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아비는 이제 너희가 있는 고향에서 수륙 오천 리나 떨어진 먼 나라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린 너희를 앞에 놓고 말하여 들려 줄 수 없으매 그 동안 나의 지난 일을 대략 기록하여서 몇몇 동지에게 남겨 장래 너희가 자라서 아비의 경력을 알고 싶어할 때가 되거든 너희에게 보여 주라고 부탁하였거니와, 너희가 아직 나이 어리기 때문에 직접 말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지만 어디 세상사가 뜻과 같이 되느냐.
5
내 나이는 벌써 쉰셋이건마는 너희는 이제 열 살과 일곱 살밖에 안되었으니 너희의 나이와 지식이 자라질 때에는 내 정신과 기력은 벌써 쇠할 뿐 아니라, 이 몸은 이미 원수 왜에게 선전포고를 내리고 지금 사선에 서 있으니 내 목숨을 어찌 믿어 너희가 자라서 면대하여 말할 수 있을 날을 기다리겠느냐. 이러하기 때문에 지금 이 글을 써 두려는 것이다.
6
내가 내 경력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기는 것은 결코 너희에게 나를 본받으라는 뜻은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바는 너희도 대한민국의 한 국민이니 동서와 고금의 허다한 위인 중에서 가장 숭배할 만한 이를 택하여 스승으로 섬기라는 것이다. 너희가 자라더라도 아비의 경력이 알 길이 없겠기로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이다.
7
다만 유감되는 것은 이 책에 적는 것이 모두 오랜 일이므로 잊어버린 것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하나도 보태거나 지어 넣은 것이 없는 것도 사실이니 믿어주기를 바란다.
11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어떻게 고려 왕건 태조의 따님 낙랑공주의 부마가 되셔서 우리들의 조상이 되셨는지는 <삼국사기>나 안동 김씨 족보를 보면 알 것이다.
12
경순왕의 팔세손이 충렬공, 충렬공의 현손이 익원공인데, 이 어른이 우리 파의 시조요, 나는 익원공에서 21대손이다. 충렬공, 익원공은 모두 고려조의 공신이거니와, 이조에 들어와서도 우리 조상은 대대로 서울에 살아서 글과 벼슬로 가업을 삼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 방조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려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매, 내게 11대조 되시는 어른이 처자를 끌고 서울을 도망하여 일시 고향에 망명하시더니, 그곳도 서울에서 가까워 안전하지 못하므로 해주 부중에서 서쪽으로 80리 백운방 텃골 팔봉산 양가봉 밑에 숨을 자리를 구하시게 되었다. 그곳 뒷개에 있는 선영에는 11대 조부모님의 산소를 비롯하여 역대 선산이 계시고 조모님도 이 선영에 모셨다.
13
그 때에 우리 집이 멸문지화를 피하는 길이 오직 하나 뿐이었으니, 그것은 양반의 행색을 감추고 상놈 행세를 하는 일이었다. 텃골에 처음 와서는 조상님네는 농부의 행색으로 묵은장이를 일구어 농사를 짓다가 군역전이라는 땅을 짓게 되면서부터 아주 상놈의 패를 차게 되었다. 이 땅을 부치는 사람은 나라에서 부를 때에는 언제나 군사로 나서는 법이니 그때에는 나라에서 문을 높이고 무를 낮추어 군사라면 천역, 즉 천한 일이었다.
14
이것이 우리나라를 쇠약하게 한 큰 원인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리하여서 우리는 판에 박힌 상놈으로, 텃골 근동에서 양반 행세하는 진주 강씨, 덕수 이씨들에게 대대로 천대와 압제를 받아왔다. 우리 문중의 딸들이 저들에게 시집을 가는 일은 있어도 우리가 저들의 딸에게 장가드는 일은 없었다.
15
그러나 중년에는 우리 가문이 꽤 창성하였던 모양이어서, 텃골 우리 터에는 기와집이 즐비하였고, 또 선산에는 석물도 크고 많았으며, 내가 여남은 살 때까지도 우리 문중에 혼상 대사가 있을 때에는 이정길이란 사람이 언제나 와서 일을 보았는데,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집 종으로서 속량 받은 사람이라 하니, 그는 우리 같은 상놈의 집에 종으로 태어났던 것이라 참으로 흉악한 팔자라고 아니할 수 없다.
16
우리가 해주에 와서 산 뒤로 역대를 상고하여 보면 글 하는 이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이름난 이는 없었고 매양 불평객이 많았다. 내 증조부는 가어사질을 하다가 해주 영문에 갇혔지만 서울 어느 양반의 청편지를 얻어다 대고 겨우 형벌을 면하셨다는 말을 집안 어른들께 들었다. 암행어사라는 것은 임금이 시골 사정을 알기 위하여 신임하는 젊은 관원에게 무서운 권세를 주어서 순회시키는 벼슬인데, 허름한 과객의 행색으로 차리고 다니는 것이 상례다.
17
증조 항렬 네 분 중에 한 분은 내가 대여섯 살 때까지 생존하셨고, 조부 형제는 구존하셨고, 아버지 4형제는 다 살아계시다가 백부 백영은 얼마 아니하여 돌아가셔서 나는 다섯 살 적에 종형들과 함께 곡하던 것이 기억된다.
18
아버지 휘 순영은 4형제 중에 둘째 분으로서, 집이 가난하여 장가를 못 가고 노총각으로 계시다가 스물네 살 때에 삼각혼인이라는 기괴한 방법으로 장련에 사는 현풍 곽씨의 딸, 열네 살 된 이와 성혼하여 종조부 댁에 붙어살다가 2, 3년 후에 독립한 살림을 하시게 된 때에 내가 태어났다. 그때 어머님의 나이는 열일곱이요, 푸른 밤송이 속에서 붉은 밤 한 개를 얻어서 감추어 둔 것이 태몽이라고 어머님은 늘 말씀하셨다.
19
병자년 7월 11일 자시(이 날은 조모님 기일이었다)에 텃골에 있는 웅덩이 큰댁이라고 해서 조부와 백부가 사시는 집에서 태어난 것이 나다. 내 일생이 기구할 예조였는지, 그것은 유례가 없는 난산이었다. 진통이 일어난 지 6, 7일이 되어도 순산은 아니 되고, 어머니의 생명이 위태하게 되어 혹은 약으로, 혹은 예방으로 온갖 시험을 다 해도 효험이 없어서 어른들의 강제로 아버지가 소의 길마를 머리에 쓰고 지붕에 올라가서 소의 소리를 내고야 비로소 내가 나왔다고 한다. 겨우 열일곱 살 되시는 어머님은 내가 귀찮아서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짜증을 내셨다는데, 젖이 말라서 암죽을 먹이고, 아버지가 나를 품속에 품고 다니시며 아기 있는 어머니 젖을 얻어 먹이셨다.
20
먼 촌 족대모 핏개댁이 밤중이라고 싫은 빛 없이 내게 젖을 물리셨단 말을 듣고 내가 열 살 갓 넘어 그 어른이 작고하신 뒤에는 나는 그 산소 앞을 지날 때마다 경의를 표하였다. 내가 마마를 치른 것이 세 살이 아니면 네 살 적인데, 몸에 돋은 것을 어머니가 예사 부스럼 다스리던 죽침으로 따서 고름을 빼었으므로 내 얼굴에 굵은 벼슬 자국이 생긴 것이다.
21
내가 다섯 살 적에 부모님은 나를 데리시고 강령 삼거리로 이사하셨다. 거기는 뒤에는 산이요, 앞은 바다였다. 종조, 재종조, 삼종조 여러 댁이 그리로 떠났기 때문에 우리 집도 따라간 것이었다. 거기서 이태를 살았는데, 우리 집은 어떻게나 호젓한지 호랑이가 사람을 물고 우리 집 문 앞으로 지나갔다. 산 어귀 호랑이 길목에 우리 집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밤이면 한 걸음도 문 밖에는 나서지 못하였다. 낮이면 부모님은 농사하러 다니시거나 혹은 바다에 무엇을 잡으러 가시고, 나는 거기서 그 중 가까운 신풍 이 생원 집에 가서 그 집 아이들과 놀다가 오는 것이 일과였다.
22
그 집 아이들 중에는 나와 동갑되는 아이도 있었으나, 두세 살 위 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애들이 이놈 해줏놈 때려 주자고 공모하여 나는 무지하게도 한 차례 매를 맞았다. 나는 분해서 집으로 돌아와 부엌에서 큰 식칼을 가지고 다시 이 생원 집으로 가서 기습으로 그놈들을 다 찔러 죽일 생각으로 울타리를 뜯고 있는 것을, 열일고여덟 살 된 그 집 딸이 보고 소리소리 질러 오라비들을 불렀기 때문에 나는 목적을 달치 못하고 또 그놈들에게 붙들려 실컷 얻어맞고 칼만 빼앗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식칼을 잃은 죄로 부모님께 매를 맞을 것이 두려워서 어머님께서 식칼이 없다고 찾으실 때에도 나는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23
또 하루는 집에 혼자 있노라니까 엿장수가 문전으로 지나가면서,
24
"헌 유기나 부서진 수저로 엿을 사시오."
26
나는 엿은 먹고 싶으나 엿장수가 아이들의 자지를 잘라간다는 말을 어른들께 들은 일이 있으므로 방문을 꽉 닫아걸고 엿장수를 부른 뒤에 아버지의 성한 숟가락을 발로 디디고 분질러서 반은 두고 반만 창구멍으로 내밀었다. 헌 숟가락이어야 엿을 주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엿장수는 내가 내미는 반동강 숟가락을 받고 엿을 한 주먹 뭉쳐서 창구멍으로 들이밀었다. 내가 반동강 숟가락을 옆에 놓고 한창 맛있게 엿을 먹고 있을 즈음에 아버님께서 돌아오셨다. 나는 사실대로 아뢰었더니, 다시 그런 일을 하면 경을 친다고 꾸중만 하시고 때리지는 아니하셨다.
27
또 한 번은 역시 그때의 일로, 아버지께서 엽전 스무 냥을 방 아랫목 이부자리 속에 두시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가 나가시고 나 혼자만 있을 때에, 심심은 하고, 동구 밖 거릿집에 가서 떡이나 사먹으리라 하고 그 스무 냥 꾸러미를 모두 꺼내어 허리에 감고 문을 나섰다. 얼마를 가다가 마침 우리 집으로 오시는 삼종조를 만났다.
28
"너 이 녀석, 돈은 가지고 어디로 가느냐?"
32
"네 아비가 보면 이 녀석 매 맞는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33
하고 삼종조는 내 몸에 감은 돈을 빼앗아다가 아버지를 주셨다. 먹고 싶은 떡도 못 사먹고 마음이 자못 불평하여 집에 와 있노라니, 뒤따라 아버지께서 들어오셔서 아무 말씀도 없이 빨랫줄로 나를 꽁꽁 동여서 들보 위에 매달고 회초리로 후려갈기시니,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다. 어머니도 밭에서 아니 돌아오신 때라 말려 줄 이도 없이 나는 매를 맞고 매달려 있었다. 이때에 마침 장련 할아버지라는 재종조께서 들어오셨다. 이 어른은 의술을 하는 이로서 나를 귀애하시던 이다. 내게는 참말 천행으로 이 어른이 우리 집 앞을 지나가시다가 내가 악을 쓰고 우는 소리를 듣고 달려 들어오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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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련 할아버지는 들어오시는 길로 불문곡직하고 들보에 달린 나를 끌러 내려놓으신 뒤에야 아버지께 까닭을 물으셨다. 아버지가 내 죄를 고하시는 말씀을 다 듣지도 아니하시고 장련 할아버지는, 나이는 아버지와 동갑이시지만, 아저씨의 위엄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치시던 회초리를 빼앗아서 아버지의 머리와 다리를 함부로 한참 동안이나 때리시고 나서야 비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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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것을 그렇게 무지하게 때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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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책망하셨다. 아버지께서 매를 맞으시는 것이 퍽도 고소하고 장련 할아버지가 퍽도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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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련 할아버지는 나를 업고 들로 나가서 참외와 수박을 실컷 사 먹이고 또 그 할아버지 댁으로 업고 가셨다.
38
장련 할아버지의 어머니 되시는 종증조모께서도 그 아드님에게 내가 아버지에게 매를 맞은 연유를 들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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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비 밉다. 집에 가지 말고 우리 집에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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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아버지의 잘못을 누누이 책망하시고 밥과 반찬을 맛있게 하여주셨다. 나는 얼마만큼 마음이 기쁘고 아버지가 그 할아버지에게 맞던 것을 생각하니 상쾌하기 짝이 없었다. 이 모양으로 이 댁에서 여러 날을 묵어서 집에 돌아왔다.
41
한번은 장맛비가 많이 와서 근처에 샘들이 솟아서 여러 갈래 작은 시내를 이루었다. 나는 빨강이, 파랑이 물감 통을 집에서 꺼내다가 한 시내에는 빨강이를 풀고, 또 한 시내에는 파랑이를 풀어서 붉은 시내, 푸른 시내가 한데 모여서 어우러지는 양을 장난으로 구경하고 좋아하다가 어머니께 몹시 매를 맞았다.
42
종조께서 이곳에서 작고하셔서 백여 리나 되는 해주 본향으로 힘들여 행상한 것이 빌미가 된 것인지, 내가 일곱 살 되던 해에 이르러 여기 와서 살던 일가들이 한 집, 두 집 해주 본향으로 돌아갔다. 우리 집도 이 통에 텃골로 돌아올 때에 나는 어른들의 등에 업혀 오던 것이 기억난다.
43
고향에 돌아와서는 우리 집은 농사로 살아가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비록 학식은 기성명 정도이지만, 허우대가 좋고, 성정이 호방하고, 술이 한량이 없으셔서, 강씨, 이씨라면 만나는 대로 막 때려 주고는 해주 감영에 잡혀 갇히기를 한 해에도 몇 번씩 하셔서 문중에 소동을 일으키셨다.
