
"나는 벼슬을 못할 상놈이니까 조그마한 왜놈이나 죽였다마는, 벼슬을 하는 양반들은 너희 황제의 모가지를 베어서 원수를 갚을 것이다."
 
406
하고 나는 와타나베에게 대답하였다.
 
407
나는 이날 김윤정에게 이화보를 놓아달라고 청하였더니 이화보는 그날로 석방되어 좋아라고 돌아갔다.
 
408
이로부터 나는 심문은 다 끝나고 판결만을 기다리는 한가한 몸이 되었다. 내가 이 동안에 한 일은 독서, 죄수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 죄수들을 위하여 소장을 대서하는 것이었다.
 
409
나는 아버지께서 들여 주신 <대학>을 읽고 또 읽었다. 글도 좋거니와 다른 책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감리서에 다니는 어떤 젊은 관리의 덕으로 천만의외에 여기서 내 20 평생에 꿈도 못 꾸던 새로운 책을 읽어서 새로운 문화에 접촉할 수가 있었다. 그 관리는 나를 찾아와서 여러 가지 새로운 말을 하여 주었다. 구미 문명국의 이야기며, 우리나라가 옛 사상, 옛 지식만 지키고 척양척왜로 외국을 배척만 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나라를 건질 수 없다는 것이며, 널리 세계의 정치, 문화, 경제, 과학 등을 연구하여서 좋은 것은 받아들여서 우리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410
"창수와 같은 의기남아로는 마땅히 신학식을 구하여서 국가와 국민을 새롭게 할 것이니, 이것이 영웅의 사업이지, 한갓 배외사상만을 가지고는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막을 수 없지 아니한가."
 
411
하여 나를 일깨워줄뿐더러, 중국에서 발간된 <태서신사>, <세계지지> 등 한문으로 된 책자와 국한문으로 번역된 조선 책도 들여 주었다. 나는 언제 사형의 판결과 집행을 받을지 모르는 몸인 줄 알면서도 아침에 옳은 길을 듣고, 저녁에는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이 신서적을 수불석권하고 탐독하였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읽는 것을 보고 감리서 관리도 매우 좋아하였다.
 
412
이런 책들을 읽는 동안에 나는 서양이란 것이 무엇이며, 오늘날 세계의 형편이 어떠하다는 것도 아는 동시에, 나 자신과 우리나라에 대한 비판도 하게 되었다. 나는 고 선생이 조상의 제사에 부르는 축문에 명나라 연호인 영력 몇 년을 쓰는 것이 우리 민족으로서는 옳지 아니한 것도 깨달았고, 안 진사가 서양 학문을 한다고 절교하던 것이 고 선생의 달관이 아니라고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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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청계동에 있을 때에는 고 선생의 학설을 그대로 받아 척양척왜를 나의 유일한 천직으로 알았고, 옳은 도가 한 줄기 살아 있는 데는 오직 우리나라뿐이요, 저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 무리들은 모두 금수와 같은 오랑캐라고만 믿고 있었다. 그러나 <태서신사> 한 권만 보아도 저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가 우뚝 솟은 사람들이 결코 원숭이에서 얼마 멀지 아니한 오랑캐가 아니요, 오히려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는 좋은 법과 아름다운 풍속을 가졌고, 저 큰 갓을 쓰고 넓은 띠를 두른 신선과 같은 우리 탐관오리야말로 오랑캐의 존호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414
나는 이에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저마다 배우고 사람마다 가르치는 것이라 깨달았다. 옥중에 있는 죄수들을 보니 글을 아는 이는 없고, 또 그들의 생각이나 말이 모두 무지하기 짝이 없어서 이 백성을 이대로 두고는 결코 나라의 수치를 씻을 수도 없고, 다른 나라와 겨루어나갈 부강한 힘을 얻을 수도 없다고 단정하였다.
 
415
이에 나는 내가 깨달은 바를 실행하여서 내 목숨이 있는 날까지 같이 옥중에 있는 죄수들만이라도 가르쳐보려 하였다. 죄수는 들락날락하는 자를 아울러 평균 100명가량인데, 그 열에 아홉까지는 양서부지(일자무식)였다. 내가 글을 가르쳐주마 한즉 그들은 마다고는 아니하고 배우는 체를 하였으나, 그 중에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글에 뜻이 있는 것보다 내 눈에 들어서 맛있는 음식을 얻어먹으려는 것이 목적인 것 같았다. 도적이나 살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글을 배워서 더 좋은 사람이 되어보겠다는 생각조차 일어나지 아니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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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근이란 자는 <대학>을 배우기로 하였는데, 그 서문에 '인생팔세 개입소학'이라는 구절을 소리 높여 읽다가, '개입소학'을 '개 아가리 소학'이라고 하여서 나는 허리가 끊어지도록 웃었다. 이 자는 화개동 갈보의 서방으로서 갈보 하나를 중국으로 팔아 보낸 죄로 10년 징역을 받은 것이었다. 때는 건양 2년 즈음이라, <황성신문>이 창간되었다 하여 누가 내게 들여 주는 어느 날 신문에 내 사건의 전말을 대강 적고 나서, 김창수가 인천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치므로 감옥은 학교가 되었다고 씌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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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죄수의 선생 노릇을 하는 한편, 또 대서소도 벌인 셈이 되었다. 억울하게 잡혀온 죄수의 말을 듣고 내가 소장을 써주면 그것으로 놓여나가는 이도 있어서 내 소장 대서가 소문이 나게 되었다. 더구나 옥에 갇혀 있으면서 밖에 있는 대서인에게 소장을 써달래려면 매우 힘도 들고 돈도 들었다. 그런데 같은 감방에 마주 앉아서 충분히 할 말을 다 하고 소장을 쓰는 것은 인찰지 사는 값밖에는 도무지 비용이 들지 아니하였다. 내가 소장을 쓰면 꼭 득송한다고 사람들이 헛소문을 내어서 관리 중에 내게 소장을 지어달라는 자도 있고, 어느 관원에게 돈을 빼앗겼다하는 사람의 원정을 지어서 상관에게 드려 그 관리를 파면시킨 일도 있었다. 이러므로 옥리들도 나를 꺼려서 죄수를 함부로 학대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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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글을 가르치고, 대서를 한 여가에 나는 죄수들에게 소리도 시키고 나도 소리를 배우고 놀았다. 나는 농촌 생장이지마는 기음노래(김매는 노래) 한 가락, 갈까보다(춘향가의 일부) 한 마디도 할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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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옥의 규칙이 지금과는 달라서 낮잠을 재우고 밤에는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다들 잠든 틈을 타서 죄수가 도망할 것을 염려함에서였다. 그러므로 죄수들은 밤새도록 소리도 하고 이야기책도 읽기를 허하였던 것이다. 이 규칙은 내게는 적용되지 아니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이 그러므로 나도 자연 늦도록 놀다가 자게 되었다. 자꾸 듣는 동안에 자연 시조니 타령이니 남이 하는 소리의 맛을 알게 되어서 나도 배울 생각이 났다. 나는 갈보 서방 조덕근한테 평시조, 엮음시조, 남창 지름, 여창 지름, 적벽가, 새타령, 개구리타령 등을 배워서 남들이 할 때면 나도 한몫 들었다.
 
420
이러고 있는 동안에 세월이 흘러서 7월도 거의 다 갔다. 하루는 <황성신문>에 다른 살인 죄인, 강도 죄인 몇과 함께 인천 감옥에 있는 살인강도 김창수를 아무 날 처교한다는 기사가 난 것을 보았다. 그 날짜는 7월 스무이렛날이든가 했다. 사람이 이런 일을 당하면 부러 태연한 태도를 꾸밀 법도 하지마는 어찌된 일인지 내 마음은 조금도 경동되지 아니하였다. 교수대를 오를 시간을 겨우 반일을 격하고도 나는 음식이나 독서나 담화를 평상시처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 고 선생께 들은 말씀 중에 박태보가 보습으로 단근질을 받을 때에,
 
421
"이 쇠가 식었으니 더 달구어 오너라."
 
422
한 것이며, 심양에 잡혀갔던 삼학사의 사적을 들은 영향이라고 생각되었다.
 
423
내가 사형을 당한다는 신문기사를 본 사람들은 뒤를 이어 찾아와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눈물을 흘렸다. 이를테면 조상이다. 아무 나으리, 아무 영감 하는 사람들도 찾아와서,
 
424
"김 석사, 살아 나와서 상면할 줄 알았더니 이것이 웬일이오?"
 
425
하고 두 주먹으로 눈물을 씻고 갔다.
 
426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밥을 손수 들고 오시는 어머니가 평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으심이었다. 아마 사람들이 내가 죽게 되었다는 말을 아니 알려드린 것인가 하였다.
 
427
나는 조상하는 손님이 돌아간 뒤에도 여느 때처럼 <대학>을 읽고 있었다. 인천 감옥 죄수의 사형 집행은 언제나 오후에 하게 되었고, 처소는 우각동이란 것을 알므로 나는 아침과 점심을 잘 먹었다. 죽을 때에는 어떻게 하리라 하는 마음 준비도 할 마음이 없었다. 나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아니하건마는 다른 죄수들이며 글을 배운 제자들, 그리고 나한테 소장을 써 받고 송사에 대한 지도를 받아오던 잡수들이 애통해 하는 양은 그들이 제 부모 상에 그러하였을까 의심하리만큼 간절하였다.
 
428
차차 시간은 흘러서 오후가 되고 저녁때가 되었다. 교수대로 끌려 나갈 시간이 바짝바짝 다가오는 것이다. 나는 내 목숨이 끊어질 순간까지 성현의 말씀에 잠심하여 성현과 동행하리라 하고 몸을 단정히 하고 앉아서 <대학>을 읽고 있었다. 그럭저럭 저녁밥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내가 특별한 죄수가 되어서 밤에 집행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예기하지 아니하였던 저녁 한 때를 이 세상에서 더 먹은 것이었다.
 
429
밤이 초경은 되어서, 밖에서 여러 사람이 떠들썩하고 가까이 오는 인기척이 나더니 옥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430
'옳지, 이제 때가 왔구나.'
 
431
하고 올 것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한 방에 있는 죄수들은 제가 죽으러 나가기나 하는 것처럼 모두 낯색이 변하여 덜덜 떨고 있었다. 이때 문 밖에서,
 
432
"창수, 어느 방에 있소?"
 
433
하는 소리가 들렸다.
 
434
"이 방이오."
 
435
하는 내 대답은 듣는 것 같지도 않고, 방문을 열기 전부터 어떤 소리가,
 
436
"아이고, 이제는 창수 살았소! 아이고, 감리 영감과 전 서원과 각청 직원이 아침부터 밥 한 술 못 먹고 끌탕만 하고 있었소―창수를 어찌 차마 우리 손으로 죽이느냐고. 그랬더니 지금 대군주 폐하께옵서 대청에서 감리 영감을 불러 계시고, 김창수 사형을 정지하랍신 친칙을 받잡고 밤이라도 옥에 내려가 김창수에게 전지하여 주랍신 분부를 듣고 왔소. 오늘 얼마나 상심하였소?"
 
437
하고 관속들은 친동기가 죽기를 면하기나 한 것처럼 기뻐하였다. 이것이 병진년 윤 8월 26일이었다. 뒤에 알고 보니 내가 사형을 면하고 살아난 데는 두 번 아슬아슬한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이러하였다.
 
438
법무대신이 내 이름과 함께 몇 사형 죄인의 명부를 가지고 입궐하여 상감의 칙재를 받았다. 상감께서는 다 재가를 하였는데, 그때에 입직하였던 승지 중의 하나가 내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讐: 국모의 원수를 갚음인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서 이미 재가된 안건을 다시 가지고 어전에 나아가 임금께 뵈인즉, 상감께서는 즉시 어전회의를 여시어 내 사형을 정지하기로 결정하시고, 곧 인천 감리 이재정을 전화로 부르신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그 승지의 눈에 '국모보수' 네 글자가 아니 띄었더라면 나는 예정대로 교수대의 이슬이 되었을 것이니, 이것이 첫째로 이상한 인연이었다.
 
439
둘째로는 전화가 인천에 통하게 된 것이 바로 내게 관한 전화가 오기 사흘 전이었다고 한다. 만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 개통이 아니 되었던들 아무리 위에서 나를 살리려 하셨더라도 그 은명이 오기 전에 나는 벌써 죽었을 것이었다고 한다.
 
440
그러자, 감리서 주사가 뒤이어 찾아와서 하는 말에 의하면 내가 사형을 당하기로 작정되었던 날 인천항 내의 서른두 물상객주들이 통문을 돌려서 매 호에 한 사람 이상 구각동으로 김창수 처형 구경을 가되, 각기 엽전 한 냥씩을 가지고 가서 그것을 모아 김창수의 몸값을 삼자, 만일 그것만으로 안 되거든 부족액은 서른두 객주가 담당하자고 작정하였더라고 한다. 감리서 주사는 내게 이런 말을 들려주고 끝으로,
 
441
"아무러하거나 김 석사, 이제는 천행으로 살아났소. 며칠 안으로 궐내에서 은명이 계실 터이니 아무 염려 말고 계시오."
 
442
하고 갔다.
 
443
이제는 다들 내가 분명히 사형을 면한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상설이 날리다가 갑자기 춘풍이 부는 것과 같았다. 옥문이 열리는 소리에 벌벌 떨고 있던 죄수들은 내게 전하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 좋아서 죽을 지경인 모양이었다. 신골방망이로 차꼬를 두드리며 온갖 노래를 다 부르고 청(靑)바지저고리짜리들이 얼씨구나 좋을씨고 하고 춤을 춘다, 익살을 부린다, 마치 푸른 옷을 입은 배우들의 연극장을 지어낸 듯하였다.
 
444
죄수들은 내가 그냥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태연자약한 것은 이렇게 무사하게 될 줄을 미리 알았던 것이라고 제멋대로 해석하고, 나를 이인이라 하여 앞날 일을 내다보는 사람이라고들 떠들었다. 더구나 어머님은 갑곶 바다에서 "내가 안 죽습니다" 하던 말을 기억하시고 내가 무엇을 아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시는 모양이요, 아버지도 그런 생각을 가지시는 것 같았다.
 
445
대군주의 칙령으로 김창수의 사형이 정지되었다는 소문이 전파되니 전일에 와서 영결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조상이 아니요, 치하하러 왔다. 하도 면회인이 많으므로 나는 옥문 안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 몇 날 동안 응접을 하였다. 전에는 다만 나의 젊은 의기를 애석히 여기는 것뿐이었거니와, 칙명으로 내 사형이 정지되는 것을 보고는 미구에 위에서 소명이 내려서 내가 영귀하게 되리라고 짐작하고 벌써부터 내게 아첨하는 사람조차 생기게 되었다. 이런 일은 일반 사람들뿐만 아니라 관리 중에도 있었다.
 
446
하루는 감리서 주사가 의복 한 벌을 가지고 와서 내게 주고 말하기를, 이것은 병마우후 김주경이라는 강화 사람이 감리 사또에게 청하여 전하는 것인즉 이 옷을 갈아입고 있다가 그 김주경이 오거든 만나라고 하였다.
 
447
이윽고 한 사람이 찾아왔는데 나이는 사십이나 되어 보이고, 면목이 단단하게 생겼다. 만나서 별 말이 없고 다만,
 
448
"고생이나 잘하시오. 나는 김주경이오"
 
449
하고는 돌아갔다.
 
450
어머님께서 저녁밥을 가지고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김 우후가 아버지를 찾아와서 부모님 양주의 옷감과, 용처에 보태라고 돈 200냥을 두고 가며 열흘 후에 또 오마고 하였다 했다.
 
451
"네가 보니 그 양반이 어떻더냐? 밖에서 듣기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 하더구나."
 
452
하시기로 나는,
 
453
"사람을 한 번 보고 어찌 잘 알 수 있습니까마는 그 사람이 하는 일은 고맙습니다."
 
454
하였다.
 
455
김주경에게 내 일을 알린 것은 인천옥에 사령반수로 있는 최덕만이었다. 최덕만은 본래 김의 집 비부였었다. 김주경의 자는 경득이니, 강화 아전의 자식이었다. 병인양요 뒤에 대원군이 강화에 3000명의 무사를 양성하고 섬 주위에 두루 포루를 쌓아 국방 영문을 세울 때에 포량 고지기(군량을 둔 창고를 지키는 소임)가 된 것이 그의 출세의 시초였다. 그는 성품이 호방하여 초립동이 시절에도 글 읽기를 싫어하고 투전을 일삼았다.
 
456
한번은 그 부모가 그를 징계하기 위하여 며칠 동안 고방 속에 가두었더니, 들어갈 때에 그는 투전목 하나를 감추어 가지고 들어가서 거기 갇혀 있는 동안에 투전에 대한 여러 가지 묘법을 터득하여가지고 나와서 투전목을 수만 개 만들되, 투전짝마다 저만 알 수 있는 표를 하였다. 이 투전목을 강화도 안에 있는 여러 포구에 분배하여 뱃사람들에게 팔게 하고 자기는 이 배 저 배로 돌아다니면서 투전을 하였다. 어느 배에서나 쓰는 투전목은 다 김주경이가 만든 것이라, 그는 투전짝의 표를 보아 알기 때문에 얼마 아니하여서 수십만의 돈을 땄다.
 
457
김주경은 그렇게 투전하여 얻은 돈으로 강화와 인천의 각 관청의 관속을 매수하여 그의 지휘에 복종케 하고, 또 꾀 있고 용맹 있는 날탕패를 많이 모아 제 식구를 만들어놓고는 어떠한 세도 있는 양반이라도 비리의 일을 하는 자가 있으면 직접이거나 간접이거나 꼭 혼을 내고야 말았다. 경내에 도적이 나서 포교가 범인을 잡으러 나오더라도 먼저 김주경에게 물어보아서 그가 잡아가라면 잡아가고, 그에게 맡기고 가라면 포교들은 거역을 못하였다. 당시에 강화에는 큰 인물 둘이 있으니 양반에는 이건창이요, 상놈에는 김주경이라고 하였다. 이 두 사람은 강화유수도 건드리지를 못하였다. 대원군은 이런 말을 듣고 김주경에게 군량을 맡은 중임을 맡긴 것이다.
 
458
하루는 사령반수 최덕만이 내게 와서 하는 말이, 김주경이 어느 날 자기 집에 와서 밥을 먹으면서 말하기를, 김창수를 살려내야 할 터인데, 요새 정부의 대관 놈들이 모두 눈깔에 동록이 슬어서 돈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하니, 이번에 집에 가서 가산을 보두 족쳐 팔아가지고 김창수의 부모 중의 한 분을 데리고 서울로 가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석방 운동을 하겠노라 하더라고 하였다. 최덕만이 이 말을 한 지 10여 일 후에 과연 김주경이가 인천에 와서 내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갔다.
 
459
뒤에 듣건대 김주경은 당시 법무대신 한규설을 찾아서 내 말을 하고, 이런 사람을 살려내어야 충의지사가 많이 나올 터이니, 폐하께 입주하여 나를 놓아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한규설도 내심으로는 찬성이나, 일본공사 임권조(林權助:하야시 곤스케)가 벌써 김창수를 아니 죽였다는 것을 문제삼아서 대신 중에 누구든지 김창수를 옹호하는 자는 무슨 수단으로든지 해치려 하니, 막무가내로 폐하께 입주하는 일을 거절하므로 김주경은 분개하여 대관들을 무수히 졸욕하고 나와서 공식으로 법부에 김창수 석방을 요구하는 소지를 올렸더니 그제야 '기의가상 사관중대 미가천평향아(基義可尙 事關重大 未可擅便向事: 의는 가상하나 일이 중대하여 여기서 마음대로 할 수 없다)'하였다.
 
460
그 뒤에도 제 2차, 3차로 관계있는 각 아문에 소장을 드려 보았으나 어디나 마찬가지로 이리 미루고 저리 미루어 결말을 보지 못하였다. 이 모양으로 김주경은 7, 8개월 동안이나 나를 위하여 송사를 하는 통에 그 집 재산은 다 탕진되었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번갈아서 인천에서 서울로 오르락내리락하셨으나 필경 아무 효과도 없이 김주경도 마침내 나를 석방하는 운동을 중지하고 말았다.
 
461
김주경은 소송을 단념하고 집에 돌아와서 내게 편지를 하였는데, 보통으로 위문하는 말을 한 끝에 오언절구 한 수를 적었다.
 
462
"탈농진호조 발호기상린 구충필어효 청간의려인(脫籠眞好鳥 拔扈豈常鱗 求忠必於孝 請看依閭人: 새는 조롱을 벗어나야 좋은 새며, 고기가 통발을 벗어나니 어찌 예사스러우랴. 충신은 반드시 효 있는 집에서 찾고 효자는 평민의 집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463
라고 하였다. 이것은 내게 탈옥을 권하는 말이었다. 나는 김주경이 그간 나를 위하여 심력을 다한 것에 감사하고, 구차히 살 길을 위하여 생명보다 중한 광명을 버릴 뜻이 없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답장하였다.
 
464
김주경은 그 후 동지를 규합하여 관용선 청룡환, 현익호, 해룡환 세 척 중에서 하나를 탈취하여 해적이 될 준비를 하다가 강화 군수의 염탐한 바가 되어서 일이 틀어지고 도망하였는데, 중로에서 그 군수의 행차를 만나서 군수를 실컷 두들겨 주고 해삼위(海參崴: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갔다고도 하고, 근방 어느 곳에 숨어있다고도 하였다.
 
465
그 후에 아버지는 김주경이 서울 각 아문에 드렸던 소송 문서 전부를 가지고 강화의 이건창을 찾아서 나를 구출할 방책을 물으셨으나, 그도 역시 탄식할 뿐이었다고 한다.
 
466
나는 그대로 옥중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신학문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나는 만사를 하늘의 뜻에 맡기고 성현으로 더불어 동행하자는 생각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으므로 탈옥 도주는 염두에도 두지 아니하고 있었다. 그러나 10년수 조덕근, 김백석, 3년수 양봉구, 이름은 잊었으나 종신수도 하나 있어서 그들은 조용할 때면 가끔 내게 탈옥하자는 뜻을 비추었다. 그들은 내가 하려고만 하면 한 손에 몇 명씩 쥐고 공중으로 날아서라도 그들을 건져낼 수 있는 것같이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두고두고 그들이 눈물을 흘려가며 살려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내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생각에는 나는 얼마 아니하여 위로부터 은명이 내려서 크게 귀하게 되겠지마는 나마저 나가면 자기들은 어떻게 살랴 하는 것이었다.
 
467
나는 생각하였다. 상감께서 나를 죄인으로 알지 아니하심은 내 사형을 정지하라신 친칙으로 보아 분명하고, 동포들이 내가 살기를 원하는 것도 김주경을 비롯하여 인천항의 물상객주들이 돈을 모아서 내 목숨을 사려고 한 것으로 알 수 있지 아니하냐. 상하가 다 내가 살기를 원하나 나를 놓아주지 못하는 것은 오직 왜놈 때문이다. 내가 옥중에서 죽어버린다면 왜놈을 기쁘게 할 뿐인즉 내가 탈옥을 하더라도 의리에 어그러질 것이 없다고. 이리하여 나는 탈옥할 결심을 하였다. 내가 조덕근에게 내 결심을 말한즉 그는 벌써 살아난 듯이 기뻐하면서 무엇이나 내가 시키는 대로 할 것을 맹세하였다. 나는 그에게 집에 말하여 돈 200냥을 들여오라 하였더니 밥을 나르는 사람 편에 기별하여서 곧 가져왔다. 이것으로 탈옥의 한 가지 준비는 된 셈이었다.
 
468
둘째로 큰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강화 사람 황순용이라는 사람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황가는 절도죄로 3년 징역을 거의 다 치르고 앞으로 나갈 날이 멀지 아니하므로 감옥의 규례대로 다른 죄수를 감독하는 직책을 맡아가지고 있었다. 이놈을 손에 넣지 아니하고는 일이 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황가에게 한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김백석을 남색으로 지극히 사랑하는 것이었다. 김백석은 아직 17, 8세의 미소년으로, 절도 3범으로 10년 징역의 판결을 받고 복역한지가 한 달쯤 된 사람이었다. 나는 김백석을 이용하여 황가를 손에 넣기로 계획을 정하였다.
 
469
나는 조덕근으로 하여금 김백석을 충동하여, 김백석으로 하여금 황가를 졸라서 황가로 하여금 내게 김백석을 탈옥시켜주기를 빌게 하였다. 계교는 맞았다. 황가는 날더러 김백석을 놓아달라고 빌었다. 나는 그를 준절히 책망하고 다시는 그런 죄 될 말은 말라고 엄명하였다. 그러나 김백석에게 자꾸 졸리우는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졸랐다. 내가 뿌리치면 뿌리칠수록 그의 청은 간절하여서 한번은,
 
470
"제가 대신 징역을 져도 좋으니 백석이면 살려줍시오,"하고 황가는 울었다. 비록 더러운 애정이라 하여도 애정의 힘은 과연 컸다. 그제야 내가 황가의 청을 듣는 것같이, 그러면 그러라고 허락하였다. 황은 백배 사례하고 기뻐하였다. 이리하여 둘째 준비도 끝이 났다.
 
471
다음에 나는 아버지께 면회를 청하여 한 자 길이 되는 세모난 철창 하나를 들여주십사하고 여쭈었다. 아버지께서는 얼른 알아차리고 그날 저녁에 새 옷 한 벌에 그 창을 싸서 들여 주셨다.
 
472
이제는 마지막으로 탈옥할 날을 정하였으니, 그것은 무술년 3월 초아흐렛날이었다.
 
473
이날 나는 당번하는 옥사정 김가에게 돈 150냥을 주어, 오늘 밤에 내가 죄수들에게 한 턱을 낼 터이니 쌀과 고기와 모주 한 통을 사 달라 하고 따로 돈 스물닷 냥을 옥사정에게 주어 그것으로는 아편을 사먹으라고 하였다. 옥사정이 아편쟁인 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죄수에게 턱을 낸 것은 전에도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옥사정도 예사로이 알았을 뿐더러 아편값 스물닷 냥이 생긴 것이 무엇보다도 좋아서 두말없이 모든 것을 내 말대로 하였다. 관속이나 죄수나 나는 조만간 은명으로 귀히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아무도 내가 탈옥 도주를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리가 없었다. 조덕근, 양봉구, 황순용, 김백석 네 사람도 나는 그냥 옥에 머물러 있고, 자기네만을 빼어놓을 줄만 알고 있었다.
 
