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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척전 (崔陟傳) ◈
해설   본문  
1621년 (광해13)
趙緯韓 (조위한)
1
최척전 (崔陟傳)
 
 
2
전라도 남원땅에 한 소년이 있었으니 이름은 최척이요, 자는 백승이라 했다. 최척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서문 밖 만복사 동쪽에서 아버지와 외로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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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척은 나이가 어렸지만 생각이 깊고 마음은 한없이 착했으며, 벗과 사귀기를 좋아하였다. 소년의 아버지는 일찍부터 이런 충고를 했다.
 
4
"네가 공부를 즐겨하지 않는다면 커서 무뢰한 밖에 더 되겠느냐. 도대체 너는 어떤 인물을 본받고자 하느냐. 지금 한창 난리가 일어나 고을마다 장정을 널리 뽑고 있다는 걸 너도 들어 알게다. 그런데 너는 오직 놀기에만 힘쓰니 어찌 이 늙은 애비를 기쁘게 할 수 있겠느냐. 이 책을 마련해 줄 터인즉 선비를 찾아가 배우도록 하려므나. 비록 과거 급제하여 명성을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전쟁터에는 끌려가지 않을 것이다. 저 성남에 정상사란 선비가 있다. 그와는 소시적부터 친구여서 잘 아는 사이다. 그는 면학에 힘써 문장이 능하니 초학자를 가르침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네가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도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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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척은 당일로 정상사를 찾아갔다. 그는 간곡히 가르침을 청했다. 그래서 정상사는 끝내 거절을 못하고 문하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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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공부를 시작한지도 몇 달이 지났다. 이미 학문은 크게 진전을 보았다. 동네 사람들은 소년의 총명함을 칭찬해 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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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척이 글을 배울때면 한 소녀가 숨어 들어 글 읽는 소리를 몰래 엿듣곤 했다. 나이는 열 일고여덟쯤 됐을까. 새카만 윤기어린 머리를 가진 그림같이 아름다운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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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이었다. 정상사가 식사를 하느라고 글방을 비워 최척 혼자서 글을 읽고 있었다. 갑자기 창 틈으로 조그만 쪽지가 들어왔다. 최척은 이상히 여겨 그것을 주워서 펴보았다. 그 쪽지에는 시경(詩經)에 있는 '표유매(標有梅)'의 마지막 장이 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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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글을 읽자 마음이 마냥 들떴다.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 언제 밤이 오려나 몹시 기다려졌다. 그러다가 공부하는 사람이 쓸데없는 일에 관심을 갖아서는 안된다고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그럴수록 마음이 달아 올랐다. 최척은 공부를 다하고 글방을 나섰다. 문밖에 지켜 서 있던 푸른 옷을 입은 계집아이가 뒤를 따라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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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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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최척은 계집아이를 보자 쪽지 생각이 났다. 그가 집으로 가는 길에 자세히 물으니, 계집아이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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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낭자의 시녀인 춘생이라 하옵니다. 낭자께서 저를 보내시며 낭군님에게 청하여 화답의 시를 받아 가지고 오라고 하시었사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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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척은 이 계집아이가 의심쩍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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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정가의 사람이 아니냐? 어째서 이 낭자라고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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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낭자께서는 서울 숭례문(崇禮門) 밖 청파동(靑坡洞)에서 살고 있었어요. 아버지이신 이경신(李景新) 어른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 심씨(沈氏) 홀로 딸을 데리고 살고 있답니다. 이름은 옥영(玉英)이라 하옵는데 오늘 낮 창 너머로 시를 던져준 사람이 바로 저의 낭자이옵니다. 지난 해, 난리를 피해, 강화(江華)에서 배를 타고 나주로 피난 나왔습니다. 올 가을에 거기서 다시 여기 정씨 댁으로 옮겨왔답니다. 그것은 한 과년한 딸을 두었기 때문이랍니다. 표형(表兄) 되시는 정상사에게 혼사를 부탁하기 위해서였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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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척은 아버지를 뵙고 청혼을 해보도록 간청했다. 아버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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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화족(華族)이니까 반드시 부자가 아니면 혼인하러 들지 않을 것이다. 우리 집은 빈한해서 응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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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척은 몸이 달아 재삼 아버지를 졸라댔다. 마침내 아버지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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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굳이 원한다면 내 한번 청혼을 해보긴 하겠다만 성패는 하늘에 달렸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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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이었다. 최공은 정상사를 찾아갔다. 아들의 혼사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정상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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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표매(表妹)가 와 있긴 있다네. 서울에서 난을 피해 내 집에 와 있네. 그 딸은 재색과 행실이 아주 뛰어나 내가 신랑감을 널리 구하고 있는 중일세. 자네 아들의 재주가 뛰어나고 또한 준수하니 신랑감으로는 적합하다고 생각되나. 집안이 가난한 것이 한일세 그려. 그러나 한번 누이와 상의해 가부간에 알려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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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공이 돌아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최척은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정상사는 최공을 보낸 다음 안으로 들어가 심씨(沈氏)와 상의했다. 그녀는 단호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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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집을 버리고 피난을 나와 외롭고 위태로워도 의탁할 곳이 없잖아요, 다만 딸 하나밖에 없으니 부잣집으로 출가시키기를 원해요. 가난한 집의 아들은 비록 그 마음이 아무리 어질다 하더라도 원치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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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이었다. 옥영은 어머니와 함께 잠자리에 들어 최척의 말을 할까 망설이며 눈치를 살폈다. 옥영이 눈물을 흘리니 어머니가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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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나 나를 실망시키지 않도록 하려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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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옥영이 이 말을 듣고 얼굴은 붉혔으나,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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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사위감을 고르시는데 부잣집만 바라고 있으니,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님의 그 뜻은 저인들 어찌 모르겠어요. 부잣집인데다 사위감이 어질다면 오죽이나 좋겠어요. 그러나 생활은 부유하더라도 남편이 변변치 못하다면, 그 넉넉한 살림을 관리하기가 어려울 것이 아니옵니다. 저는 집안이 무자라 하더라도 남편될 사람이 어질지 못하다 하오면 그런 집으로는 시집을 가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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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게 무슨 당돌한 소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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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돌한 말이 아니옵고 제 의견을 말했을 뿐이어요. 제가 알기로는 최척이라는 사람이 아저씨 댁에 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품이 충후하고 성실하여 단연코 경박한 탕자는 아닌가 합니다. 그런 분을 남편으로 섬긴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어요. 더구나 가난한 것은 선비로서 떳떳한 길이 아니옵니까? 저는 원래부터 불의의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되는 것은 원치 아니합니다. 부디 그 댁으로 혼사를 정해 주시어요. 이런 말은 처녀로서 드릴 말씀이 아닌 줄 아니다만, 혼자는 일생에 있어 가장 중대한 일이옵기에 감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씀드리옵니다. 만일에 일생을 그르친다면 어찌할 것이옵니까. 이것은 깨진 병을 다시 원상대로 할 수 없으며, 물들인 실을 다시 희게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옵니다. 제 아무리 가슴 아파한들 또한 후회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옵니다. 더구나 이 몸은 남의 집에 얹혀 있사오며, 거기다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쟎았어요. 그리고 적병이 정말 충실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장모를 잘 받들어 모시겠어요?"
 