44
인근 양반들이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때 시골 습관에 누가 사람을 때려서 상처를 내면 맞은 사람을 때린 사람의 집에 떠메어다가 누이고 그가 죽나 살아나나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한 달에도 몇 번씩 피투성이가 되어서 다 죽게 된 사람을 메어다가 사랑에 누이는 때도 있었다.
45
아버지가 이렇게 사람을 때리시는 것은 비록 취중에 한 일이라 하더라도 다 무슨 불평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당신께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라도 양반이나 강한 자들이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시고는 참지 못하셔서 <수호지>에 나오는 호걸들 식으로 친불친을 막론하고 패어 주었다. 이렇게 아버지가 불같은 성정이신 줄을 알므로, 인근 상놈들은 두려워 공경하고 양반들은 무서워서 피하였다.
46
해마다 세말이 되면 아버지는 달걀, 담배 같은 것을 많이 장만하셔서 감영의 영리청, 사령청에 선사를 하셨다. 그러면 그 회사로 책력이며, 해주 먹 같은 것이 왔다. 이것은 강씨, 이씨 같은 양반들이 감사나 판관에게 가 붙는 것에 대응하는 수였다. 영리청이나 사령청에 친하게 하는 것을 계방이라 하는데, 이렇게 계방이 되어 두면 감사의 영문이나 본아에 잡혀가서 영리청이나 옥에 갇히는 일이 있더라도 영리와 사령들이 사정을 두기 때문에 갇히는 것은 명색뿐이요, 기실은 영리, 사령들과 같은 방에서 같은 밥을 먹고 편히 있고, 또 설사 태형, 곤장을 맞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사령들은 매우 치는 시늉을 하고, 맞는 편에서는 죽어가는 엄살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뿐더러 만일 아버지께서 되잡아 양반들을 걸어서 소송을 하여서 그들이 잡혀오게 되면 제아무리 감사나 판관에게 뇌물을 써서 모면한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편인 영속들에게 호되게 경을 치고, 많은 재물을 허비하게 된다. 이렇게 망한 부자가 일 년 동안에 십여 명이나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47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인근 양반들은 그를 달래려 함인지 아버지를 도존위에 천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도존위 행공을 할 때에는 다른 도존위와는 반대로 양반에게 용서 없이 엄하고, 빈천한 사람들에게는 후하였다. 세금을 받는 데도 빈천한 사람의 것은 자담하여 내는 수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가혹히 하는 일은 없었다. 이 때문에 3년이 못 되어서 아버지는 공전 흠포(공금 횡령)로 면직을 당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인근에 사는 양반들의 꺼림과 미움을 받아서 그들의 아낙네와 아들까지도 김순영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
48
아버지의 어릴 적 별명은 효자였다. 그것은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에 아버지께서 왼쪽 무명지를 칼로 잘라서 할머니의 입에 피를 흘려 넣으셨기 때문에 소생하셔서 사흘이나 더 사셨다는 데서 생긴 것이었다.
49
아버지 4형제 중 백부(휘 백영)은 보통 농군이셨고, 셋째 숙부도 특기할 일이 없으나, 넷째 계부(휘 준영)가 아버지와 같이 특이한 편이셨다. 계부는 국문을 배우는데도 한겨울 동안에 가자에 기역자도 못 깨우치고 말았으되, 술은 무량으로 자시고, 또 주사가 대단하셔서 취하기만 하면 꼭 풍파를 일으키는데, 아버지는 꼭 양반에게 주정을 하셨으나, 준영 계부는 아무리 취하여도 양반에게는 감히 손을 못 대고 일가 사람들에게만 덤비셨다. 그러다가 조부님께 매를 얻어맞으시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50
내가 아홉 살 적에 조부님 상사가 났는데 장례 날에 이 삼촌이 상여 메는 사람들에게 야료를 하여서 결국은 그를 결박을 지어 놓고야 장례를 모셨다. 장례를 지낸 뒤에 종증조의 발의로 문회를 열고, 이러한 패류를 그대로 둘 수가 없으니 단단히 징치를 하여서 후환을 막아야 한다 하여 의논한 결과로 준영 삼촌을 앉은뱅이로 만들기로 작정하고 발뒤꿈치를 베었으나, 분김에 한 일이라 힘줄은 다 끊어지지 아니하여서 병신까지는 안 되었다. 그러나 그가 조부 댁 사랑에 누워서 호랑이처럼 영각을 하는 바람에 나는 무서워서 그 근처에도 못 가던 것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하니 상놈의 소위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때에 어머니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51
"너의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 때문이니, 두고 보아서 네가 또 술을 먹는다면 나는 자살을 하여서 네 꼴을 안 보겠다."
53
이때쯤에는 나는 국문을 배워서 이야기책은 읽을 줄 알았고, 천자(千字文)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얻어 배워서 다 떼었다. 그러나 내가 글공부를 하리라고 결심한 데에는 한 동기가 있었다.
54
하루는 어른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들었다. 몇 해 전 일이다. 문중에 새로 혼인한 집이 있었는데, 어느 할아버지가 서울 갔던 길에 사다가 두셨던 관을 밤에 내어 쓰고 새 사돈을 대하셨던 것이 양반들에게 발각이 되어서 그 관은 열파를 당하고, 그로부터 다시는 우리 김씨는 관을 못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55
나는 이 말을 듣고 몹시 울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어찌해서 양반이 되고, 우리는 어찌해서 상놈이 되었는가고 물었다. 어른들이 대답하는 말은 이러하였다. 방아메 강씨도 그 조상은 우리 조상만 못하였지마는 일문에 진사가 셋이나 살아 있고, 자라소 이씨도 그러하다고. 나는 어떻게 하면 진사가 되느냐고 물었다. 진사나 대과나 다 글을 잘 공부하여 큰 선비가 되어서 과거에 급제를 하면 된다는 대답이었다.
56
이 말을 들은 뒤로 나는 부쩍 공부할 마음이 생겨서 아버지께 글방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아버지도 주저하지 아니할 수 없으셨다. 우리 동네에는 서당이 없으니 이웃 동네 양반네 서당에 갈 길밖에 없었다. 그런데 양반네 서당에서 나를 받아줄지 말지도 알 수 없는 일이거니와, 또 거기 들어간다 하더라도 양반의 자식들의 등쌀에 견디어 낼 것 같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얼른 결단을 못 하다가 마침내 우리 동네 아이들과 이웃동네 상놈의 아이들을 모아서 새로 서당을 하나 만들고, 청수리 이 생원이라는 양반 한 분을 선생으로 모셔 오기로 하였다. 이 생원은 지체는 양반이지마는 글이 서툴러 양반 서당에서는 데려가는 데가 없기 때문에 우리 서당으로 오신 것이다.
57
이 선생이 오신다는 날, 나는 머리를 빗고 새 옷을 갈아입고 아버지를 따라서 마중을 나갔다. 저쪽에서 나이가 쉰 남짓 되어 보이는 키가 후리후리한 노인 한 분이 오시는데, 아버지께서 먼저 인사를 하시고 나서 날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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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셨다. 나는 공손하게 너붓이 절을 하고 나서 그 선생을 우러러보니, 신인이라 할지 하느님이라 할지 어떻게나 거룩해 보이는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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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우리 사랑을 글방으로 정하고, 우리 집에서 선생의 식사를 받들기로 하였다. 그 때에 내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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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하던 첫날 나는 '마상봉한식(馬上逢寒食)' 다섯 자를 배웠는데, 뜻은 알든 모르든 기쁜 맛에 자꾸 읽었다. 밤에도 어머니께서 밀 매가리(껍질을 벗기는 것)하시는 것을 도와 드리면서 자꾸 외었다.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서 선생님 방에 나가서 누구보다도 먼저 배워서 밥그릇 망태기를 메고 먼 데서 오는 동무들을 가르쳐 주었다.
62
이 모양으로 우리 집에서 석 달을 지내고는 산골 신 존위 집 사랑으로 글방을 옮기게 되어서 나는 밥그릇 망태기를 메고 고개를 넘어서 다녔다. 집에서 서당에 가기까지, 서당에서 집에 오기까지 내 입에서는 글소리가 끊어지는 일이 없었다. 글동무 중에는 나보다 정도가 높은 아이도 있었으나, 배운 것을 강을 하는 데에는 언제나 내가 최우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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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지 반년 만에 선생과 신 존위 사이에 반목이 생겨서 필경 이 선생을 내어보내게 되었는데, 신 존위가 말하는 이유는 이 선생이 밥을 너무 많이 자신다는 것이거니와, 사실은 그 아들이 둔재여서 공부를 잘 못하는데 내 공부가 일취월장하는 것을 시기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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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월강(한 달에 한 번 보는 시험) 때에 선생이 내게 조용히 부탁하신 일이 있었다. 내가 늘 우등을 하였으니 이번에는 일부러 잘 못하고 선생이 뜻을 물어도 일부러 모른 체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하오리다 약속을 하고 그대로 하였다. 이리하여서 이 날에 신 존위의 아들이 처음으로 한 번 장원을 하였다. 신 존위는 대단히 기뻐서 이날 닭을 잡고 한 턱을 잘 내었다. 그러나 번번이 신 존위의 아들을 장원시키지 못한 죄로 이 선생이 퇴짜를 맞은 것이니, 참으로 상놈의 행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루는 내가 아침밥을 먹기 전에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셔서 나를 불러 작별 인사를 하실 때에 나는 정신이 아득하여서 선생님의 품에 매달려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선생님도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 나는 며칠 동안은 밥도 잘 아니 먹고 울기만 하였다.
65
그 후에도 어떤 돌림 선생 한 분을 모셔다가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으나, 이번에는 아버지께서 갑자기 전신 불구가 되셔서 자리에 누우시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공부를 전폐하고 아버지 심부름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근본 빈한한 살림에 의원이야 약이야 하고 가산을 탕진한 끝에 겨우 아버지는 반신불수로 변하여서 한쪽 팔과 다리를 쓰시게 된 것만도 천행이라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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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버지가 반신불수로서는 살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여서라도 병은 고쳐야 하겠다 하여 어머니는 병신 아버지를 모시고 무전 여행을 나서게 되었다. 문전 걸식을 하면서 고명 의원을 찾아서 남편의 병을 고치자는 것이다.
67
집도 가마솥도 다 팔아 없어지고, 나는 백모님 댁에 맡긴 몸이 되어서 종형들과 소 고삐를 끌고 산과 들로 다니며 세월을 보내었다.
68
부모님이 그리워 견딜 수 없으므로 여행하는 부모님을 따라서 신천, 안악, 장련 등지로 유리하였다. 그러다가 나는 장련 대촌의 육촌 친척집에 두고 부모님만 고향으로 조부 대상제를 지내러 가시고 말았다. 그 댁도 농가인 까닭에 식구들과 같이 구월산에 나무를 베러 갔었는데, 내가 어려서는 유달리 크지를 못하여 나뭇짐을 지고 다니면 나뭇짐이 걸어가는 것과 같았고, 또한 그러한 고역을 처음 당하니 고통도 되려니와, 그 동네는 큰 서당이 있어 밤낮 글 읽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말할 수 없는 비회를 금할 수 없었다.
69
부모님이 유리표박하시는 동안에 아버지 병환이 신기하게도 차도가 계셔서 못 쓰시던 팔다리도 잘은 못해도 쓰게 되셨다. 그래서 내 공부를 시키실 목적으로 다시 본향에 돌아오셨다. 고향에 돌아와 보니 의식주를 기댈 만한 곳이 없었는데, 일가들이 얼마씩 추렴을 내어서 살림살이를 장만하고, 나는 또 서당에 다니게 되었다.
70
책은 남의 것을 빌어서 읽는다 하더라도 지필묵 값이 나올 데가 없었다. 어머님이 길품과 길쌈품을 팔아서 지필묵을 사 주실 때에는 어찌나 고마운지 이루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었다.