474
저녁밥을 들고 오신 어머님께, 자식은 오늘 밤으로 옥에서 나가겠으니 이 밤으로 배를 얻어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셔서 자식이 찾아갈 때를 기다리라고 여쭈었다.
 
475
50명 징역수와 30명 미결수들은 주렸던 창자에 고깃국과 모주를 실컷 먹고 취흥이 도도하였다. 옥사정 김가더러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죄수들 소리나 시키며 놀자며 내가 청하였더니 김가는 좋아라고,
 
476
"이놈들아, 김 서방님 들으시게 장기대로 소리들이나 해라."
 
477
하고 생색을 보이고는 저는 소리보다 좋은 아편을 피우려고 제 방에 들어가버렸다.
 
478
나는 적수 방에서 잡수 방으로, 잡수 방에서 적수 방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 슬쩍 마루 밑으로 들어가서 바닥에 깐 박석(정방형으로 구운 옛날 벽돌)을 창끝으로 들춰내고 땅을 파서 옥 밖에 나섰다. 그리고 옥 담을 넘을 줄사다리를 매어놓고 나니 문득 딴 생각이 났다. 다른 사람을 끌어내려다가 무슨 일이 날는지는 모르니, 이 길로 나 혼자만 나가버리자 하는 것이었다. 그 자들은 좋은 사람도 아니니 기어코 건져낸들 무엇하랴. 그러나 얼른 돌려 생각하였다. 사람이 현인군자에게 죄를 지어도 부끄러웁거늘 하물며 저들과 같은 죄인에게 죄인이 되고서야 어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으랴. 종신토록 수치가 될 것이다.
 
479
나는 내가 나온 구멍으로 다시 들어가서 천연덕스럽게 내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그들은 여전히 흥에 겨워서 놀고 있었다. 나는 눈짓으로 조덕근의 무리를 하나씩 불러서 나가는 길을 일러주어 다 내보내고 다섯째로 내가 나가보니 먼저 나온 네 녀석은 담을 넘을 생각도 아니하고 밑에 소복하니 모여앉아서 벌벌 떨고 있었다. 나는 하나씩 하나씩 궁둥이를 떠받쳐서 담을 넘겨 보내고 마지막으로 내가 담을 넘으려 할 때 먼저 나간 녀석들이 용동 마루로 통하는 길에 면한 판장을 넘느라고 왈가닥거리고 소리를 내어서 경무청과 순검청에서 무슨 일이 난 줄 알고 비상소집의 호각소리가 나고 옥문 밖에서는 벌써 퉁탕퉁탕하고 급히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480
나는 아직도 옥 담 밑에 서 있었다. 이제는 내 방으로 돌아갈 수도 없은즉 재빨리 달아나는 것 밖에 없건마는 남을 넘겨주기는 쉬워도 한 길 반이나 넘는 담을 혼자 넘기는 어려웠다. 나 혼자는 줄사다리로 어름어름 넘어갈 새도 없었다. 옥문 열리는 소리, 죄수들이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죄수들이 물통을 마주 메는 한 길이나 되는 몽둥이를 짚고 몸을 솟구쳐서 담 꼭대기에 손을 걸고 저편으로 뛰어넘었다. 이렇게 된 이상에는 내 길을 막는 자가 있으면 사생의 결단을 하고 결투할 결심으로 판장을 넘지 아니하고 내 쇠창을 손에 들고 바로 삼문을 나갔다. 삼문을 지키는 파수 순검들은 비상소집에 들어간 모양이어서 거기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탄탄대로로 나왔다. 들어온 지 2년 만에 인천옥을 나온 것이었다.
 
 

1.4. 방랑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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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에서는 나왔으나 어디로 갈 바를 몰랐다. 늦은 봄 밤 안개가 자욱한데다가 인천은 연전 서울 구경을 왔을 때에 한번 지났을 뿐이라, 길이 생소하여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밤에 물결소리를 더듬어서 모래사장을 헤매다가 훤히 동이 틀 때에 보니 기껏 달아난다는 것이 감리서 바로 뒤 용동 마루터기에 와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휘휘 둘러보노라니 수십 보 밖에 어떤 순검 한 명이 칼 소리를 제그럭제그럭 하고 내가 있는 데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길가 어떤 가겟집 함실아궁이를 덮은 널빤지 밑에 몸을 숨겼다. 순검의 흔들리는 환도집이 바로 코끝을 스칠 듯이 지나갔다.
 
483
아궁이에서 나오니 벌써 훤하게 밝았는데, 천주교당의 뾰족집이 보였다. 그것이 동쪽인 줄 알고 걸어갔다.
 
484
나는 어떤 집에 가서 주인을 불렀다. 누구냐 하기로 "아저씨, 나와 보세요." 하였더니 그는 나와서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김창수인데, 간밤에 인천 감리가 비밀 석방하여주었으나 이 꼴을 하고 대낮에 길을 갈 수가 없으니 날이 저물 때까지 집에 머물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주인은 안 된다고 거절하였다. 또 얼마를 가노라니까 모군꾼 하나가 상투바람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소리를 하며 내려왔다. 나는 또 사실을 말하고 빠져나갈 길을 물었더니, 그 사람은 대단히 친절하게 나를 이끌고 좁은 뒷골목 길로 요리조리 사람의 눈에 안 띄게 화개동 마루터기까지 가서 이리 가면 수원이요, 저리 가면 시흥이니, 마음대로 어느 길로든지 가라고 일러주었다. 미처 그의 이름을 못 물어본 것이 한이다.
 
485
나는 서울로 갈 작정으로 시흥 가는 길로 들어섰다. 내 행색을 보면 누가 보든지 참말로 도적놈이라 할 것이다. 염병에 머리털은 다 빠져서 새로 난 머리카락을 노끈으로 비끄러매어서 솔잎상투로 짜고, 머리에는 수건을 동이고, 두루마기도 없이 동저고릿바람인데, 옷은 가난한 사람의 것이 아닌 새 것이면서 땅 밑으로 기어 나올 때에 군데군데 묻은 흙이 물이 들어서 스스로 살펴보아도 평상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아니하였다.
 
486
인천 시가를 벗어나서 5리쯤 가서 해가 떴다. 바람결에 호각소리가 들리고 산에도 사람이 희끗희끗하였다. 내 이런 꼴로는 산에 숨더라도 수사망에 걸릴 것 같으므로 허허실실로 차라리 대로변에 숨으리라 하고 길가 잔솔밭에 들어가서 솔포기 밑에 몸을 감추고 드러누웠다. 얼굴이 감추어지지 않는 것은 솔가지를 꺾어서 덮어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칼 찬 순검과 벙거지 쓴 압뢰들이 지껄이며 내가 누워 있는 옆으로 지나갔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에서 나는 조덕근은 서울로, 양봉구는 배로 달아난 것을 알았고, 내게 대해서는
 
487
"김창수는 장사니까 잡기 어려울 거야. 허기야 잘 달아났지. 옥에서 썩으면 무얼 하게."
 
488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나는 다 알 수가 있었다.
 
489
나는 온종일 솔포기 속에 누워 있다가 순검 누구누구며 압뢰 김장석 등이 도로 내 발부리를 지나서 인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야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니, 벌써 황혼이었다. 나오기는 하였으나 어제 이른 저녁밥 이후로는 물 한 방울 못 먹고 눈 한 번 못 붙인 나는 배는 고프고 몸은 곤하여 촌보를 옮기기가 어려웠다.
 
490
나는 가까운 동네 어떤 집에 가서, 황해도 연안에 가서 쌀을 사가지고 오다가 북성고지 앞에서 배 파선을 한 서울 청파 사람이라고 말하고 밥을 좀 달라고 하였더니, 주인이 죽 한 그릇을 내다 주었다. 나는 누구에게 정표로 받아서 몸에 지니고 있던 화류면경을 꺼내어 그 집 아이에게 뇌물로 주고 하룻밤 드새기를 청하였으나 거절을 당하였다. 그러고 보니 죽 한 그릇에 엽전 한 냥을 주고 사먹은 셈이 되었다. 그때 엽전 한 냥이면 쌀 한 말 값도 더 되었다. 나는 또 한 집 사랑에 들어갔으나 또 퇴짜를 맞고 하릴없이 방앗간에서 자기로 하였다. 나는 옆에 놓인 짚단을 날라다가 덮고 드러누웠다. 인천 감옥 이태의 연극이 이에 막을 내리고 방앗감 잠이 둘째 막의 개시로구나, 하면서 소리를 내어서 <손무자>와 <삼략>을 외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491
"거지가 글을 다 읽는다."
 
492
하는 것은 상관없으나, 또 어떤 사람이,
 
493
"예사 거지가 아니야. 아까 저 사랑에 온 것을 보니 수상한 사람이야."
 
494
하는 말에는 대단히 켕겼다. 그래서 나는 미친 사람의 모양을 하느라고 귀둥대둥 혼자 욕설을 퍼붓다가 잠이 들었다.
 
495
새벽 일찍 일어나서 버리고개를 향하고 소로로 가다가, 밥을 빌어먹을 생각으로 어떤 집 문전에 섰다. 나는 거지들이 기운차고 넌출지게 밥을 내라고 떠들던 양을 생각하고,
 
496
"밥 좀 주시우."
 
497
하고 불러 보았으나, 내 딴에는 소리껏 외친다는 것이 개가 짖을 만한 소리밖에 안 나왔다. 주인은 밥은 없으니 숭늉이나 먹으라고 숭늉 한 그릇을 내 주었다. 그것을 얻어먹고 또 걸었다.
 
498
오랫동안 좁은 세계에서 살다가 넓은 천지에 나와서 가고 싶은 대로 활활 갈 수 있는 것이 참으로 신통하고 상쾌하였다. 나는 배고픈 줄도 모르고 옥에서 배운 시조와 타령을 하면서 부평, 시흥을 지나 그날 당일로 양화도 나루에 다다랐다. 강만 건너면 서울이건마는 날은 저물고, 배는 고프고, 또 나룻배를 탈래야 뱃삯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동네 서당을 찾아 들어갔다.
 
499
선생과 인사를 청한즉 그는 내가 나이 어리고 의관이 분명치 못함을 봄인지 초면에 하대를 하였다. 나는 정색하고,
 
500
"선생이 이렇게 교만무례하고 어찌 남을 가르치겠소? 내가 일시 운수가 불길하여 길에서 도적을 만나 의관과 행리를 다 빼앗기고 이 꼴로 선생을 대하게 되었소마는 사람을 그렇게 괄시하는 법이 어디 있소. 허, 예절을 알 만한 이를 찾아온다는 것이, 어참, 봉변이로고."
 
501
하고 일변 책하고 일변 빼었다. 선생은 곧 사과하고 다시 인사를 청하였다. 그러고는 그날 밤을 글 토론으로 지내고, 아침에는 선생이 아이 하나에게 편지를 써주기로 나룻배 주인에게 전하여 나를 뱃삯 없이 건너게 하였다.
 
502
나는 옥에서 사귀었던 진오위장을 찾아갔다. 이 사람은 남영희궁에 청지기로 있는 사람으로서, 배오개 유기장이 5, 6인과 짜고 배를 타고 인천 바다에 떠서 백동전을 사주하다가 깡그리 붙들려서 1년 동안이나 나와 함께 옥살이를 하였다. 그들은 내게 생전 못 잊을 신세를 졌노라 하여 날더러 출옥하는 날에는 꼭 찾아달라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503
내가 영희궁을 찾아간 것은 황혼이었다. 진오위장은 마루 끝에 나와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504
"아이고머니, 이게 누구요?"
 
505
하고 버선발로 마당에 뛰어 내려와서 내게 매달렸다. 그리고 내 손을 끌고 방으로 들어가서 내가 나온 곡절을 듣고는 일변 식구들을 불러서 내게 인사를 시키고, 일변 사람을 보내어 예전 공범들을 청해왔다. 그들은 내 행색이 수상하다 하여 '나는 갓을 사오리다.' '나는 망건을 사오겠소.' '나는 두루마기를 내리다.' 하여 한 사람이 한 가지씩 추렴을 모아서 나는 3, 4년 만에 비로소 의관을 하고 나니 저절로 눈물이 떨어졌다. 이렇게 나는 날마다 진오위장 일파와 모여 놀며 며칠을 유련하였다.
 
506
그러는 동안에 나는 조덕근을 두 번이나 찾아 갔으나, 이 핑계 저 핑계 하고 나를 전혀 만나주지 아니하였다. 중죄인인 나를 아는 체하는 것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507
진오위장 집에서 잘 먹고, 잘 놀고, 수일을 쉬어서 여러 사람이 모아주는 노자를 한 짐 잔뜩 걸머지고 삼남 구경을 떠나느라고 동작 나루를 건넜다. 그때에 내 심회가 심히 울적하여 승방뜰이라는 데서부터 술 먹기를 시작하여 매일 장취로 비틀거리고 걷는 길이 수원 오산장에 다다랐을 때에 벌써 한 짐 돈을 다 써버리고 말았다. 나는 오산장에서 서쪽에 있는 김삼척의 집을 찾기로 하였다. 주인은 삼쳑영장을 지낸 사람으로, 아들이 6형제가 있는데, 그 중 맏아들인 김동훈이 인천항에서 장사를 하다가 실패한 관계로 인천옥에서 한 달 정도 고생을 할 때에 나와 절친하게 되었다. 그가 옥에서 나올 때 내 손을 잡고 꼭 후일에 서로 만나기를 약속한 것이었다. 나는 김삼척 집에서 대환영을 받아서 그 아들 6형제와 더불어 밤낮으로 술을 먹고 소리를 하며 며칠을 놀다가 노자까지 얻어가지고 또 길을 떠났다.
 
508
강경에서 공종렬을 찾으니, 그도 인천옥에서 사귄 사람으로서, 그 어머니도 옥에 면회하러 왔을 때에 알았으므로 많은 우대를 받고, 공종렬의 소개로 그의 매부 진선전을 전라도 무주에서 찾은 후, 나는 이왕 삼남에 왔던 길이니 남원에서 김형진을 찾아보리라 하고 이동(귓골)을 찾아갔다. 동네 사람 말이 김형진의 집이 과연 대대로 이 동네에 살았으나, 연전에 김형진이 동학에 들어가 가족을 끌고 도망한 후로는 소식이 없다고 했다. 나는 대단히 섭섭하였다.
 
509
전주 남문 안서에서 약국을 하는 최군선이 자기의 매부라는 말을 김형진에게 들었던 것을 기억하고 찾아갔으나 최는 대단히 냉랭하게, 그가 처남인 것은 사실이나 무거운 짐을 그에게 지우고 벌써 죽었다고 원망조로 말할 뿐이었다. 나는 비감을 누를 수 없어서 부중으로 헤매었다. 마침 그날이 전주 장날이어서 사람이 많았다. 나는 어떤 백목전 앞에 서서 백목을 파는 청년 하나를 보았다. 그의 모습이 김형진과 흡사하기로 그가 흥정을 하여가지고 나오기를 기다려서 붙잡고,
 
510
"당신 김 서방 아니오?"
 
511
하고 물은즉, 그가 그렇다고 하기로 나는 다시,
 
512
"노형이 김형진 씨 계씨 아니시오?"
 
513
하였더니, 그는 무슨 의심이 났는지 머뭇머뭇하고 대답을 못했다. 나는
 
514
"나는 황해도 해주 사는 김창수요. 노형 백씨 생전에 혹시 내 말을 못 들으셨소?"
 
515
하였더니, 그제서야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형이 생전에 노상 내 말을 하였을 뿐 아니라, 임종시에도 나를 못 보고 죽는 것이 한이라고 하였다는 말을 하였다.
 
516
나는 그 청년을 따라서 금구 원평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조그마한 농가였다. 그가 그 어머니와 형수에게 내가 왔다는 말을 고하니 집 안에서는 곡성이 진동하였다. 김형진이 죽은 지 열아흐레째 되는 날이었다.
 
517
나는 궤연(신주를 모신 곳)에 곡하고 늙은 어머니와 젊은 과수(寡守: 남편이 죽은 후 혼자 사는 여자)에게 인사를 하였다. 고인에게는 맹문이라는 8, 9세 되는 아들이 있고, 그의 아우에게는 맹렬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나는 이 집에서 가버린 벗을 생각하여 수일을 더 쉬고 목포로 갔다. 그것도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의 목포는 아직 신개항지여서 관청이 건축도 채 아니 된 엉성한 곳이었다. 여기서 우연히 양봉구를 만났다. 나와 같이 탈옥한 넷 중의 한 사람이다. 그에게서 나는 조덕근이 다시 잡혀서 눈 하나가 빠지고 다리가 부러졌다는 말과, 그때에 당직이던 김가는 아편 인으로 죽었단 말을 들었다. 내게 관한 소문은 못 들었다고 하였다. 양봉구는 약간의 노자를 내게 주고 이곳은 개항장이 되어서 팔도 사람이 다 모여드는 데니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 하여 어서 떠나라고 권하였다.
 
518
나는 목포를 떠나서 광주를 지나, 함평에 이름난 육모정 이 진사 집에 과객으로 하룻밤을 잤다. 이 진사는 부유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육모정에는 언제나 빈객이 많았고, 손님들께 조석을 대접할 때에는 이 진사도 손님들과 함께 상을 받았다. 식상은 주인이나 손님이나 일체 평등이요, 조금도 차별이 없었고, 하인들이 손님을 대하는 태도는 그 주인께 대하는 것과 똑같이 하였다. 이것은 주인 이 진사의 인격의 표현이어서 참으로 놀라운 규모(본보기)요, 가풍이었다.
 
519
육모정은 이 진사의 정자거니와 그 속에는 침실, 식당, 응접실, 독서실, 휴게실 등이 구비되었다. 그때에 글을 읽던 두 학동이 지금의 이재혁, 이재승 형제다.
 
520
나는 하룻밤을 쉬어 떠나려 하였으나 이 진사가 굳이 만류하여 얼마든지 더 묵어서 가라는 말에는 은근한 신정이 품겨 있었다. 나는 주인의 정성에 감동되어 육모정에서 보름을 더 묵었다.
 
521
내가 내일 이 진사 집을 떠난다는 말을 듣고 자기 집으로 청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보다 다소 연장자인 장년의 한 선비로, 내가 육모정에 묵는 동안 날마다 와서 담화하던 사람이었다.
 
522
나는 그의 청을 물리칠 수 없어서 저녁밥을 먹으러 그의 집으로 갔다. 집은 참말 게딱지와 같고 방은 단 한 칸뿐이었다. 그 부인이 개다리소반에 주인과 겸상으로 저녁상을 들여왔다. 주발 뚜껑을 열고 보니 밥은 아니요, 무엇인지 모를 것이었다.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으니 맛이 쓰기가 곰의 쓸개와 같았다. 이것은 쌀겨와 팥으로 만든 겨범벅이었다. 주인은 내가 이 진사 집에서 매일 흰 밥에 좋은 반찬을 먹는 것을 보았지마는 조금도 안되었다는 말도 없고 미안하다는 빛도 없이 흔연히 저도 먹고 내게도 권하였다. 나는 그의 높은 뜻과 깊은 정에 감격하여 조금도 아니 남기고 다 먹었다.
 
523
나는 함평을 떠나 강진, 고금도, 완도를 구경하고 장흥을 거쳐 보성으로 갔다. 보성에서는 송곡면(지금은 득량면이라고 고쳤다고 한다) 득량리에 사는 종씨 김광언이라는 이를 만나 그 문중의 여러 댁에서 40여 일이나 묵고, 떠날 때에는 그 동네에 사는 선씨 부인한테 필낭 하나를 신행(贐行: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주는 시문이나 물건) 선물로 받았다.
 
524
보성을 떠나 나는 화순, 동복, 담양을 두루 구경하고 하동 쌍계사에 들러 칠불아자방(七佛亞字房:칠불암의 아자방)을 보고 다시 충청도로 올라와 계룡산 갑사에 도착한 것은 감이 벌겋게 익어 달리고, 낙엽이 날리는 늦은 가을이었다. 나는 절에서 점심을 사먹고 앉았더니 동학사로부터 왔노라고 점심을 시켜먹는 유산객 하나가 있었다. 통성명을 한즉, 그는 공주에 사는 이 서방이라고 하였다. 연기는 40이 넘은 듯 한데 그가 들려주는 자작의 시로 보거나 그의 말로 보거나 퍽 비관을 품은 사람이었다. 비록 초면이라도 피차가 다 허심탄회한 말이 서로 맞았다. 그가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기로, 나는 개성에 생장하여 장사를 업으로 삼다가 실패하여 홧김에 강산 구경을 떠나서 삼남으로 돌아다닌 지가 1년이 장근하노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마곡사가 40리밖에 아니 되니 같이 가서 구경하자고 하였다. 마곡사라면 내가 어려서 동국명현록을 읽을 때에 서 화담 경덕이 마곡사 팥죽 가마에 중이 빠져 죽는 것을 대궐 안에 동지 하례를 하면서 보았다는 말에서 들은 일이 있었다. 나는 이 서방과 같이 마곡사를 향하여 계룡산을 떠났다.
 
525
길을 걸으면서 이 서방은 홀아비라는 것이며, 사숙에 훈장으로 여러 해 있었다는 것이며, 지금은 마곡사에 들어가 중이 되려 하니 나도 같이 하면 어떠냐고 하였다. 나도 중이 될 생각이 없지는 아니하나 돌연히 일어난 문제라 당장에 대답은 아니하였다.
 
526
마곡사 앞 고개를 올라선 때는 벌써 황혼이었다. 산에 가득 단풍이 누릇불긋하여 '유자비추풍(遊子悲秋風)'의 감회를 깊게 하였다. 마곡사는 저녁 안개에 잠겨 있어서 풍진에 더럽힌 우리의 눈을 피하는 듯하였다. 뎅, 뎅, 인경이 울려왔다. 저녁 예불을 알리는 소리다. 일체 번뇌를 버리라 하는 것같이 들렸다.
 
527
이 서방이 다시 다져 물었다.
 
528
"김 형, 어찌하시려오? 세사를 다 잊고 나와 같이 중이 됩시다."
 
529
나는 웃으며,
 
530
"여기서 말하면 무엇하오? 중이 되려는 자와 중을 만드는 자와 마주 대한 자리에서 작정합시다."
 
531
이렇게 대답하였다.
 
532
우리는 안개를 헤치고 고개를 내려서 산문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갔다. 걸음마다 내 몸은 더러운 세계에서 깨끗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옮아가는 것이었다. 매화당을 지나 소리쳐 흐르는 내 위에 걸린 긴 나무다리를 건너 심검당에 들어가니, 머리 벗어진 노승 한 분이 그림폭을 펴놓고 보다가 우리를 보고 인사했다. 이 서방은 전부터 이 노승과 숙면이었고, 그는 포봉당이라는 이였다. 이 서방이 나를 심검당에 두고 자기는 다른 데로 갔다. 이윽고 나를 위한 밥이 나왔다. 저녁상을 물리고 앉았노라니 어떤 하얗게 센 노승 한 분이 와서 내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나는 거짓말로 본래 송도 태생이오며, 조실부모하고, 강근지친도 없어서 혈혈단신이 강산 구경이나 다니노라고 말하였다. 그런즉 그 노승은 속성은 소씨요, 익산 사람으로서 머리를 깎고 노승이 된 지가 50년이나 되노라 하고, 은근히 나더러 상좌가 되기를 청하였다. 나는 본시 재질이 둔탁하고 학식이 천박하여 노사에게 누가 될까 저어하노라 하고 겸사하였더니, 그는 내가 상좌만 되면 고명한 스승의 밑에서 불학을 공부하여 장차 큰 강사가 될지 아느냐고 강권하였다.
 
533
이튿날 이 서방은 벌써 머리를 달걀같이 밀고 와서 내게 문안을 하고 하는 말이, 하은당이 이 절 안에 갑부인 보경 대사의 상좌이니 내가 하은당의 상좌만 되면 내가 공부하기에 학비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어서 삭발하기를 권하였다. 나도 하룻밤 청정한 생활에 모든 세상 잡념이 식은 재와 같이 되었으므로 출가하기로 작정하였다.
 
534
얼마 후에 나는 놋칼을 든 사제 호덕삼을 따라서 냇가로 나아가 쭈그리고 앉았다. 덕삼은 삭발진언을 송알송알 부르더니 머리가 선뜩하며 내 상투가 모래 위에 뚝 떨어졌다. 이미 결심을 한 일이건마는 머리카락과 함께 눈물이 떨어짐을 금할 수 없었다.
 
535
법당에서는 종이 울렸다. 나의 득도식을 알리는 것이었다. 산내 각 암자로부터 착가사 장삼한 수백 명의 승려가 모여들고, 향적실에는 공양주가 불공밥을 짓고 있었다. 나도 검은 장삼, 붉은 가사를 입고 대웅보전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곁에서 덕삼이가 배불하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은사 하은당이 내 법명을 원종이라고 명하여 불전에 고하고, 수계사 용담회상이 경문을 낭독하고 내게 오계를 준다. 예불의 절차가 끝난 뒤에는 보경 대사를 위시하여 산중에 나이 많은 여러 대사들께 차례로 절을 드렸다. 그리고 날마다 절하는 공부를 하고 진언집을 외우고 초발심자경문을 읽고 중의 여러 가지 예법과 규율을 배웠다. 정신 수양에 대하여서는,
 
536
'승행에는 하심이 제일이라'
 
537
하여 교만한 마음을 떼는 것을 주로 삼았다. 사람에게 대하여서만이 아니라 짐승, 벌레에 대하여서까지도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어젯밤 나더러 중이 되라고 교섭할 때에는 그렇게 공손하던 은사 하은당이 오늘 낮부터는,
 
538
"얘, 원종아!"
 
539
하고 막 해라를 하고,
 
540
"이놈 생기기를 미련하게 생겨먹었으니 고명한 중은 될까 싶지 않다. 상판대기가 저렇게도 밉게 생겼을까. 어서 가서 나무도 해오고 물도 길어!"
 