30
심씨는 딸의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31
이튿날, 심씨는 정상사와 마주앉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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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난 밤 동안 곰곰 생각해 보았어요. 최랑은 비록 가난하지만 훌륭한 선비인 것 같아요. 부귀는 하늘에 달린 것,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출가시키기 보단, 차라리 잘 아는 최랑으로 사위를 삼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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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가 그렇게 원한다면 내 반드시 성사시켜 줌세. 최생은 가난하나 그 사람됨이 옥과 같네. 비록 서울 넓은 바닥에서 구한다 하더라도 그만한 사람은 드물걸세. 앞으로 뜻을 이루어 학업이 대성한담녀 우물안의 개구리는 되지 않을것이니 안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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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로 매파를 보냈다. 사주를 써 약혼했다. 내친 걸음에 9월 보름날로 혼인날까지 받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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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보다도 당사자들이 크게 기뻐했다. 혼인날이 어서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마음을 태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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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동안의 세월이 흘렀다. 남원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의병장은 참봉을 지냈던 변사정이었다. 이 의병들이 영남으로 진격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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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척은 활을 잘 쏠 뿐만 아니라 말 타는 재주가 비상하다 하여 의병으로 뽑혔다. 최척은 진중에서 고민하다 못해 병이 들었다. 결혼날은 하루하루 다가왔다. 그는 의병장에게 찾아가 휴가를 신청했다. 의병장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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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가 어느 때라고 감히 결혼한다고 휴가를 달라는고. 상감께서도 몽진하셔서 풀밭, 진흙 속에서 갖은 고생을 다하고 계셔, 신자된 도리로서 마땅히 칼을 들어 적을 무찔러야 함이 옳은 일이 아닌고. 하물며 너는 아직도 장가 들 나이가 아니쟎느냐. 왜적을 격파하고 난 후에 장가 들어도 늦지 않을 것이니, 앞으로는 내색도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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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엄하게 책망하며 끝내 허락해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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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척은 종군한 뒤로 혼인날이 박두해도 돌아오지 않았다. 옥영은 혼인날을 헛되이 보냈다. 그녀는 하루하루 수심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41
옥영의 이웃에 양성을 가진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 자는 옥영의 아름다운 미모며 착한 마음씨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약혼자인 최척이 출정하여 돌아오지 않음을 틈타 구혼을 했다. 몰래 보화를 정가로 들여 보냈고 매파를 충동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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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생이라는 자는 빈곤하기 그지없나이다. 날이면 날마다 때 걱정을 하니 부친 봉양하기에도 어렵습니다. 항상 남한테서 쌀을 빌어 오는 처지라 합니다. 그런 처지에 아내를 얻는담녀 그 어려움이란 이루 헤아릴수 없을것이요, 더구나 최생이란 자는 전장에 나가 동아오지 않으니 그 생사를 알 수 없지 않은가요. 그런데 비해 양씨는 원래부터 한다 하는 부자가 아닌가요. 그의 아들 또한 어질어 최생만 못잖으니, 아주 금슬 좋은 부부가 될것이 뻔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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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파는 성가시게 보챘다.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격으로 심씨는 마음이 소롯이 기울어졌다. 그리하여 끝내 승낙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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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날짜도 열흘 앞세워 정하기까지 하였다. 옥영은 이를 알았다. 그날밤, 옥영이는 어머니와 마주하자 단연코 반대하여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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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랑이 오지 못한 것은 그 몸이 의병장에게 매인 때문이어요. 고의로 약속을 저버린 것이 아니온데, 최랑을 기다리지도 아니하고 스스로 파혼하는 불의를 저는 원하지 않사옵니다. 만약 딸의 뜻을 꺾고자 한다면 저는 당장 죽어버리겠어요. 어머니마저 이 마음을 몰라주는데, 어찌 하늘인들 알아 줄리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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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찌 제 고집만 부리느냐. 응당 남의 딸이 되었으면 부모의 처분만 기다려야 할 것이 아니냐. 감히 어느 앞이라고 시집가는 것까지 간섭을 하려 드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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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심씨는 딸을 몹시 책망했다.
 