71
내 나이 열네 살이 되매, 선생이라는 이가 모두 고루해서 내 마음에 차지 아니하였다. 벼 열 섬짜리, 닷 섬짜리 하고 훈료가 많고 적은 것으로 선생의 학력을 평가하였다. 그들은 다만 글만 부족할 뿐 아니라 그 마음씨나 일하는 것에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72
그때에 아버지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밥 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고,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행문이나 배우라는 것이었다. '우명문표사단(右明文標事段)'하는 땅문서 쓰기, '우근진소지단(右謹陳訴旨段)'하는 소장 쓰기, '유세차감소고우(維歲次敢昭告于)'하는 축문 쓰기, '복지제기자미유항려(僕之第幾子未有伉儷)'하는 혼서지 쓰기, '복미심차시(伏未審此時)'하는 편지 쓰기를 배우라 하시므로 나는 틈틈이 이 공부를 하여서 무식촌 중에 문장이 되어서 문중에는 내가 장차 존위 하나는 하리라고 촉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 글은 이제야 겨우 속문 정도에 지나지 못하지만 뜻은 한 동네의 존위에는 있지 아니하였다. <통감>, <사략>을 읽을 때에 '왕후장상영유종호(王候將相寧有種乎: 왕, 제후, 장군, 재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음)'하는 진승의 말이나, 칼을 빼어서 뱀을 베었다는 유방의 일이나, 빨래하는 아낙네에게 밥을 빌어먹은 한신의 사적을 볼 때에는 나도 모르게 어깨에서 바람이 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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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 가세로는 고명한 스승을 찾아갈 수가 없어서 아버지께서도 무척 걱정을 하시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마침 공부할 길이 하나 뚫렸다. 우리 동네에서 동북으로 10리쯤 되는 학골이라는 곳에 정문재라는 이가 글을 가르치고 계셨다. 이 이는 문벌은 우리 집과 마찬가지로 상놈이었으나, 과문으로는 당시에 굴지되는 큰 선비여서 그 문하에는 사처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이 정 선생이 내 백모와 재종간이므로 아버지께서 그에게 간청하여 훈료 없이 통학하며 배우는 허락을 얻으셨다. 이에 나는 날마다 밥망태기를 메고 험한 산길을 10리나 걸어서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가는 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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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으로는 과문의 초보인 대고풍 십팔구(大古風 十八句)요, 학과로는 <한당시>와 <대학>, <통감> 등이요, 습자에서는 분판만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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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임진경과를 해주에서 보인다는 공포가 났으니 이것이 우리나라의 마지막 과거였다. 어느 날 정 선생은 아버지께 이런 말씀을 하시고, 나도 과거를 보기 위하여 명지를 쓰는 연습으로 장지를 좀 쓸 필요가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천신만고로 장지 다섯 장을 구해 오셔서 나는 그 다섯 장 종이가 까맣게 되도록 글씨를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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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날이 가까워오매 우리 부자는 돈이 없으므로 과거 중에 먹을 만큼 좁쌀을 지고 정 선생을 따라 해주로 갔다. 여관에 들 형편이 못 되므로 전에 아버지께서 친해 두셨던 계방에 사처를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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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날이 왔다. 선화당 옆에 있는 관풍각 주위에는 새끼줄을 둘러 늘였다. 정각에 부문을 한다는데, 선비들이 접을 따라서 제 이름을 쓴 백포기를 장대 끝에 높이 들고 모여들었다. 산동접, 석담접, 이 모양이었다. 선비들은 검은 베로 만든 유건을 머리에 쓰고 도포를 입고 접기를 따라 꾸역꾸역 밀려들어, 좋은 자리를 먼저 잡으려고 앞장선 용사패들이 아우성을 하는 것도 볼만하였다. 원래 과장에는 노소도 없고, 귀천도 없이 무질서한 것이 유풍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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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가관인 것은 늙은 선비들의 걸과라는 것이다. 둘러 늘인 새끼그물 구멍으로 모가지를 쑥 들이밀고 이런 소리를 외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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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생의 성명은 아무이옵는데, 먼 시골에 거생하면서 과거마다 참예하였사옵는데 금년이 일흔 몇 살이올시다. 요 다음은 다시 참가 못 하겠사오니 이번에 초시라도 한 번 합격이 되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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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양으로 혹은 큰 소리로 부르짖고, 혹은 방성대곡도 하니 한편 비루도 하거니와 또 한편 가련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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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을 짓기를 정 선생이 하시고 쓰기만 내가 하기로 하였으나, 내가 과거를 내 이름으로 아니 보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명지를 드린다는 말에 감복하여서 접장 한 분이 내 명지를 써 주기로 하였다. 나보다는 글씨가 낫기 때문이었다. 제 글과 제 글씨로 못 하는 것이 유감이었으나, 차작으로라도 아버지가 급제를 하셨으면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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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작으로 말하면 누구나 차작 아닌 것이 없었다. 세력 있고 재산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글 잘하는 사람에게 글을 빌고 글씨 잘 쓰는 사람에게 글씨를 빌어서 과거를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좋은 편이었다. 글은 어찌되었든지 서울 권문세가의 청편지 한 장이나 시관의 수청 기생에게 주는 명주 한 필이 진사나 급제가 되기에는 글 잘하는 큰 선비의 글보다도 빨랐다. 물론 우리 글 따위는 통인의 집 식지감이나 되었을 것이요, 시관의 눈에도 띄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진사 급제는 미리 정해놓고 과거는 나중 보는 것이었다.
83
이번 과거에 나는 크게 실망하였다. 아무리 글공부를 한댔자, 그것으로 발천하여 양반이 되기는 그른 세상인 줄을 깨달았다. 모처럼 글을 잘해도 세도 있는 자제들의 대서인 되는 것이 상지상(上之上: 가장 나은 경우)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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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에 돌아와서 과거에 실망한 뜻을 아뢰었더니 아버지도 내가 바로 깨달았다고 옳게 여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85
"너 그러면 풍수 공부나 관상 공부를 하여 보아라. 풍수를 잘 배우면 명당을 얻어서 조상님네 산소를 잘 써서 자손이 복록을 누릴 것이요, 관상에 능하면 사람을 잘 알아보아서 성인군자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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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말씀을 매우 유리하게 여겨서 아버님께 청하여 <마의상서>를 빌어다가 독방에서 석 달 동안 꼼짝 아니하고 공부하였다. 그 방법은 면경을 앞에 놓고 내 얼굴을 보면서 일변 얼굴의 여러 부분의 이름을 배우고, 일변 내 상의 길흉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내 얼굴을 관찰해 보아도 귀격이나 부격과 같은 좋은 상은 없고, 천격, 빈격, 흉격 뿐이었다. 전자에 과장에서 실망하였던 것을 상서에서나 회복하려 하였더니, 제 상을 보니 그보다도 더욱 낙심이 되었다. 짐승 모양으로 그저 살기나 위해 살다가 죽을까, 세상에 살아 있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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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절망에 빠진 나에게 오직 한 가지 희망을 주는 것은 <마의상서> 중에 있는 다음의 구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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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
89
이것을 보고 나는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좋지 못하던 사람으로서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서 <마의상서>는 아무 대답도 주지 못하였다. 이래서 상서는 덮어 버리고 <지가서>를 좀 보았으나, 거기에도 취미를 얻지 못하고, 이번에는 병서를 읽기 시작하였다. <손무자>, <오기자>, <삼략>, <육도> 등을 읽어 보았다. 알지 못할 것도 많으나, 장수의 재목을 말한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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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복어전심불망동 여사졸동감고 진퇴여호 지피지기 백전불패(泰山覆於前心不妄動 與士卒同甘苦 進退女虎 知彼知己 百戰不敗: 태산이 무너지더라도 마음을 동치 말고, 사졸로 더불어 달고 씀을 같이 하며, 나아가고 물러감을 범과 같이 하며,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지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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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이 내 마음을 끌었다, 이때에 내 나이가 열일곱 살, 나는 일가 아이들을 모아서 훈장질을 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병서를 읽고 1년의 세월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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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사방에는 여러 가지 괴질이 돌았다. 어디서는 진인이 나타나서 바다에 달리는 화륜선(汽船)을 못 가게 딱 잡아놓고 세금을 받고야 놓아주었다는 둥, 머지 아니하여 계룡산에 정 도령이 도읍을 할 터이니 바른 목에 가 있어야 새 나라의 양반이 된다 하여 세간을 팔아가지고 아무개는 계룡산으로 이사를 하였다는 둥, 이러한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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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 동네에서 남쪽으로 20리쯤 가서 갯골이란 곳에 사는 오응선(吳膺善)과 그 이웃동네에 사는 최유현(崔琉鉉)이라는 사람이 충청도 최도명(崔道明)이라는 동학(東學) 선생에게서 도를 받아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방에 들고 나기에 문을 열지 아니하며, 문득 있다가 문득 없어지며, 능히 공중으로 걸어 다니므로 충청도 그 선생 최도명한테 밤 동안 다녀온다고 하였다. 나는 이 동학이라는 것에 호기심이 생겨서 이 사람들을 찾아보기로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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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에게 들은 말대로 누린 것, 비린 것을 끊고 목욕하고 새 옷을 입고 나섰다. 이렇게 하여야 받아준다는 것이었다. 내 행색으로 말하면 머리는 빗어서 땋아 늘이고 옥색 도포에 끈목띠를 띠었다. 때는 내가 열여덟 살 되던 정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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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골 오씨 집 문전에 다다르니 안에서 무슨 글을 읽는 소리가 나오는데, 그것은 보통 경전이나 시를 외우는 소리와는 달라서 마치 노래를 합창하는 것과 같았다. 공문에 나아가 주인을 찾았더니 통천관(通天冠)을 쓴 말쑥한 젊은 선비 한 사람이 나와서 나를 맞는다. 내가 공손히 절을 한즉 그도 공손히 맞절을 하기로, 나는 황공하여서 내 성명과 문벌을 말하고 내가 비록 성관을 하였더라도 양반 댁 서방님인 주인의 맞절을 받을 수 없거늘, 하물며 편발(編髮) 아이에게 이런 대우가 과도한 것을 말하였다. 그랬더니 선비는 감동하는 빛을 보이면서, 그는 동학 도인이라 선생의 훈계를 지켜 빈부귀천에 차별이 없고, 누구나 평등으로 대접하는 것이니, 미안해할 것 없다고 말하고 내가 찾아온 뜻을 물었다. 나는 이 말을 들으매 별세계에 온 것 같았다. 내가 도를 들으러 찾아온 뜻을 고하니 그는 쾌히 동학의 내력과 도리의 요령을 설명하였다. 이 도는 용담(龍潭) 최수운(崔水雲) 선생께서 천명(闡明)하신 것이나, 그 어른은 이미 순교하셨고, 지금은 그 조카님 최해월(崔海月) 선생이 대도주(大道主)가 되셔서 포교를 하신다는 것이며, 이 도의 종지(宗旨)로 말하면 말세의 간사한 인류로 하여금 개과천선하여서 새 백성이 되어가지고 장래에 진명지주(眞命之主: 하늘의 뜻을 받아 어지러운 세상을 평정하고 통일한다는 참된 임금)를 뫼시어 계룡산에 새 나라를 세우는 것이라 하는 것 등을 말하였다. 나는 한번 들으매 심히 환희심이 발하였다. 내 상호가 나쁜 것을 깨닫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맹세한 나에게는 하느님을 몸에 모시고 하늘 도를 행하는 것이 가장 요긴한 일일뿐더러, 상놈인 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로서는 동학의 평등주의(平等主義)가 더할 수 없이 고마웠고, 또 이씨의 운수가 다하였으니 새 나라를 세운다는 말도 해주의 과거에서 본 바와 같이 정치의 부패함에 실망한 나에게는 적절하게 들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나는 입도할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서 입도 절차를 물은즉 쌀 한 말, 백지 세 권, 황초 한 쌍을 가지고 오면 입도식을 행하여 준다고 하였다. <동경대전(東經大全)>, <팔편가사(八編歌詞)>, <궁을가(弓乙歌)> 등 동학의 서적을 열람하고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께 오씨에게서 들은 말을 여쭙고 입도할 의사를 품하였더니 아버지께서는 곧 허락하시고 입도식에 쓸 예물을 준비하여 주셨다. 이렇게 하여서 내가 동학에 입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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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에 입도한 나는 열심히 공부를 하는 동시에 포덕(전도)에 힘을 썼다. 아버지께서도 입도하셨다. 이 때의 형편으로 말하면 양반은 동학에 오는 이가 적고 나와 같은 상놈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내가 입도한지 불과 몇 개월 만에 연비(連臂:포덕하여 얻은 신자라는 뜻)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이렇게 하여 내 이름이 널리 소문이 나서 도를 물으러 찾아오는 이도 있고, 내게 대한 무근지설(無根之說)을 전파하는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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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동학을 하여보니 무슨 조화가 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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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이 가장 흔히 내게 와서 묻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도를 구하지 아니하고, 요술과 같은 조화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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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짓지 말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 도의 조화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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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나의 솔직하고 정당한 대답이건마는 듣는 이는 내가 조화를 감추고 자기네에게 아니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김창수(金昌洙 - 창암[昌岩]이라는 아명을 버리고 이때부터 이 이름을 썼다) 가 한 길이나 떠서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노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모양으로 있는 소리 없는 소리 섞어 전하여서 내 명성이 황해도 일대뿐만 아니라 멀리 평안남도에까지 퍼져서 당년에 내 밑에 연비가 무려 수천에 달하였다. 당시 황평 양서 동학당 중에서 내가 나이가 어린 사람으로서 많은 연비를 가졌다 하여 나를 아기접주라고 별명지었다. 접주(接主)라는 것은 한 접의 수령이란 말로서 위에서 내리는 직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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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계사년(癸巳年) 가을에 해월(海月:최시형) 대도주로부터 오응선, 최유현 등에게 각기 연비의 성명 단자(명부)를 보고하라는 경통(敬通:공함이라는 뜻)이 왔으므로 황해도 내에서 직접 대도주를 찾아갈 인망 높은 도유(道儒) 15명을 뽑을 때에 나도 뽑혔다. 편발로는 불편하다 하여 성관하고 떠나게 되었다. 연비들이 내 노자를 모아 내고, 또 도주님께 올릴 예물로는 해주 향묵도 특제로 맞추어 가지고 육로, 수로를 거쳐서 충청도 보은군 장안(長安)이라는 해월 선생 계신 데 다다랐다. 동네에 쑥 들어서니 이 집에서도 저 집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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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始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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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주문 외우는 소리가 들리고, 또 일변으로는 해월 대도주를 찾아서 오는 무리, 일변으로는 뵈옵고 가는 무리가 연락부절하고, 집이란 집은 어디나 사람으로 가득 찼었다. 