541
하고 막 종으로 부리려 든다. 나는 깜짝 놀랐다. 중이 되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내가 망명객이 되어 사방으로 유리하는 몸은 되었지마는, 영웅심도 있고, 공명심도 있고, 평생에 한이 되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양반이 되어도 월등한 양반이 되어서 우리 집을 멸시하는 양반들을 한번 내려다보겠다는 생각을 가슴속에 감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중놈이 되고 보니 이러한 허영적인 야심은 불씨 문중에서는 터럭끝만치도 용서하지 못하는 악마여서, 이러한 악념이 마음에 움틀 때에는 호법선신의 힘을 빌려서 일체법공의 칼로 뿌리째 베어버려야 했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데를 들어왔나 하고 혼자 웃고 혼자 탄식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기왕 중이 되었으니 하라는 대로 순종할 길 밖에 없었다. 나는 장작도 패고 물도 긷고 하라는 것은 다 하였다.
 
542
하루는 물을 길어오다가 물통 하나를 깨뜨린 죄로 스님한테 눈알이 빠지도록 야단을 맞았다. 어떻게 심하게 스님이 나를 나무라셨는지 보경당 노승님께서 한탄을 하셨다.
 
543
"전자에도 남들이 다 괜찮다는 상좌를 들여 주었건마는 저렇게 못 견디게 굴어서 다 내어 쫓더니, 이제 또 저렇게 하니 원종인들 오래 붙어 있을 수 있나. 잘 가르치면 제 앞쓸이는 할 만하건마는."
 
544
하고 하은당을 책망하셨다. 이것을 보니 나는 적이 위로가 되었다.
 
545
나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면 다른 사미들과 같이 예불하는 법이며, <천수경>, <심경> 같은 것을 외고, 또 수계사이신 용담 스님께 <보각서장>을 배웠다. 용담은 당시 마곡에서 불학만이 아니라 유가의 학문도 잘 아시기로 유명한 이였다. 학식만이 아니라, 위인이 대체를 아는 이여서 누구나 존경할 만한 높은 스승이었다.
 
546
용담께 시주하는 상좌 혜명이라는 젊은 불자가 내게 동정이 깊었고, 또 용담 스님도 하은당의 가풍이 괴상함을 가끔 걱정하시면서 나를 위로하셨다. '견월망지(見月忘指)'라 달을 보면 그만이지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야 아무려면 어떠냐 하는 말씀을 하시고, 또 칼날 같은 마음을 품어 성나는 마음을 끊으라 하여 '인(忍)'자의 이치를 가르쳐 주셨다. 하은당이 심하게 나를 볶으시는 것이 모두 내 공부를 도우심으로 알라는 뜻이다.
 
547
이 모양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반년의 세월이 흘러서 무술년도 다 가고 기해년이 되었다. 나는 고생이 되지마는 다른 중들은 나를 부러워하였다. 보경당이나 하은당이 다 70, 80 노인이시니, 그분네만 작고하시면 그 많은 재산이 다 내 것이 된다는 것이었다. 추수기를 보면 백미로만 받는 것이 200석이나 되고, 돈과 물건으로 있는 것이 수십만 냥이나 되었다. 그러나 나는 청정적멸의 도법에 일생을 바칠 생각이 생기지 아니하였다. 인천옥에서 떠난 후에 소식을 모르는 부모님도 그 후에 어찌되셨는지 알고 싶고, 나를 구해내려다가 집과 몸을 아울려 망쳐버린 김주경의 간 곳도 찾고 싶고, 해주 비동에 고 후조 선생(후조는 고 선생의 당호다)도 뵙고 싶고, 그때에 천주학을 한다고 해서 대의의 반역으로 곡해하고 불평을 품고 떠난 청계동의 안 진사를 찾아 사과도 할 마음이 때때로 흉중에 오락가락하여 보경당의 재물에 탐을 낼 생각은 꿈에도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548
그래서 하루는 보경당께 뵈옵고,
 
549
"소승이 기왕 중이 된 이상에는 중으로서 배울 것을 배워야 하겠사오니, 금강산으로 가서 경공부를 하고 일생에 충실한 불자가 되겠나이다."
 
550
하고 아뢰었다.
 
551
보경당은 내 말을 들으시고,
 
552
"내 벌써 그럴 줄 알았다. 네 원이 그런 데야 할 수 있느냐."
 
553
하시고 즉석에서 하은당을 부르셔서 한참 동안 서로 다투시다가 마침내 나에게 세간을 내어주셨다. 나는 백미 열 말과 의발을 받아가지고 하은당을 떠나 큰 방으로 옮아왔다. 그날부터 나는 자유였다. 나는 그 쌀 열 말을 팔아서 노자를 만들어가지고 마곡을 떠나 서울로 향하였다.
 
554
수일을 걸어 서울에 도착한 것은 기해년 봄이었다. 그때까지 서울 성 안에는 승니를 들이지 않는 국금(國禁)이 있었다. 나는 문 밖으로 이 절 저 절 돌아다니다가 서대문 밖 새 절에 가서 하루 묵는 중에 사형 혜명을 만났다. 그는 화장사에 은사를 찾아가는 길이라 하고, 나는 금강산에 공부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혜명과 작별하고 나는 풍기 혜정이라는 중을 만났다. 그가 평양 구경을 가는 길이라 하기로 나와 동행하자고 하였다. 임진강을 건너 송도를 구경하고 나는 해주 감영을 보고 평양으로 가자 하여 혜정을 이끌고 해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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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산 신광사 북암이라는 암자에 머물면서 나는 혜정에게 약간 내 사정을 통하고, 그에게 텃골 집에 가서 내 부모와 비밀히 만나 그 안부를 알아오되, 내가 잘 있단 말만 아뢰고 어디 있단 것은 알리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이렇게 부탁해 놓고 혜정의 회보만 기다리고 있었더니 바로 4월 29일 석양에 혜정의 뒤를 따라 부모님 양주께서 오셨다. 혜정에게서 내 안부를 들으신 부모님은, 네가 내 아들이 있는 곳을 알 터이니 너만 따라가면 내 아들을 볼 것이다 하고 혜정을 따라 나서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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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암에서 하루를 묵어서 양친을 모시고 나는 중의 행색으로 혜정과 같이 평양 길을 떠났다. 길을 가면서 한마디씩 하시는 말씀을 종합건대, 무술년 3월 초아흐렛날 부모님은 해주 본향에 돌아오셨으나 순검이 뒤따라와서 두 분을 다 잡아다가 3월 13일 인천옥에 가두었다. 어머니는 얼마 아니하여 놓여나시고, 아버지는 석 달 후에야 석방되셨다. 그로부터 두 분은 고향에 계시면서 내 생사를 몰라 주야로 마음을 졸이셨고, 꿈자리만 사나워도 종일 식음을 전폐하셨다. 그러하신지 이태만에 혜정이 찾아간 것이었다. 만나고 보니 내가 살아있는 것은 다행하나 중이 된 것은 슬프다고 하셨다.
 
557
5월 초나흗날 평양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여관에서 쉬고, 이튿날인 단옷날에 모란봉 그네 뛰는 구경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내 앞길에 중대한 영향을 준 사람을 만났다.
 
558
관동 골목을 지나노라니 어떤 집 사랑에, 머리에 지포관을 쓰고 몸에 심수의를 입고 두 무릎을 모으고 점잔하게 꿇어앉아 있는 사람을 보았다. 나는 문득 호기심을 내어 한번 수작을 붙여보리라 하고 계하에 이르러,
 
559
"소승 문안드리오."
 
560
하고 합장하고 허리를 굽혔다. 그 학자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들어오라고 하였다. 들어가 인사를 한즉 그는 간재 전우의 문인 최재학으로, 호를 극암이라 하여 상당이 이름이 높은 이였다. 나는 공주 마곡사의 중이라는 말과 이번 오는 길에 천안 금곡에 전간재 선생을 찾았으나 마침 출타하신 중이어서 못 만났다는 말과, 이제 우연히 고명하신 최 선생을 뵈오니 이만 다행이 없다는 말을 하고 그와 몇 마디 도리에 관한 문답을 하였더니 최 선생은 나를 옆에 앉은 어떤 수염이 좋고 위풍이 늠름한 노인에게 소개하였다. 그는 당시 평양 진위대에 참령으로 있는 전효순이었다. 소개가 끝난 뒤에 최극암은 전 참령에게,
 
561
"이 대사는 학식이 놀라우니 영천암 방주를 내이시면 영감 자제와 외손들의 공부에 유익하겠소. 영감 의향이 어떠시오?"
 
562
하고 나를 추천한다.
 
563
전 참령은,
 
564
"거 좋은 말씀이오. 지금 곁에서 듣는 바에도 대사의 고명하심을 흠모하오. 대사의 의향은 어떠시오? 내가 자식놈 하나와 외손자놈들을 최 선생께 맡겨서 영천암에서 공부를 시키고 있는데, 지금 있는 주지승이 성행이 불량하여 술만 먹고 도무지 음식 제절을 잘 돌아보지를 아니하여서 곤란 막심하던 중이오."
 
565
하고 내 허락을 청하였다. 나는 웃으며
 
566
"소승의 방탕이 본래 있던 중보다 더할지 어찌 아시오?"
 
567
하고 한 번 사양했으나 속으로 다행히 여겼다. 부모님을 모시고 구걸하기도 황송하던 터이라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싶었던 까닭이다.
 
568
전 참령은 평양서윤 홍순욱을 찾아가더니 얼마 아니하여 '승 원종으로 영천사 방주를 차정함'이라는 첩지를 가지고 와서 즉일로 부임하라고 나를 재촉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영천암 주지가 되었다.
 
569
영천암은 평양서 서쪽으로 약 40리, 대보산에 있는 암자로서, 대동강 넓은 들과 평양을 바라보는 경치 좋은 곳에 있었다. 나는 혜정과 같이 영천암으로 가서 부모님을 조용한 방에 거처하시게 하고, 나는 혜정과 같이 한 방을 차지하였다. 학생이란 것은 전효순의 아들 병선, 그의 사위 김윤문의 세 아들 장손, 중손, 차손과 그 밖에 김동원 등 몇몇이 있었다. 전효순은 간일하여 좋은 음식을 평양에서 지어 보내고, 또 산 밑 신흥동에 있는 육고에서 영천사에 고기를 대기로 하여 나는 매일 내려가서 고기를 한 짐씩 져다가 끓이고 굽고 하여 중의 옷을 입은 채로 터놓고 막 먹었다. 때때로 최재학을 따라 평양에 들어가서도 사숭재에서 시인 황경환 등과 시화나 하고 고기로 꾸미한 국수를 막 먹었다. 그리고 염불을 아니 하고 시만 외우니 불가에서 이르는바 '손에 돼지 대가리를 들고 입으로 경을 읽는' 중이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서 시승 원종이라는 칭호는 얻었으나 같이 와 있던 혜정에게는 실망을 주었다. 혜정은 내 신심이 쇠하고 속심만 증장하는 것을 보고 매우 걱정하였으나 고기 안주에 술 취한 중의 귀에 그런 충고가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는 내 불심이 회복되기 어려운 것을 보고 영천암을 떠난다 하여 행리를 지고 나서서 산을 내려가다가는 차마 나와 작별하기가 어려워서 되돌아오기를 달포나 하다가 마침내 경상도로 간다고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도 내가 다시 머리를 깎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셔서 나는 머리를 기르고 중노릇을 하다가 그 해 가을도 늦어서 나는 다리를 들여서 상투를 짜고 선비의 의관을 하고 부모를 모시고 해주 본향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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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돌아온 나를 환영하는 사람은 없고, 창수가 돌아왔으니 또 무슨 일 저지르기를 하지나 않나 하고 친한 이는 걱정하고 남들은 비웃었다. 그 중에서도 준영 계부는 아무리 하여도 나를 신임하지 아니하셨다. 그는 지금 마음을 잡아서 그 중씨(둘째 형)인 아버지께도 공손하고 농사도 잘하시건마는 내게 대하여는 할 수 없는 난봉으로 아시는 모양이어서,
 
571
'되지 못한 그놈의 글 다 내버리고 부지런히 농사를 한다면 장가도 들여 주고 살림도 시켜주지만, 그렇지 아니한다면 나는 몰라요."
 
572
하고 부모님께 나를 농군이 되도록 명령하시기를 권하셨다. 그러나 부모님은 나를 농군으로 만드실 뜻은 없으셔서, 그래도 무슨 큰 뜻이 있어 장래에 이름난 사람이 되려니 하고 내게 희망을 붙이시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내가 농군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가 아버지 형제분 사이에 논쟁이 되고 있는 동안에 기해년도 다 가고 경자년 봄 농사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573
계부는 조카인 나를 꼭 사람을 만들려고 결심하신 모양이어서 새벽마다 우리 집에 오셔서 내 단잠을 깨워서 밥을 먹여가지고는 가래질 터로 끌고 가셨다. 나는 며칠 동안 순순히 계부의 명령에 복종하였으나 아무리 하여도 마음이 붙지 아니하여 몰래 강화를 향하여 고향을 떠나고 말았다. 고 선생과 안 진사를 못 찾고 가는 것이 섭섭하였으나 아직 내어놓고 다닐 계제도 아니므로 생소한 곳으로 가기로 한 것이었다.
 
574
나는 김두래라고 변명하고 강화에 도착하여서 남문 안 김주경의 집을 찾으니 김주경은 어디 갔는지 소식이 없다 하고 그 셋째 아우 진경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나를 접대하였다.
 
575
"나는 연안 사는 김두래일세. 자네 백씨와 막역한 동지일러니 수년간 소식을 몰라서 전위해 찾아온 길일세."
 
576
하고 나를 소개하였다. 경진은 나를 반가이 맞아 그동안 지낸 일을 말하였다. 그 말에 의하면 주경은 집을 떠난 후로 3, 4년이 되어도 음신이 없어서 진경이가 형수를 모시고 조카들을 기르고 있다고 했다. 집은 비록 초가나, 본래는 크고 넓게 썩 잘 지었는데, 여러 해 거두지를 아니하여 많이 퇴락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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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는 평소에 주경이 앉았던 보료가 있고, 신의를 어기는 동지를 친히 벌하기에 쓰던 것이라는 나무 몽둥이가 벽상에 걸려 있었다. 나와 노는 일곱 살 먹은 아이가 주경의 아들인데 이름이 윤태라고 했다.
 
578
나는 진경에게 모처럼 그 형을 찾아왔다가 그저 돌아가기가 섭섭하니 얼마 동안 윤태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소식을 기다리고 싶다고 하였더니 진경은, 그러지 않아도 윤태와 그 중형(仲兄: 둘째 형)의 두 아들이 글을 배울 나이가 되었건마는 적당한 선생이 없어서 놀리고 있었다는 말을 하고, 곧 그 중형 무경에게로 가서 조카 둘을 데려왔다. 나는 이날부터 촌 학구(글방의 스승)가 된 것이었다. 윤태는 <동몽선습>, 무경의 큰아들은 <사략초권>, 작은놈은 <천자문>을 배우기로 하였다. 내가 글을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나서 차차 학동이 늘어서 한 달이 못 되어 30명이나 되었다. 나는 심혈을 다하여 가르쳤다.
 
579
이렇게 한 지 석 달을 지낸 어느 날, 진경은 이상한 소리를 혼자 중얼거렸다.
 
580
"글쎄, 유인무도 이상한 사람이야. 김창수가 왜 우리 집에를 온담."
 
581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에 가슴이 뜨끔하였으나 모르는 체하였다. 그래도 진경은 내게 설명하였다. 그 말은 이러하였다.
 
582
유인무는 부평 양반으로서, 연전에 상제로 읍에서 삼십 리쯤 되는 곳에 이우해 와서 3년쯤 살다가 간 사람인데, 그 때에 김주경과 반상의 별을 초월하여 서로 친하게 지낸 일이 있었는데, 김창수가 인천옥을 깨뜨리고 도망한 후에 여러 번째 해주 김창수가 오거든 급히 알려달라는 편지를 하였는데, 이번에 통진 사는 이춘백이라는 김주경과도 친한 친구를 보내니 의심 말고 김창수의 소식을 말하라는 것이었다.
 
583
나는 진경이가 내 행색을 아나 떠보려고,
 
584
"김창수가 그래 한 번도 안 왔나?"
 
585
하고 물었다. 진경은 딱하다는 듯,
 
586
"형장도 생각해보시오. 여기서 인천이 지척인데 피신해 다니는 김창수가 왜 오겠소?"
 
587
한다.
 
588
"그럼 유인무가 왜놈의 염탐꾼인 게지."
 
589
나는 이렇게 진경에게 물어보았다. 진경은,
 
590
"아니오. 유인무라는 이는 그런 양반이 아니오. 친히 뵈온 적은 없으나, 형님 말씀이 유 생원은 보통 벼슬하는 양반과는 달라서 학자의 기풍이 있다고 하오."
 
591
하고 유인무의 인물을 극구 칭송한다. 나는 그 이상 묻는 것도 수상쩍을 것 같아서 그만하고 입을 다물었다.
 
592
이튿날 조반 후에 어떤 키가 후리후리하고 얼굴이 숨숨 얽은, 50세나 되었음직한 사람이 서슴지 않고 사랑으로 들어오더니, 내 앞에서 글을 배우고 있던 윤태를 보고,
 
593
"그 새에 퍽 컸구나. 안에 들어가서 작은아버지 나오시래라, 내가 왔다고."
 
594
하는 양이 이춘백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595
"백씨 소식 못 들었지?"
 
596
"아직 아무 소식 없습니다."
 
597
"허어, 걱정이로군. 유인무의 편지 보았지?"
 
598
"네, 어제 받았습니다."
 
599
주객 간에 이런 문답이 있고는 진경이가 장지를 닫아서 내가 앉아 있는 방을 막고 둘이서만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는 아니 듣고 두 사람의 말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문답은 이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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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무란 양반이 지각이 없으시지, 김창수가 형님도 안 계신 우리 집에 왜 오리라고 자꾸 편지를 하는 거야요?"
 
601
"자네 말이 옳지마는 여기밖에 알아볼 데가 없지 아니한가. 그가 해주 본향에 갔을 리는 없고, 설사 그 집에서 김창수 있는 데를 알기로서니 발설을 할 리가 있겠나. 유인무로 말하면 아랫녘에 내려가 살다가 서울 다니러 왔던 길에 자네 백씨가 김창수를 구해내려고 가산을 탕진하고 부지거처로 피신했다는 말을 듣고 자네 백씨의 의기를 장히 여겨서 아무리 하여서라도 김창수를 건져내어야겠다고 결심하였으나, 법으로 백씨가 할 것을 다 하여도 안 되었으니 인제 힘으로 할 수 밖에 없다고 하여서 13명 결사대를 조직하였던 것일세.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야. 그래서 인천항 중요한 곳 7, 8처에 석유를 한 통씩 지고 들어가서 불을 놓고 그 소란 통에 옥을 깨뜨리고 김창수를 살려내기로 하고, 유인무가 날더러 두 사람을 데리고 인천에 감옥 형편을 알아오라 하기로 가본즉, 김창수는 벌써 사흘 전에 다른 죄수 네 명을 데리고 달아난 뒤란 말이야. 일이 이렇게 된 것일세. 그러니 유인무가 자네 백씨나 김창수의 소식을 알고 싶어할 것이 아닌가. 그래 정말 김창수한테서 무슨 편지라도 온 것이 없나?"
 
602
"편지도 없습니다. 편지를 보내고 회답을 기다릴 만하면 본인이 오지요."
 
603
"그도 그러이."
 
604
"이 생원께서는 인제 서울로 가시렵니까?"
 
605
"오늘은 친구나 몇 찾고 내일 가겠네. 떠날 때에 또 옴세."
 
606
이러한 문답이 있고 이춘백은 가버렸다. 나는 유인무를 믿고 그를 찾기로 결심하였다. 내게 이처럼 성의를 가진 사람을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설사 그가 성의를 가장한 염탐꾼일는지 모른다 하여도 군자는 가기이방(可欺以方)이라, 의리로 알고 속은 것이 내 허물은 아니다. 이만큼 하는 데도 안 믿는다면 그것은 나의 불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진경에게 이튿날 이춘백이 오거든 나를 그에게 소개하기를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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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에 나는 진경에게 내가 김창수라는 것을 자백하고, 유인무를 만나기 위하여 이춘백을 따라서 떠날 것을 말하였다. 진경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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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이 과시 그러시면 제가 만류를 어찌 합니까."
 
609
하고 인천옥에 사령반수로서 처음으로 김주경에게 내 말을 알린 최덕만은 작년에 죽었다는 말을 하고, 학동들에게는 선생님이 오늘 본댁에를 가시니 다들 집으로 돌아가라 하여 돌려보내었다.
 
610
이윽고 이춘백이 왔다. 진경은 그에게 나를 소개하였다. 나도 서울을 가니 동행하자고 하였더니 이춘백은 보통 길동무로 알고 좋다고 하였다. 진경은 춘백의 소매를 끌고 뒷방에 들어가서 내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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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나는 이춘백과 함께 진경의 집을 떠났다. 남문통에는 30명 학동들과 그 학부형들이 길이 메이도록 모여서 나를 전송하였다. 내가 도무지 아무 훈료도 아니 받고 심혈을 기울여서 가르친 것이 그들의 마음에 감동을 준 모양이어서 나는 기뻤다. 우리는 당일로 공덕리 박 진사 태병의 집에 도착하였다. 이춘백이 먼저 안사랑으로 들어가서 얼마 있더니 키는 중키가 못되고 얼굴은 볕에 그을려 거무스름하고 망건에 검은 갓을 쓰고 검소한 옷을 입은 생원 한 분이 나와서 나를 방으로 맞아들였다.
 
612
"내가 유인무요. 오시기에 신고(辛苦)하셨소. 남아하처불상봉(男兒何處不相逢)이라더니 마침내 창수 형을 만나고 말았소."
 
613
하고 유인무는 희색이 만면하여 춘백을 보며,
 
614
"무슨 일이고 한두 번 실패한다손 낙심할 것이 아니란 말일세. 끝끝내 구하면 반드시 얻는 날이 있단 말야. 전일에도 안 그러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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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말에서 나는 그네가 나를 찾던 심경을 엿볼 수가 있었다.
 
616
나는 유인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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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김주경 댁에서 선생이 나 같은 사람을 위하여 허다한 근로를 하신 것을 알았고, 오늘 존안을 뵈옵거니와, 세상에서 침소봉대로 전하는 말을 들으시고 이제 실물로 보시니 낙심되실 줄 아오. 부끄럽소이다."
 
618
하였다.
 
619
"내가 내 과거를 검사하였더니, 용두사미란 말요."
 
620
유인무는,
 
621
"뱀의 꼬리를 붙들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보겠지요."
 
622
하고 웃었다.
 
623
주인 박태병은 유인무와 동서라고 하였다. 나는 박 진사 집에서 저녁을 먹고 문 안 유인무의 숙소로 가서 거기서 묵으며 음식점에 가서 놀기도 하고 구경도 하고 돌아다녔다. 며칠이 지나서 유인무는 편지 한 장과 노자를 주어 나를 충청도 연산 광이다리 도림리 이천경의 집으로 지시하였다. 이천경은 흔연히 나를 맞아서 한 달이나 잘 먹이고 잘 이야기하다가, 또 편지 한 장과 노자를 주어서 나를 전라도 무주읍에서 삼포를 하는 이시발에게 보냈다. 이시발의 집에서 하루를 묵고, 또 이시발의 편지를 받아가지고 지례군 천곡 성태영을 찾아갔다. 성태영의 조부가 원주 목사를 지냈으므로 성원주 댁이라고 불렀다. 대문으로 들어서니 수청방, 상노방에 하인이 수십 명이요, 사랑에 앉은 사람들은 다 귀족의 풍이 있었다. 주인 성태영이 내가 전하는 이시발의 편지를 보더니 나를 크게 환영하여 상좌에 앉히니 하인들의 대우가 더욱 융숭하였다. 성태영의 자는 능하요, 호는 일주였다. 성태영은 나를 이끌고 혹은 산에 올라 나물을 캐며, 혹은 물에 나아가 고기를 보는 취미 있는 소일을 하고, 혹은 등하에 고금사를 문답하여 어언 일삭이 되었는데, 하루는 유인무가 성태영의 집에 왔다. 반가이 만나서 성태영 집에서 하룻밤을 같이 자고, 이튿날 아침에 같은 무주 읍내에 있는 유인무의 집으로 같이 가서 그로부터는 거기서 숙식을 하였다. 유인무는 내가 김창수라는 본명으로 행세하기가 불편하리라 하여 이름은 거북 구(龜)자 외자로 하고, 자를 연상, 호를 연하라고 지어주었다. 그리고 나를 부를 때에는 연하라는 호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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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무는 큰딸은 시집을 가고 집에는 아들 형제가 있는데, 맏이의 이름은 한경이었고, 무주 군수 이탁도 그와 연척인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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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무는 그동안 나를 이리저리로 돌린 연유를 설명하였다. 이천경이나 이시발이나 성태영이나 유인무와는 다 동지여서, 새로운 인물을 얻으면 내가 당한 모양으로 이 집에서 한 달, 저 집에서 얼마, 이 모양으로 동지들의 집으로 돌려서 그 인물을 관찰하고, 그 결과를 종합하여 그 인물이 벼슬하기에 합당하면 벼슬을 시키고, 장사나 농사에 합당하면 그것을 시키도록 약속이 되어 있던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시험의 결과로 아직 학식이 천박하니 공부를 더 시키도록 하고, 또 상놈인 내 문벌을 높이기 위하여 내 부모에게 연산 이천경의 가대를 주어 거기 사시게 하고 인근 몇 양반과 결탁하여 우리 집을 양반 축에 넣자는 것이었다.
 