48
밤이 깊었다. 심씨는 잠결에 이상한 숨소리를 들었다. 놀라 깨어났다. 옆에 누워 자던 딸이 없엇다. 당황하여 급히 찾아나섰다. 옥영은 창 밑에 쓰러져 있었다. 수건으로 목을 졸라 맨 것이었다. 이미 손발은 싸늘하게 식었고, 가느다란 숨소리만 가쁘게 들렸다. 이것마저 점점 희미해 지더니 뚝 끊어지고 말았다.
 
49
심씨는 통곡했다. 부랴부랴 목을 맨 수건을 풀었다. 손길은 마냥 떨렸다. 이때 춘생이 깨어나서 불을 밝혔다. 그녀도 주저앉아 통곡했다.
 
50
급히 서둘러 물 몇 모금을 입을 벌리고 흘려 넣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가느다란 숨결이 되살아났다. 온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너나 없이 달려와 구완했다.
 
51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심씨는 양가와의 혼사 문제는 입에 담지도 않았다. 발 없는 소문이 널리 퍼져 나갔다. 최공의 귀에도 이 사실이 들려 왔다. 그는 그 사실을 아들에게 알렸다.
 
52
그 무렵, 최척은 병으로 몸져 누워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서신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병세는 다급해졌다. 의병장도 이를 알고 최척을 불렀다. 곧 귀가 조치를 취해 주었다.
 