우리는 접대인에게 우리 일행 15명의 명단을 부탁하여 대도주께 우리가 온 것을 통하였더니, 1시간이나 지나서 황해도에서 온 도인을 부르신다는 통지가 왔다. 우리 일행 열다섯은 인도자를 따라서 해월 선생의 처소에 이르러 선생 앞에 한꺼번에 절을 드리니, 선생은 앉으신 채로 상체를 굽히고 두 손을 방바닥에 짚어 답배를 하시고, 먼 길에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다며 간단히 위로하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가지고 온 예물과 도인의 명단을 드리니, 선생은 맡은 소임을 부르셔서 처리하라고 명하셨다. 우리가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온 뜻은 선생의 선풍도골(仙風道骨)도 뵈오려니와, 선생께 무슨 신통한 조화 줌치(주머니의 방언)나 받을까함이었으나 그런 것은 없었다. 선생은 연기(年紀)가 육십은 되어 보이는데, 구레나룻이 보기 좋게 났으며, 약간 검게 보이고, 얼굴은 여위었으나 맑은 맵시다. 크고 검은 갓을 쓰시고 동저고리 바람으로 일을 보고 계셨다. 방문 앞에 놓인 무쇠 화로에서 약탕관이 김이 나며 끓고 있었는데, 독삼탕 냄새가 났다. 선생이 잡수시는 것이라고 했다. 방 내외에는 여러 제자들이 옹위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친근하게 모시는 이는 손응구, 김연국, 박인호 같은 이들인데, 손응구는 장차 해월 선생의 후계자로 대도주가 될 의암 손병희로서 깨끗한 청년이었고, 김은 연기가 사십은 되어 보이는데 순실한 농부와 같았다. 이 두 사람은 다 해월 선생의 사위라고 들었다. 손씨는 유식해 보이고, 천을천수(天乙天水)라고 쓴 부적을 보건대 글씨 재주도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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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이 해월 선생 앞에 있을 때에 보고가 들어왔다.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이가 벌써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뒤이어 또 후보(後報)가 들어왔다. 어떤 고을의 원이 도유(동학 도를 닦는 선비)의 전 가족을 잡아 가두고 가산을 강탈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를 들으신 선생은 진노한 낯빛을 띠고 순 경상도 사투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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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가 몰려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서서 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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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니 선생의 이 말씀이 곧 동원령(動員令)이었다. 각지에서 와서 대령하던 대접주(大接主)들이 물 끓듯 살기를 띠고 물러가기 시작하였다. 각각 제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싸우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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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황해도에서 온 일행도 각각 접주라는 첩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두건 속에 '해월인(海月印)'이라고 전자로 새긴 인이 찍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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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께 하직하는 절을 하고 물러나와 잠시 속리산을 구경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벌써 곳곳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이고, 평복에 칼 찬 사람을 가끔 만나게 되었다. 광혜원 장거리에 오니 1만 명이나 됨직한 동학군이 진을 치고 행인을 검사하고 있었다. 가관인 것은 평시에 동학당을 학대하던 양반들을 잡아다가 길가에 앉혀놓고 짚신을 삼기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증거를 보이고 무사히 통과하였다. 부근 촌락에서 밥을 짐으로 지어가지고 도소(都所: 이를테면 사령부)로 날라 오는 것을 무수히 길에서 만났다. 논에서 벼를 베던 농민들이 동학군이 물밀듯 모여드는 것을 보고 낫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도 보았고, 서울에 이르러서는 경군(서울 군사)이 삼남을 향해서 행군하는 것도 만났다. 해주에 돌아왔을 때는 9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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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동학당들도 들먹들먹하고 있었다. 첫째로는 양반과 관리의 압박으로 도인들의 생활이 불안하였고, 둘째로는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으로부터 향응하라는 경통이 빗발치듯했다. 그래서 15접주를 위시하여 여러 두목들이 회의한 결과 거사하기로 작정하고, 제 1회 총소집의 위치를 해주 죽천장으로 정하고 각처 도인에게 경통을 발하였다. 나는 팔봉산 밑에 산다고 하여서 접 이름을 팔봉이라고 짓고 푸른 갑사에 팔봉도소라고 크게 쓴 기를 만들고, 표어로는 척양척왜 넉 자를 써서 높이 달았다. 그러고는 서울서 토벌하러 내려올 경군과 왜병과 싸우기 위하여 연비 중에서 총기를 가진 이를 모아서 군대를 편제하기로 하였다. 나는 본시 산협잡쟁이요, 또 상놈인 까닭에 산포수 연비가 많아서 다 모아본즉 총을 가진 군사가 700명이나 되어 무력으로는 누구의 접보다도 나았다. 인근 부호의 집에 간직하였던 약간의 호신용 무기도 모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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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회의에서 작성한 전략으로는 우선 황해도의 수부인 해주성을 빼앗아 탐관오리와 왜놈을 다 잡아 죽이기로 하고, 팔봉 접주 김창수로 선봉장을 삼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평소에 병서에 소양이 있고, 또 내 부대에 산포수가 많은 것도 이유겠지마는 자기네가 앞장을 서서 총알받이가 되기 싫은 것이 아마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쾌히 '선봉'이라고 쓴 사령기를 들고 말을 타고 선두에 서서 해주성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해주성 서문 밖 선녀산에 진을 치고 총공격령이 내리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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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총지휘부에서 총공격령이 내리고, 작전 계획은 선봉장인 나에게 일임한다는 명령이 왔다. 나는 이렇게 계획을 세워서 본부에 아뢰고 곧 작전을 개시하였다. 지금 성내에 아직 경군은 도착하지 아니하고 오합지중으로 된 수성군 200명과 왜병 7명이 있을 뿐이니, 선발대로 하여금 먼저 남문을 엄습케 하여 수성군의 힘을 그리로 끌게 한 후에 나는 서문을 깨뜨릴 터인즉 총소(총사령부)에서 형세를 보아서 허약한 편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총소에서는 내 계획을 채용하여 한 부대를 남문으로 향하여 행진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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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에 수 명의 왜병이 성 위에 올라 대여섯 방이나 시험사격을 하는 바람에 남문으로 향하던 선발대는 도망하기 시작하였다. 왜병은 이것을 보고 돌아와서 달아나는 무리에게 총을 연발하였다. 나는 이에 전군을 지휘하여서 서문을 향하여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돌연 총소에서 퇴각하라는 명령이 내리고, 우리 선봉대는 머리도 돌리기 전에 따르던 군사가 산으로 들로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한 군사를 붙들어 퇴각하는 까닭을 물으니 남문 밖에서 도유 서너 명이 총에 맞아 죽은 까닭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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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니 선봉대만 혼자 머물 수도 없어서 비교적 질서 있게 퇴각하여 해주에서 서쪽으로 80리 되는 회학동 곽 감영 댁에 유진하기로 하였다. 무장한 군사는 축이 안 나고 거의 전부 따라와 있는 것이 대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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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의 실패에 분개하여서 잘 훈련된 군대를 만들기에 힘을 다하기로 하였다. 동학 도유거나 아니거나 전에 장교의 경험이 있는 자는 비사후폐(秘事厚幣:말을 정중히 하고 예물을 후하게 함)로 초빙하여 군사를 훈련하는 교관을 삼았다. 총 쏘기는 말할 것도 없고 행보하는 법이며 체조며 온갖 조련을 다하였다. 좋은 군대를 만드는 것이 싸움에 이기는 비결이라고 믿은 것이다. 하루는 어떤 사람 둘이 내게 면회를 청하였다. 구월산 밑에 사는 정덕현, 우종서라는 사람들이었다. 찾아온 까닭을 물었더니 그 대답이 놀라웠다. 동학군이란 한 놈도 쓸 것이 없는데 들은즉 내가 좀 낫단 말을 듣고 한번 보러 왔다는 것이다. 옆에 있던 내 부하들이 두 사람의 말이 심히 불공함을 분개하였다. 나는 도리어 부하를 책망하여 밖으로 내보내고, 이상한 손님과 셋이서 마주앉았다. 나는 공손히 두 사람을 향하여 '선생'이라 존칭하고, 이처럼 찾아와 주시니 무슨 좋은 계책을 가르쳐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런즉 정씨가 더욱 교만한 태도로 말하기를, 비록 계책을 말하기로니 네가 알아듣기나 할까, 실행한 자격이 없으리라고 비웃은 뒤에, 더욱 호기 있는 어성으로, 동학 접주나 하는 자들은 어줍지 않게 호기가 충전하여 선비를 초개와 같이 보니 너도 그런 사람이 아니냐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더욱 공손한 태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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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접주는 다른 접주와 다르다는 것을 선생께서 한 번 가르쳐보신 뒤에야 알 것이 아닙니까?" 하였다. 그들은 둘 다 나보다 10년은 연상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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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정씨가 흔연히 내 손을 잡으며 계책을 말하였다. 그것은 이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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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기를 정숙히 하되 비록 병졸을 대하더라도 하대하지 아니하고 경어를 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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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심을 얻을 것이니, 동학군이 총을 가지고 민가로 다니며 집곡이니 집전이니 하고 강도적 행위를 하는 것을 엄금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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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초현이니, 어진 이를 구하는 글을 돌려 널리 좋은 사람을 모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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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군을 구월산에 모으고 훈련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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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재령, 신천 두 고을에 왜가 사서 쌓아둔 쌀 2000석을 몰수하여 구월산 패엽사에 쌓아두고 군량으로 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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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 이 계획을 실시하기로 하고 즉시 전군을 집합장에 모아 정씨를 모주라, 우씨를 종사라고 공포하고 전군을 지휘하여 두 사람에게 최경례를 시켰다. 그러고는 구월산으로 진을 옮길 준비를 하던 차에, 어느 날 밤 신천 청계동 안 진사로부터 밀사가 왔다. 안 진사의 이름은 태훈이니, 그의 맏아들 중근은 나중에 이등박문을 죽인 안중근이다. 그는 글 잘하고 글씨 잘 쓰기로 이름이 서울에까지 떨치고, 또 지략도 있어 당시 조정의 대관들까지도 그를 무섭게 대우하였다. 동학당이 일어나매 안 진사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인 청계동 자택에 의려소를 두고, 그의 자제들로 하여금 모두 의병이 되게 하고 포수 300명을 모집하여서 벌써 신천 지경 안에 있는 동학당을 토벌하기에 많은 성공을 하여서 각 접이 다 이를 두려워하고 경계하였던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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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 모주로 하여금 이 밀사를 만나게 하였다. 그의 보고에 의하면, 나의 본진이 있는 회학동과 안 진사의 청계동이 불과 20리 상거이나, 만일 내가 무모하게 청계동을 치려다가 패하면 내 생명과 명성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니, 그러하면 좋은 인재를 하나 잃어버리게 될 것인즉, 안 진사가 나를 위하는 호의로 이 밀사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이에 곧 나의 참모회의를 열어서 의논한 결과, 저편에서 나를 치지 아니하면 나도 저편을 치지 아니할 것, 피차에 어려운 지경에 빠질 경우에는 서로 도울 것이라는 밀약이 성립되었다.
124
예정대로 나의 군사는 구월산으로 집결하였다. 재령, 신천에 있던 쌀도 패엽사로 옮겨왔다. 한 섬을 져오면 서 말을 준다고 하였더니 당일로 다 옮겨졌다. 날마다 군사 훈련도 여행(勵行: 힘써 행함)하였다. 또 인근 각 동에 훈령하여 동학당이라고 자칭하고 민간에 행패하는 자를 적발하여 엄벌하였더니 며칠이 안 가서 질서가 회복되고 백성이 안도하였다. 또 초현문을 발표하여 널리 인재도 수탐하여 송종호, 허곤 같은 유식한 사람을 얻었다. 패엽사에는 하은당이라는 도승이 있어서 수백 명 남녀 승도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나는 가끔 그의 법설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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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는 동안에 경군과 왜병이 해주를 점령하고, 옹진, 강령 등지를 평정하여 학령을 넘어온다는 기별이 들렸다. 그들의 목표가 구월산일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화근은 경군이나 왜병에 있지 아니하고 나와 같은 동학당인 이동엽의 군사에 있었다. 이동엽은 구월산 부근 일대에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접주로서, 그의 부하는 나의 본진 가까이까지 침입하여 노략질을 함부로 하였다. 우리 군에서는 사정없이 그들을 체포하여 처벌하였기 때문에 피차간에 반목이 깊어진데다가, 우리 군사들 중에 우리 군율에 의한 형벌을 받고 앙심을 품은 자와 노략질을 마음대로 하고 싶은 자들이 이동엽의 군대로 달아나는 일이 날로 늘었다. 이리하여 이동엽의 세력은 날로 커지고 내 세력은 날로 줄었다. 이에 최고회의를 열어 의논한 결과, 나는 동학접주의 칭호를 버리기로 하고, 내 군대를 허곤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이는 나의 병권을 빼앗으려 함이 아니요, 나를 살려내고자 하는 계책이었다. 이에 허곤은 송종호로 하여금 평양에 있는 장호민에게 보내는 소개 편지를 가지고 평양으로 떠나게 하였으니, 이것은 황주 병사의 양해를 얻어서 일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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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내 나이가 열아홉, 갑오년 섣달이었다. 나는 몸에 열이 나고 두통이 심하여서 자리에 눕게 되었다. 하은당 대사는 나를 그의 사처인 조실에 혼자 있게 하고 몸소 병구완을 하였다. 며칠 후에 내 병이 홍역인 것이 판명되어서 하은당은,
128
하고 웃었다. 그러고는 홍역을 다스린 경험이 있는 늙은 승수자 한 분을 가리어 내 조리를 맡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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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병석에 누워 있노라니, 하루는 이동엽이 전군을 이끌고 패엽사로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있고, 뒤이어 어지러이 총소리가 나며 순식간에 절 경내는 양군의 육박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원래 사기가 저상한데다가 장수를 잃은 나의 군사는 불의의 습격을 받아서 일패도지하고, 나의 본진은 적의 제압한 바 되고 말았다. 나의 군사들은 보기도 흉하게 도망하여 흩어지는 모양이었다.
131
"김 접주에게 손을 대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영장 이종선 이놈만 잡아 죽여라."
133
이 말을 듣고 나는 이불을 차고 마루 끝에 뛰어 나서서,
134
"이종선은 내 명령을 받아서 무슨 일이나 행한 사람이니 만일 이종선이가 죽을 죄를 지었거든 나를 죽여라."
136
이동엽이 부하에게 명하여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게 하고 이종선만을 끌고 나가더니, 이윽고 동구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이동엽의 부하는 다 물러가고 말았다.
137
이종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동구로 달려 내려갔다. 과연 그는 총에 맞아 쓰러졌고, 그의 옷은 아직도 불이 붙어 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안고 통곡하다가 내 저고리를 벗어 그 머리를 싸주었다. 그 저고리는 내가 남의 윗사람이 되었다 하여 어머니께서 지어 보내신, 평생에 처음 입어보는 명주 저고리였다. 동민들은 백설 위에 내가 벌거벗고 통곡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의복을 가져다 입혀주었다. 나는 동민들을 지휘하여 이종선의 시체를 매장하였다.