626
유인무는 이런 설명을 하고,
 
627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문벌이 양반이 아니고는 일을 할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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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한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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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인무의 깊은 뜻에 감사하면서 고향으로 가서 2월까지 부모님을 모시고 연산 이천경의 가대로 이사하기로 작정하였다. 유인무는 내게 편지 한 장을 주어서 강화 버드러지 주 진사 윤호에게로 보내었다. 나는 김주경 집 소식을 염문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주 진사는 내게 백동전으로 4천 냥을 내어 주고 노자를 삼으라고 하였다. 대체 유인무의 동지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고, 그들은 편지 한 장으로 만사에 서로 어김이 없었다. 주 진사 집은 바닷가여서 동짓달인데도 아직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생선이 흔하여서 수일간 잘 대접을 받았다. 나는 백동전 4000냥을 전대에 넣어서 칭칭 몸에 둘러 감고 서울을 향하여 강화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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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와서 유인무의 집에 묵다가 어느 날 밤에 아버지께서 황천이라고 쓰라시는 꿈을 꾸고 유인무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지난 봄에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계시다가 조금 나으신 것을 뵙고 떠나서 서울에 와서 탕약 보제를 지어 우편으로 보내드리고 이내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던 차에, 이러한 흉몽을 꾸니 하루도 지체할 수가 없어서 그 이튿날로 해주 길을 떠났다. 나흘 만에 해주읍 비동 고 선생을 뵈오니 지나간 4, 5년간에 그다지 노쇠하셨는지, 돋보기가 아니고는 글을 못 보시는 모양이었다. 나와 약혼하였던 선생의 장손녀는 청계동 김사집이란 어떤 농가 며느리로 시집을 보내었다 하고, 나더러 아재라고 부르던 작은 손녀가 벌써 10여 세가 된 것이, 나를 알아보고 여전히 아재라고 부르는 것이 감개무량하였다. 내가 왜를 죽인 일을 고 선생께서 유의암(유인석)에게 말씀하여 유의암이 그의 저서인 <소의신편>의 속편에 나를 의기남아라고 써넣었다는 말씀도 하셨다. 의암이 의병에 실패하고 평산으로 왔을 때, 고 선생은 내가 서간도에 다녀왔을 때에 보고하던 것을 말씀하여 의암이 그리로 가서 근거를 정하고 양병하기로 하였다는 말씀도 하셨다. 의암이 거기서 공자상을 모시고 무사를 모아서 훈련하니 나도 그리로 감이 어떠나 하셨으나,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狄)이란 고 선생 일류의 사상은 벌써 나를 움직일 힘이 없었다. 나는 내 신사상을 힘써 말하였으나, 고 선생의 귀에는 그것이 들어가지 아니하는 모양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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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도 개화꾼이 되었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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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실 뿐이었다. 나는 서양 문명의 힘이 위대하다는 것을 말하고, 이것은 도저히 상투와 공자왈 맹자왈만으로는 저항할 수 없으니 우리나라에서도 그 문명을 수입하여 신교육을 실시하고 모든 제도를 서양식으로 개혁함이 아니고는 국맥을 보존할 수 없는 연유를 설명하였으나,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이적의 도는 좇을 수 없다 하여 내 말을 물리치시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선생은 이미 나와는 딴 시대 사람이었다. 그러나 고 선생 댁에서는 성냥 하나라도 외국 물건이라고는 쓰지 않는 것이 매우 고상하게 보였다. 고 선생을 모시고 하룻밤을 쉬고 이튿날 떠난 것이 선생과 나의 영결이 되고 말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 선생은 그 후 충청도 제천의 어느 일가집에서 객사하셨다고 한다. 슬프고 슬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까지 30여 년에 나의 용심과 처사에 하나라도 옳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온전히 청계동에서 받은, 선생의 심혈을 쏟아서 구전심수하신 교훈의 힘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 자애가 깊으신 존안을 뵈올 수 없으니, 아아, 슬프고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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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 선생을 하직하고 떠나서 당일로 텃골 본집에 다다르니 황혼이었다. 안마당에 들어서니 어머니께서 부엌으로 나오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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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네가 오는구나. 아버지 병세가 위중하시다. 아까 아버지가 이 애가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왜 뜰에 서서 있느냐 하시기로 헛소리로만 여겼더니 네가 정말 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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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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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급히 들어가 뵈오니 아버지께서 반가워하시기는 하나 병세는 과연 위중하였다. 나는 정성껏 시탕을 하였으나 약효를 보지 못하고 열나흘만에 아버지는 내 무릎을 베고 돌아가셨다. 내 손을 꼭 쥐셨던 아버지의 손에 힘이 스르르 풀리시더니 곧 운명하셨다.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나는 나의 평생의 지기인 유인무, 성태영 등의 호의대로 부모님을 연산으로 모시고 가서 만년에나 강씨, 이씨에게 상놈 대우를 받던 뼈에 사무치는 한을 면하시게 할까 하고 속으로 기대하였더니, 이제 아주 다시 못 돌아오실 길을 떠나시니 천고의 유한이다.
 
637
집이 원래 궁벽한 산촌인 데다가 근본 빈한한 우리 가세로는 명의나 영약을 쓸 처지도 못 되어서, 나는 예전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에 아버지가 단지하시던 것을 생각하고 나도 단지나 하여 일각이라도 아버지의 생명을 붙들어보리라 하였으나, 내가 단지를 하는 것을 보시면 어머니가 마음 아파하실 것이 두려워서 단지 대신에 내 넓적다리의 살을 한 점 베어서 피는 받아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고, 살은 불에 구워서 약이라고 하여 아버지가 잡수시게 하였다. 그래도 시원한 효험이 없는 것은 피와 살의 분량이 적은 것인 듯하기로, 나는 다시 칼을 들어서 먼저 것보다 더 크게 살을 뜨리라 하고 어썩 뜨기는 떴으나, 떼어내자니 몹시 아파서 베어만 놓고 떼지는 못하였다. 단지나 할고는 효자나 할 것이지, 나 같은 불효로는 못 할 것이라고 자탄하였다. 독신 상제로 조객을 대하자니 상청을 비울 수는 없고, 다리는 아프고, 설한풍은 살을 에이고 하여서 나는 다리 살을 벤 것을 후회하는 생각까지 났다.
 
638
유인무와 성태영에게 부고를 하였더니 유인무는 서울에 없었다 하여 성태영이 혼자 나귀를 달려 500리 먼 길에 조상을 왔다.
 
639
나는 집상 중에 아무 데도 출입을 아니 하고 준영 계부의 농사를 도와드렸더니 계부는 매우 나를 기특하게 여기시는 모양이어서, 당신이 돈 200냥을 내어서 이웃 동네 어떤 상놈의 딸과 혼인을 하라고 내게 명령하셨다. 아버지도 없는 조카를 당신의 힘으로 장가들이는 것은 당연한 의무요, 또 큰 영광으로 아시는 준영 계부는 내가 돈을 쓰고 하는 혼인이면 정승의 딸이라도 나는 아니 한다고 거절하는 것을 보시고 대로하여 낫을 들고 내게 달려드시는 것을, 어머니께서 가로막아서 나를 피하게 하여주셨다.
 
640
임인년 정월에 장연 먼 촌 일가댁에 세배를 갔더니, 내게 할머니 되는 어른이 그 친정 당질녀로 17세 되는 처녀가 있으니 장가 들 마음이 없는가고 물었다. 나는 세 가지 조건에만 맞으면 혼인한다고 말하였다. 그 세 가지라는 것은, 돈 말이 없을 것과 신부될 사람이 학식이 있을 것과 당자와 서로 대면하여서 말을 해볼 것 등이었다.
 
641
어떤 날 할머니는 나를 끌고 그 처자의 집으로 갔다. 그 처자의 어머니는 딸 4형제를 둔 과댁으로서, 위로 3형제는 다 시집을 가고, 지금 나와 말이 되는 이는 여옥이라는 끝의 딸이었다. 여옥은 국문을 깨치고 바느질을 잘 가르쳤다고 하였다. 집은 오막살이여서 더할 수 없이 작은 집이었다.
 
642
나를 방에 들여앉혀 놓고 세 사람이 부엌에서 한참이나 쑥덕거리더니, 다른 것은 다 하여도 당자 대면만은 어렵다고 하였다.
 
643
"나와 대면하기를 꺼리는 여자라면 내 아내가 될 자격이 없소."
 
644
하고 내가 강경하게 나간 결과로 처녀를 불러들였다.
 
645
나는 처자를 향하여 인사말을 붙였으나 그는 잠잠하였다.
 
646
나는 다시,
 
647
"당신이 나와 혼인한 마음이 있소?"
 
648
하고 물었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649
나는 또,
 
650
"내가 지금 상중이니 1년 후에 탈상을 하고야 성례를 할 터인데, 그 동안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내게 글을 배우겠소?"
 
651
하고 물었다. 그래도 처녀의 대답 소리가 내 귀에는 아니 들렸는데, 할머니와 처녀의 어머니는 여옥이가 다 그런다고 대답하였다고 하였다. 이리하여서 그와 나와는 약혼이 되었다.
 
652
집에 돌아와서 내가 이러이러한 처자와 약혼하였다는 말을 하여도 준영 계부는 믿지 아니하고 어머니더러 가서 보고 오시라고 하시더니, 어머니께서 알아보고 오신 뒤에야 준영 계부가,
 
653
"세상에 어수룩한 사람도 다 있다."
 
654
고 빈정거리셨다.
 
655
나는 여자 독본이라 할 만한 것을 한 권 만들어서 틈만 나면 내 아내 될 사람을 가르쳤다.
 
656
어느덧 1년도 지나서 계묘년 2월에 아버지의 담제도 끝나고 어머니께서는 어서 나를 성례시켜야 한다고 분주하실 때에 여옥의 병이 위급하다는 기별이 왔다. 내가 놀라서 달려갔을 때에는 아직도 여옥은 나를 반겨할 정신이 있었으나, 워낙 중한 장감(長感: 감기가 오래되어서 생기는 병으로, 폐렴으로 발전하기 쉬움)인 데다가 의약도 쓰지 못하여 내가 간 지 사흘만에 그만 죽고 말았다. 나는 손수 그를 염습하여 남산에 안장하고, 장모는 김동 김윤오 집에 인도하여 예수를 믿고 여생을 보내도록 하였다. 내 나이 30에 이 일을 당한 것이었다.
 
657
이 해 2월에 장연읍 사직동으로 반이하였다. 오 진사 인형이 나로 하여금 집 걱정이 없이 공공사업에 종사케 하기 위하여 내게 준 가대로서, 20여 마지기 전답에 산과 과수까지 낀 것이었다. 해주에서 종형 태수 부처를 옮겨다가 집일을 보게 하고, 나는 오 진사 집 사랑에 학교를 설립하고 오 진사의 딸 신애, 아들 기원, 오봉형의 아들 둘, 오면형의 아들과 딸, 오순형의 딸 형제와 그 밖에 남녀 몇 아이를 모아서 생도로 삼았다.
 
658
방 중간을 병풍으로 막아 남녀의 자리를 구별하였다. 순형은 인형의 셋째 아우로서, 사람이 근실하고 예수를 잘 믿어 교육에 열심하여서 나와 함께 학생을 가르치고 예수교를 전도하여 1년 이내에 교회도 흥왕하고 학교도 차차 확장되었다. 당시에 주색장으로 출입하던 백남훈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어 봉양학교의 교원이 되게 하고, 나는 공립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당시 황해도에서 학교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공립으로 해주와 장연에 각각 하나씩 있었을 뿐인데, 해주에 있는 것은 이름만 학교여서 여전히 사서삼경을 가르치고 있었고, 정말 칠판을 걸고 산술, 지리, 역사 등 신학문을 가르친 것은 장연 학교뿐이었다.
 
659
여름에 평양 예수교의 주최인 사범 강습소에 갔을 적에 최광옥을 만났다. 그는 숭실중학교의 학생이면서 교육가로, 애국자로 이름이 높았고 나와도 뜻이 맞았다. 최광옥은 내가 아직 혼자라는 말을 듣고 안신호라는 신여성과 결혼하기를 권하였다. 그는 도산 안창호의 영매로 나이는 스무 살, 극히 활발하고 당시 신여성 중에 명성이라고 최광옥은 말하였다.
 
660
나는 안도산의 장인 이석관의 집에서 안신호와 처음 만났다. 주인 이씨와 최광옥과 함께였다. 회견이 끝나고 사관에 돌아왔더니 최광옥이 뒤따라와서 안신호의 승낙을 얻었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래서 나는 안신호와 혼인이 되는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이튿날 이석관과 최광옥이 달려와서 혼약이 깨졌다고 내게 알렸다. 그 까닭이라는 것은 이러하였다. 안도산이 미국으로 가는 길에 상해 어느 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양주삼에게 신호와의 혼인 말을 하고, 양주삼이 졸업하기를 기다려서 결정하라는 말을 신호에게도 편지로 한 일이 있었는데, 어제 나와 약혼이 된 뒤에 양주삼에게서 이제는 학교를 졸업하였으니 허혼하라는 편지가 왔다. 이 편지를 받고 밤새도록 고통한 신호는 두 손의 떡이라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리기도 어려워 양주삼과 김구를 둘 다 거절하고 한 동네에 자라난 김성택(뒤에 목사가 되었다)과 혼인하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가내하거니와 퍽 마음에 섭섭하였다. 그러자 얼마 아니하여 신호가 몸소 나를 찾아와서 미안한 말을 하고 나를 오라비라 부르겠다고 말하여 나는 그의 쾌쾌한 결단성을 도리어 흠모하였다.
 
661
한 번은 군수 윤구영이 나를 불러 해주에 가서 농상공부에서 보내는 뽕나무 묘목을 찾아오는 일을 맡겼다. 수리 정창극이 나를 군수에게 추천한 것이었다. 나는 200냥 노자를 타 가지고 걸어서 해주로 갔다. 말이나 교군을 타라는 것이었지만 아니 탔다.
 
662
해주에는 농상공부 주사가 특파되어 와서 묘목을 각 군에 배부하고 있었다. 정부에서 전국에 양잠을 장려하느라고 일본으로부터 뽕나무 묘목을 실어 들여온 것이다.
 
663
묘목은 다 마른 것이었다. 나는 마른 묘목을 무엇하느냐고 아니 받는다고 하였더니 농상공부 주사는 대로하여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느냐고 나를 꾸짖었다. 나도 마주 대로하여 나라에서 보내시는 묘목을 마르게 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야 한다 하고 관찰부에 이 사유를 보고한다고 하였더니, 주사는 겁이 나는 모양이어서 날더러 생생한 것으로 마음대로 골라 가라고 간청하였다. 나는 이리하여 산 묘목 수천 본을 골라서 말에 싣고 돌아왔다. 노자는 모두 70냥을 쓰고 130냥을 정창극에게 돌렸다. 나는 집세기(짚신) 한 켤레에 얼마, 냉면 한 그릇에 얼마, 이 모양으로 돈 쓴 데를 자세히 적어서 남은 돈과 함께 주었다. 정창극은 그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하여,
 
664
"사람들이 다 선생 같으면 나라 일이 걱정이 없겠소. 다른 사람이 갔다면 적어도 200냥은 더 청구했을 것이오."
 
665
하였다.
 
666
정창극은 실로 진실한 아전이었다. 당시 상하를 막론하고 관리라는 관리는 모두 나라와 백성의 것을 도적하는 탐관으로 되었건마는, 정창극만은 한 푼도 받을 것 이외의 것을 받음이 없었다. 이러하기 때문에 군수도 감히 탐학을 못하였다.
 
667
얼마 후에 농상공부로부터 나를 종상위원으로 임명한다는 사령서가 왔다. 이것은 큰 벼슬이어서 관속들이며 천민들은 내가 지나가는 앞에서는 담뱃대를 감추고 허리를 굽히기까지 하였다.
 
668
그러나 나는 이태 동안이나 살던 사직동 집을 떠나지 아니하면 안 되게 되었다. 그것은 오 진사와 내 종형이 죽은 때문이었다. 오 진사는 고기잡이배를 부리다가 이태 만에 가산을 패하고 세상을 떠나니, 나는 사직동 가대를 그의 유족에게 돌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또 종형은 본래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몰랐었으나, 나를 따라 장연에 와서 예수를 믿은 뒤로는 국문에 능통하여 종교서적을 보고, 강당에서 설교까지 하게 되었었는데, 불행히 예배 보는 중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서 나는 종형수에게 개가하기를 허하여 그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읍내로 떠났다. 내가 사직동에 있는 동안에 유인무와 주윤호가 다녀갔다. 그들은 예전 북간도 관리사 서상무와 합력하여 북간도에 한 근거지를 건설할 차로 국내에서 동지를 구하러 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라 하여 밤을 삶고 닭을 잡아서 정성으로 그들을 대접하셨다. 우리는 밤과 닭고기를 먹으면서 연일 밤이 늦도록 국사를 이야기하였다.
 
669
여러 번 혼약이 되고도 깨어지던 나는 마침내 신천 사평동 최준례와 말썽 많은 혼인을 하였다. 준례는 본래 서울 태생으로, 그 어머니 김씨 부인이 젊은 과부로서 길러낸 두 딸 중의 막내딸이었다. 김씨 부인은 그 때 구리개에 임시로 내었던 제중원(지금의 세브란스)에 고용되어서 두 딸을 길러 맏딸은 의사 신창희에게 시집보내고, 신창희가 신천에서 개업하매 여덟 살 된 준례를 데리고 신천에 와서 사위의 집에 우접하여 있었다. 나는 양성칙 영수의 중매로 준례와 약혼하였는데, 이 때문에 교회에 큰 문제가 일어났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준례의 어머니가 준례를 강성모라는 사람에게 허혼을 하였는데, 준례는 어머니의 말을 아니 듣고 내게 허혼한 것이었다. 당시 18세인 준례는 혼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미국 선교사 한위렴, 군예빈 두 분까지 나서서 준례더러 강성모에게 시집가라고 권하였으나 준례는 당연히 거절하였다. 내게 대하여도 이 혼인을 말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나는 본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부모의 허혼을 반대한다 하여 기어이 준례와 혼인하기로 작정하고, 신창희로 하여금 준례를 사직동 내 집으로 데려오게 하여 굳게 약혼을 한 뒤에 서울 정신여학교로 공부를 보내어버렸다. 나와 준례는 교회에 반항한다는 죄로 책벌을 받았으나, 얼마 후에 군예빈 목사가 우리의 혼례서를 만들어주고 두 사람의 책벌을 풀었으니, 이리하여 나는 비로소 혼인한 사람이 되었다.
 
 

1.5. 민족에 내놓은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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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신조약이 체결되어서 대한의 독립권이 깨어지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에 사방에서 지사와 산림 학자들이 일어나서 경기, 충청, 경상, 강원 제도(諸道)에 의병의 혈전이 시작되었다. 허위, 이강년, 최익현, 민긍호, 유인석, 이진룡, 우동선 등은 다 의병 대장으로 각각 일방의 웅이었다. 그들은 오직 하늘을 찌르는 의분이 있을 뿐이요, 군사의 지식이 없기 때문에 도처에서 패전하였다.
 
672
이때에 나는 진남포 엡윗 청년회(Epworth League)의 총무로서 대표의 임무를 띠고 경성 대회에 출석케 되었다. 대회는 상동 교회에서 열렸는데 표면은 교회 사업을 의논한다 하나 속살은 순전한 애국운동의 회의였다. 의병을 일으킨 이들이 구사상의 애국운동이라면, 우리 예수교인은 신사상의 애국운동이라 할 것이다.
 
673
그때에 상동에 모인 인물은 전덕기, 정순만, 이준, 이동녕, 최재학, 계명륙, 김인즙, 옥관빈, 이승길, 차병수, 신상민, 김태연, 표영각, 조성환, 서상팔, 이항직, 이희간, 기산도, 김병헌(현재는 왕삼덕), 유두환, 김기홍 그리고 나 김구였다.
 
674
우리가 회의한 결과로 작정한 것은 도끼를 메고 상소하는 것이었다. 1회, 2회로 4, 5명씩 연명으로 상소하여 죽든지 잡혀 갇히든지 몇 번이고 반복하자는 것이었다.
 
675
제 1회 상소하는 글은 이준이 짓고 최재학이 소주가 되고 그 밖의 네 사람이 더 서명하여 신민 대표로 5명이 연명하였다. 상소를 하러 가기 전에 정순만의 인도로 우리 일동은 상동 교회에 모여서 한 걸음도 뒤로 물러가지 말고 죽기까지 일심하자고 맹약하는 기도를 올리고 일제히 대한문 앞으로 몰려갔다. 문 밖에 이르러 상소에 서명한 다섯 사람은 형식적으로 회의를 열고 상소를 한다는 결의를 하였으나, 기실 상소는 별감의 손을 통하여 벌써 대황제께 입람이 된 때였다.
 
676
홀연 왜 순사대가 달려와서 해산을 명하였다. 우리는 내정간섭이라 하여 일변 반항하며 일변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강탈하여 우리 2천만 신민으로 노예를 삼는 조약을 억지로 맺으니 우리는 죽기로 싸우자고 격렬한 연설을 하였다. 마침내 왜 순사대는 상소에 이름을 둔 다섯 지사를 경무청으로 잡아가고 말았다.
 
677
우리는 다섯 지사가 잡혀가는 것을 보고 종로로 몰려와서 가두연설을 시작하였다. 거기도 왜 순사가 와서 발검으로 군중을 해산하려 하므로 연설하던 청년 하나가 단신으로 달려들어 왜 순사 하나를 발길로 차서 거꾸러뜨렸더니 왜 순사들은 총을 쏘았다. 우리는 어물전도가(魚物廛都家)가 불탄 자리에 쌓인 와륵(瓦礫:깨진 기와 조각과 자갈)을 던져서 왜 순사대와 접전을 하였다. 왜 순사대는 중과부적하여 중국인 점포에 들어가 숨어서 총을 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점포를 향하여 빗발같이 와륵을 던졌다. 이 때에 보병 한 중대가 달려와서 군중을 해산하고 한인을 잡히는 대로 포박하여 수십 명이나 잡아갔다.
 
678
이날 민영환이 자살하였다 하므로 나는 몇 동지와 함께 민 댁에 가서 조상하고 돌아서 큰길에 나서니, 웬 40세나 되어 보이는 사람 하나가 맨상투바람으로 피묻은 흰 명주저고리를 입고 여러 사람에게 옹위되어서 인력거에 앉아 큰 소리를 내어 울며 끌려가고 있었다. 누구냐고 물어본즉 참찬 이상설이 자살하려다가 미수한 것이라고 하였다.
 
679
당초 상동회의에서는 몇 번이고 상소를 반복하려 하였으나 으레 사형에 처할 줄 알았던 최재학 이하는 흐지부지 효유방송이나 할 모양이어서 큰 문제도 되지 않는 것 같았고, 또 정세를 돌아보니 상소 같은 것으로 무슨 효과가 생길 것 같지도 아니하여서 우리 동지들은 방침을 고쳐서 각각 전국에 흩어져 교육 사업에 힘을 쓰기로 하였다. 지식이 멸이하고 애국심이 박약한 이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가 곧 제 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전에는 아무것으로도 나라를 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황해도로 내려와서 문화 초리면 종산 서명의숙의 교원이 되었다가, 이듬해 김용제 등 지기의 초청으로 안악으로 이사하여 그곳 양산학교의 직원이 되었다. 종산에서 안악으로 떠나온 것이 기유년 정월 18일이라 갓 난 첫딸이 찬바람을 쐐서 안악에 오는 길로 죽었다.
 
680
안악에는 김용제, 김용진 등 종형제와 그들의 자질 김홍량과 최명식 같은 지사들이 있어서 신교육에 열심하였다. 이때에는 안악뿐이 아니라 각처에 학교가 많이 일어났으나 신지식을 가진 교원이 부족한 때라 당시 교육가로 이름이 높은 최광옥을 평양으로 연빙하여 안악 양산학교에 하기 사범강습회를 여니, 사숙 훈장들까지 강습생으로 오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도 있었다. 멀리 경기도, 충청도에서까지 와서 강습생이 400여 명에 달하였다. 강사로는 김홍량, 이시복, 김낙영, 최재원 등이요, 여자 강사로는 김낙희, 방신영 등이 있었고, 강구봉, 박혜명 같은 중도 강습생 중에 끼어 있었다.
 
681
박혜명은 전에 말한 일이 있는 마곡사 시대의 사형으로, 연전 서울서 서로 작별한 뒤에는 소식을 몰랐다가 이번 강습회에서 서로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는 당시 구월산 패엽사의 주지였다. 나는 그를 양산학교의 사무실로 인도하여 내 형이라고 소개하고 내 친구들이 그를 내 친형으로 대우하기를 청하였다.
 
682
혜명에게 들은즉 내 은사 보경당, 하은당은 석유 한 초롱을 사다가 그 호부를 시험하느라고 불붙은 막대기를 석유통에 넣었다가 그것이 폭발하여 포봉당까지 세 분이 일시에 죽었고, 그 남긴 재산을 맡기기 위하여 금강산에 내가 있는 곳을 두루 찾았으나 종적을 몰라서 할 수 없이 유산 전부를 사중(寺中)에 붙였다고 하였다.
 
683
나는 여기서 김효영 선생의 일을 아니 적을 수가 없다. 선생은 김용진의 부친이요, 김홍량의 조부다. 젊어서 글을 읽더니 집이 가난함을 한탄하여 황해도 소산(所産)인 면포를 사서 몸소 등에 지고 평안도 강계, 초산 등 산읍으로 행상을 하여서 밑천을 잡아가지고 근검으로 치부한 이라는데, 내가 가서 교사가 되었을 때에는 벌써 연세가 70이 넘고 허리가 기역자로 굽었으나,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가 탈속하여 보매 위엄이 있었다. 선생은 일찍부터 신교육이 필요함을 깨닫고 그 장손 홍량을 일본에 유학케 하였다. 한 번은 양산학교가 경영난에 빠졌을 때에 무명씨로 벼 백 석을 기부하였는데, 나중에야 그가 자여질에게도 알리지 아니하고 한 것인 줄을 알게 되었다. 나로 말하면 선생의 자질의 연배건마는 며칠에 한 번씩 정해 놓고 내 집 문전에 와서,
 
684
"선생님 평안하시오?"
 
685
하고 문안을 하였다. 이것은 자손의 스승을 존경하는 성의를 보임인 동시에 사마골 오백금 격이라고 나는 탄복하였다.
 
686
나는 교육에 종사한 이래로 성묘도 못하고 있다가 여러 해 만에 해주 본향에 가보니 많은 변화가 생겼다. 첫째로 감개무량한 것은 나를 안아주고 귀애해 주던 노인들이 많이 세상을 떠나고, 전에는 어린아이던 것들이 이제는 커다란 어른들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기 막히는 것은 그 어른 된 사람들이 아무 지각이 나지 아니하여 나라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었다.
 