53
최척이 집으로 돌아온지도 수일이 지났다. 그렇게 위독하던 병세도 씻은 듯이 나았다.
 
54
마침내 그날, 섣달 초사흘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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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척은 정상사의 집으로 가서 옥영과 혼례를 치렀다. 두사람의 기쁨이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56
최척은 아내와 장모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에 들어서기도 전이었다. 친척들이 몰려와 신부의 아름다움을 칭송해 마지 않았다. 이웃 사람들도 어진 아내를 데려왔다고 부러워들 했다.
 
57
옥영은 시집온 지 3일도 채 안되서 시집 일을 열심히 했다. 베틀에 올라 베를 짰고 들로 나가 김을 맸다. 그녀는 지성으로 시아버지를 공경했고 남편을 정성스레 섬겼다. 웃 사람들을 공손히 받들었고 아랫사람들에게는 극히 자상했다. 그녀는 인정과 사랑을 골고루 베풀었다. 원근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양홍의 아내며 포선의 며느리도 이보다는 못했을 것이라고들 했다.
 
58
최척은 옥영을 아내로 맞이한 후 부족함이 없었다. 그토록 원하던 사람과 혼인을 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살림도 나날이 넉넉해져 갔다. 이렇게 아기자기한 세월은 흘러갔다. 그러나 최척은 시간이 흐를수록 대를 이을 아들이 늘 걱정이 됐다. 생각다 못해 매달 초하루가 되면 부부 동반해서 만복사로 올라가 자식 하나 점지해 달라고 빌었다.
 
59
이듬해는 갑오년이었다. 이 해도 정초에 만복사로 올라가 불공을 지성으로 드렸다. 그날 밤이었다. 부인의 꿈속에 부처님이 나타나 말씀하셨다.
 
60
"나는 만복사의 부처로다. 내가 그대들의 지극한 정성에 크게 감동되었도다. 그래서 기남자를 점지해 줄 것인즉, 이후 부인의 몸에는 태기가 있을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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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 달로 부터 태기가 있었다. 만삭이 되어 순산하니 아들이었다. 등에는 손바닥만한 붉은 점이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몽석이라 지었다.
 
62
최척은 피리를 썩 잘 불었다. 그는 달 밝은 밤이나 꽃 피는 아침 나절에 피리를 불었다. 그가 피리를 불 때면 저무는 봄날하며 아름다운 밤으로 미풍이 간드러지게 살랑거렷고, 밝은달은 빛을 더해 현란하게 비쳤다. 바람에 나는 꽃잎은 옷에 나앉았고, 그윽한 향기가 코끝에 맴돌았다. 그러면 술독에서 빚어 놓은 술을 퍼, 잔 가득히 부어 마셨다. 취기가 한껏 돌면 책상에 기댄 채 피리를 불었다. 그 피리 소리는 간드러지게 울려 퍼져 멀리까지 번졌다. 옥영은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이윽고,
 
63
"첩은 오래 전부터 아녀자들이 시를 읊는 것을 못마땅해 했었어요. 그렇지만 이런 정경에 이르러선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요."
 
64
최척이,
 
65
"어디 부인이 한 수 읊어 보오."
 
66
하니 옥영이 칠언 절귀 한수를 읊었다.
 
67
王子吹簫月欲低 (왕자진이 피리부니 달도 내려와 들으려하는데)
68
會須共御靑鸞去 (타고 갈 푸른 난조 나는 것을 막아나 보세.)
69
碧天如海露凄凄 (푸른 하늘 바다 같고 하얀 이슬 차건만)
70
蓬萊炳霞路不迷 (봉래산 가는 길을 안개 속에서도 찾을 수 있네.)
 
71
최척은 이제까지 시를 지어 본 적이 없었다. 부인이 읊은 시를 듣고 크게 놀랐다. 너무나 감동해 시흥이 절로 솟았다. 화답의 시를 읊었다.
 
72
瑤臺繚緲曉雲紅 (요대는 아득한데 새벽 구름 붉었고)
73
餘鸞滿空山月落 (남은 소리 하늘에 가득하고 달은 떨어지네.)
74
吹傘澈簫曲未終 (불어대는 피리 소리 아직도 끝나지 않았건만)
75
一庭花影動香風 (한 떨기 꽃송이 향기로 바람을 일으키네.)
 