138
이종선은 함경도 정평 사람으로, 장사차 황해도에 와서 살던 사람이다. 총사냥을 잘하고, 비록 무식하나 사람을 거느리는 재주가 있어서 내가 그를 화포령장으로 삼았던 것이다.
139
이종선을 매장한 나는 패엽사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부산동 정덕현 집으로 갔다. 내게서 그 동안 지낸 일을 들은 정씨는 태연한 태도로,
140
"이제 형은 할 일 다 한 사람이니 나와 함께 평안히 유람이나 떠나자."
141
하고 내가 이종선의 원수 갚을 말까지 눌러버리고 말았다. 이동엽이 패엽사를 친 것은 제 손으로 저를 친 것과 마찬가지다, 경군과 왜병이 이동엽을 치기를 재촉할 것이라고 하던 정씨의 말이 그대로 맞아서, 정씨와 내가 몽금포 근처에 숨어 있는 동안에 이동엽은 잡혀가서 사형을 당하였다. 구월산의 내 군사와 이동엽의 군사가 소탕되니 황해도의 동학당은 전멸이 된 셈이었다.
142
몽금포 근동에 석 달을 숨어 있다가 나는 정씨와 작반하여 텃골에 부모를 찾아뵈옵고, 정씨의 의견을 좇아 청계동 안 진사를 찾아 몸을 의탁하기로 하였다. 나는 패군지장으로서 일찍 적군이던 안 진사의 밑에 들어가 포로 신세가 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였으나, 정씨는 안 진사의 위인이 그렇지 아니하여 심히 인재를 사랑한다는 말과, 전에 안 진사가 밀사를 보낸 것도 이런 경우를 당하면 자기에게 오라는 뜻이라고 역설함에 나는 그 말대로 한 것이었다.
143
텃골 본향에서 부모님을 뵈온 이튿날, 정씨와 나는 곧 천봉산을 넘어 청계동에 다다랐다. 청계동은 사면이 험준하고 수려한 봉란으로 에워 있고, 동네에는 띄엄띄엄 4, 50호의 인가가 있으며, 동구 앞으로 한 줄기 개울이 흐르고, 그곳 바위 위에는 '청계동천(淸溪洞川)'이라는 안 진사의 자필 각자(刻字: 새긴 글자)가 있었다.
144
동구를 막을 듯이 작은 봉우리 하나가 있었는데, 그 위에는 포대가 있고, 길 어귀에 파수병이 있어서 우리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명함을 내주고 얼마 있노라니 의려장의 허가가 있다 하여 한 군사가 우리를 안내하여 의려소인 안 진사 댁으로 갔다. 문전에는 연당이 있고 그 가운데에는 작은 정자가 있었는데, 이것은 안 진사 6형제가 평일에 술을 마시고 시를 읊는 곳이라고 했다. 대청 벽상에는 의려소 석 자를 횡액으로 써 붙였다. 안 진사는 우리를 정청에 영접하여 수인사를 한 후에 첫말이,
145
"김 석사가 패엽사에서 위험을 면하신 줄을 알았으나 그 후 사람을 놓아서 수탐하여도 계신 곳을 몰라서 우려하였더니 오늘 이처럼 찾아주시니 감사하외다."
147
"들으니 구경하(具慶下:부모님 두 분이 다 살아계심)시던데 양위분은 안접하실 곳이 있으시오?"
149
내가 별로 안접하실 곳이 없는 뜻을 말하였더니, 안 진사는 즉시 오일선에게 총 멘 군사 30명을 맡기며,
150
"오늘 안으로 텃골로 가서 김 석사 부모 양위를 뫼셔오되, 근동에 있는 우마를 징발하여 그 댁 가산 전부를 반이해 오렸다."
152
이리하여 우리 집이 청계동에 우접하게 되니, 내가 스무 살 되던 을미년 2월 일이었다.
153
내가 청계동에 머문 것은 불과 4,5 개월이었지만, 그 동안은 내게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것은 첫째로는 내가 안 진사와 같은 큰 인격에 접한 것이요, 둘째로는 고 산림과 같은 의기 있는 학자의 훈도를 받게 된 것이었다.
154
안 진사는 해주 부중에 10여 대나 살아오던 구가의 자제였다. 그 조부 인수가 진해 현감을 지내고는 세상이 차차 어지러워짐을 보고 세상에서 몸을 숨기고자 하여, 많은 재산을 가난한 일가에게 나누어주고 약 300석 추수하는 재산을 가지고 청계동으로 들어오니, 이는 산천이 수려하고 족히 피난처가 될 만한 것을 취함이었다. 이 때는 장손인 중근이 두 살 때였다. 안 진사는 과거를 하려고 서울 김종한의 문객이 되어 다년 유경하다가 진사가 되고는 벼슬할 뜻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형제 여섯 사람이 술과 시로 세월을 보내고, 뜻있는 벗을 사귀기로 낙을 삼고 있었다. 안씨 6형제가 다 문장재사라 할 만하지마는, 그 중에서도 셋째인 안 진사가 눈에 정기가 있어 사람을 누르는 힘이 있고, 기상이 뇌락하여, 비록 조정의 대관이라도 그와 면대하면 자연 경외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는 내가 보기에도 퍽 소탈하여서, 비록 무식한 하류들에게까지도 조금도 교만한 빛이 없이 친절하고 정녕하여서 상류나 하류나 다 그에게 호감을 가졌었다. 얼굴이 매우 청수하나 술이 과하여 코끝이 붉은 것이 흠이었다. 그는 율을 잘하여서 당시에도 그의 시가 많이 전송되었고, 내게도 그가 득의의 작을 흥 있게 읊어주는 일이 있었다. 그는 '황석공소서'를 자필로 써서 벽장문에 붙이고, 취흥이 나면 소리를 높여서 그것을 낭독하였다.
155
그때 안 진사의 맏아들 중근은 열세 살로, 상투를 짜고 있었는데, 머리를 자주색 수건으로 질끈 동이고 돔방총이라는 짧은 총을 메고 날마다 사냥을 일삼고 있어 보기에도 영기가 발발하고, 청계동 군사들 중에 사격술이 제일이어서 짐승이나 새나 그가 겨눈 것은 놓치는 일이 없기로 유명하였다. 그의 계부 태건과 언제나 함께 사냥을 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잡아오는 노루와 고라니로는 군사들을 먹이고, 또 진사 6형제의 주연의 안주를 삼았다. 진사의 둘째 아들 정근과 셋째 공근은 다 붉은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땋아 늘인 도련님들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진사는 이 두 아들에 대해서는 글을 읽지 않는다고 걱정도 하였으나 중근에 대해서는 아무 간섭도 아니하는 모양이었다.
156
고 산림의 이름은 능선인데, 그는 해주 서문 밖 비동에 세거하는 사람으로서, 중암 조중교의 문인이요, 의암 유인석과 동문으로서, 해서(海西:황해도 지역)에서는 행검으로 굴지되는 학자였다. 이 이도 안진사의 초청으로 이 청계동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157
내가 고 산림을 처음 대한 것은 안 진사의 사랑에서였다. 그런데 자기의 사랑에 놀러오라는 그의 말에 나는 크게 감복하여 이튿날 그의 집에 찾아갔다. 선생은 늙으신 낯에 기쁨을 띠시고 친절하게 나를 영접하시며 맏아들인 원명을 불러 나와 상면케 하였다. 원명은 나이 서른 살쯤 되어 보였는데 자품(資稟:사람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은 명민한 듯하나 크고 넓음이 그 부친의 뒤를 이을 것 같지는 아니하였다. 원명에게는 15, 6세나 된 맏딸이 있었다.
158
고 선생이 거처하시는 방은 작은 사랑이었는데, 방 안에는 책이 가득 쌓여있고, 네 벽에는 옛날에 이름난 사람들의 좌우명과 선생 자신의 심득 같은 것을 둘러 붙였으며, 선생은 가만히 꿇어앉아서 마음을 가다듬는 공부를 하시며 <손무자>, <삼략> 같은 병서도 읽으셨다.
159
고 선생은 나더러, 내가 매일 안 진사의 사랑에 가서 놀더라도 정신 수양에는 효과가 적을 듯하니, 매일 선생의 사랑에 와서 세상사도 말하고 학문도 토론함이 어떠냐고 하였다. 나는 이러한 대 선생이 나에게 대하여 이처럼 특별한 지우(知遇:학식이나 인격을 인정하여 잘 대우함)를 주시는 것을 눈물겹게 황송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나는 좋은 마음 가진 사람이 되려던 소원을 말씀드리고 모든 것을 고 선생의 지도에 맡긴다는 성의를 표하였다. 과거에 낙심하고 관상에 낙심하고 동학에 실패한,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리를 가지게 되었는데, 나 같은 것도 고 선생과 같으신 큰 학자의 지도로 한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있을까? 스스로 의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런 말씀을 아뢰었더니 고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160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남의 일을 어찌 알랴. 그러므로 내가 그대의 장래를 판단할 힘은 없으나, 내가 한 가지 그대에게 확실히 말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성현을 목표로 하고 성현의 자취를 밟으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힘써 가노라면 성현의 지경에 달하는 자도 있고, 못 미치는 자도 있거니와, 이왕 그대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될 뜻을 가졌으니 몇 번 길을 잘못 들더라도 본심만 변치 말고 고치고 또 고치고, 나아가고 또 나아가면 목적지에 달할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괴로워하지 말고 행하기만 힘쓰라."
161
이로부터 나는 매일 고 선생 사랑에 갔다. 선생은 내게 고금의 위인을 비평하여 주고, 당신이 연구하여 깨달은 바를 가르쳐주고, <화서아언>이며 <주자백선>에서 긴요한 절구를 보여주셨다. 선생이 특히 역설하시는 바는 의리에 관해서였다. 비록 뛰어난 재능이 있더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그 재능이 도리어 화단이 된다고 하셨다.
162
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치는 방법을 취하지 아니하고, 내 정신과 재질을 보셔서 뚫어진 곳은 깁고 빈 구석을 채워주는 구전심수의 첩경을 택하셨다. 선생은 나를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보셨음인지, 아무리 많이 알고 잘 판단하였더라도 실행할 과단력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고 말씀을 하시고,
163
'득수반지무족기 현애철수장부아(得樹攀枝無足奇 縣崖撤手丈夫兒:나뭇가지를 잡아도 발에는 힘주지 않고, 벼랑에 매달려도 손을 놓을 수 있는 것이 장부다)'
165
가끔 안 진사가 고 선생을 찾아오셔서 두 분이 고금의 일을 강론하심을 옆에서 듣는 것은 참으로 비할 데 없이 재미있는 일이었다.
166
나는 가끔 고 선생 댁에서 놀다가 저녁밥을 선생과 같이 먹고, 밤이 깊어 인적이 고요할 때까지 국사를 논하는 일이 있었다.
168
"예로부터 천하에 흥하여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고, 망해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도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어느 나라 국민이 의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며, 그와는 반대로 백성이 여러 패로 갈라져 한 편은 이 나라에 붙고 한 편은 저 나라에 붙어서 외국에는 아첨하고 제 동포와는 싸워서 망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이다. 이제 왜의 세력이 전국에 충만하여 궐내에까지 침입하여서 대신도 적의 마음대로 내고 들이게 되었으니 우리나라가 제 2의 왜국이 아니고 무엇인가. 만고에 망하지 아니한 나라가 없고, 천하에 죽지 아니한 사람이 있던가.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일건사가 남아있을 뿐이다."
169
선생은 비감한 낯으로 나를 보시며 이 말씀을 하셨다. 나는 비분을 못 이겨 울었다.
170
망하는 우리나라를 망하지 않도록 붙들 도리는 없는가 하는 내 물음에 대해서 선생은 청국과 서로 맺는 것이 좋다고 하시고, 그 이유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171
"청국이 갑오년 싸움(청일전쟁, 1894년)에 진 원수를 반드시 갚으러 할 것이니, 우리 중에서 상당한 사람이 그 나라에 가서 그 국정도 조사하고 그 나라 인물과도 교의를 맺어두었다가 후일에 기회가 오거든 서로 응할 준비를 하여두는 것이 필요하다."
172
나는 선생의 이 말씀에 감동하여 청국으로 갈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나와 같이 어린 것이 한 사람 간다고 해서 무슨 일이 되랴 하는 뜻을 말씀드린즉 선생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책망하시고, 누구나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혼자만이라도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니, 저마다 남이 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저마다 제 일을 하면 자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라, 어떤 사람은 정계에, 또 어떤 사람은 학계나 상계에, 이처럼 자기가 합당한 방면으로 활동하여서 그 결과가 모이면 큰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셨다.
173
이 말씀에 나는 청국으로 떠날 결심을 하고, 그 뜻을 고 선생께 아뢰었다. 선생은 크게 기뻐하셔서 내가 떠난 뒤에는 내 부모까지 염려 마라 하셨다.
174
나는 의리로 보아 이 뜻을 안 진사에게 통함이 옳을까 하였으나, 고 선생은 이에 반대하셨다. 안 진사가 천주학을 믿을 의향이 있는 모양인데, 만일 그렇다면 이는 양이를 의뢰하려 함이니 대의에 어긋나는 일인즉 지금 이런 큰일을 의논할 수 없다. 그러나 안 진사는 확실한 인재니, 내가 청국을 유력(遊歷:여러 고장을 돌아다님)한 뒤에 좋은 일이 있을 때에 서로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아니하니, 이번에는 말없이 떠나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엇이나 고 선생의 지시대로 하기로 결심하고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하였다.