687
예전 양반이라는 사람들도 찾아보았으나 다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혼몽한 중에 있어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라고 권하면 머리를 깎이니 못한다 하고 있었다. 내게 대하여서는 전과 같이 아주 하대는 못하고 말하기 어려운 듯이 어물어물하였다. 상놈은 여전히 상놈이요, 양반은 새로운 상놈이 될 뿐, 한 번 민족을 위하여 몸을 바쳐서 새로운 양반이 되리라는 기개를 볼 수 없으니 한심한 일이었다.
 
688
고향에 와서 이렇게 실망되는 일이 많은 중에 나를 기쁘게 한 것은 준영 계부께서 나를 사랑하심이었다. 항상 나를 집안 망칠 난봉으로 아시다가 내가 장연에서 오 진사의 신임과 존경을 받는 것을 목도하시고부터는 비로소 나를 믿으셨다.
 
689
나는 본향 사람들을 모아 놓고 내가 지고 온 환등을 보이면서,
 
690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삼천리 강토와 이천만 동포에게 충성을 다하여라."
 
691
하고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
 
692
안악에서는 하기 사범강습소를 마친 후에 양산학교를 크게 확장하여 중학부와 소학부를 두고, 김홍량이 교장이 되었다.
 
693
나는 최광옥 등 교육가들과 함께 해서 교육총회를 조직하고 내가 그 학무총감이 되었다. 황해도 내에 학교를 많이 설립하고 그것을 잘 경영하도록 설도하는 것이 내 직무였다. 나는 이 사명을 띠고 도내 각 군을 순회하는 길을 떠났다.
 
694
배천 군수 전봉훈의 초청을 받았다. 읍에 못 미쳐 오리정에 군내 각 면의 주민들이 나와서 등대하다가 내가 당도한즉 군수가 선창으로,
 
695
"김구 선생 만세!"
 
696
를 부르니 일동이 화하여 부른다. 나는 경황실색하여 손으로 군수의 입을 막으며 그것이 망발인 것을 말하였다. 만세라는 것은 오직 황제에 대하여서만 부르는 것이요, 황태자도 천세라고밖에 못 부르는 것이 옛 법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일개 서민인 내게 만세를 부르니 내가 경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군수는 웃으며 내 손을 잡고 개화시대에는 친구 송영에도 만세를 부르는 법이니 안심하라고 하였다. 나는 군수의 사저에 머물렀다.
 
697
전봉훈은 본시 재령 아전으로, 해주에서 총순으로 오래 있을 때에 교육에 힘을 많이 썼다. 해주 정내학교를 세운 것도 그요, 각 전방에 명령하여 사환하는 아이들을 야학에 보내게 하고, 만일 안 보내면 주인을 벌하는 일을 한 것도 그여서, 해주 부내의 교육의 발달은 전 총순의 힘으로 됨이 컸다. 그의 외아들은 조사하고 장손 무길이 5, 6세였다.
 
698
전 군수는 대단히 경골한(硬骨漢)이어서 다른 고을에서는 일본 수비대에게 동헌을 내어 맡기되 그는 강경히 거절하여서 여전히 동헌은 군수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왜의 미움을 받았으나, 그는 벼슬자리를 탐내어 뜻을 굽힐 사람이 아니었다.
 
699
전봉훈은 최광옥을 연빙하여 사범강습소를 설립하고 강연회를 각지에 열어 민중에게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최광옥은 배천 읍내에서 강연을 하는 중에 강단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황평 양서 인사들이 그의 공적을 사모하고 뜻과 재주를 아껴서 사리원에 큰 기념비를 세우기로 하고 평양 안태국에게 비석 만드는 일을 맡기기까지 하였으나, 합병조약이 되었기 때문에 중지하고 말았다. 최광옥의 유골은 배천읍 남산에 묻혀 있다.
 
700
나는 배천을 떠나 재령 양원학교에서 유림을 소집하여 교육의 필요와 계획을 말하고, 장연 군수의 청으로 읍내와 각 면을 순회하고, 송화 군수 성낙영의 간청으로 수 년 만에 송화읍을 찾았다. 이곳은 해서의 의병을 토벌하던 요해지(要害地: 지세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이므로 읍내에는 왜의 수비대, 헌병대, 경찰서, 우편국 등의 기관이 있어서 관사는 전부 그런 것에 점령이 되고 정작 군수는 사가를 빌려서 사무를 보고 있었다. 나는 분한 마음에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일어날 지경이었다.
 
701
환등회를 여니 남녀 청중이 무려 수천 명이니, 군수 성낙영, 세무서장 구자록을 위시하여 각 관청의 관리며, 왜의 장교와 경관들도 많이 출석하였다. 나는 대황제 폐하의 어진영을 뫼셔오라 하여 강단 정면에 봉안하고 일동 기립 국궁(鞠躬: 몸을 굽혀 존경의 뜻을 나타냄)을 명하고 왜의 장교들까지 다 그리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니 벌써 무언중에 장내에는 엄중한 기운이 돌았다.
 
702
나는 '한인이 배일하는 이유가 무엇인고'하는 연제로 일장의 연설을 하였다. 과거 일청(청일전쟁), 일아(러일전쟁) 두 전쟁 때에는 우리는 일본에 대하여 신뢰하는 감정이 극히 두터웠다. 그 후에는 일본이 강제로 우리나라 주권을 상하는 조약을 맺으므로 우리의 악감이 격발되었다. 또 일병이 촌락으로 횡행하며 남의 집에 막 들어가고, 닭이나 달걀을 막 빼앗아서 약탈의 행동을 하므로 우리는 배일을 하게 된 것이니, 이것은 일본의 잘못이요, 한인의 책임이 아니라고 탁자를 두드리며 외쳤다. 자리를 돌아보니 성낙영, 구자록은 낯빛이 흙빛이요, 일반 청중의 얼굴에는 격앙의 빛이 완연하고 왜인의 눈에는 노기가 등등하였다. 홀연 경찰이 환등회의 해산을 명하고 나는 경찰서로 불려가서 한인 감독 순사 숙직실에 구류되었다. 각 학교 학생들의 위문대가 뒤를 이어 밤이 새도록 나를 찾아왔다.
 
703
이튿날 아침에 하얼빈 전보라 하여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이 '은치안'이라는 한인의 손에 죽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704
'은치안'이 누구일까 하고 궁금해 하였더니 이튿날 신문으로 그것이 안응칠 중근인 줄을 알고 십수년 전 내가 청계동에서 보던 총 잘 쏘던 소년을 회상하였다.
 
705
나는 내가 구금된 것이 안중근 관계인 것을 알고 오래 놓이지 못할 것을 각오하였다. 한 달이나 지난 후에 나를 불러내어서 몇 마디를 묻고는 해주 지방법원으로 압송되었다. 수교장을 지날 때에 감승무의 집에서 낮참을 하는데, 시내 학교의 교직원들이 교육공로자인 나를 위하여 한 턱의 위로연을 베풀게 하여달라고 호송하는 왜 순사에게 청하였더니, 내가 해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하는 것이 좋지 아니하냐면서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706
나는 곧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튿날 검사정에 불려 안중근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았으나, 나는 그 부친과 세의가 있을 뿐이요, 안중근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검사는 지나간 수년간의 내 행적을 적은 책을 내어놓고 이것저것 심문하였으나 결국 불기소로 방면이 되었다.
 
707
나는 행구를 가지고 감옥에서 나와서 박창진의 책사로 갔다가 유훈영을 만나 그 아버지 유장단의 환갑연에 참여하고, 송화에서는 나를 호송해올 때에 왜 순사와 같이 왔던 한인 순사들이 내 일의 하회를 알고 가려고 아직도 해주에서 묵고 있단 말을 듣고 그들 전부를 술집에 청하여서 한 턱을 먹이고 지난 일을 말하여서 돌려보냈다. 한인 순사는 기회만 있으면 왜 순사의 눈을 피하여 내게 동정하였던 것이다.
 
708
안악 동지들은 내 일을 염려하여 한정교를 위해 해주로 보내어왔으므로 나는 이승준, 김영택, 양낙주 등 몇 친구를 방문하고는 곧 안악으로 돌아왔다.
 
709
안악에 와서 나는 양산학교 소학부의 유년반을 담임하면서 재령군 북률면 무상동 보강학교의 교장을 겸무하였다. 이 학교는 나무리벌의 한 끝에 있어 가난한 사람들이 힘을 내어 세운 것이었다. 전임 교원으로는 전승근이 있고, 장덕준은 반 교사, 반 학생으로 그 아우 덕수를 데리고 학교 안에서 숙식하고 있었다.
 
710
내가 보강학교 교장이 된 뒤에 우스운 삽화가 있었다. 그것은 학교에 세 번이나 도깨비불이 났다는 것이다. 학교를 지을 때 옆에 있는 고목을 찍어서 불을 때었으므로 도깨비가 불을 놓는 것이니, 이것을 막으려면 부군당에 치성을 드려야 한다고 다들 말하였다. 나는 직원을 명하여 밤에 숨어서 지키라 하였다. 이틀 만에 불을 놓는 도깨비를 등시 포착하고 보니 동네 서당의 훈장이었다. 그는 학교가 서기 때문에 서당이 없어서 제가 직업을 잃은 것이 분하여서 이렇게 학교에 불을 놓는 것이라고 자백하였다. 나는 그를 경찰서에 보내지 아니하고 동네를 떠나라고 명하였다.
 
711
이 지방에는 큰 부자는 없으나 나무리가 크고 살진 벌이 있어서 다들 가난하지는 아니하였다. 또 주민들이 다 명민하여서 시대의 변천을 잘 깨달아 운수, 진초, 보강, 기독 등 학교들을 세워 자녀들을 교육하는 한편으로는 농무회를 조직하여 농업의 발달을 도모하는 등 공익사업에 착안함이 실로 보임직하였다. 의사 나석주도 이곳 사람이다. 아직 20내외의 청년으로서 소년, 소녀 8, 9명을 배에 싣고 왜의 철망을 벗어나 중국 방면에 가서 마음대로 교육할 양으로 떠나다가 장연 오리포에서 왜경에 붙들려서 여러 달 옥고를 받고 나와서, 겉으로는 장사도 하고 농사도 한다 하면서 속으로는 청년 간에 독립 사상을 고취하고, 직접 간접으로 교육에 힘을 써서 나무리벌 청년의 신망을 받는 중심 인물이 되어 있었다. 나도 나무리벌에 내왕하면서 그와 만났다.
 
712
하루는 안악에서 노백린을 만났다. 그는 그때에 육군 정령의 군직을 버리고 그의 향리인 풍천에서 교육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서울로 가는 길에 안악을 지나는 것이었다. 나는 부강학교로 갈 겸 그와 작반하여 나무리 진초동 김정홍의 집에서 하룻밤을 잤다. 김은 그 동네의 교육가였다.
 
713
저녁에 진초학교 직원들도 와서 주연을 벌이고 있노라니 동네가 갑자기 요란하여졌다. 주인 김정홍이 놀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설명하는 말이 이러하였다. 진초학교에 오인성이라는 여교원이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그의 남편 이재명이 와서 단총으로 오인성을 위협하여 인성은 학교 일을 못 보고 어느 집에 피신하여 있는데, 이재명은 매국적을 모조리 죽인다고 부르짖으면서 미쳐 날뛰어 방포를 하므로 동네가 이렇게 소란한 것이라고 했다.
 
714
나는 노백린과 상의하고 이재명이라는 사람을 불러왔다. 그는 22, 3세의 청년으로서 미우(眉宇)에 가득하게 분기를 띠고 들어섰다. 인사를 청한즉 그는 자기는 어려서 하와이에 건너가서 거기서 공부를 하던 중에 우리나라가 왜에게 빼앗긴다는 말을 듣고 두어 달 전에 환국하였다는 말과, 제 목적은 이완용 이하의 매국적을 죽임에 있다 하여 단도와 권총을 내어 보이고, 또 자기는 평양에서 오인성이라는 여자와 결혼하였는데, 그가 남편의 충의의 뜻을 몰라본다는 말을 기탄없이 하였다.
 
715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장차 서울 북달은재에서 이완용을 단도로 찌를 의사 이재명이 될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한 허열에 뜬 청년으로만 보았다.
 
716
노백린도 나와 같이 생각한 모양이어서 그의 손을 잡고, 큰 일을 하려는 사람이 큰 일을 할 무기를 가지고 아내를 위협하고 동네를 소란케 하는 것은 아직 수양이 부족한 것이라고 간곡히 말하고, 그 단총을 자기에게 맡겨두고 마음을 더 수양하고 동지도 더 얻어 가지고 일을 단행하라고 권하였더니 이재명은 총과 칼을 노백린에게 주기는 주면서도 선선하게 주는 빛은 없었다.
 
717
노백린이 사리원 역에서 차를 타고 막 떠나려 할 때에 문득 이재명이 그곳에 나타나서 노에게 그 맡긴 물건을 도로 달라고 하였으나, 노는 "서울 와서 찾으시오"하고 떠나버렸다.
 
718
그 후 일삭이 못하여 이 의사는 동지 몇 사람과 서울에 들어가 군밤 장수로 변장하고 천주교당에 다녀오는 이완용을 찌른 것이었다. 완용이 탔던 인력거꾼은 즉사하고 완용의 목숨은 살아나서 나라를 파는 마지막 도장을 찍을 날을 주었으니, 이것은 노백린이나 내가 공연한 간섭으로 그의 단총을 빼앗은 때문이었다.
 
719
나라의 명맥이 경각에 달렸으되 국민 중에는 망국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가 많았다. 이에 일변 깨달은 지사들이 한데 뭉치고, 또 일변 못 깨달은 동포를 계발하여서 다 기울어진 국운을 만회하려는 큰 비밀 운동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신민회(新民會)였다.
 
720
안창호는 미국으로부터 돌아와서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우고 청년 교육을 표면의 사업으로 하면서, 이면으로는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전덕기, 이동녕, 주진수, 이갑, 이종호, 최광옥, 김홍량 등과 기타 몇 사람을 중심으로 하고 4백여 명 정수분자로 신민회를 조직하여 훈련 지도하다가 안창호는 용산 헌병대에 잡혀 갇혔다.
 
721
합병이 된 뒤에는 소위 주의 인물을 일망타진할 것을 미리 알았음인지, 안창호는 장연군 송천(松川)에서 비밀히 위해위(威海衛)로 가고, 이종호, 이갑, 유동열 등 동지도 뒤를 이어서 압록강을 건넜다.
 
722
서울에서 양기탁의 이름으로 비밀회의를 할 터이니 출석하라는 통지가 왔기에 나도 출석하였다. 그 때 양기탁의 집에 모인 사람은 주인 양기탁과 이동녕, 안태국, 주진수, 이승훈, 김도희와 그리고 나 김구였다. 이 회의의 결과는 이러하였다.
 
723
왜가 서울에 총독부를 두었으니 우리도 서울에 도독부를 두고 각 도에 총감이라는 대표를 두어서 국맥을 이어서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만주에 이민 계획을 세우고, 또 무관 학교를 창설하여 광복 전쟁에 쓸 장교를 양성하기로 하고, 각 도 대표를 선정하니 황해도에 김구, 평안남도에 안태국, 평안북도에 이승훈, 강원도에 주진수, 경기도에 양기탁이었다. 이 대표들은 급히 맡은 지방으로 돌아가서 황해, 평남, 평북은 각 15만 원, 강원은 10만 원, 경기는 20만 원을 15일 이내로 판비하기로 결정하였다.
 
724
나는 경술년 11월 아침 차로 서울을 떠났다. 양기탁의 친아우 인탁이 재령 재판소 서기로 부임하는 길로 그 부인과 같이 동차하였으나 기탁은 내게 인탁에게도 통정은 말라고 일렀다. 부자와 형제간에도 필요 없이는 비밀을 누설하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725
사리원에서 인탁과 작별하고 안악으로 돌아와 김홍량에게 이번 비밀회의에서 결정된 것을 말하였더니 김홍량은 그대로 실행하기 위하여 자기의 가산을 팔기로 내어 놓았다. 그리고 신천 유문형 등 이곳 고을 동지들께도 비밀히 이 뜻을 통하였다. 장연 이명서는 우선 그 어머니와 아우 명선을 서간도로 보내어 추후하여 들어오는 동지들을 위하여 준비하기로 하여 일행이 안악에 도착하였기로 내가 인도하여 출발시켰다. 이렇게 우리 일은 착착 진행 중에 있었다.
 
726
어느 날 밤중에 안명근이가 양산학교 사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가 서울 가 있는 동안에도 누차 찾아왔었던 것이다. 그가 나를 찾은 목적은, 독립운동의 자금으로 돈을 내마 하고 자기에게 허락하고도 안 내는 부자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우선 안악 부자들을 육혈포로 위협하여 본을 보일 터이니 날더러 지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727
이것은 지금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사업과는 상관이 없고 안명근이 독자로 하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돈을 가지고 할 일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의 계획에 의하면 동지를 많이 모아서 황해도 내의 전신과 전화를 끊어 각지에 있는 왜적이 서로 연락하는 길을 막아 놓고 지방 지방이 일어나서 제 지방에 있는 왜적을 죽이라는 영을 내리면 반드시 성사가 될 것이니, 설사 타 지방에서 왜병이 대부대로 온다 하더라도 닷새는 걸릴 것인즉, 그 동안만은 우리의 자유로운 세상이고 실컷 원수를 갚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728
나는 명근의 손을 잡고 이 계획은 버리라고 만류하였다. 여순에서 그 종형 중근이 당한 일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과 달리 격분도 할 일이지마는 국가의 독립은 그런 일시적 설원(雪寃)으로 되는 것이 아닌즉 널리 동지를 모으고 동포를 가르쳐서 실력을 기른 뒤에 크게 싸울 준비를 하여야 한다는 뜻을 말하고, 서간도에 이민을 할 것과 의기 있는 청년을 많이 그리로 인도하여 인재를 양성함이 급무라는 뜻을 설명하였다. 내 말을 듣고 그도 그렇다고 수긍은 하나 자기의 생각과 같지 아니한 것이 불만한 모양으로 서로 작별하였다.
 
729
그런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아니하여서 안명근이 사리원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것이 신문으로 전해졌다.
 
730
해가 바뀌어 신해년 정월 초닷샛날 새벽, 내가 아직 기침도 하기 전에 왜 헌병 하나가 내 숙소인 양산학교 사무실에 와서 헌병 소장이 잠깐 만나자 한다 하고 나를 헌병 분견소로 데리고 간다. 가 보니 벌써 김홍량, 도인권, 이상진, 양성진, 박도병, 한필호, 장명선 등 양산 학교 직원들이 하나씩 하나씩 나 모양으로 불려왔다. 경무총감부의 명령이라 하고 곧 우리를 구류하였다가 2,3일 후에 재령으로 이수하였다.
 
731
재령에서 또 우리를 끌어내어 사리원으로 가더니 거기서 서울 가는 차를 태웠다. 같은 차로 잡혀가는 사람들 중에는 송화 반정 신석충 진사도 있었으나, 그는 재령강 철교를 건널 적에 차창으로 몸을 던져서 자살하고 말았다.
 
732
신 진사는 해서의 유명한 학자요, 또 자선가였고, 그 아우 석제도 진사였다. 한 번 내가 석제 진사를 찾아갔을 때에 그 아들 낙영과 손자 상호가 동구까지 마중 나오기로 내가 모자를 벗어서 인사하였더니 그들은 황망히 갓을 벗어서 답례한 일이 있었다.
 
733
또 차중에서 이승훈을 만났다. 그는 잡혀가는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가 포박되어 가는 것을 보고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차가 용산역에 닿았을 때에 (그 때에는 경의선도 용산을 지나서 서울로 들어왔었다) 형사 하나가 뛰어 올라와서 이승훈을 보고,
 
734
"당신 이승훈 씨 아니오?"
 
735
하고 물었다. 그렇다 한즉 그 형사놈이,
 
736
"경무총감부에서 영감을 부르니 좀 가십시다."
 
737
하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리와 같이 결박을 지어서 끌고 간다. 후에 알고 보니 황해도를 중심으로 다수의 애국자가 잡힌 것이었다. 이것은 왜가 한국을 강제로 빼앗은 뒤에 그것을 아주 제 것을 만들어볼 양으로 우리나라의 애국자인 지식 계급과 부호를 모조리 없애 버리려는 계획의 제 일회였다.
 
738
그러기 위하여는 감옥과 이왕 있는 유치장만으로는 부족하여서, 창고 같은 건물을 벌의 집 모양으로 간을 막아서 임시 유치장을 많이 준비하여 놓고 우리들을 잡아 올린 것이었다.
 
739
이번 통에 잡혀온 사람은 황해도에서는 안명근을 비롯하여, 신천에서 이원식, 박만준, 신백서, 이학구, 유원봉, 유문형, 이승조, 박제윤, 배경진, 최중호, 재령에서 정달하, 민영룡, 신효범, 안악에서 김홍량, 김용제, 양성진, 김구, 박도병, 박형병, 고봉수, 한정교, 최익형, 고정화, 도인권, 이태주, 장응선, 원행섭, 김용진 등이요, 장련에서 장의택, 장원용, 최상륜, 은율에서 김용원, 송화에서 오덕겸, 장홍범, 권태선, 이종록, 감익룡, 장연에서 김재형, 해주에서 이승준, 이재림, 김영택, 봉산에서 이승길, 이효건, 그리고 배천에서 김병옥, 연안에서 편강렬 등이었고, 평안남도에서는 안태국, 옥관빈, 평안북도에서는 이승훈, 유동열, 김용규의 형제가 붙들리고, 경성에서는 양기탁, 김도희, 강원도에서 주진수, 함경도에서 이동휘가 잡혀와서 다들 유치되어 있었다. 나는 이동휘와는 전면이 없었으나 유치장에서 명패를 보고 그가 잡혀온 줄을 알았다.
 
740
나는 생각하였다. 평거에 나라를 위하여 십분 정성과 힘을 쓰지 못한 죄로 이 벌을 받는 것이라고. 이제 와서 내게 남은 일은 고 후조 선생의 훈계대로 육신과 삼학사를 본받아 죽어도 굴치 않는 것뿐이라고 결심하였다.
 
741
심문실에 끌려 나가는 날이 왔다. 심문하는 왜놈이 나의 주소, 성명 등을 묻고 나서,
 
742
"네가 어찌하여 여기 왔는지 아느냐?"
 
743
하기로 나는,
 
744
"잡혀오니 끌려왔을 뿐이요, 이유는 모른다."
 
745
고 하였더니 다시는 묻지도 아니하고 내 수족을 결박하여 천장에 매달았다. 처음에는 고통을 깨달았으나 차차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정신이 들어보니 나는 고요한 겨울 달빛을 받고 심문실 한 구석에 누워 있는데, 얼굴과 몸에 냉수를 끼얹는 감각뿐이요, 그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없었다.
 
746
내가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보고 왜놈은 비로소 나와 안명근과의 관계를 묻기로, 나는 안명근과는 서로 아는 사이나 같이 일한 것은 없다고 하였더니, 그놈은 와락 성을 내어서 다시 나를 묶어 천장에 달고 세 놈이 둘러서서 막대기와 단장으로 수없이 내 몸을 후려갈겨서 나는 또 정신을 잃었다. 세 놈이 나를 끌어다가 유치장에 누일 때에는 벌써 환하게 밝은 때였다. 어제 해 질 때에 시작한 내 심문이 오늘 해 뜰 때까지 계속된 것이었다.
 
747
처음에 내 성명을 묻던 놈이 밤이 새도록 쉬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그놈들이 어떻게 제 나라의 일에 충성된 것을 알았다. 저놈은 이미 먹은 나라를 삭히려기에 밤을 새거늘 나는 제 나라를 찾으려는 일로 몇 번이나 밤을 새웠던고 하고 스스로 돌아보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고, 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것과 같아서 스스로 애국자인 줄 알고 있던 나도 기실 망국민의 근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니 눈물이 눈에 넘쳤다.
 
748
이렇게 악형을 받는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옆방에 있는 김홍량, 한필호, 안태국, 안명근 등도 심문을 받으러 끌려 나갈 때에는 기운 있게 제 발로 걸어 나가나 왜놈의 혹독한 단련을 받고 유치장으로 돌아올 때에는 언제나 반죽음이 되어 있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 치미는 분함을 누를 길이 없었다.
 
749
한 번은 안명근이 소리소리 지르면서,
 
750
"이놈들아, 죽일 때에 죽이더라도 애국 의사의 대접을 이렇게 한단 말이냐?"
 
751
하고 호령하는 사이사이에,
 
752
"나는 내 말만 하였고 김구, 김홍량 등은 관계가 없다고 하였소."
 
753
하는 말을 끼워서 우리의 귀에 넣었다.
 
754
우리들은 감방에서 서로 통화하는 방법을 발명하여서 우리의 사건을 보안법 위반과 모살급 강도의 둘로 나누어서 아무쪼록 동지의 희생을 적게 하기로 의논하였다. 양기탁의 방에서 안태국의 방과 내가 있는 방으로, 내게서 이재림이 있는 방으로, 좌우 줄 20여 방, 40여 방이 비밀리에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755
왜놈들은 우리의 심문이 진행됨에 따라 이것을 통방이라고 칭하였다. 사건의 범위가 점점 축소됨을 보고 의심이 났던 모양이어서, 우리 중에서 한순직을 살살 꾀어 우리가 밀어하는 내용을 밀고하게 하였다. 어느 날 양기탁이 밥 받는 구멍에 손바닥을 대고, 우리의 비밀한 통화를 한순직이 밀고하니 금후로는 통방을 폐하자는 뜻을 손가락 필담으로 전하였다. 과연 센 바람을 겪고서야 단단한 풀을 알 것이었다. 안명근이 한순직을 내게 소개할 때에 그는 용감한 청년이라고 칭하더니 이 꼴이었다. 어찌 한순직뿐이랴, 최명식도 악형을 못 이겨서 없는 소리를 자백하였으나 나중에 후회하여 긍허(兢虛)라고 호를 지어서 평생에 자책하였다. 그때의 형편으로 보면 내 혀끝이 한 번 움직이는데 몇 사람의 생명이 달렸으므로 나는 단단히 결심을 하였다.
 
756
하루는 또 불려나가서 내 평생의 지기가 누구냐 하기로 나는 서슴지 않고,
 
757
"오인형이 내 평생의 지기다."
 