76
읊기를 마치자 옥영은 몹시 즐거워했다. 그러나 이런 즐거움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지레 짐작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77
"세상살이에는 불의의 변고가 많사옵니다. 좋은 일에는 반드시 마가 끼어들게 마련이옵고 헤어지고 만남이 무상한 것이오니, 어찌 마음이 슬퍼지지 않을 수 있겠어요."
 
78
최척은 부인의 눈물을 소매로 훔쳐주며 위로했다.
 
79
"굴신과 영허 천도의 상리요, 길흉과 회린은 인사의 당연함이라 하지 않소, 설혹 타고난 운명을 바꿀 수야 없다손 치더라도, 얽매여 살 필요가 어디 있겠소. 그러니 너무 슬퍼하거나 근심하지 마오. 옛 사람이 말하되 '길한 말만 하고 흉한 말은 하지 말라'는 속담이 있듯이 부질없는 마음을 써 이 즐거운 마음을 상하게 할 것까지야 없지 않소."
 
80
이로부터 부부의 사랑은 나날이 깊어갔다.
 
81
이들 부부는 지음이라고 자처하면서 하루도 떨어져 있는 일이 없었다.
 
82
정유년 8월이었다. 왜적이 남원 고을로 쳐들어와 성을 함락시켰다. 사람들은 뿔뿔히 흩어져 산 속으로 피난했다. 최척의 가족은 지리산 연곡 깊숙이 피난했다.
 
83
난리통이라 인심이 흉흉했다. 어디서 무슨 변을 당할 지 몰랐다. 최척은 옥영더러 남장을 하라고 일렀다. 남복을 입으니 아무도 여자인 줄 짐작 못했다. 산속으로 피난온 지 여러 날이 지났다. 이미 가져온 양식은 동이 났다. 가족이 굶주리게 되었다.
 
84
최척은 장정 서너 명과 작당하여 산 속을 벗어났다. 양식을 구하는 길에 적세를 살피면서 구례까지 갔었다. 그곳에서 갑자기 적병을 만났다. 그들은 몸을 신속히 날려 바위틈에 숨었다. 적병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왜적들은 곧장 지리산 연곡으로 쳐들어왔다. 적들은 피난나온 사람들을 남김없이 잡아 끌고 갔다. 최척은 길이 막혀 거동을 할 수 없었다. 사흘이 애타게 지나갔다.
 
85
그는 적병이 물러간 다음에 연곡으로 급히 달려갔다. 연곡은 이미 생지옥이었다. 처참했다. 시체는 산골짜기마다 내동댕이쳐져 있었고 유혈은 내를 이뤘다. 혈안이 되어 가족을 찾는 그 때였다. 숲 속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소리나는 곳으로 찾아갔다.
 
86
그곳에는 노약한 몇 사람이 온 몸에 상처를 입고 신음하고 있었다. 그 중 다소 성한 사람이 최척을 알아보고 눈물은 뚝뚝 흘리며 말했다.
 
87
「적병이 이곳으로 쳐들어 왔다네. 재화를 약탈하고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였고 젊은 여자들은 섬강으로 끌고 갔다네」
 
88
최척은 주먹을 불끈 쥐고 대성 통곡했다. 땅을 치며 피를 토했다. 이윽고 그는 섬강으로 달려갔다. 얼마 못가서 흩어진 시체 속에서 신음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 소리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가서 보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시뻘건 선지 피가 온 얼굴을 감싸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최척은 옷을 살펴보았다. 어딘가 낯이 익은 것만 같았다. 크게 소리쳐 불렀다.
 
89
「네가 혹 춘생이 아니냐」
 
90
춘생은 젖 먹던 힘까지 내어 눈을 떴다. 그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려졌다. 그녀는 기어든 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91
「오, 서방님 ! 아씨가 적병에 잡혀갔어요. 저 저도 붙잡혀 따라가다가 따라가지를 못하니 칼로 찔렀어요. 칼 맞은 지 한나절 만에야 겨우 사 살아났으나 등에 업힌 아기의 새 생사를 아 알…」
 
92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숨이 넘어갔다.
 