176
내가 청국을 향하여 방랑의 길을 떠나기로 작정한 바로 전날, 나는 넌지시 안 진사를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속으로만이라도 하직하는 정을 표현하려고 안 진사 댁 사랑에 갔다가 참빗장수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언어동작이 아무리 보아도 예사 사람이 아닌 듯하여 인사를 청한즉 그는 전라도 남원 귓골 사는 김형진이란 사람이요, 나와 같은 안동 김씨요, 연치는 나보다 8,9 세 위였다. 나는 참빗을 사겠노라고 그를 내 집으로 데리고 와서 하룻밤을 같이 자면서 그의 인물을 떠보았다. 과연 그는 보통 참빗장수가 아니요, 안 진사가 당시에 대문장, 대영웅이라는 말을 듣고 한 번 찾아 보러 일부러 떠나온 것이라고 한다. 인격이 그리 뛰어나거나 학식이 도저한 인물은 못 되나 시국에 대하여서 불평을 품고 무슨 일이나 하여보자는 결심은 있어 보였다. 이튿날 그를 데리고 고 선생을 찾아 선생에게 인물 감정을 청하였더니, 선생은 그가 비록 주뇌가 될 인물은 못 되나 남을 도와서 일할 만한 소질은 있어 보인다는 판단을 내리셨다. 이에 나는 김씨를 내 길동무 삼기로 하고, 집에서 먹이던 말 한 필을 팔아 여비를 만들어 청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177
우리는 백두산을 보고 동삼성(만주)을 돌아서 북경으로 가기로 하였다. 평양까지는 예사대로 가서, 거기서부터는 나도 김형진 모양으로 참빗과 황화장수(행상)를 하기로 하고, 참빗과 붓, 먹과 기타 산읍에서 팔릴 만한 물건을 사서 둘이서 한 짐씩 걸머졌다. 그리고 평양을 떠나서 을밀대와 모란봉을 잠시 구경하고 강동, 양덕, 맹산을 거쳐 함경도로 넘어서서 고원, 정평을 지나 함흥 감영에 도착하였다. 강동 어느 장거리에서 하룻밤을 자다가 칠십 늙은이 주정뱅이한테 까닭 모를 매를 얻어맞고 한신이 회음에서 어떤 젊은 놈에게 봉변당하던 것을 이야기하고 웃은 일이 있었다. 고원 함관령에서 이 태조(조선 태조)가 말갈을 쳐 물리친 승전비를 보고, 함흥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길다는 남대천 나무다리와 네 가지 큰 것 중에 하나라는 장승을 보았다. 이 장승은 큰 나무에 사람의 얼굴을 새긴 것인데, 머리에는 사모를 쓰고 얼굴에는 주홍칠을 하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이 매우 위엄이 있었다. 장승은 2개씩 남대천 다리 머리에 갈라 서있었다.
178
옛날에 장승은 큰 길목에는 어디나 서있었으나 함흥의 장승이 그 중 가장 크기로 유명하여서 경주의 인경과 은진의 돌미륵과 연산의 쇠가마와 함께 사대물이라고 꼽히던 것이었다.
179
함흥의 낙민루는 이 태조가 세운 것으로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180
흥원, 신포에서는 명태잡이 하는 것을 보고, 어떤 튼튼한 아낙네가 광주리에 꽃게 한 마리를 담아서 힘껏 이고 가는데, 게의 다리가 모두 내 팔뚝보다도 굵은 것을 보고 놀랐다.
181
함경도에 들어서서 가장 감복한 것은 교육제도가 황해도나 평안도보다 발달된 것이었다. 아무리 초가집만 있는 가난한 동네에도 서재와 도청은 기와집이었다. 흥원 지경 어느 서재에는 선생이 세 사람이 있어 학과를 고등, 중등, 초등으로 나눠서 각각 한 반씩 담당하며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옛날 서당으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서당 대청 좌우에는 북과 종을 달고 북을 치면 글 읽기를 시작하고, 종을 치면 쉬었다. 더구나 북청은 함경도 중에서도 글을 숭상하는 고을이어서 내가 그곳을 지날 때에도 살아있는 진사가 30여 명이요, 대과에 급제한 조관이 일곱이나 있었다. 과연 문향이라고 나는 크게 탄복하였다.
182
도청이라는 것은 동네에서 공용으로 쓰는 집이다. 여염집보다 크기도 하고 화려하기도 하다. 사람들은 밤이면 여기 모여서 동네 일을 의논도 하고, 새끼 꼬기, 신 삼기도 하고, 이야기도 듣고, 놀기도 하고, 또 동네 안에 뉘 집에나 손님이 오면 집에서 식사만 대접하고 잠은 도청에서 자게 하니, 이를테면 공동 사랑이요, 여관이요, 공회당이다. 만일 돈 없는 나그네가 오면 도청 예산 중에서 식사를 공궤하기로 되어 있다. 모두 본받을 미풍이라고 생각하였다.
183
우리가 단천 마운령을 넘어서 갑산읍에 도착한 것이 을미년 7월이었다. 여기 와서 놀란 것은 기와를 인 관청을 제외하고는 집집마다 지붕에 풀이 무성하여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빈 터와 같았다. 그러나 뒤에 알고 보니 이것은 지붕을 덮은 봇껍질을 흙덩이로 눌러놓으면 거기에서 풀이 무성하게 자라 아무리 악수가 퍼부어도 흙이 씻기지 아니한다고 한다.
184
봇껍질은 희고 빤빤하고 단단하여서 기와보다도 오래간다 하며, 사람이 죽어 봇껍질로 싸서 묻으면 1만년이 가도 해골이 흩어지는 일이 없다고 한다.
185
혜산진에 이르니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만주를 바라보는 곳이라 건너편 중국 사람의 집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서는 압록강도 걸어서 건널 만하였다.
186
혜산진에 있는 제천당은 우리나라 산맥의 조종이 되는 백두산 밑에 있어 예로부터 나라에서 제관을 보내어 하늘과 백두산 신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그 주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187
'유월설색산백두이운무 만고유성수압록이흉용(六月雪色山白頭而雲霧 萬古流聲水鴨綠而洶湧:눈 쌓인 6월의 백두산에 운무가 감돌고 만고에 끊이지 않고 흐르는 압록강이 용솟음친다)'
188
우리는 백두산 가는 길을 물어가면서 서대령을 넘어 삼주, 장진, 후창을 거쳐 자성의 중강을 건너서 중국 땅인 마울산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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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길은 무비 험산준령이요, 어떤 곳은 7, 80 리나 무인지경도 있어서 밥을 싸가지고 간 적도 있었다. 산은 심히 험하나 맹수는 별로 없었고, 수풀이 깊어서 지척을 분별치 못할 때가 많았다. 나무는 하나를 벤 그루터기 위에 7, 8 명이 모여 앉아서 밥을 먹을 만한 것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내가 본 것 중에도 통나무로 곡식 넣는 통을 파느라고 장정 하나가 그 통 속에 들어서서 도끼질을 하는 것이 있었다. 장관인 것은 이 산봉우리에 섰던 나무가 쓰러져서 저 산봉우리에 걸쳐 있는 것을 우리가 다리 삼아서 건너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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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경은 인심이 대단히 순후하고, 먹을 것도 넉넉하여서 나그네가 오면 극히 반가워하여 얼마든지 묵게 한 뒤에 보냈다. 곡식은 대개 귀밀과 감자요, 산의 개천에는 이면수라는 물고기가 많이 나는데 대단히 맛이 좋았다. 옷감으로 짐승의 가죽을 쓰는 것이 퍽이나 원시적이었다. 삼수 읍내에는 민가가 겨우 30호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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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울산에서 서북으로 노인치라는 영(嶺)을 넘고 또 넘어 서대령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100리에 두어 사람 정도 우리 동포를 만났는데, 대부분 금점꾼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더러 백두산 가는 것이 향마적 때문에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하므로 우리는 유감이나마 백두산 참배를 중지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방향을 돌려 만주 구경이나 하리라 하고 통화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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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는 압록강 연변의 다른 현성과 마찬가지로 설립된 지 얼마 아니 되어서 관사와 성루의 서까래가 아직도 흰빛을 잃지 아니하였다. 성내에 인가가 모두 500호라는데, 그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의 집도 하나 있었다. 남자는 변발을 하여서 중국 사람의 모양을 하고 현청에 통사로 있다는데, 그의 처자들은 우리의 옷을 입고 있었다. 거기서 10리쯤 가서 심 생원이라는 동포가 산다 하기로 찾아갔더니 정신없이 아편만 먹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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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로 돌아다니는 중에 가장 미운 것은 호통사였다. 몇 마디 한어를 배워가지고는 불쌍한 동포의 등을 긁어 피를 빨아먹는 것이었다. 우리 동포들은 갑오년 난리를 피하여 생소한 이 땅에 건너와서 중국 사람이 살 수가 없어서 내버린 험한 산골을 택하여 화전을 일구어서 조나 강냉이를 지어 근근이 연명하고 있었다. 호통사라는 놈들은 중국 사람들에게 붙어서 무리한 핑계를 만들어가지고 혹은 동포의 전곡을 빼앗고, 혹은 부녀의 정조를 유린하는 것이었다. 어떤 곳에를 가노라니 중국인의 집에 한복을 입은 처녀가 있기에 이웃사람에게 물어본즉 그 역시 호통사의 농간으로 그 부모의 빚값으로 중국인의 집에 끌려온 것이라고 하였다. 관전, 임강, 환인, 어디를 가도 호통사의 폐해는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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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나 토지는 비옥하여서 한 사람이 지으면 열 사람이 먹을 만하였다. 오직 귀한 것은 소금이어서, 이것은 의주에서 물을 거슬러 올라와 사람의 등으로 져 나르는 것이라 한다. 동포들의 인심은 참으로 순후하여, 본국 사람이 오면 '앞대 나그네'가 왔다 하여 혈속과 같이 반가워하고, 집집이 다투어서 맛있는 것을 대접하려고 애를 쓰고, 남녀노소가 모여와서 본국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다. 대부분이 청일 전쟁 때 피난 간 사람들이지만 간혹 본국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 온 사람이 있었다. 그 중에는 민요에 장두가 되었던(민란을 주도했던) 호걸도 있고, 공금을 포흠한 관속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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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광개토왕비는 아직 몰랐던 때라 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거니와, 관전의 임경업 장군의 비각을 본 것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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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충신임경업지비(三國忠臣林慶業之碑)'라고 비면에 새겨 있는데, 이 지방 중국 사람들은 병이 나면 이 비각에 제사를 드리는 풍속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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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방으로 방랑하는 동안에 김이언이란 사람이 청국의 도움을 받아서 일본에 반항할 의병을 꾸미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이언은 벽동 사람으로서, 기운이 있고 글도 잘하여 심양자사에게 말 한 필과 <삼국지> 한 질을 상으로 받았기 때문에 중국 사람 장령들에게도 대접을 받는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을 찾아보기로 작정하고, 먼저 그 인물이 참으로 지사인가, 협잡꾼인가 아닌가를 염탐하기 위하여 김형진을 먼저 떠나보내고 나는 다른 길로 수소문을 하면서 따라가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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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압록강을 거의 100리나 격한 노중에서 궁둥이에 관인을 찍은 말을 타고 오는 젊은 청국 장교 한 사람을 만났다. 그의 머리에 쓴 마라기(청국 군인의 모자)에는 옥로가 빛나고 붉은 솔이 너풀거렸다. 나는 덮어놓고 그의 말머리를 잡았다. 그는 말에서 내렸다. 나는 중국말을 몰랐으므로 내가 여행하는 취지를 적은 글을 만들어서 품에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을 그 장교에게 내어 보였다. 그는 내가 주는 글을 받아 읽더니 다 읽기도 전에 소리를 내어 울었다. 내가 놀라서 그가 우는 까닭을 물으니 그는 내 글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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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피왜적여아불공대천지수(痛彼倭敵與我不共戴天之讐:왜적과는 더불어 평생을 같이 살 수 없는 철천지 원수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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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구절을 가리키며 다시 나를 잡고 울었다. 내가 필담을 하기 위해 필통을 꺼냈더니, 그가 먼저 붓을 들어 왜가 어찌하여 그대의 원수냐고 도리어 내게 묻는다. 나는 일본이 임진으로부터 세세에 걸쳐 원수일 뿐만 아니라, 지난달에 왜가 우리 국모를 불살라 죽였다고 쓰고, 다음에 그대야말로 무슨 연유로 내 글을 보고 이토록 통곡하는가 하고 물었다. 그의 대답을 듣건대, 그는 작년 평양 싸움에서 전사한 장수, 서옥생의 아들로서, 강계 관찰사에게 그 부친의 시체를 찾아주기를 청하였던 바, 찾았다 하기로 가본즉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시체가 아니므로 허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나는 평양 보통문 밖에 '서옥생전사지지'라는 목패를 보았다는 말을 하였다. 그의 집은 금주요, 집에는 15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아버지 옥생이 그 중에서 1000명을 데리고 출정하여서 전멸하였고 지금 집에는 500명이 남아 있으며, 재산은 넉넉하고, 자기의 나이는 서른 살이요, 아내는 몇 살이며, 아들이 몇, 딸이 몇이라고 자세히 가르쳐준 뒤에 내 나이를 물어, 내가 그보다 연하인 것을 알고는 그는 나를 아우라고 부를 터이니 그를 형이라고 부르라 하여 피차에 형제의 의를 맺기로 청하고, 서로 같은 원수를 가졌으니 함께 살면서 시기를 기다리자 하여 나더러 그와 같이 금주로 가기를 청하고,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내 등에 진 짐을 벗겨 말에 달아매고 나를 붙들어 말안장에 올려놓고 자기는 걸어서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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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마를 가며 곰곰이 생각하였다. 기회는 썩 좋은 기회였다. 내가 원래 이 길을 떠난 것은 중국의 인사들과 교의를 맺자는 것이었으니, 이제 서씨와 같은 명가와 인연을 맺은 것은 고소원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김형진에게 알릴 길이 없는 것이었다. 만일 김형진만 같이 있었던들 나는 이때에 서를 따라갔을 것이다.