758
하고 대답하였더니 종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는 일이 없던 내 입에서 평생의 지기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극히 반가워하는 낯빛으로 그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천연하게,
 
759
"오인형은 장연에 살더니 연전에 죽었다"
 
760
하였더니 그놈들이 대로하여 또 내가 정신을 잃도록 악형을 하였다.
 
761
한 번은 학생 중에는 누가 가장 너를 사모하더냐 하는 질문에 나는, 창졸간에 내 집에 와서 공부하고 있던 최중호의 이름을 말하고서는 나는 내 혀를 물어 끊고 싶었다. 젊은 것이 또 잡혀 와서 경을 치겠다고 아픈 가슴으로 창밖을 바라보니, 언제 잡혀왔는지 반쯤 죽은 최중호가 왜놈에게 끌려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762
진고개 끝 남산 기슭에 있는 소위 경무총감부에서는 밤이나 낮이나 도수장에서 소나 돼지를 때려잡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이것은 우리 애국자들이 왜놈에게 악형을 당하는 소리였다.
 
763
하루는 한필호 의사가 심문을 당하고 오는 길에 겨우 머리를 들어 밥구멍으로 나를 들여다보면서,
 
764
"모두 부인했더니 지독한 악형을 받아서 나는 죽습니다."
 
765
하고 작별하는 모양을 보이기로, 나는
 
766
"그렇게 낙심 말고 물이나 좀 자시오."
 
767
하고 위로하였더니, 한 의사는
 
768
"인제는 물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769
하고는 다시 소식을 몰랐는데, 공판 때에야 비로소 한필호 선생이 순국한 것과 신석충 진사가 사리원으로 끌려오는 도중에 재령강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 것을 알았다.
 
770
하루는 나는 최고심문실이라는 데로 끌려갔다. 뉘라서 뜻하였으랴, 17년 전 내가 인천 경무청에서 심문을 당할 때에 방청석에 앉았다가 내가 호령하는 바람에 '칙쇼 칙쇼'하고 뒷방으로 피신하던 도변(渡邊:와타나베) 순사 놈이 나를 심문하려고 앉았을 줄이야. 그놈은 전과 같이 검은 수염을 길러 늘이고 낯바닥에는 약간 노쇠한 빛이 보였으나 이제는 경무총감부의 기밀과장으로 경시의 제복을 입고 위의가 엄숙하였다.
 
771
도변이 놈은 나를 보고 첫말이, 제 가슴에는 엑스광선이 있어서 내 평생의 역사와 가슴 속에 품은 비밀을 소상히 다 알고 있으니 일호도 숨김이 없이 다 자백을 하면 괜찮거니와, 만일에 은휘하는 곳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나를 때려죽인다는 것이다.
 
772
그러나 도변이 놈의 엑스광선은 내가 17년 전 인천감옥의 김창수인 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연전 해주 검사국에서 검사가 보던 <김구>라는 책에도 내가 치하포에서 토전양량을 죽인 것이나 인천감옥에서 사형정지를 받고 탈옥 도주한 것은 적혀 있지 아니하였던 것과 같이, 이번 사건에 내게 관한 기록에도 그것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내 일을 일러바치는 한인 형사와 정탐들도 그 일만은 빼고 내 보고를 하는 모양이니, 그들이 비록 왜의 수족이 되어서 창귀(倀鬼:남이 못된 짓을 하도록 이끄는 사람) 노릇을 한다고 하더라도 역시 마음의 한구석에는 한인혼(魂)이 남아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773
도변이 놈이 나의 경력을 묻는 데 대하여서 나는 어려서는 농사를 하다가 근년에 종교와 교육사업을 하고 있거니와 모든 것을 내놓고 숨어서 하는 것이 없으며, 현재에는 안악 양산학교의 교장으로 있노라고 대답하였더니 도변은 와락 성을 내며, 내가 종교와 교육에 종사한다는 것은 껍데기요, 속으로는 여러 가지 큰 음모를 하고 있는 것을 제가 소상히 다 알고 있노라 하면서, 내가 안명근과 공모하여 총독을 암살할 음모를 하고,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운동을 준비하려고 부자의 돈을 강탈한 사실을 은휘한들 되겠느냐고 나를 엄포하였다. 이에 대하여 나는 안명근과는 전연 관계가 없고 서간도에 이민이란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빈한한 농민에게 생활의 근거를 주자는 것뿐이라고 답변한 뒤에, 나는 화두를 돌려서 지방 경찰의 도량이 좁고 의심만 많아서 걸핏하면 배일로 사람을 모니 이러고는 백성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서 모든 사업에 방해가 많으니, 이후로는 지방의 경찰에 주의하여 우리 같은 사람들이 교육이나 잘 하고 있도록 하여달라, 학교 개학기도 벌써 넘었으니 속히 가서 학교일을 보게 하여달라 하였다. 도변이 놈은 악형은 아니 하고 나를 유치장으로 돌려보냈다.
 
774
이제 보니 도변이 놈은 내가 김창수인 것을 전연 모르는 것이 확실하고, 그렇다 하면 내 과거를 소상히 아는 형사들이 그 말을 아니 한 것도 분명하였다. 나는 기뻤다.
 
775
나라는 망하였으나 민족은 망하지 아니하였다. 왜 경찰에 형사질을 하는 한인의 마음에도 애국심은 남아 있으니 우리 민족은 결코 망하지 아니하리라고 믿고 기뻐하는 동시에, 형사들까지도 내게 이런 동정을 주었으니 나로서는 최후의 일각까지 동지를 위하여 싸우고 원수의 요구에 응치 아니하리라 하였다. 그리고 김홍량은 나보다 활동할 능력도 많고 인물의 품격도 높으니 나를 희생하여서라도 그를 살리리라 하고 심문 시에도 내게 불리하면서도 그에게 유리하게 답변하였고, 또 "구몰니중홍비해외(龜沒泥中鴻飛海外:거북은 진흙 속에 있으며 기러기는 바다 위를 난다)"라고 중얼거렸다.
 
776
전부 일곱 번 심문 중에 도변의 것을 제하고 여섯 번은 번번이 악형을 당하여서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악형을 받고 유치장으로 끌려 돌아올 때마다 나는,
 
777
"나의 목숨은 너희가 빼앗아도 나의 정신은 너희가 빼앗지 못하리라"
 
778
하고 소리를 높여 외쳐서 동지들의 마음이 풀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내가 그렇게 떠들면 왜놈들은,
 
779
"나쁜 말이 해소도 다다쿠"
 
780
라고 위협하였으나, 동지들의 마음은 내 말에 격려되었으리라고 믿는다.
 
781
내게 대한 제 8회 심문은 과장과 각 주임경시 7, 8명 열석 하에 열렸다. 이놈들이 나를 향하여 하는 말이,
 
782
"네 동류가 거개 자백을 하였는데 네놈 한 놈이 자백을 아니 하니 참 어리석고 완고한 놈이다. 네가 아무리 입을 다물고 아니하기로서니 다른 놈들의 실토에서 나온 네놈의 죄가 숨겨지겠느냐. 너, 생각해보아라. 새로 토지를 매수한 지주가 밭에 거치적거리는 돌멩이를 추려내지 아니하고 그냥 둘 것이냐. 그러니 똑바로 말을 하면 괜찮거니와, 일향 고집하면 이 자리에서 네놈을 때려죽일 터이니 그리 알아라."
 
783
한다. 이 말에 나는,
 
784
"오냐, 잘 알았다. 내가 너희가 새로 산 밭의 돌이라면 그것은 맞다. 너희가 나를 돌로 알고 파내려는 수고보다 패어내우는 내 고통이 더 심하니, 그렇다면 너희들의 손을 빌릴 것 없이 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릴 터이니 보아라."
 
785
하고 머리로 옆에 있는 기둥을 받고 정신을 잃고 엎어졌다.
 
786
여러 놈들이 인공호흡을 한다, 냉수를 면상에 뿜는다 하여 내가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에 여러 놈 중에서 한 놈이 능청스럽게,
 
787
"김구는 조선인 중에 존경을 받는 인물이니 이같이 대우하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본직에게 맡기시기를 바라오."
 
788
하고 청을 하니 여러 놈들이 즉시 승낙했다.
 
789
승낙을 받은 그놈이 나를 제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담배도 주고 말도 좋은 말을 쓰고 대우가 융숭했다. 그놈의 말이 자기는 황해도에 출장하여 내게 관한 조사를 하여가지고 왔는데, 그 결과로 보면 나는 교육에 열심하여 월급을 받거나 못 받거나 여일하게 교무에 열심하고, 일반 인민의 여론을 듣더라도 나는 정직한 사람인데 경무총감부에서도 내 신분을 잘 모르고 악형을 많이 한 모양이니 대단히 유감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심문하는 데는 이렇게 할 사람과 저렇게 할 사람이 따로 있는데 나 같은 인물에 대하여서 그렇게 한 것은 크게 실례라고 아주 뻔뻔스럽게 듣기 좋은 소리를 했다.
 
790
왜놈들이 우리 애국자들의 자백을 짜내기 위하여 하는 수단은 대개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으니, 첫째는 악형이요, 둘째는 배고프게 하는 것이요, 그리고 셋째는 우대하는 것이다. 악형에는 회초리와 막대기로 전신을 두들긴 뒤에 다 죽게 된 사람을 등상 위에 올려 세우고 붉은 오랏줄로 뒷짐결박을 지워서 천장에 있는 쇠갈고리에 달아 올리고는 발등상을 빼어버리면 사람이 대롱대롱 공중에 달리는 것이다. 이 모양으로 얼마 동안을 지나면 사람은 고통을 못 이기어 정신을 잃어버린다. 그런 뒤에 사람을 끌러 내려놓고 얼굴과 몸에 냉수를 끼얹으면 다시 소생하여 정신이 든다. 나는 난장을 맞을 때에 내복 위로 맞으면 덜 아프다 하여 내복을 벗어버리고 맞았다.
 
791
그 다음의 악형은 화로에 쇠꼬챙이를 달구어놓고 그것으로 벌거벗은 사람의 몸을 막 지지는 것이다.
 
792
그 다음의 악형은 세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만한 모난 막대기를 끼우고 그 막대기 두 끝을 노끈으로 꼭 졸라매는 것이다.
 
793
그 다음은 사람을 거꾸로 달고 코에 물을 붓는 것이다.
 
794
그러나 이러한 악형을 당하면 나도 악을 내어서 참을 수도 있지마는 이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굶기는 벌이다. 밥을 부쩍 줄여서 겨우 죽지 아니할 만큼 먹이는 것인데, 이리하여 배가 고플 대로 고픈 때에 차입밥을 받아서 먹는 고깃국과 김치 냄새를 맡을 때에는 미칠 듯이 먹고 싶다.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을 팔아서라도 맛있는 음식을 들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난다. 박영효의 부친이 옥중에서 섬거적을 뜯어먹다가 죽었다는 말이며, 옛날 소무가 전을 씹어 먹으며 한나라 절개를 지켰다는 글을 생각할 때에 나는 사람의 마음은 배고파서 잃고, 짐승의 성품만이 남은 것이 아닌가 하고 자책하였다.
 
795
차입밥! 얼마나 반가운 것인가. 그러나 왜놈들이 원하는 자백을 아니 하면 차입은 허하지 아니한다. 참말이나 거짓말이나 저희들의 비위에 맞는 소리로 답변을 해야만 차입을 허하는 것이다. 나는 종내 차입을 못 받았다. 조석 때면 내 아내가 내게 들리라고 큰 소리로,
 
796
"김구 밥 가져왔어요."
 
797
하고 소리치는 것이 들리나, 그때마다 왜놈이,
 
798
"깅가메 나쁜 말이 햇소데. 사시이래(차입) 일이 오브소다."
 
799
하고 물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깅가메'라는 것은 왜놈들이 부르는 내 별명이다.
 
800
그러나 배고픈 것보다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그것은 우대였다.
 
801
내가 아내를 팔아서라도 맛있는 것을 실컷 먹고 싶다고 생각할 때에 경무총감 명석(明石元二郞: 아카시 모토지로)의 방으로 나를 불러들여 극진히 우대하였다. 더할 수 없는 하지하천의 대우에 진절머리가 났던 나에게 이 우대가 기쁘지 않음이 아니었다.
 
802
명석이 놈이 내게 한 말의 요령은 이러하였다. 내가 신부민으로 일본에 대한 충성만 표시하면 즉각으로 자기가 총독에게 보고하여 옥고를 면하게 할 터요, 또 일본이 조선을 통치함에 있어서 순전히 일본인만을 쓰는 것이 아니라 덕망이 높은 조선 인사를 얻어서 정치를 하게 하려 하니, 그대와 같은 충후한 장자로서 대세의 추이를 모를 바 아닌즉 순응함이 어떠냐. 그런즉 안명근 사건에 대한 것은 사실대로 자백을 하라는 것이었다.
 
803
나는 명석에게 대하여,
 
804
"당신이 나의 충후함을 인정하거든 내가 자초로부터 공술한 것도 믿으시오."
 
805
하였다. 그놈은 가장 점잖은 체모를 가지나 기색은 좋지 못하였다.
 
806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오늘 내가 불려나와서 처음에 당장 때려죽인다고 하다가 이놈의 방으로 끌려 들어온 것이었다.
 
807
이놈은 국우(國友尙謙: 구니토모 쇼겐)라는 경시다. 그는 제가 대만에 있을 때에 어떤 대만인 피의자 하나를 담임하여 심문하였는데, 그 사람이 나와 같이 고집하다가 검사국에 가서야 일체를 자백하였노라 하는 편지를 국우에게 보내었다 하며, 나도 검사국에 넘어가거든 잘 자백을 할 터이니 그러면 검사의 동정을 얻으리라 하고 전화로 국수장국에 고기를 많이 넣어서 가져오라고 명하여 그것을 내 앞에 놓고 먹기를 청한다. 나는 나를 무죄로 한다면 이 음식을 먹으려니와 나를 유죄로 한다면 나는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하여 숟가락을 들지 아니하였다.
 
808
그런즉 그놈이,
 
809
"김구 씨는 한문병자(漢文病者)야. 김구는 내게 동정을 아니 하지마는 나는 자연히 김구 씨께 동정이 간단 말요. 그래서 변변치 못하나마 드리는 대접이니 식기 전에 어서 자시오."
 
810
한다. 그래도 나는 일향 사양하였더니 국우는 웃으면서 한자로, '군의치독부(君疑置毒否:그대는 음식에 독을 넣었다고 의심하는가)'하는 다섯 자를 써 보이며, 이제는 심문도 종결되었고 오늘부터는 사식 차입도 허한다고 하였다. 나는 독을 넣었다고 의심하는 것은 아니라 하고 그 장국을 받아먹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부터 사식이 들어왔다.
 
811
나와 같은 방에 이종록이라 하는 청년이 있는데 그를 따라온 친척이 없어서 사식을 들여 줄 이가 없었다. 내가 밥을 한 방에서만 먹으면 그에게 나눠줄 수도 있겠지마는 사식은 딴 방에 불러내어서 먹이기 때문에 그리할 수가 없어서 나는 밥과 반찬을 한 입 잔뜩 물고 방에 들어와서 제비가 새끼 먹이듯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 먹였다. 그러나 그것도 한 때 뿐이요, 이튿날 나는 종로 구치감으로 넘어갔다. 방은 독방이라 심심하나 모든 것이 총감부보다는 편하고 거기서 주는 감식이라는 밥도 총감부의 것보다는 훨씬 많았다.
 
812
내 사건은 사실대로만 처단한다 하면 보안법 위반으로, 극형이라 하여도 징역 1년밖에 안 될 것이지마는 나를 억지로 안명근의 강도 사건에 끌어다 붙이려 하였다. 내가 억지로라 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내가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서간도에 이민을 하고 무관학교를 세울 목적으로 이동녕을 파견할 회의를 한 날짜가 바로 안악에서 안명근, 김홍량 등이 부호를 협박할 논의를 하였다 하는 그 날짜이므로, 나는 도저히 안악에서 한 회의에 참예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하건마는 안악 양산학교 교직원의 아들 이원형이라 하는 14세 되는 어린아이를 협박하여 내가 그 자리에 참예하는 것을 보았노라고 거짓 증언을 시켜서 나를 안명근의 강도 사건에 옭아 넣었다. 애매하기로 말하면 김홍량이나 도인권이나 김용제나 다 애매하지마는 그래도 이들은 그날 안악에는 있었으니 회의에 참예했다고 억지로 우겨댈 수도 있겠으나, 500리 밖에서 다른 회의에 참예하였다고 저희 기록에 써놓은 내가, 같은 날에 안악의 회의에도 참예했다는 것은 요술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813
나는 내게 대한 유일한 증인인 이원형 소년이 내가 심문받는 옆 방에서 심문받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814
"너는 안명근과 김구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았지?"
 
815
하는 심문에 대하여 이 소년은,
 
816
"나는 안명근이라는 사람은 얼굴도 모르고, 김구는 그 자리에 없었소."
 
817
하고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옆에서 어떤 조선 순사가,
 
818
"이 미련한 놈아, 안명근도 김구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만 하면 너의 아버지를 따라 집에 가게 해 줄 터이니 시키는 대로 대답을 해."
 
819
하는 말에 원형은,
 
820
"그러면 그렇게 할 터이니 때리지 마셔요."
 
821
하였다. 검사정에서도 이원형을 증인으로 불러들였으나, 이 소년이 "네" 하는 대답이 있자마자 다른 말이 더 나오는 것을 꺼리는 듯 곧 문 밖으로 몰아내었다. 나는 500리를 새에 둔 두 회의에 참예하는 김구를 만드느라고 매우 수고롭겠다고 검사에게 말하였더니 검사는 그 말에 대답도 아니 하고,
 
822
"종결!"
 
823
하고 심문이 끝난 것을 선언하였다.
 
824
내가 경무총감부에 갇혀 있을 그 때 의병장 강기동도 잡혀와 있었다. 그는 애초에 의병으로 다니다가 귀순하여서 헌병 보조원이 되었다. 한 번은 사형을 당할 의병 10여명이 갇힌 감방을 수직(守直:맡아서 지킴)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감방 문을 열어 의병들을 다 내어놓고 무기고를 깨뜨리고 무기를 꺼내어 일제히 무장을 하고 그도 같이 달아나서 경기, 충청, 강원도 등지로 왜병과 싸우고 돌아다니다가 안기동이라고 변명하고 원산에 들어가 무슨 계획을 하다가 붙들려온 것이었다. 그는 육군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 김좌진도 애국운동으로 강도로 몰려 징역을 받고 나와 같은 감방에서 고생을 하였다.
 
825
하루는 안악 군수 이모라는 자가 감옥으로 나를 찾아와서 양산학교 집과 기구를 공립보통학교에 내어놓는다는 도장을 찍으라고 하므로, 나는 집은 나랏집이니까 내어놓지마는 기구는 사삿것이니 사립학교인 양산학교에 기부한다고 하였으나, 그것도 공립으로 가져가고 말았다. 양산학교는 우리들 불온분자들의 학교라 하여 강제로 폐지해버린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아이들은 목자를 잃은 양과 같이 다 흩어져버렸을 것이다. 특별히 손두환과 우기범 두 학생이 생각났다. 재주로나 뜻으로나 특출하였고, 어리면서도 망국의 한을 느낄 줄 아는 이들이었다.
 
826
어떻게 하여서라도 이 자리를 모면하여 해외에서 활동하고 싶던 김홍량도 자기가 안명근의 부탁으로 신천 이원식에게 권고하였다는 것을 자백하였으니 도저히 빠지기 어려울 것이다. 심혈을 다 바치던 교육사업도 수포로 돌아가고 믿고 사랑하던 동지도 살아 나갈 길이 망연하니 분하기 그지없었다. 어머니는 안악에 있던 가장집물을 다 팔아가지고 내 옥바라지를 하시려고 서울로 올라오셨다. 내 처와 딸 화경이는 평산 처형네 집에 들렀다가 공판날이 되어서 온다는 어머니의 말씀이셨다.
 
827
어머니가 손수 담으신 밥그릇을 열어 밥을 떠먹으며 생각하니 이 밥에 어머니 눈물이 점점이 떨어졌을 것이었다. 18년 전 해주에서의 옥바라지와 인천 옥바라지를 하실 때에는 내외분이 고생을 나누기나 하셨건마는 이제는 어머니 혼자셨다. 어머님께 도움이 되기는커녕 위로를 드릴 능력이 있는 자가 그 누군가.
 
828
이럭저럭 공판날이 되었다. 죄수를 태우는 마차를 타고 경성 지방재판소 문전에 다다르니 어머니가 화경을 업으시고 아내를 데리고 거기 서 계셨다.
 
829
우리는 2호 법정이라는 데로 끌려 들어갔다. 법정 피고석 걸상에 앉은 차례는 수석에 안명근, 다음에 김홍량, 셋째로는 나, 그리고는 이승길, 배경진, 한순직, 도인권, 양성진, 최익형, 김용제, 최명식, 장윤근, 고봉수, 한정교, 박형병 등 모두 열다섯 명이 늘어앉고, 방청석을 돌아보니 피고인의 친척, 친지와 남녀 학생들이 와 있었다. 변호사, 신문기자석에도 다 사람이 있었다. 한필호 선생이 경무총감부에서 매 맞아 별세하고, 신석충 진사는 사리원으로 호송되는 도중에 재령강 철교에서 투신자살을 하였단 말을 여기서 들었다.
 
830
소위 판결이라는 것은 안명근이 종신 징역이요, 김홍량, 김구, 이승길, 배경진, 한순직, 원행섭, 박만준 등 일곱 명은 징역 15년(원행섭, 박만준은 궐석이었다), 도인권, 양성진이 10년, 최익형, 김용제, 장윤근, 고봉수, 한정교, 박형병은 각각 7년 또는 5년이니 이것은 강도사건 관계요, 보안법 사건으로는 양기탁을 주범으로 하여 안태국, 김구, 김홍량, 주진수, 옥관빈, 김도희, 김용규, 고정화, 정달하, 감익룡과 이름은 잊었으나 김용규의 족질 한 사람이 있었는데, 판결되기는 양기탁, 안태국, 김구, 김홍량, 주진수, 옥관빈은 징역 2년이요, 나머지는 1년으로부터 6개월이었다. 그리고 재판을 통하지 아니하고 소위 행정처분으로 이동휘, 이승훈, 박도병, 최종호, 정문원, 김영옥 등 19인은 무의도, 제주도, 고금도, 울릉도로 1년간 거주 제한이라는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김홍량이나 나는 강도로 15년, 보안법으로 2년, 모두 17년 징역살이를 하게 된 것이었다.
 
831
판결이 확정되어 우리는 종로 구치감을 떠나서 서대문 감옥으로 넘어갔다. 지금까지 미결수었으나 이제부터는 변통없는 전중이었다. 동지들의 얼굴을 날마다 서로 대하게 되고 이따금 말로 통정도 할 수 있는 것이 큰 위로였다.
 
832
7년, 5년 징역까지는 세상에 나갈 희망이 있었지마는 10년, 15년으로는 살아서 나갈 희망은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몸은 왜의 포로가 되어 징역을 지면서도 정신으로는 왜놈을 짐승과 같이 여기고 쾌활한 마음으로 낙천 생활을 하리라고 작정하였다. 다른 동지들도 다 나와 뜻이 같았다.
 
833
옥중에 있는 동지들은 대개 아들이 있었으나 나는 딸이 하나가 있을 뿐이요, 아들이 없었다. 김용제 군은 아들이 4형제나 되므로 그 셋째 아들 문량으로 하여금 내 뒤를 잇게 한다고 허락하였다. 나도 동지의 호의를 고맙게 받았다.
 
834
또 한 가지 나로 하여금 비관을 품지 않게 하는 일이 있으니, 그것은 일본이 내가 잡혀오기 전에 생각하던 것과 같이 크고 무서운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본 것이었다. 밑으로는 형사, 순사로부터 꼭지로는 경무총감까지 만나 보는 동안에 모두 좀것들이요, 대국민다운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가슴에 엑스광선을 대어서 내 속과 내력을 다 들여다본다면서도 내가 17년 전의 김창수인 줄도 몰라보고 깝죽대는 도변이야말로 일본을 대표한 자인 것 같다.
 
835
나는 이렇게 단정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장래에 대하여서 비관하지 아니하게 되었다.
 
836
허위, 이강년 등 큰 애국지사의 부하로 의병을 다니다가 들어왔다는 사람들이 인물로나 식견으로나 보잘것없음을 볼 때에는 낙심도 되지마는 이재명, 안중근 같은 의사의 동지로 잡혀 들어온 사람들의 애국심이 불같고 정신이 씩씩한 것을 보면, 교육만 하면 우리 민족은 좋은 국민이 될 것을 아니 믿을 수 없었다. 저 무지한 의병들도 일본에 복종하는 백성이 되지 아니하고 10년, 15년의 벌을 받는 사람이 된 것만 해도 고맙고 존경할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도 고 후조 선생 같은 어른의 가르침이 없었던들 어찌 대의를 아는 사람이 되었으랴.
 
837
옥에 있는 동안에 나는 내 심리가 차차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지난 10여년 간에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서 무엇이나 저를 책망할지언정 남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남의 허물은 어디까지나 용서하는 그러한 부드러운 태도가 변하여서 일본에 대한 것이면 무엇이나 미워하고 반항하고 파괴하려는 결심이 생긴 것이었다.
 
838
나는 아침저녁으로 다른 죄수들과 같이 왜 간수에게 절을 하는 것이 무척 괴롭고 부끄러웠다. 다른 죄수들은 대의를 몰라서 그러하거니와 너는 고 선생의 제자가 아니냐 하고 양심을 때리는 것이 있었다.
 
839
나는 내 손으로 밭 갈고 길쌈함이 없이 오늘까지 먹고 입고 살아왔다. 그 먹은 밥과 입은 옷이 뉘에게서 나왔느냐, 우리 대한 나라의 것이 아니냐. 나라가 나를 오늘날까지 먹이고 입힌 것이 왜놈에게 순종하여 붉은 요에 콩밥이나 얻어먹으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840
'식인지식의인의 소지평생막유위(食人之食衣人衣 所志平生莫有違:사람의 밥을 먹고 사람의 옷을 입었으니, 품은 뜻은 평생토록 어김이 없어야 한다)'
 
841
내가 대한 나라의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살아왔으니, 이 수치를 참고 살아나서 앞으로 17년 후에 이 은혜를 갚을 공을 세울 수가 있느냐.
 