93
최척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발로는 땅을 치면서 통곡하다가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지나 정신이 들었다. 또 기운을 차려 섬강으로 달려갔다. 섬강으로 가보니 강둑에는 칼 맞은 시체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연곡으로 피난왔던 사람들이었다.
 
94
최척은 더 이상 기대를 걸 수 없었다. 그는 실성하여 통곡하며 시체 속을 누볐다. 그는 마침내 자살하려고 강가로 갔다. 막 물로 뛰어들려는 찰라 어떤 사람이 옷을 잡으며,
 
95
「이 난리통에 당신같은 이가 한사람뿐인가. 그럴수록 용기백배해야지」
 
96
하고 말리는 것이었다. 그래 죽지도 못하고 가족을 찾아 강둑을 사흘이나 밤낮으로 찾아 헤맸으나 허사였다. 그는 기진맥진해서 옛 집으로 돌아갔다. 집은 적화에 다 타 버렸다. 무너진 담장과 깨진 기왓장만이 흩어져 있었다.
 
97
한 곳엔 피난가지 못하고 적병에게 붙들려 죽은 사람의 뼈가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발을 옮겨 놓을만한 틈새가 없었다. 최척은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금료밑을 헤매고 다녔다. 마침내는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어느 날이었다. 홀연히 명장이 수십 기를 이끌고 성에서 나왔다. 금교 밑에서 말을 씻고 있었다. 최척은 의병방으로 진중에 있을 때 명나라 병사를 응접하여 수작을 오랫동안 했었다. 그래서 명나라 말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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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척은 집도 불타 버렸고 가족마저 잃어버려 몸 하나 의탁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명장을 붙들고 명나라로 들어가 살겠다고 애원했다. 명장은 그의 말을 듣자 측은히 여겼고 그 뜻을 동정하여 말했다.
 
100
「나는 오종병의 천총 여유문이요. 내 집은 절강 요흥부에 있는데 비록 가난하지만 먹고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소.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끼리 서로 만나 마음껏 즐기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 하오. 내 좁은 소견에만 매달려 뜻에 맞는 사람의 청을 어찌 들어주지 않으리요」
 
101
그리고는 말 한 필을 내주었다. 그리고 진중에 함께 유하도록 했다. 최척은 용모가 준수했다. 헤아리고 생각함이 또한 깊었다.
 
102
그리고 궁마가 능술할 뿐만 아니라 문장도 넉넉했다. 그래서 여공이 지극히 생각해 주었다. 식사도 같이 했고 잠자리에도 함께 들었다. 왜적이 어느 정도 평정되자 오총병은 군사를 이끌고 철수했다. 여공은 최척을 데리고 함께 환국했다. 그는 오총병을 떠나 고향인 요흥부로 가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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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척의 마을에 왜적이 습격했을 때 최공과 심씨는 늙고 병들어 멀리 피난갈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적병을 피해 산골짜기에 숨어 있었다. 적병이 물러가자 골짜기를 나왔다. 이 마을 저 마을로 걸식하며 다녔다. 그러다가 연곡사에 발길이 닿았다.
 
104
그때 승방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째지게 났다. 심씨가 최공을 보면서 말했다.
 
105
「누구의 아이인지는 모르나 꼭 손자의 울음소리와 같군요」
 
106
그래서 최공이 문을 열고 살펴 보았다. 틀림없는 몽석이었다. 달려들어가 어루만지며 얼렀다. 얼마쯤 아기를 돌아보다 옆에 있는 스님에게,
 
107
「이 아이를 어디서 어떻게 데려왔습니다.」
 
108
하고 물었다.
 
109
혜정 이란 스님이 대답했다.
 
110
「소승이 쌓여 있는 시체 속에서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몹시 불쌍하게 여겨 데려왔소이다. 지금 아기의 부모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옵니다.」
 
111
최공은,
 
112
「정말 부처님의 힘이 아니었다면 이 아이가 어찌 살아났겠소」
 
113
하고 극구 사례했다. 그 날로 최공은 손자를 데리고 불타버린 집으로 돌아왔다.
 
114
타다 남은 집을 수리해 겨우 비바람을 피하며 살았다.
 