202
나는 근 1년이나 집을 떠나 있어 부모님 안부도 모르고, 또 서울 형편도 못 들었으니, 이 길로 본국에 돌아가 근친도 하고, 나라 일이 되어가는 양도 알아본 뒤에 금주로 형을 따라갈 것을 말하고 결연하게 그와 서로 작별하였다.
203
나는 참빗장수의 행세로 이집 저집에서 김이언의 일을 물어가며 서와 작별한 지 5, 6일 만에 김이언의 근거지 삼도구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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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언은 당년 50여 세에, 심양에서 500근 되는 대포를 앉아서 두 손으로 들었다 놓았다 할 만큼 기운이 있는 사람이었다. 보기에 용기가 부족한 것 같고, 또 자신이 과하여 남의 의사를 용납하는 도량이 없는 것 같았다. 도리어 그의 동지인, 초산에서 이방을 지냈다는 김규현이란 사람이 의리도 있고 책략도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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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언은 자기가 창의의 수령이 되어서 초산, 강계, 위원, 벽동 등지의 포수와, 강 건너 중국 땅에 사는 동포 중에 사냥총이 있는 사람을 모집하여서 약 300명가량 무장한 군사를 두고 있었다. 창의의 명의로는 국모가 왜적의 손에 죽었으니 국민 전체의 욕이라 참을 수 없다는 것이요, 이 뜻으로 글 잘하는 김규현의 붓으로 격문을 지어서 사방에 산포하였다. 나와 김형진 두 사람도 참가하기로 하여 나는 초산, 위원 등지에 숨어 다니며 포수를 모으는 일과 강계 성중에 들어가서 화약을 사오는 일을 맡았다. 거사할 시기는 을미년 동짓달 초생, 압록강이 얼어붙을 때로 하였다. 군사를 얼음 위로 몰아서 강계성을 점령하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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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원에서 내가 맡은 일을 끝내고 책원지인 삼도구로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을 건너다가 엷은 얼음을 밟아서 두 팔만 얼음 위에 남고 몸이 온통 강 속으로 빠져버렸다. 나는 솟아오를 길이 없어서 목청껏 사람 살리라고 소리 지를 뿐이었다. 내 소리를 들은 동민들이 나와서 나를 얼음 구멍에서 꺼내어 인가로 데리고 갔을 때에 내 의복은 벌써 딱딱한 얼음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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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강계성을 습격할 날이 왔다. 우선 고산리를 쳐 거기 있는 무기를 빼앗아서 무기 없는 군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이 첫 실책이었다. 나는 고산리를 먼저 치지 말고 곧장 강계성을 엄습하자고 주장하였다. 우리가 고산리를 쳤다는 소문이 들어가면 강계성의 수비가 더욱 엄중할 것이니, 고산리에서 약간의 무기를 더 얻는 것보다는 출기부의(出其不意)로 강계를 덮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김규현, 백 진사 등 참모도 내 의견에 찬성하였으나 김이언은 종시 제 고집을 세우고 듣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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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전에서 무기를 빼앗은 우리 군사는 이튿날 강계로 진군하여 야반에 독로강 빙판으로 전군을 몰아 선두가 인풍루에서 10 리쯤 되는 곳에 다다랐을 때에 강남 쪽 송림 속에서 화승불이 번쩍번쩍하는 것이 보였다. 그때에는 모두 화승총이었으므로 군사는 불붙은 화승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송림 속으로부터 강계대 장교 몇 명이 나와 김이언을 찾아보고 첫말로 묻는 말이, 이번에 오는 군사 중에 청병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김이언은 이에 대하여 이번에는 청병은 아니 왔다, 그러나 우리가 강계를 점령하였다고 기별하는 대로 오기로 하였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정직한 말일는지는 모르거니와 전략적인 대답은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우리 중에 몇 사람이 청국 장교로 차리고 선두에 설 것을 주장하였으나, 김이언은 우리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는 이 싸움에 청병의 위력을 가장하는 것은 옳지 아니하니, 강계성 점령은 당당하게 흰 옷을 입은 우리가 할 것이요, 또 강계대의 장교도 이미 내응할 약속이 있으니 염려 없다고 고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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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에 대하여 강계대의 장교라는 것이 애국심으로 움직이기보다도 세력에 쏠릴 것이라 하여 청국 장교로 가장하는 것이 전략상 극히 필요하다고 하였으나, 김이언은 끝까지 듣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랬던 차에 이제 강계대 장교가 머리를 흔들고 돌아가는 것을 보니 나는 벌써 대세가 틀렸다고 생각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장교들이 그들의 진지로 돌아갈 때쯤 하여 화승불들이 일제히 움직이더니 탕탕 하고 포성이 진동하고 탄알이 빗발같이 이리로 날아왔다. 잔뜩 믿고 마음을 놓고 있던 이 편의 1000여 명 군마는 얼음판 위에서 대혼란을 일으켜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달아나기를 시작하고, 벌써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자,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고 우는 자가 여기저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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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이 다 틀렸음을 알고, 또 김이언으로 보면 이번에 여기서 패하고는 다시 회복 못할 것으로 보고 김형진과 함께 슬며서 떨어져서 몸을 피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군사들이 달아나는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도리어 강계성에 가까운 쪽으로 피하였다. 인풍루 바로 밑의 동네로 갔더니 어느 집에도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그 중에 가장 큰 집으로 갔다. 밖에서 불러도 대답이 없고 안에 들어가도 사람은 없는데, 빈 집에 큰 제상이 놓이고, 그 위에는 갖은 음식이 벌여져 있고, 상 밑에는 술병이 있었다. 우리는 우선 술과 안주를 한바탕 배불리 먹었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그 아버지 대상제를 지내다가 총소리에 놀라서 식구들과 손님들이 모두 산으로 피난하였던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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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튿날 강계를 떠나 되넘이 고개를 넘어 수일 만에 신천으로 돌아왔다. 청계동으로 가는 길에 나는 호열자로 하여서 고 선생의 맏아들 원명의 부처가 구몰하였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나는 집에도 가기 전에 먼저 고 선생 댁을 찾았더니, 선생은 도리어 태연자약하셨다. 나는 어색하여 말문이 막혔다. 내가 부모님 계신 집으로 가려고 하직을 할 때에 고 선생은 뜻 모를 말씀을 하셨다.
213
하시는 것이었다. 집에 와서 부모님의 말씀을 듣잡고 비로소 내가 없는 동안에 고 선생의 손녀, 즉 원명의 딸과 나와 약혼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부모님은 번을 갈아서 약혼이 되던 경로를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은 이러하였다.
214
하루는 고 선생이 집에 찾아오셔서 아버지를 보시고 요새는 아들도 없고 고적할 터이니 선생의 사랑에 오셔서 담화나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아버지께서 고 선생 댁 사랑에를 가셨더니 고 선생은 아버지께 내가 어려서 자라던 일을 물으셨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어려서 공부를 열심히 하던 일, 해주에 과거보러 갔다가 비관하고 돌아오던 일, 상서를 보고는 제 상이 좋지 못하였다고 낙심하던 일, 상이 좋지 못하니 마음이나 좋은 사람이 된다고 동학에 들어가 도를 닦던 일, 이웃 동네에 사는 강씨와 이씨는 조상의 뼈를 파는 죽은 양반이지마는 저는 마음을 닦고 몸으로 행하여 산 양반이 되겠다던 일 등을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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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어머님의 말씀은, 내가 어렸을 때 강령에서 살 적에 칼을 가지고 그 집 식구를 모두 찔러 죽인다고 신풍 이 생원 집에 갔다가 칼을 빼앗기고 매만 맞고 돌아왔다는 것, 돈 스무 냥을 허리에 두르고 떡을 사먹으러 가다가 아버지께 되게 매를 맞은 것, 푸른 물감을 온통 꺼내다가 개천에 풀어놓은 것을 보고 어머니가 단단히 때려주셨다는 것 같은 것 등이었다.
216
이랬더니 하루는 고 선생이 아버지께, 나와 고 선생의 장손녀와 혼인하면 어떠냐고 말을 내시고, 아버지께서는 문벌로 보나, 덕행으로 보나, 또 내 외모로 보나 어찌 감히 선생의 가문을 욕되게 하랴 하여 사양하셨다. 그런즉 고 선생은 아버지를 보시고 내가 못생긴 것을 한탄 말라고, 창수는 범의 상이니 장차 범의 냄새를 피우고 범의 소리를 내어 천하를 놀라게 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리하여서 내 약혼이 된 것이었다.
217
나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고 선생께서 나 같은 것을 그처럼 촉망하셔서 사랑하시는 손녀를 허하심에 대하여 큰 책임을 감당키 어렵게 생각하였다. 더구나 선생께서,
218
"나도 맏아들 부처가 다 죽었으니 앞으로는 창수에게 의탁하려오."
220
"내가 청계동에 와서 청년을 많이 대하여보았으나 창수만한 남아는 없었소."
221
하셨다는 말씀을 듣자올 때에는 더욱 몸 둘 곳이 없었다. 그 규수로 보더라도 그 얼굴이나 마음이나 가졍교훈을 받은 점으로나 나는 만족하였다.
222
이 약혼에 대하여 부모님이 기뻐하심은 말할 것도 없었다. 외아들을 장가들인다는 것만도 기쁜 일이거늘, 하물며 이름 높은 학자요, 양반의 집과 혼인을 하게 된 것을 더욱 영광으로 생각하시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비록 없는 살림이라도 혼인 준비에 두 집이 다 바빴다.
223
아직 성례 전이지마는 고 선생 댁에서는 나를 사위로 보는 모양이어서, 혹시 선생 댁에서 저녁을 먹게 되면 그 처녀가 상을 들고 나오고, 6, 7세 되는 그의 어린 동생은 나를 아재라고까지 부르고 반가워하였다. 이를테면 내 장인 장모인 원명 부처의 장례도 내가 조력하여서 지냈다.
224
나는 선생께 이번 여행에서 본 바를 보고하였다. 두만강, 압록강 건너편의 땅이 비옥하고, 또 지세도 요새로 되어 있어 족히 동포를 이식하고 양병도 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곳 인심이 순후한 것이며, 또 서옥생의 아들과 결의(結義)형제가 되었다는 것 등을 낱낱이 아뢰었다.
225
때는 마침 김홍집 일파가 일본의 후원으로 우리나라 정권을 잡아서 신장정이라는 법령을 발하여 급진적으로 모든 제도를 개혁하던 무렵으로서, 그 새 법의 하나로 나온 것이 단발령이었다. 대군주 폐하라고 부르는 상감께서 먼저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으시고는 관리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깎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 단발령이 팔도에 내렸으나 백성들이 응종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서울을 비롯하여 감영, 병영 같은 큰 도회지에서는 목목이 군사가 지켜져서 행인을 막 붙잡고 상투를 잘랐다. 이것을 늑삭(억지로 깎는다는 뜻)이라 하여 늑삭을 당한 사람은 큰일이나 난 것처럼 통곡을 하였다. 이 단발령은 크게 민원을 일으켜서 어떤 선비는 도끼를 메고,
226
"이 목을 자를지언정 이 머리는 깎지 못하리라"
227
하는 뜻으로 상소를 올렸다. '차라리 지하에 목 없는 귀신이 될지언정, 살아서 머리 깎은 사람은 아니 되리라'는 글이 마치 격서 모양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파하여서 민심을 선동하였다.
228
이처럼 단발을 싫어하고 반대하는 이유가 다만 유교의 '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孝之始也:내 온몸을 부모로부터 받았으니 감히 이를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에서 나온 것만이 아니요, 이것은 일본이 시키는 것이라는 반감에서 온 것이었다.
229
군대와 경찰관은 이미 단발이 끝나고 문관도 공리에 이르기까지 실시하는 중이었다.
230
나는 고 선생께 안 진사와 상의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진언하였다. 이를테면 단발 반대의 의병이었고, 단발 반대를 곧 일본 배척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231
회의는 열렸으나 안 진사의 뜻은 우리와 달랐다. 이길 가망이 없는 일을 일으킨다면 실패할 것밖에 없으니 천주교나 믿고 있다가 시기를 보아서 일어나자는 것이 안 진사의 의사였다. 그는 머리를 깎이게 된다면 깎아도 좋다고까지 말하였다.
232
안 진사의 말에 고 선생은 두말하지 않고,
234
하고 자리를 차고 일어나 나갔다. 끊는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선비가 절교를 선언하는 말이다.
235
이 광경을 보고 나도 안 진사에 대하여 섭섭한 마음이 났다. 안 진사 같은 인격으로서, 되었거나 못 되었거나 제 나라에서 일어난 동학은 목숨을 내어놓고 토벌까지 하면서 서양 오랑캐의 천주학을 한다는 것은 괴이한 일이거니와, 그는 그렇다 하더라도 목을 잘릴지언정 머리를 깎지 못하겠다는 생각은커녕 단발할 생각까지 가졌다는 것은 대의에 어긋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236
안 진사의 태도에 실망한 고 선생과 나는 얼른 내 혼인이나 하고 청계동을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나는 금주 서옥생의 아들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237
그런데 천만 염외에 불행한 일이 또 하나 생겼다. 어느 날 아침 일찍이 고 선생이 나를 찾아오셔서 대단히 낙심한 얼굴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
238
"어제 내가 사랑에 앉았노라니 웬 김가라는 자가 찾아와서 '당신이 고 아무개요?' 하기로 그렇다 한즉, 그 자가 내 앞에 다가와 칼을 내어놓으며 하는 말이, '들으니 당신이 손녀를 김창수에게 허혼을 하였다 하니, 그러면 첩으로 준다면 모르되 정실로는 아니 되리다. 김창수는 벌써 내 딸과 약혼한 지가 오래요.' 그러기로 나는, '김창수가 정혼한 데가 없는 줄 알고 내 손녀를 허한 것이지, 만일 약혼한 데가 있다면야 그러할 리가 있는가. 내가 김창수를 만나서 해결할 터이니 돌아가라'고 해서 돌려보내기는 했으나 내 집안에서는 모두 큰 소동이 났네."