842
내가 이 모양으로 고민할 때에 안명근 군이 굶어 죽기를 결심하였노라고 내게 말하기로 나는 서슴지 않고,
 
843
"할 수 있거든 단행하시오."
 
844
하였다. 그날부터 안명근은 배가 아프다고 칭하고 제게 들어오는 밥은 다른 죄수에게 나눠주고 4, 5일을 연해 굶어서 기운이 탈진하였다. 감옥에서는 의사를 시켜 진찰케 하였으나 아무 병이 없으므로 안명근을 결박하고 강제로 입을 벌리고 계란 등속을 흘려 넣어서 죽으려는 목숨을 억지로 붙들었다. 죽을 자유조차 없는 이 자리였다.
 
845
"나는 또 밥을 먹소." 하고 안명근은 내게 기별하였다.
 
846
우리가 서대문 감옥으로 넘어온 후에 얼마 아니하여서 또 중대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소위 사내(寺內:데라우치) 총독 암살사건이라는 맹랑한 사건으로, 전국에서 무려 700여명의 애국자가 검거되어 경무총감부에서 우리가 당한 악형을 다 겪은 뒤에는 105인이 공판으로 회부된 사건이다. 105인 사건이라고도 하고 신민회 사건이라고도 한다. 2년 형의 진행 중에 있던 양기탁, 안태국, 옥관빈과 제주도로 정배 갔던 이승훈도 붙들려 올라왔다. 왜놈들은 새로 산 밭에 뭉우리돌을 다 골라 버리고야 말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대한이 제 것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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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복역한지 칠팔 삭 만에 어머니께서 서대문 감옥으로 나를 면회하려 오셨다. 딸깍하고 주먹 하나 드나들 만한 구멍이 열리기로 내다본즉 어머니가 서 계시고, 그 곁에는 왜 간수 한 놈이 지키고 있다. 어머니는 태연한 안색으로,
 
848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면회는 한 사람밖에 못 한다고 하여서 네 처와 화경이는 저 밖에 와 있다. 우리 세 식구는 잘 있으니 염려 말아라. 옥중에서 네 몸이나 잘 보중하여라. 밥이 부족하거든 하루 두 번씩 사식 들여 주랴?"
 
849
하시고 언성 하나도 떨리심이 없었다. 저렇게 씩씩하신 어머니께서 자식을 왜놈에게 빼앗기시고 면회를 하겠다고 왜놈에게 고개를 숙이고 청원을 하셨을 것을 생각하니 황송하고도 분하였다.
 
850
우리 어머니는 참말 갸륵하셨다! 17년 징역을 받은 아들을 대할 때에 어쩌면 저렇게 태연하실 수가 있었으랴. 그러나 면회를 마치고 돌아가실 때에는 눈물이 앞을 가려서 발부리가 아니 보이셨을 것이다.
 
851
어머니께서 하루 두 번 들여 주시는 사식을 한 번은 내가 먹고 한 번은 다른 죄수에게 번갈아 나눠주었다. 그들은 받아먹을 때에는 평생에 그 은혜를 아니 잊을 듯이 굽신거리지마는 다음번에 저를 아니 주고 다른 사람을 줄 때에는,
 
852
"그게 네 의붓아비냐, 효자정문 내릴라."
 
853
이러한 소리를 하면서 내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면 그 때에 내게 얻어먹는 편이 들고 나서 나를 역성하므로 마침내 툭탁거리고 싸움이 벌어져서 둘이 다 간수에게 흠씬 얻어맞는 일도 있었다. 나는 선을 한다는 것이 도리어 악이 되는 것이었다.
 
854
나도 서대문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는 먼저 들어온 패들이 나를 멸시하였으나 소위 국사 강도범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부터는 대접이 변하였다. 더구나 이재명 의사의 동지들이 모두 학식이 있고 일어에 능통하여서 죄수와 간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 때에는 통역을 하기 때문에 죄수들 간에 세력이 있었는데, 그들이 나를 우대하는 것을 보고 다른 죄수들도 나를 어려워하게 되었다.
 
855
나는 처음에는 한 백여 일 동안 수갑을 채인 대로 있었다. 더구나 첫날 수갑을 채우는 놈이 너무 단단하게 졸라서 살이 패이고 손목이 퉁퉁 부었으므로 이튿날 문제가 되어서,
 
856
"왜 아프다고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857
고 하기로 나는,
 
858
"무엇이나 시키는 대로 복종하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859
하였다. 그랬더니,
 
860
"이 다음에는 불편한 일이 있거든 말하라."
 
861
고 하였다.
 
862
손목은 아프고 방은 좁아서 매우 괴로웠으나 나는 꾹 참았다.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이러한 생활에도 차차 익으면 심상하게 되었다. 수갑도 끄르게 되어서 몸이 좀 편하게 되니 불현듯 최명식 군이 보고 싶었다. 수갑 끄른 자리에 허물은 지금도 완연히 남아 있다.
 
863
최 군은 옴이 올라서 옴방에 있다 하니 나도 옴이 생기면 최 군과 같이 있게 되리라 하여 인공적으로 옴을 만들었다. 의사의 순회가 있기 30분 전 쯤하여 철사 끝으로 손가락 사이를 꼭꼭 찔러 놓으면 그 자리가 볼록볼록 부르트고 말간 진물이 나와서 천연 옴으로 보였다. 이것은 내가 감옥살이에서 배운 부끄러운 재주였다.
 
864
이 속임수가 성공하여 나는 옴쟁이 방으로 옮겨져서 최명식과 반가이 만날 수 있었다. 반가운 김에 밤이 늦도록 이야기를 하다가 좌등佐藤: 사토)이라 하는 간수 놈에게 들켜서 누가 먼저 말을 하였느냐 하기로 내가 먼저 하였노라 하였더니 나를 창살 밑으로 나오라 하여 세워놓고 곤봉으로 난타하였다.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아니하고 맞았으나, 그때에 맞은 것으로 내 왼편 귀 위의 연골이 상하여 봉충이가 되어서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다행히 최 군은 용서한다 하고 다시 왜말로,
 
865
"하나시 헷소도 다다쿠도(이야기하면 때려줄 테야.)"
 
866
하고 좌등은 물러갔다.
 
867
감옥에서 죄수에게 이렇게 가혹한 대우를 하기 때문에 죄수들은 더욱 반항심과 자포자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사기나 횡령으로 들어온 자는 절도나 강도질을 하였다. 그리고 만기로 출옥하였던 자들도 다시 들어오는 자를 가끔 보았다. 민족적 반감이 충만한 우리를 왜놈의 그 좁은 소갈머리로는 도저히 감화할 수 없겠지마는 내 민족끼리의 나라에서 감옥을 다스린다 하면 단지 남의 나라를 모방만 하지 말고 우리의 독특한 제도를 만들 필요가 있다. 즉 감옥의 간수부터 대학 교수의 자격이 있는 자를 쓰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는 것보다는 국민의 불행한 일원으로 보아서 선으로 지도하기에만 힘을 쓸 것이요, 일반 사회에서도 입감자(入監者)를 멸시하는 감정을 버리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한다면 반드시 좋은 효과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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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의 감옥제도로는 사람을 작은 죄인으로부터 큰 죄인을 만들뿐더러, 사람의 자존심과 도덕심마저도 마비시켰다. 예하면 죄수들은 어디서 무엇을 도둑질하던 이야기, 누구를 어떻게 죽이던 이야기를 부끄러워함도 없이 도리어 자랑삼아서 하고 있었다. 그도 친한 친구에게면 몰라도 초면인 사람에게도 꺼림이 없고, 또 세상에 드러난 죄도 아니고 저 혼자만 아는 죄를 뻔뻔스럽게 말하는 것을 보아도 그들이 감옥에 들어와서 부끄러워하는 감정을 잃어버린 표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잃을진대 무슨 짓은 못하랴. 짐승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감옥이란 이런 곳이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869
나는 최명식과 함께 소제부(掃除夫:청소부)의 일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죄수들이 부러워하는 '벼슬'이다. 우리는 공장에서 죄수들에게 일감을 돌려주고 뜰이나 쓸고 나면 할 일이 없어서 남들이 일하는 구경을 하거나 돌아다녔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최 군과 나는 죄수 중에서 뛰어난 인물을 고르기로 하였다. 내가 돌아보다가 눈에 띄는 죄수의 번호를 기억하고 명식 군도 기억하여 나중에 맞추어 보아서 둘의 본 바가 일치하는 자가 있으면 그의 내력과 인물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870
이 방법으로 우리는 한 사람을 골랐다. 그는 다른 죄수와 같이 차리고 같은 일을 하지마는 그 눈에 정기가 있고, 동작에도 남다른 데가 있었다. 나이는 40 내외였다. 인사를 청한즉 그는 충청북도 괴산 사람이요, 5년 징역을 받아 이태를 치르고 앞으로 3년을 남긴 강도범으로, 통칭 김 진사라는 사람이었다. 나는 누구며 무슨 죄로 왔느냐고 묻기로, 나는 황해도 안악 사람이요, 강도로 15년을 받았다고 하였더니 김 진사는,
 
871
"거, 짐이 좀 무겁소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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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가 나에게 "초범이시오?"하기로 그렇다고 대답할 때에 왜 간수가 와서 더 말을 못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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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본 어떤 죄수가 나에게 그 사람을 아느냐 하기로 초면이라 하였더니, 그 죄수의 말이,
 
874
"남도 도적 치고 그 사람 모르는 도적은 없습니다. 그가 유명한 삼남 불한당 괴수 김 진사요. 그 패거리가 많이 잡혀 들어왔는데, 더러는 병나 죽고 사형도 당하고 놓여 나간 자도 많지요."
 
875
하였다.
 
876
그랬더니 그날 저녁에 우리들이 벌거벗고 공장에서 감방으로 들어올 때에 그 역시 우리 뒤를 따라서,
 
877
"오늘부터 이 방에서 괴로움을 끼치게 됩니다."
 
878
하고 내가 있는 감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퍽이나 반가워서,
 
879
"이 방으로 전방이 되셨소?"
 
880
하고 물은즉 그는,
 
881
"네. 아, 노형이 계신 방이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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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도 기쁜 빛을 보인다. 옷을 입고 점검도 끝난 뒤에 나는 죄수 두 사람에게 부탁하여 철창에 귀를 대어 간수가 오는 소리를 지켜 달라 하고 김 진사와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883
내가 먼저 입을 열어, 아까 공장에서는 서로 할 말을 다 못하여서 유감일러니 이제 한 방에 있게 되니 다행이라는 말을 하였더니, 그도 동감이라고 말하고는 계속하여서 그는 마치 목사가 신입 교인에게 세례문답을 하듯이 내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 첫 질문은,
 
884
"노형은 강도 15년이라 하셨지요?"
 
885
하는 것이었다.
 
886
"네, 그렇소이다."
 
887
"그러면 어느 계통이시오, 추설이요, 목단설이시오. 북대요? 또 행락은 얼마 동안이나 하셨소?"
 
888
나는 이게 다 무슨 소린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추설', '목단설'은 무엇이요, '북대'는 무엇이며, '행락'은 대체 무엇일까?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는 것을 보더니 김 진사는 빙긋 웃으며,
 
889
"노형은 북대인가 싶으오."
 
890
하고 경멸하는 빛을 보였다.
 
891
내 옆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죄수 하나가 김 진사를 대하여 나를 가리키며, 나는 국사범 강도라, 그런 말을 하여도 못 알아들을 것이라고 변명하여 주었다. 그는 찰강도라 계통 있는 도적이었다. 그의 설명을 듣고야 김 진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892
"내 어째 이상하다 했소. 아까 공장에서 노형이 강도 15년이라기에 위아래로 훑어보아도 강도 냄새가 안 나기에 아마 북대인가 보다 하였소이다."
 
893
한다.
 
894
나는 연전에 양산학교 사무실에서 교원들과 함께 하던 이야기를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세상에 활빈당이니 불한당이니 하는 큰 도적 떼가 있어서 능히 장거리와 큰 고을을 쳐서 관원을 죽이고 전재(錢財)를 빼앗되, 단결이 굳고 용기가 있으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동작이 민활하여 나라 군사의 힘으로도 그들을 잡지 못한단 말을 들었는데,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자면 견고한 조직과 기민한 훈련이 필요한즉 이 도적 떼의 결사와 훈련의 방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하여 두루 탐문해보았으나 마침내 아무 단서도 얻지 못하고 만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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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을 굶으면 도적질할 마음이 난다고 하지마는 마음만으로 도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니, 거기도 용기와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담을 넘고 구멍을 뚫는 좀도둑은 몰라도 수십 명, 수백 명 떼를 지어 다니는 도적이라면 거기는 조직도 있고 훈련도 있고 의리도 있으려니와 무엇보다도 두목 되는 지도자가 있을 것인즉 수십 명, 수백 명 도적 떼의 지도자가 될 만한 인물이면 능히 한 나라를 다스려갈 만한 지혜와 용기와 위엄이 있어야 할 것이다.
 
896
그래서 나는 김 진사에게 도적 떼의 조직에 관한 것을 물었다. 그런즉 진사는 의외에도 은휘함 없이 내 요구에 응하였다.
 
897
"우리나라의 기상이 다 해이한 이 때까지도 그대로 남은 곳은 벌과 도적의 법뿐이외다."
 
898
라는 허두로 시작된 김 진사의 말에 의하면, 고려 이전은 상고할 길이 없으나, 이조시대의 도적 떼의 기원은 이성계의 이신벌군(以臣伐君:신하가 임금을 침)의 불의에 분개한 지사들이 도당을 모아 일변 이성계를 따라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소위 양반들의 생명과 재물을 빼앗고, 일변 그들이 세우려는 질서를 파괴하여서 불의에 대한 보복을 하려는 데서 나왔으니, 그 정신에 있어서는 두문동 72현과 같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도적이라 하나 약한 백성의 것은 건드리지 아니하고 나라 재물이나 관원이나 양반의 것을 약탈하여서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구제함으로 쾌사(快事:통쾌한 일)를 삼았다. 이 모양으로 나라를 상대로 하기 때문에 자연히 법이 엄하고 단결이 굳어서 적은 무리의 힘으로 능히 5백년간 나라의 힘과 겨루어 온 것이었다.
 
899
이 도적의 떼는 근본이 하나요, 또 노사장이라는 한 지도자의 밑에 있으나, 그 중에서 강원도에 근거를 둔 일파를 '목단설'이라고 부르고, 삼남에 있는 것을 '추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설에 속한 자는 서로 만나면 곧 동지로 서로 믿고 친밀하게 되었다. 이 두 설에 들지 아니하고 임시임시로 도당을 모아서 도적질하는 자를 '북대'라고 하는데, 이 북대는 목단설과 추설의 공동의 적으로 알아서 닥치는 대로 죽여 버리게 되었다.
 
900
노사장 밑에는 유사가 있고, 각 지방의 두목도 유사라고 하여 국가의 행정조직과 방사(倣似:매우 비슷함)하게 전국의 도적을 통괄하였다. 일 년에 한 차례 '대장'을 부르니 이것은 한 설만의 대회였다. 대회라고 전원이 출석하기는 불가능하므로 각 도와 각 군에서 몇 명씩 대표자를 파견하기로 되었는데, 그 대표자는 각기 유사가 지명하게 되며, 한 번 지명을 받으면 절대 복종이었다.
 
901
이 '장' 부르는 처소는 흔히 큰 절이나 장거리였다. 대소공사를 혹은 의논하고 혹은 지시하여 장이 끝난 뒤에는 으레 어느 고을이나 장거리를 쳐서 시위를 하는 것이었다.
 
902
그들이 대회에 참예하려 갈 때에는 혹은 양반으로, 혹은 등짐장수로, 혹은 장돌뱅이, 혹은 중, 혹은 상제로, 별별 가장을 하여서 관민의 눈을 피하였다. 어디를 습격하러 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세상을 놀라게 한 하동장 습격은 장례를 가장하여 무기를 관에 넣어 상여에 싣고 혹은 상제, 혹은 복인, 혹은 상두꾼, 혹은 화장객이 되어서 장날 백주에 당당히 하동 읍내로 들어간 것이었다.
 
903
김 진사는 이러한 설명을 구변 좋게 한 후에 내게,
 
904
"노형, 황해도라셨지? 그러면 연전에 청단장을 치고 곡산 원을 죽인 사건을 아시겠구려?"
 
905
하기로 아노라고 대답하였더니, 김 진사는 지난 일을 회상하고 유쾌한 듯이 빙그레 웃으며,
 
906
"그 때에 도당을 지휘한 것이 바로 나요. 나는 양반의 행차로 차리고 사인교를 타고 구종별배로 앞뒤 벽제까지 시키면서 호기당당하게 청단장에를 들어갔던 것이오. 장에 볼 일을 다 보고 질풍신뢰와 같이 곡산읍으로 들이몰아서 곡산 군수를 잡아 죽였으니, 이것은 그놈이 학정을 하여서 인민으로 어육을 삼는다 하기로 제천행도(하늘을 대신하여 정의를 실현함)를 한 것이었소."
 
907
하고 말을 마쳤다.
 
908
그러면 이번 징역이 그 사건 때문이오?"
 
909
하고 내가 묻는 말에 그는,
 
910
"아니오. 만일 그 사건이라면 5년만으로 되겠소? 기위 면키 어려울 듯하기로 대단치 아니한 사건 하나를 실토하여서 5년 징역을 졌소이다."
 
911
나는 그들이 새 동지를 구할 때에 어떻게 신중하게 오래 두고 그 인물을 관찰하는 것이며, 이만하면 동지가 되겠다고 판단한 뒤에도 어떻게 그의 심지를 시험하는 것이며, 이 모양으로 동지를 고르기 때문에 한 번 동지가 된 다음에는 서로 다투거나 배반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며, 장물을 나눌 때에 어떻게 공평하다는 것이며, 또 동지의 의리를 배반하는 자가 만일에 있으면 어떻게 형벌이 엄중하다는 것도 김 진사에게 들었다.
 
912
인물을 고를 때에는 먼저 눈 정기를 본다는 것이며,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동지의 처첩을 범하는 것과 장물을 감추는 것이요, 상 중에 가장 큰 상은 불행히 관에 잡혀가더라도 동지를 불지 아니하는 것이니, 이러한 사람을 위하여서는 그 가족이 편안히 살도록 하여 준다는 말도 들었다.
 
913
김 진사의 말을 듣고 나는 나라의 독립을 찾는다는 우리 무리의 단결이 저 도적만도 못한 것을 무한히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914
여기서 나는 동지 도인권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는 본시 용강 사람으로, 노백린, 김희선, 이갑 등이 장령으로 있을 때에 군인이 되어서 정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군대가 해산되매 향리에 돌아와 있는 것을 양산학교 체육 선생으로 연빙하여 와서 우리의 동지가 되어 이번 사건에도 10년 징역을 받고 나와 같이 고생을 하게 된 사람이다. 이때에 옥중에는 죄수를 모아서 불상 앞에 예불을 시키는 예가 있었는데, 도인권은 자기는 예수교인이니 우상 앞에 고개를 숙일 수 없다 하여 아무리 위협하여도 고개를 빳빳이 하고 있었다. 이것에 문제가 되어서 마침내 예불은 강제로 시키지 아니하기로 작정이 되었다.
 
915
또 옥에서 상표를 주는 것을 그는 거절하였다. 자기는 죄를 지은 일도 없고 따라서 회개한 일도 없으니 개전(改悛)을 이유로 하는 상표를 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916
또 그 후에 가출옥을 시킬 적에도 도인권은, 본래 내가 무죄한 것을 지금 와서 깨달았으니 판결을 취소하고 나가라 하면 나가겠지마는 가출옥이라는 '가'자가 불쾌하니 아니 받는다고 버티어서, 옥에서도 할 수 없이 형기를 채우고 도로 내보냈다. 도인권의 이러한 행동은 강도로서는 능히 못할 일이라, '만산고목일지청(萬山枯木一枝靑)'의 기개가 있었다.
 
917
'외외낙락적나라 득보건수반아(嵬嵬落樂赤裸裸 獨步乾坤誰伴我:홀로 높고 정갈하여 구애됨이 없으니 천하를 홀러 걸으매 누가 나를 짝하랴)'
 
918
라고 한 불가의 구절을 나는 도 군을 위하여 한 번 읊었다.
 
919
하루는 나가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일을 중지하고 명치(明治:메이지 일왕)가 죽었다는 것과 그 때문에 대사(大赦)를 내린다는 말을 하였다. 이 때문에 최고 2년인 보안법 위반에 걸린 동지들은 즉일로 나가고, 나는 8년을 감하여 7년이 되고, 김홍량 등 15년은 7년을 감하여 8년이 되고, 10년이라도 다 그 비례로 감형이 되었다. 그런 뒤 수삭이 지나서 또 명치의 처가 죽었다 하여 다시 잔기의 삼분지 일을 감하니, 내 형은 5년 남짓한 경형이 되고 말았다.
 
920
이때 종신이던 것이 20년으로 감하여진 안명근은 형을 가하여 죽임을 받을지언정 감형은 아니 받는다고 항거하였으나 죄수에 대하여서는 일체를 강제로 집행하는 것인즉, 감형을 아니 받을 자유도 죄수에게는 있지 아니하다 하여 필경 20년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는 안명근은 새로 지은 마포 감옥으로 이감이 되어서 다시는 그의 면목을 대할 기회도 없게 되었다. 안명근은 전후 17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연전에 방면되어 신천 청계동에서 그 부인과 같이 여생을 보내고 있더니 아령에 있는 그 부친과 친아우를 그려서 그리로 가던 길에 만주 화룡현에서 만고의 한을 품고 못 돌아올 길을 떠나고 말았다.
 
921
이렇게 연거푸 감형을 당하고 보니 이미 겪어버린 3년 남짓을 빼면 나머지 형기가 2년밖에 아니 된다. 이때부터는 확실히 세상에 나가서 활동할 희망이 생겼다. 나는 세상에 나가면 무슨 일을 할까, 지사들이 옥에 다녀가서는 왜놈에게 순종하여 구질구질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니 나도 걱정이 되었다. 나는 왜놈이 지어준 뭉우리돌대로 가리라 하고 굳게 결심하고, 그 표로 내 이름 김구(金龜)를 고쳐 김구(金九)라 하고, 당호 연하를 버리고 백범(百凡)이라고 하여 옥중 동지들에게 알렸다. 이름자를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하는 뜻이요, '백범(百凡)'이라 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 하는 내 원을 표하는 것이니, 우리 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만큼이라도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한 독립국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나는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을 때마다 하나님께 빌었다.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여보고 죽게 하소서 하고.
 
922
나는 앞으로 2년을 다 못 남기고 인천 감옥으로 이감이 되었다. 나는 그 원인을 안다. 내가 서대문 감옥 제 2과장 왜놈하고 싸운 일이 있는데, 그 보복으로 그놈이 나를 힘드는 인천 축항 공사로 돌린 것이었다.
 
923
여러 동지가 서로 만나고 위로하며 쾌활하게 3년이나 살던 서대문 감옥과 작별하고 40명 붉은 옷 입은 전중이 떼에 편입이 되어서 쇠사슬로 허리를 얽혀서 인천으로 끌려갔다. 무술년 3월 초열흘날 밤중에 옥을 깨뜨리고 도망한 내가 17년 만에 쇠사슬로 묶인 몸으로 다시 이 옥문으로 들어올 줄을 누가 알았으랴.
 
924
문을 들어서서 둘러보니 새로이 감방이 증축되었으나 내가 글을 읽던 그 감방이 그대로 있고, 산보하던 뜰도 변함이 없었다. 내가 호랑이같이 소리를 질러 도변이 놈을 꾸짖던 경무청은 매음녀 검사소가 되고, 감리사가 좌기하던 내원당은 감옥의 집물을 두는 곳간이 되고, 옛날 주사, 순검이 들끓던 곳은 왜놈의 천지를 이루었다. 마치 죽었던 사람이 몇십년만에 살아나서 제 고향에 돌아와서 보는 것 같았다. 감옥 뒷담 너무 용동 마루터기에서 옥에 갇힌 불효한 이 자식을 보겠다고 우두커니 서서 내려다보시던 선친의 얼굴이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오늘의 김구가 그날의 김창수라고 하는 자는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925
감방에 들어가니 서대문에서 먼저 전감된 낯익은 사람도 있어서 반가웠다.
 
926
어떤 자가 내 곁으로 쑥 다가앉아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927
"그 분 낯이 매우 익은데, 당신 김창수 아니오?"
 
928
한다.
 
929
참말 청천벽력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본즉 17년 전에 나와 한 감방에 있던 절도 10년의 문종칠이었다. 늙었을망정 젊을 때의 면목이 그대로 있다. 오직 그때와 다른 것은 이마에 움쑥 들어간 구멍이 있는 것이었다. 내가 의아한 듯이 짐짓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제 낯바닥을 내 앞으로 쑥 내밀어 나를 쳐다보면서,
 
930
"창수 김 서방, 나를 모를 리가 있소. 지금 내 면상에 이 구멍이 없다고 보면 아실 것 아니오. 나는 당신이 달아난 후에 죽도록 매를 맞은 문종칠이오. 그만하면 알겠구려." 하는 데는 나는 모른다고 버틸 수가 없어서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그 자가 밉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931
문가는 나에게,
 
932
"당시에 인천 항구를 진동하던 충신이 무슨 죄를 짓고 또 들어오셨소?"
 
933
하고 묻는다. 나는 귀찮게 생각하여서,
 
934
"15년 강도요."
 
935
하고 간단히 대답하였다.
 
936
문가는 입을 삐죽거리며,
 
937
"충신과 강도는 상거가 심원한데요. 그때의 창수는 우리 같은 도적놈들과 동거케 한다고 경무관한테까지 들이대지 않았소? 강도 15년은 맛이 꽤 무던하겠구려."
 
938
하고 빈정거린다.
 
939
나는 속에 불끈 치미는 것이 있었으나 문의 말을 탓하기는 고사하고 빌붙는 어조로,
 
940
"충신 노릇도 사람이 하고 강도도 사람이 하는 것 아니오? 한때에는 그렇게 놀고 한때에는 이렇게 노는 게지요. 문 서방은 어찌하여 또 이렇게 고생을 하시오?"
 