115
옥영은 왜놈에게 붙잡혀 왜국으로 끌려갔다. 왜병중에 늙은 병사가 있었다. 비록 글은 배우지 못했지만 부처님을 믿어 그 마음은 자비로왔다. 그는 장사를 생업으로 했다. 그리고 배타기를 익혔다. 그래서 왜장 소서행장이 선주로 삼아 조선으로 나오게 되었다.
 
116
이 늙은 왜인은 옥영을 아껴 주었다. 부인을 집으로 데려가 좋은 옷과 맛잇는 음식을 하어 환심을 사려고 했다. 그렇게 하면 도망치지 않으려니 여겼다. 옥영은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려는 직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배를 내어 도망치려 했으나 감시가 심해 들키곤 했다.
 
117
어느날 밤이었다. 옥영은 웅크리고 있다가 선잠이 들었다. 꿈결에 부처님이 나타나,
 
118
"나는 만복사의 부처로다. 부인이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반드시 후일이 있을 것이다."
 
119
하고 계시해 주었다. 옥영은 깨어나 그 꿈을 곰곰히 생각했다. 부처님을 굳게 믿어 후일이 있을 것을 기약하고는 자살하려던 뜻을 굽혔다.
 
120
이 왜인의 집에는 늙은 딸이 하나 있을 뿐 아들이 없었다. 늙은 왜인은 옥영을 집에만 있게 했고 바깥 출입을 못하게 했다. 그래서 옥영은 말했다.
 
121
"저는 몸이 작은데다 약골이라 병이 잦습니다. 본국에 있을때도 장정으로 안 뽑혀 출전도 못했습니다. 단지 바느질과 밥짓는 것만 배워 다른 일은 전혀 할 수 없습니다."
 
122
그러자 왜인은 더욱 가상히 여겼다. 아들같이 사랑했다.
 
123
이 왜인은 언제나 배를 타고 다니며 장사를 했다. 장사를 나서면 옥영을 배 안에 두고 밥을 짓게 했다. 왜인은 중국 남월과 절강사이를 왕래하며 장사했다.
 
124
그때쯤이었다. 최척은 요흥부에 여공과 함께 형제지의를 맺고 있었다. 여공은 매부를 삼으려고 했다.
 
125
그러나 최척은 굳이 사양했다.
 
126
"나는 집을 적화에 잃고 또한 노부며 약처하며 자식의 생사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껏 발상이나 복상도 못하고 있는 처지에 어찌 마음을 놓고 아내를 얻어 평안한 생활을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127
한마디로 뚝 잘라 거절했다. 이후 여공은 두 번 다시 권유하지 않았다.
 
128
그해 겨울이었다. 여공은 마침내 병들어 죽고 말았다. 최척은 더 이상 의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처없이 방랑의 길로 들어섰다. 각지의 명승 고적을 찾아다녔다. 소상강, 동정호, 악양루, 고소대 등을 돌아보며 시를 지어 읊었다. 그는 어느새 이렇게 세상을 떠돌아 다니며 한 세상을 보내겠다는 뜻을 굳혔다.
 
129
그러다가 해섬도사 왕용이라는 사람이 청성산에 은거하며 황금연단을 복용하여, 백일만에 승천하는 도술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장차 촉 땅으로 들어가 그 도사를 찾아서 배우기를 청하리라 마음 먹었다.
 
130
그때였다. 다행이도 송우란 사람을 만났다. 그의 집은 향주 용금문 안에 있었고, 경사에는 일가견을 가졌지만 공병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그는 저서로 생업을 삼았다. 또한 남을 도와 주기를 좋아하는 성미였다. 최척은 이 사람과 사귀어 지기가 되었다.
 
131
송공은 최척이 촉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 술을 마련해서 찾아왔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얼근히 취한 후였다. 송공이 최척에게 말했다.
 
132
"이 난세에 백일승천하는 도술을 누구인들 원치 않으리요. 그러한 이치는 고금을 통하여 없을 뿐만 아니라, 여생이 얼마나 남았다고 그런 마음을 다 먹소. 복식하기 위하여 굶주림을 참고 스스로 고생을 사서 할 필요까지야 뭐 있소. 그래 산귀와 더불어 벗하려고 그러는가? 최공은 그러지 말고 나를 따라 배를 타세. 오월로 다니면서 비단이나 팔고 차나 팔면서 남은 여생을 보낸다면, 이 또한 달인의 업이 아니겠는가?"
 