239
나는 이 말을 듣고 모든 일이 재미없이 된 줄을 알았다. 그래서 선생께 뚝 잘라 이렇게 여쭈었다.
240
"제가 선생님을 사모하옵기는 높으신 가르침을 받잡고지 함이옵지 손서가 되는 것이 본의는 아니오니 혼인하고 못 하는 것에 무슨 큰 상관이 있사오리까. 저는 혼인은 단념하고 사제의 의리로만 평생에 선생님을 받들겠습니다."
241
내 말을 듣고 고 선생은 눈물을 흘리시고, 나를 얻어 손서를 삼으려다가 이 괴변이 났다는 것을 자탄하시고, 끝으로,
242
"그렇다면 혼인 일사는 갱무거론일세. 그런데 지금 관리의 단발이 끝나고는 백성에게도 단발을 실시할 모양이니 시급히 피신하여 단발화를 면하게. 나는 단발화가 미치면 죽기로 작정했네."
244
나는 마음을 지어먹고 고 선생의 손녀와 혼인을 아니 하여도 좋다고 장담은 하였으나 내심으로는 여간 섭섭하지 아니하였다. 나는 그 처녀를 깊이 사랑하고 정이 들었던 것이었다.
245
이 혼사에 훼사를 놓은 김가라는 사람은 함경도 정평에 본적을 둔 김치경이다. 10여 년 전에 아버지께서 술집에서 그를 만나 술을 같이 자시다가 김에게 8, 9세 되는 딸이 있단 말을 들으시고 취담으로, "내 아들과 혼사하자"하여 서로 언약을 하고, 그 후에 아버지는 그 언약을 지키셔서 내 사주도 보내시고 또 그 계집애를 가끔 우리 집에 데려다 두기도 하셨는데, 서당 동무들이 '함지박장수 사위'라고 나를 놀리는 것도 싫었고, 또 한 번은 얼음판에 핑구를 돌리고 있는데 그 계집애가 따라와서 제게도 핑구를 하나 만들어달라고 나를 조르는 것이 싫고 미워서,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떼를 써서 그 애를 제 집으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그러나 약혼을 깨뜨린 것은 아니었다.
246
그 후 여러 해를 지내어서 갑오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아들딸을 혼인이나 시켜야 한다고 어린 것들까지도 부랴부랴 성례를 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그때 동학 접주로 동분서주하던 내가 하루는 여행을 하고 돌아오니 집에서는 그 여자와 나와 성례를 한다고 술과 떡을 마련하고 모든 혼구를 다 차려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사코 싫다고 버티어서 마침내 김치경도 도리어 무방하게 생각하여 아주 이 혼인은 파혼이 되고, 김은 그 딸을 돈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정혼까지 한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고씨 집에 장가든다는 소문을 듣고 김은 돈이라도 좀 얻어먹을 양으로 고 선생 댁에 와서 야료를 한 것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크게 분노하여 김치경을 찾아가서 김과 한바탕 싸우셨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서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이리하여 내 혼인 문제는 불행한 끝을 맺고, 고 선생도 청계동에 더 계실 뜻이 없어 해주 비동의 고향으로 돌아가시고, 나는 금주 서씨의 집으로 가느라고 역시 청계동을 떠났다. 이리하여서 내 방랑의 길은 다시 계속되었다.
247
평양 감영에 다다르니 관찰사 이하로 관리 전부가 벌써 단발을 하였고, 이제는 길목을 막고 행인을 막 붙들어서 상투를 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머리를 아니 깎이려고 슬몃슬몃 평양을 빠져나와 촌으로 산읍으로 피난을 가고, 백성이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찼다. 이것을 보고 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하여서라도 왜의 손에 노는 이 나쁜 정부를 들어 엎어야 한다고 주먹을 불끈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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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 병영에 도착하니 게시판에 단발을 정지하라는 영이 붙어있었다. 임금은 개혁파가 싫어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하시고, 수구파들은 러시아 세력에 등을 대고 총리대신 김홍집을 때려죽이고, 개혁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려놓은 것이었다. 이로부터 우리나라에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다툼이 시작되고, 친아파와 친일파의 갈등이 벌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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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성 정국의 변동으로 심기가 일전하였다. 구태여 외국으로 갈 것이 무엇이냐, 삼남에서는 곳곳에 의병이 일어난다고 하니 본국에 머물러 시세를 관망하여서 새로 거취를 정하기로 하고, 길을 돌려 용강을 거쳐서 안악으로 가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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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치하포 나룻배에 올랐다. 때는 병신년 2월 하순이라, 대동강 하류인 이 물길에는 얼음산이 수없이 흘러내렸다. 남녀 15, 6명을 태운 우리 나룻배는 얼음산에 싸여서 행동의 자유를 잃고 진남포 아래까지 밀려 내려갔다가 조수를 따라서 다시 상류로 오르락내리락하게 되었다. 선객은 말할 것도 없고 선부들까지도 이제는 죽었다고 울고불고하였다. 해마다 이 때 이 길목에서는 이런 참변이 생기는 일이 많았는데, 우리가 지금 그것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배에는 양식이 없으니 비록 파선하기를 면하더라도 사람들이 얼어 죽거나 굶어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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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나귀 한 마리가 있으니 이 모양으로 여러 날이 가게 될 경우에는 잔인하나마 잡아먹기로 하고, 한갓 울고만 있어도 쓸데없으니 선객들도 선부들과 함께 힘을 써보자고 내가 발론하였다. 여럿이 힘을 합하여서 얼음산을 떠밀어 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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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몸을 날려 성큼 얼음산에 뛰어 올라서 형세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큰 산을 의지하여 작은 산을 떠밀고, 이러한 방법을 반복하여서 간신히 한 줄기 살 길을 찾았다. 이리하여 치하포에서 5리쯤 떨어진 강 언덕에 내리니, 강 건너 서쪽 산에 지는 달이 아직 빛을 남기고 있었다. 찬바람 속에 밤길을 걸어서 치하포 배 주인 집에 드니 풍랑으로 뱃길이 막혀서 묵는 손님이 삼간방에 가득히 누워서 코를 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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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도 그 틈에 끼어 막 잠이 들려 할 즈음에 벌써 먼저 들었던 사람들이 일어나서 오늘 일기가 좋으니 새벽물에 배를 건너게 해달라고 야단들이다. 이윽고 아랫방에서부터 벌써 밥상이 들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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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할 수 없이 일어나 앉아서 내 상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방 안을 휘 둘러보았다. 가운뎃방에 단발한 사람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가 어떤 행객과 인사하는 것을 들으니 그의 성은 정씨요, 장연에 산다고 한다. 장연에서는 일찍 단발령이 실시되어서 민간인들도 머리를 깎은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 말씨가 장연 사투리가 아니요, 서울말이었다. 조선말이 썩 능숙하지마는 내 눈에는 분명 왜놈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의 흰 두루마기 밑으로 군도집이 보였다. 어디로 가느냐 한즉 그는 진남포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보통으로 장사나 공업을 하는 일인 같으면 이렇게 변복, 변성명을 할 까닭이 없으니 이는 필시 국모를 죽인 삼포오루(三浦梧樓:미우라 고로) 놈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그의 일당일 것이요, 설사 이도 저도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국가와 민족에 독균이 되기는 분명한 일이니,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하나의 수치를 씻어보리라고 나는 결심하였다. 그리고 나는 내 힘과 환경을 헤아려 보았다. 삼간방 40여명 손님 중에 그놈의 패가 몇이나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열일고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총각 하나가 그의 곁에서 수종을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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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궁리하였다. 저놈은 둘이요, 또 칼이 있고, 나는 혼자요, 또 적수공권이다. 게다가 내가 저놈에게 손을 대면 필시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달려들어 말릴 것이요, 사람들이 나를 붙잡고 있는 틈을 타서 저놈의 칼은 필시 내 목에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망설일 때에 내 가슴은 울렁거리고 심신이 혼란하여 진정할 수가 없어서 심히 고민하였다. 그때에 문득 고 선생의 교훈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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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수반지부족기 현애철수장부아(得樹攀枝不足奇 懸崖撤手丈夫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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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글이 생각났다. 벼랑을 잡은 손을 탁 놓아라. 그것이 대장부다. 나는 가슴속에 한 줄기 광명이 비침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문자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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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려서부터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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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보았거든 할 것이요, 일의 성불성을 교계하고 망설이는 것은 몸을 좋아하고 이름을 좋아하는 자의 일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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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는 의를 위하는 자요, 몸이나 이름을 위하는 자가 아니다."
264
이렇게 자문자답하고 나니 내 마음의 바다에 바람은 자고 물결은 고요하여 모든 계교가 저절로 솟아올랐다. 나는 40명 객과 수백 명 동민을 눈에 안 보이는 줄로 꽁꽁 동여 수족을 못 놀리게 하여놓고, 다음에는 저 왜놈에게 티끌만한 의심도 일으키지 말아서 안심하고 있게 하여 놓고, 나 한 사람만이 자유자재로 연극을 할 방법을 취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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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손님들이 자던 입에 새벽 밥상을 받아 아직 삼분지 일도 밥을 먹기 전에 그보다 나중 상을 받은 나는 네댓 술에 한 그릇 밥을 다 먹고 일어나서 주인을 불러 내가 오늘 해 전으로 700리 길을 걸어야 하겠으니, 밥 일곱 상을 더 차려오라고 하였다. 37, 8세 됨직한 골격이 준수한 주인은 내 말에 대답은 아니 하고 방 안에 있는 다른 손님들을 둘러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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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이 불쌍하다. 미친놈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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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목침을 베고 한편에 드러누워서 방 안의 무리와 그 왜놈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어떤 유식한 듯한 청년은 주인의 말을 받아 나를 미친놈이라고 하고, 또 어떤 담뱃대를 붙여 문 노인은 그 젊은 사람을 책하는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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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말을 함부로 말게. 지금인들 이인(異人)이 없으란 법이 있겠나. 이러한 말세에 이인이 나는 법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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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그 젊은 사람도 노인의 눈을 따라 나를 흘끗 보더니 입을 삐죽하고 비웃는 어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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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이 없을 리야 없겠죠마는, 아 저 사람 생긴 꼴을 보세요. 무슨 이인이 저렇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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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내게 들려라 하고 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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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왜는 별로 내게 주목하는 기색도 없이 식사를 필하고는 밖으로 나가 문설주에 몸을 기대고 서서 방 안을 들여다보면서 총각이 연가(밥값) 회계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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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때가 왔다 하고 서서히 일어나 '이놈!' 소리를 치면서 발길로 그 왜놈의 복장을 차니 그는 한 길이나 거진 되는 계하에 나가떨어졌다. 나는 나는 듯이 쫓아 내려가 그놈의 모가지를 밟았다. 삼간 방문 네 짝이 일제히 열리며 그리로 사람들의 모가지가 쑥쑥 내밀어졌다. 나는 몰려나오는 무리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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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이 왜놈을 위하여 감히 내게 범접하는 놈은 모조리 죽일 테니 그리 알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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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발에 채이고 눌렸던 왜놈이 몸을 빼쳐서 칼을 빼어 번쩍거리며 내게로 덤비었다. 나는 내 면상에 떨어지는 그의 칼날을 피하면서 발길을 들어 그의 옆구리를 차서 거꾸러뜨리고 칼을 잡은 손목을 힘껏 밟은즉 칼이 저절로 언 땅에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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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칼을 들어 왜놈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를 쳤다. 2월 추운 새벽이라 빙판이 진 땅 위에 피가 샘솟듯 흘렀다. 나는 손으로 그 피를 움켜 마시고, 또 왜의 피를 내 낯에 바르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검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면서, 아까 왜놈을 위하여 내게 범하려던 놈이 누구냐 하고 호령하였다. 미처 도망하지 못한 행객들은 모조리 방바닥에 넙적 엎드려, 어떤 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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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님, 살려주십시오. 나는 그놈이 왜놈인 줄 모르고 예사 사람으로 알고 말리려고 나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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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저께 바다에서 장군님과 함께 고생하던 사람입니다. 왜놈과 같이 온 사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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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모두 겁이 나서 벌벌 떨고 있는 사람들 중에 아까 나를 미친놈이라고 비웃던 청년을 책망하던 노인만이 가슴을 떡 내밀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283
"장군님, 아직 지각없는 젊은 것들이니 용서하십시오."
285
이 때에 주인 이 선달 화보가 감히 방 안에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문 밖에 꿇어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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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이 눈깔만 있고 눈동자가 없사와 누구신 줄을 몰라뵈옵고 장군님을 멸시하였사오니 죽어도 한이 없사옵니다. 그러하오나 그 왜놈과는 아무 관계도 없삽고, 다만 밥을 팔아먹은 죄밖에 없사옵니다. 아까 장군님을 능욕한 죄로 그저 죽여줍소서."
287
하고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내가 주인에게 그 왜가 누구냐고 물어서 얻은 바에 의하면, 그 왜는 황주에서 조선 배 하나를 얻어 타고 진남포로 가는 길이라 했다. 나는 주인에게 명하여 그 배의 선원을 부르고 배에 있는 그 왜의 소지품을 조속히 들이라 하였다. 이윽고 선원들이 그 왜의 물건을 가지고 와서 저희들은 다만 선가를 받고 그 왜를 태운 죄밖에 없으니 살려달라고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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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지품에 의하여 조사한즉 그 왜는 육군 중위 토전양량(土田讓亮:쓰치다 조스케)이란 자요, 엽전 600냥이 짐에 들어있었다. 나는 그 돈에서 선인들의 선가를 떼어주고, 나머지는 이 동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라고 분부하였다. 주인 이 선달이 곧 동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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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의 처치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분부하였다. 왜놈은 다만 우리나라와 국민의 원수가 될 뿐만 아니라 물속에 있는 어별들에게도 원수인즉, 이 왜의 시체를 강에 넣어 고기들로 하여금 나라의 원수의 살을 먹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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