941
하고 농쳐버렸다.
 
942
"나요? 나는 이번까지 감옥 출입이 일곱 번째니 일생을 감옥에서 보내는 셈이요."
 
943
"역한(징역 기한)은 얼마요?"
 
944
"강도 7년에 5년이 되어서 한 반 년 지내면 또 한 번 세상에 다녀오겠소."
 
945
"또 한 번 다녀오다니, 여보시오, 끔찍한 말도 하시오. 또 여기를 들어와서야 되겠소?"
 
946
"자본 없는 장사가 도적질이지요. 더욱이 도적질에 맛을 붙이면 별 수가 없습니다. 당신도 여기서는 별 꿈을 다 꾸리다마는 사회에 나가만 보시오. 도적질하다가 징역한 놈이라고 누가 받자를 하오? 자연 농공상에 접촉을 못하지요.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고 도적질하던 놈은 배운 길이 그것이라 또 도적질을 하지 않소?"
 
947
문가는 이렇게 술회를 한다.
 
948
"그렇게 여러 번째라면 어떻게 감형이 되었소?"
 
949
하고 내가 물었더니 문은,
 
950
"번번이 초범이지요. 지난 일을 다 말했다가는 영영 바깥 바람을 못 쏘여 보게요?"
 
951
하고 흥 하고 턱을 춘다.
 
952
나는 서대문에 있을 적에 어떤 강도가 중형을 지고 징역을 하는 중에 그의 공범으로서 집히지 않고 있다가 횡령죄의 경형으로 들어온 것을 보고 밀고하여 중형을 지우고 저는 감형을 받아서 다른 죄수들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을 보았다. 이것을 생각하니 문가를 덧들여 놓았다가는 큰일이었다. 이 자가 내가 17년 전의 김창수라는 것을 밀고하거나 떠벌리는 날이면 모처럼 1년 남짓하면 세상에 나가리라던 희망은 허사가 되고 만다. 그래서 나는 문가에게 친절 또 친절하게 대접하였다. 사식도 틈을 타서 문가를 주어 먹게 하고, 감식이라도 문가가 곁에 있기만 하면 나는 굶으면서도 그를 먹였다. 이러하다가 문가가 만기가 되어 출옥할 때에 나의 시원함이란 내가 출옥하는 것 못지 아니하였다.
 
953
나는 아침이면 다른 죄수 하나와 쇠사슬로 허리를 마주 매어 짝을 지어 축항 공사장으로 나갔다. 흙지게를 등에 지고 십여 길이나 되는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는 것이다. 서대문 감옥에서 하던 생활은 여기 비기면 실로 호강이었다. 나는 여러 번 무거운 짐을 진 채로 높은 사닥다리에서 떨어져 죽을 생각도 하였으나 그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 나와 마주 맨 사람은 대개 인천에서 구두켤레나 담뱃갑을 훔치고 두서너 달 징역을 사는 판이라 그런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도 편하려 하는 잔꾀를 버리고 '열즉열살도리 한즉한살도리(熱則熱殺闍梨 寒則寒殺闍梨:더울 때는 더위로 도리를 죽이고 추울 때는 추위로 도리를 죽여라)'의 선가의 병법으로 일하기에 아주 몸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였더니 몸이 아프기는 마찬가지라도 마음은 편안하였다.
 
954
이렇게 한 지 두어 달에 소위 상표라는 것을 주었다. 나는 도인권과 같이 이를 거절할 용기는 없고 도리어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955
날마다 축항공사장에 가는 길에 나는 17년 전 부모님께 친절하던 박영문의 물상객주집 앞을 지났다. 옥문을 나서서 오른편 첫째 집이었다. 그는 후덕한 사람이요, 내게는 깊은 동정을 준 이였다. 아버지와는 동갑이라 해서 매우 친밀히 지냈다고 했다. 우리들이 옥문으로 들고 날 때에 박 노인은 자기 집 문전에 서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목전에 보면서도 가서 내가 아무개요 하고 절할 수 없는 것이 괴로웠다.
 
956
박씨 집 맞은편이 물상객주 안호연의 집이었다. 안씨 역시 부모님께 극진하게 하던 이였다. 그도 전대로 살고 있었다. 나는 옥문을 출입할 때마다 마음으로만 늘 두 분께 절하였다.
 
957
7월 어느 심히 더운 날 돌연히 수인 전부를 교회당으로 부르기로, 나도 가서 앉았다. 이윽고 분감장인 왜놈이 좌중을 향하여,
 
958
"55호!"
 
959
하고 불렀다. 나는 대답하였다. 곧 일어나 나오라 하기로 단 위로 올라갔다. 가출옥으로 내보낸다는 뜻을 선언했다. 좌중 수인들을 향하여 점두례를 하고 곧 간수의 인도로 사무실로 가니, 옷 한 벌을 내어주었다. 이로써 붉은 전중이가 변하여 흰 옷 입은 사람이 되었다. 옥에 맡아두었던 내 돈이며 물건이며 내 품삯이며 조수히 내어주었다.
 
960
옥문을 나서서 첫 번째 생각은 박영문, 안호연 두 분을 찾는 일이었으나, 지금 내가 김창수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이롭지 못할 것을 생각하고 안 떨어지는 발길을 억지로 떼어서 그 집 앞을 지나 옥중에서 사귄 어떤 중국 사람의 집을 찾아가서 그날 밤을 묵었다.
 
961
이튿날 아침에 전화국으로 가서 안악 우편국으로 전화를 걸고 내 아내를 불러달라고 하였더니 전화를 맡아보는 사람이 마침 내게 배운 사람이라 내 이름을 듣고는 반기며 곧 집으로 기별한다고 약속하였다.
 
962
나는 당일로 서울로 올라가 경의선 기차를 타고 신막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사리원에 내려 배넘이 나루를 건너 나무리벌을 지나니, 전에 없던 신작로에 수십 명 사람이 쏟아져 나오고, 그 선두에 선 것은 어머니이셨다. 어머니는 내 걸음걸이를 보시며 마주 오셔서 나를 붙들고 낙루(落淚:눈물을 흘림)하시면서,
 
963
"너는 살아왔지마는 너를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던 화경이 네 딸은 서너 달 전에 죽었구나. 네게 말할 것 없다고 네 친구들이 그러기에 기별도 아니 하였다. 그나 그뿐인가. 일곱 살밖에 안 된 그 어린 것이 죽을 때에 저 죽거든 옥중에 계신 아버지에게 기별 말라고, 아버지가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이 상하시겠느냐고 그랬단다."
 
964
하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 후에 곧 화경의 무덤을 찾아보아 주었다. 화경의 무덤은 안악읍 동쪽 산기슭 공동묘지에 있었다.
 
965
어머니 뒤로 김용제 등 여러 사람이 반갑게, 또 감개 깊게 나를 맞아주었다.
 
966
나는 안신학교로 갔다. 내 아내가 안신학교에 교원으로 있으면서 교실 한 칸을 얻어가지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다른 부인들 틈에 섞여서 잠깐 내 얼굴을 바라보고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는 내 친구들과 함께 내가 저녁을 먹게 하려고 음식을 차리러 간 것이었다. 퍽 수척한 것이 눈에 띄었다.
 
967
며칠 후에 읍내 이인배의 집에서 나를 위하여 위로연을 배설(排設)하고 기생을 불러 가무를 시켰다. 잔치 도중에 나는 어머니께 불려가서,
 
968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을 데리고 술 먹는 것을 보려고 한 것이냐?"
 
969
하시는 걱정을 들었다. 나를 연회석에서 불러낸 것은 아내가 어머님께 고발한 때문이었다.
 
970
어머니와 내 아내는 전에는 충돌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내가 옥에 간 후로 서울로, 시골로 고생하고 다니시는 동안에 고부가 일심동체가 되어서 한 번도 뜻이 아니 맞은 일이 없었다고 아내가 말하였다. 아내는 서울서 책 매는 공장에도 다녔고, 어떤 서양 부인 선교사가 학비를 줄 테니 공부를 하라는 것도 어머니와 화경이가 고생이 될까보아서 아니했노라고, 내외간에 말다툼이 있을 때면 번번이 그 말을 내세웠다. 우리 내외간에 다툼이 생기면 어머니는 반드시 아내의 편이 되셔서 나를 책망하셨다. 경험에 의하면 고부간에 무슨 귓속말이 있으면 반드시 내게 불리하였다. 내가 아내의 말을 반대하거나 조금이라도 아내에게 불쾌한 빛을 보이면 으레 어머니의 호령이 내렸다.
 
971
"네가 옥에 있는 동안 그렇게 정절을 지키고 고생한 아내를 박대해서는 아니 된다. 네 동지들의 아내들 중에 별별 일이 다 있었지마는 네 처만은 참 절행이 갸륵하다. 그래서는 못 쓴다."
 
972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집안일에 하나도 내 마음대로 해본 일이 없었고 내외 싸움에 한 번도 이겨 본 일이 없었다. 내가 옥에서 나와서 또 한 가지 기뻤던 것은 준영 삼촌이 내 가족에 대하여 극진히 하신 것이었다. 어머니께서 아내와 화경이를 데리고 내 옥바라지하러 서울로 가시는 길에 해주 본향을 들르셨을 적에 준영 삼촌은 어머니께, 젊은 며느리를 데리고 어떻게 사고무친(四顧無親)한 타향에 가느냐고, 당신이 집을 하나 마련하여 형수님과 조카며느리 고생을 아니 시킬 테니 서울 갈 생각은 말고 본향에 계시라고 굳이 만류하시는 것을, 어머니는 며느리는 옥과 같은 사람이라 어디를 가도 걱정이 없다 하여 뿌리치고 서울로 가셨다는 것이다.
 
973
또 어머니와 아내가 서울서 내려와서 종산 우종서 목사에게 의탁하여 있을 때에는 준영 삼촌이 소바리(소 등에 짐을 실음)에 양식을 실어다 주셨다고 한다.
 
974
어머니는 이렇게 준영 삼촌의 일을 고맙게 말씀하시고 나서,
 
975
"네 삼촌님이 네게 대한 정분이 전과 달라 매우 애절하시다. 네가 나온 줄만 알면 보러 오실 것이다. 편지나 하여라."
 
976
하셨다.
 
977
어머니는 또 내 장모도 전 같지 않아서 나를 소중하게 아니, 거기도 출옥하였다는 기별을 하라고 하셨다. 내가 서대문 감옥에 있을 때에 장모가 여러 번 면회를 와 주셨다.
 
978
나는 곧이라도 준영 숙부를 찾아가 뵈옵고 싶었으나 아직 가출옥 중이라 어디를 가려면 일일이 헌병대의 허가를 얻어야 하는데, 왜놈에게 고개 숙이고 청하기가 싫어서 만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는 정초에 세배 겸 준영 숙부를 찾을 작정이었다.
 
979
그 후 내 거주 제한이 해제되어서 김용진 군의 부탁으로 수일 타작 간검(看儉)을 다녀왔더니 준영 숙부가 다녀가셨다. 점잖은 조카를 보러 오는 길이라 하여 남의 말을 빌려 타고 오셨는데 이틀이 지나도 내가 아니 돌아오기 때문에 섭섭하게 돌아가셨다는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980
정초가 되었다. 나는 찾을 어른들을 찾고 어머니를 찾아 세배 오는 손님들 접대도 끝이 나서 초닷샛날은 해주로 가서 준영 숙부님을 뵈옵고 오래간만에 성묘도 하리라고 벼르고 있던 차에 바로 초나흗날 저녁때에 재종제 태운이가 준영 숙부께서 별세하셨다는 기별을 가지고 왔다. 참으로 경악하였다. 다시는 준영 숙부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게 되었다. 아버지 4형제 중에 아들이라고는 나 하나 뿐, 준영 숙부는 딸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오직 하나인 조카를 못 보고 떠나시는 숙부의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백영 숙부는 관수, 태수 두 아들이 있었으나 다 조졸하여 없고, 딸 둘도 시집간 지 얼마 아니하여 죽어서 자손이 없고, 필영, 준영 두 숙부는 각각 딸 하나씩이 있을 뿐이었다.
 
981
날이 새는 대로 나는 태운과 함께 해주로 달려가서 준영 숙부의 장례를 주장(主掌)하여 텃골 고개 동녘 기슭에 산소를 모셨다. 그러고는 돌아가신 준영 숙부의 가사 처리를 대강 하고 선친 묘소에 손수 심은 잣나무를 점검하고 거기를 떠난 뒤로는 이내 다시 본향을 찾지 못하였다. 당숙모와 재종조가 생존하신다 하나 뵈올 길이 망연하다.
 
982
나는 아내가 보고 있는 안신학교 일을 좀 거들어 주었으나 소위 전과자인 나로서, 그뿐 아니라 시국이 변하여서 나 같은 사람이 전과 같이 당당하게 교육 사업에 종사할 수도, 더구나 신민회와 같은 정치 운동을 다시 계속할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애국자이던 사람들은 해외로 망명하거나 문을 닫고 숨을 길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왜놈은 우리 민족의 청소년을 우리 지도자가 돌아보지 못하도록 백방으로 막아놓고 노려보고 있었다.
 
983
나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서 농촌 사업이나 해보려고 마음을 먹고 김홍량 일문의 농장 중에 소작인의 풍기가 괴악한 동산평 농장의 농감이 되기를 자청하였다. 동산평이라는 데는 수백 년 궁장으로, 감관들이 협잡을 하고 농민을 타락시켜서 집집이 도박이요, 사람 사람이 모두 속임질과 음해로 일을 삼아서 할 수 없이 가난하고 괴악하게 된 부락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수토(水土)가 좋지 못하여 토질(土疾:풍토병) 구덩이로 소문이 났다.
 
984
김씨네는 내가 이런 데로 가는 것을 원치 아니하여 경치도 수토도 좋은 다른 농장으로 가라고 권하였다. 그들은 내가 한문 야학으로 벗을 삼아 은거하는 생활을 하려는 것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집하여 동산평으로 갔다.
 
985
나는 도박하는 자, 학령 아동이 있고도 학교에 안 보내는 자의 소작을 불허하고, 그 대신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자에게 상등답 이 두락을 주는 법을 내었다. 이리하여 학부형이 아니고는 땅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986
그리고 오랫동안 이 농장 마름으로 있으면서 소작인을 착취하고 도박을 시키던 노형극 형제의 과분한 소작지를 회수하여서 근면하고도 땅이 부족한 사람에게 분배하였다. 이 때문에 나는 노형극에게 팔을 물리고 집에 불을 놓는다는 위협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치 아니하고, 마침내 이들 형제에게 항복을 받아서 다시는 성군작당(成群作黨:무리를 모으고 패거리를 만드는 것)하여 남을 음해하는 일을 아니하기로 맹세를 시켰다.
 
987
이곳은 본래 학교가 없던 데라 나는 곧 학교를 세우고 교원을 연빙하였다. 처음에는 20명 가량의 아동으로 시작하였으나 이 농장 작인의 자녀가 다 입학하게 되니 제법 학교가 커져서 교원 한 사람으로는 부족하여 나 자신도 시간을 내어서 도왔다. 장덕준은 재령에서, 지일청은 나와 같은 지방에서 나와 비슷한 농촌 계발 운동을 하고 있었다.
 
988
내 운동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어서 동산평에는 도박이 없어지고 이듬해 추수 때에는 작인의 집에 볏섬이 들어가 쌓였다고 작인의 아내들이 기뻐하였다. 지금까지는 노름빚과 술값으로 타작 마당에서 1년 소출을 몽땅 빚쟁이에게 빼앗기고 농민은 키만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989
나는 농촌 중에서도 가장 괴악한 동산평을 이 모양으로 그만하면 쓰겠다 할 정도의 농촌을 만들어보려 하였다. 그러나 기미년 3월에 일어난 만세 소리에 나는 이 사업에서 손을 떼고 고국을 떠나게 되었다. 떠날 날을 하루 앞두고 나는 작인들을 동원하여 만세 부르는 운동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듯이 가래질을 하고 있었다. 내 동정을 살피러 왔던 왜 헌병도 이것을 보고는 안심하고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990
그 이튿날 나는 사리원으로 가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신의주에서 재목상이라 하여 무사히 통과하고 안동현에서는 좁쌀 사러 왔다고 칭하였다.
 
991
안동현에서 이레를 묵고 영국 국적인 이륭양행 배를 타고 동지 15명이 무사히 상해 포동 마두에 도착하였다. 안동현을 떠날 때에는 아직도 얼음덩어리가 첩첩이 쌓인 것을 보았는데 황포 강가에는 벌써 녹음이 우거졌다. 공승서리(公昇西里) 15호에서 첫날밤을 잤다.
 
992
이때에 상해에 모인 인물 중에 내가 전부터 잘 아는 이는 이동녕, 이광수, 김홍서, 서병호 네 사람이었고 그 밖에 일본, 아령, 구미 등지에서 이번 일로 모인 인사와 본래부터 와 있는 이가 500여 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993
이튿날 나는 벌써부터 가족을 데리고 상해에 와 있는 김보연 집을 찾아서 거기서 숙식을 하게 되었다. 김군은 내가 장연에서 교육사업을 총감하는 일을 할 때에 나를 성심으로 사랑하던 청년이다. 김 군의 지도로 이동녕, 이광수, 김홍서, 서병호 등 옛 동지를 만났다.
 
994
임시정부의 조직에 관하여서는 후일 국사에 자세히 오를 것이니 약하거니와, 나는 위원의 한 사람으로 뽑혔었다. 얼마 후에 안창호 동지가 미주로부터 와서 내무총장으로서 국무총리를 대리하게 되고, 총장들이 아직 모이지 아니하였으므로 차장제를 채용하였다. 나는 안 내무총장에게 임시정부 문 파수를 보게 하여달라고 청원하였다. 도산은 처음에는 내 뜻을 의아하게 여기는 모양이었으나 내가 이 청원을 한 동기를 말하자 쾌락(快諾)하였다. 내가 본국에 있을 때에 순사 시험 과목을 어디서 보고 내 자격을 시험하기 위하여 혼자 답안을 보았으나 합격이 못 된 일이 있었다. 나는 실력이 없는 허명을 탐하기를 두려워할뿐더러, 감옥에서 소제를 할 때에 내가 하나님께 원하기를, 생전에 한 번 우리 정부의 청사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하여줍소서 하였단 말을 도산 동지에게 한 것이었다.
 
995
안 내무총장은 내 청원을 국무회의에 제출한 결과 돌연 내게 경무국장의 사령을 주었다. 다른 총장들은 아직 취임하기 전이라 윤현진, 이춘숙, 신익희 등 새파란 젊은 차장들이 총장의 직무를 대행할 때라 나이 많은 선배로 문 파수를 보게 하면 드나들기에 거북하니 경무국장으로 하자고 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순사 될 자격도 못 되는 사람이 경무국장이 당(當)하냐고 반대하였으나 도산은,
 
996
"만일 백범이 사퇴하면 젊은 사람들 밑에 있기를 싫어하는 것 같이 오해될 염려가 있으니 그대로 행공하라."
 
997
고 강권하기로 나는 부득이 취임하여 사무하였다.
 
998
대한민국 2년에 아내가 인을 데리고 상해로 오고, 4년에 어머니께서 또 오시니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 해에 신이 태어났다.
 
999
나의 국모보수 사건이 24년 만에 이제야 왜의 귀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왔다. 내가 본국을 떠난 뒤에야 형사들도 안심하고 김구가 김창수라는 것을 왜 경찰에게 말한 것이었다. 아아, 눈물 나는 민족의식이여! 왜의 정탐 노릇은 하여도 속에는 애국심과 동포애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이 정신이 족히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독립 민족의 행복을 누리게 할 것을 아니 믿고 어이하랴.
 
1000
민국 5년에 내가 내무총장이 되었다.
 
1001
그 안에 아내는 신을 낳은 뒤에 낙상으로 인하여 폐렴이 되어서 몇 해를 고생하다가 상해 보륭의원의 진찰로 서양인이 시설한 격리 병원인 홍구폐병원에 입원하기로 되어, 보륭의원에서 한 작별이 아주 영결이 되어 민국 6년 1월 1일에 세상을 떠나매 법계(法界) 숭산로의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
 
1002
내 본의는 독립운동 기간 중에는 혼상을 막론하고 성대한 의식을 쓰는 것을 불가하게 알아서 아내의 장례를 극히 검소하게 할 생각이었으나, 여러 동지들이 내 아내가 나를 위하여 평생에 무쌍한 고생을 한 것이 곧 나라 일이라 하여 돈을 거두어 성대하게 장례를 지내고 묘비까지 세워주었다. 그 중에서도 유세관, 인욱 군은 병원 교섭과 묘지 주선에 성력을 다하여주었다.
 
1003
아내가 입원할 무렵에는 인도 병이 중하였으나 아내 장례 후에는 완쾌하였고, 신은 겨우 걸음발을 탈 때요, 아직 젖을 떼지 아니하였으므로 먹기는 우유를 먹였으나 잘 때에는 어머니의 빈 젖을 물었다. 그러므로 신이가 말을 배우게 된 때에도 할머니라는 말을 알고 어머니라는 말은 몰랐다.
 
1004
민국 8년에 어머니는 신을 데리고 환국하시고, 이듬해 9년에는 인도 보내라시는 어머니의 명으로 인도 내 곁을 떠나서 본국으로 갔다. 나는 외로운 몸으로 상해에 남아 있었다.
 
1005
민국 8년 12월에 나는 국무령으로 선거되었다. 국무령은 임시정부의 최고 수령이다. 나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을 보고, 아무리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국가라 하더라도 나같이 미미한 사람이 한 나라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의 위신에 관계된다 하여 고사하였으나 강권에 못 이기어 부득이 취임하였다.
 
1006
나는 윤기섭, 오영선, 김갑, 김철, 이규홍으로 내각을 조직한 후에 헌법 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여 독재적인 국무령제를 고쳐서 평등인 위원제로 고치고, 지금은 나 자신도 국무위원의 하나로 일하고 있다.
 
1007
내 육십 평생을 돌아보니 상리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건마는, 나는 귀역궁 불귀역궁(貴亦窮 不貴亦窮:귀한 신분이 되어도 가난하게 지내고 귀한 신분이 아니어도 역시 가난하게 지냄)으로 평생을 궁하게 지내었다.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날에는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거니와 지금의 나는 넓고 넓은 지구상에 한 치 땅, 한 칸 집도 가진 것이 없다.
 
1008
나는 과거에는 궁을 면하고 영화를 얻으려고 몽상도 하고 버둥거려보기도 하였다. 옛날 한유는 '송궁문(送窮文:가난을 보내는 글)'을 지었으나 나는 차라리 '우궁문(友窮文:가난을 벗하는 글)'을 짓고 싶다. 자식들에게 대하여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니 너희들이 나를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를 원치 아니한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恩澤)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 되어 사회를 아비로 여겨 효도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할 수는 없을 것이다.
 
1009
이 붓을 놓기 전에 두어 가지 더 적을 것이 있다.
 
1010
내가 동산평 농장에 있을 때 일이다. 기미년 2월 26일이 어머니 환갑이므로 약간 음식을 차려서 가까운 친구나 모아 간략하나마 어머니의 수연(壽筵:장수를 축하하는 잔치)을 삼으리라 하고 내외가 상의하여 진행하던 차에 어머니께서 눈치를 채시고, 지금 이 어려운 때에 환갑 잔치가 당치 아니하니 후년에 더 넉넉하게 살게 된 때로 미루라 하시므로 중지하였더니 그 후 며칠이 못 되어 나는 본국을 떠났다. 어머니께서 상해에 오신 뒤에도 마음은 먹고 있었으나 독립운동을 하느라고 날마다 수십 수백의 동포가 혹은 목숨을, 혹은 집을 잃는 참보를 듣고 앉아서 설사 힘이 있기로서니 어떻게 어머니를 위하여 수연을 차릴 경황이 있으랴. 하물며 내 생일 같은 것은 입 밖에 낸 일도 없었다.
 
1011
민국 8년이었다. 하루는 나석주가 조반 전에 고기와 반찬거리를 들고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를 보고 오늘이 내 생일이라, 옷을 전당 잡혀서 생일 차릴 것을 사왔노라 하여서, 처음으로 영광스럽게 내 생일을 차려 먹은 일이 있었다. 나석주는 나라를 위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제 손으로 저를 쏘아 충혼이 되었다. 나는 그가 차려 준 생일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하여, 또 어머니의 화연(花宴:환갑잔치)을 못 드린 것이 황송하여 평생에 다시는 내 생일을 기념치 않기로 하고, 이 글에도 내 생일 날짜를 기입하지 아니한다.
 
1012
인천 소식을 듣건대 박영문은 별세하고 안호연은 생존한다 하기로 신 편에 회중시계 한 개를 사 보내고 내가 김창수란 말을 하여달라 하였으나 회보는 없었고, 성태영은 길림에 와 산다 하기로 통신하였으며, 유인무는 북간도에서 누구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아들 한경은 아직도 거기 살고 있다고 한다. 나와 서대문 감옥에서 이태나 한 방에 있으며 내게 글을 배우고 또 내게 끔직히 하여주던 이종근은 아라사 여자를 얻어가지고 상해에 와서 종종 만났다. 이종근은 의병장 이운룡의 종제로, 헌병 보조원을 다니다가 이운룡이 죽이려 하매 회개하고 그를 따라 의병으로 다니다가 잡혀왔었다. 김형진의 유족의 소식은 아직도 모르고, 강화 김주경의 유족의 소식도 탐문하는 중이다.
 
1013
지난 일의 연월일은 어머니께 편지로 여쭈어서 기입한 것이다.
 
1014
내 일생에 제일 행복은 몸이 건강한 것이다. 감옥 생활 5년에 하루도 병으로 쉰 날은 없었고, 인천 감옥에서 학질로 반 일을 쉰 일이 있을 뿐이다. 병원이라고는 혹을 떼느라고 제중원에 1개월, 상해에서는 서반아 감기로 20일 동안 입원하였을 뿐이다.
 
1015
기미년에 고국을 떠난 지 우금(지금까지) 10여 년에 중요한 일, 진기한 일도 많으나 독립 완성 전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매 아니 적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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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1년 넘은 대한민국 11월 5월 3일에 임시정부 청사에서 붓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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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8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