133
최척은 듣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래서 송공을 따라 항주로 갔다.
 
134
그 해는 경자년 봄이었다. 최척은 송공과 함께 상선을 타고 안남을 왕래했다.
 
135
이 항구에는 왜선 10여 척이 열흘 전부터 정박하고 있었다. 때는 4월이라 모두들 노곤하여 곯아 떨어졌다.
 
136
하늘은 구름 한점없이 맑게 개었다. 물빛은 비단같이 아름다웠고, 바람이 자 물결은 잔잔했다. 물결 소리조차 조금도 들려오지 않았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도 잠이 들어 코고는 소리만 높은데, 이따금 물새 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137
그때 왜선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매우 구성지게 들려왔다. 최척은 홀로 선창에 기댄 채 신세 타령을 했다. 모든 것을 잊으려는 듯 품속에서 퉁소를 꺼내어 계면조 한 곡을 불면서 가슴속에 맺힌 애원한 정을 풀고 있었다.
 
138
이 피리 소리에 하늘마저 근심스런 빛을 띤듯했고, 구름과 연기조차 침울하기 그지 없었다. 배 안에서 잠을 자던 사람들도 놀라 깨어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슬픈 낯빛을 지었다. 피리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때 왜선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갑자기 멎었다. 염불소리 대신에 조선어로 칠언 절귀를 한 수 읊는 소리가 들렸다. 읊기를 다하자 한숨을 휴 내쉬는 것이였다.
 
139
최척은 이 시 읊는 소리를 듣고 너무도 뜻밖이여서 들었던 퉁소마저 떨어뜨렸다. 넋을 잃은 듯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송공이 이상히 여겨 큰소리로 물었다.
 
140
"자네는 어째서 그런 모양을 하고 있는가?"
 
141
하고 거듭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142
연해 큰 소리로 묻자 최척은 그 자리에 쓰러지며 기절해 버렸다. 얼마가 지나 겨우 정신을 차린 그는 말했다.
 
143
"저 시는 내 아내가 지은 시오, 둘만이 알지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오, 더욱이 시 읊는 소리가 아내와 흡사하니 어찌 놀라지 않겠소. 아내가 저 배를 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아니 도저히 그럴리 없지."
 
144
그리고는 왜적의 습격을 당하여 가족들이 흩어진 내력을 들려 주었다. 사람들은 놀라며 이상히 여겼다.
 
145
그 속에 두홍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나이가 젊고 용감한 반면에 좀 덤벙대는 선비였다. 그는 최척의 말을 듣자 의기를 나타내 주먹으로 뱃전을 쳤다.
 
146
"내가 당장 가서 찾아보겠소."
 
147
그러나 송공이 만류하며,
 
148
"깊은 밤에 일을 꾸몄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두려우이. 내일 아침에 정중히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오."
 
149
하니, 모두들 찬성했다.
 
150
그날 밤 최척은 잠 한숨 자지 못했다. 아침을 기다리며 뜬 눈으로 날을 밝혔다. 이윽고 동쪽 하늘이 밝아왔다. 그는 조금도 지체할 수 없어 배에서 내려왔다. 곧장 언덕으로 내려가 왜선으로 다가갔다.
 
151
"어젯밤 시를 읊은 사람은 틀림없이 조선인일거요. 나도 조선인이오. 이 머나먼 안남까지 와서 고국 사람을 한번 만나보는 것도 이 또한 기쁜일이 아니겠습니까?"
 
152
옥영은 배 안에서 퉁소 소리를 들었었다. 그것은 곧 조선의 곡조요, 또한 옛날에 귀에 익었던 소리였다. 그래서 남편이 그 배에 와 있지 않나 해서 시를 시험삼아 읊었던 것이었다.
 
153
이때 남편이 자기를 찾는 말을 듣자, 옥영을 황망하여 몸둘 바를 몰랐다.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급히 난간을 내려갔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고, 소리치면서 끌어안고 흐느껴 울었다. 너무나 감격해 가슴이 막혔다. 심정이 격하여 말도 제대로 않나왔다. 이윽고 정신을 차렸다.
 
154
이 극적인 광경을 보느라고 양국의 뱃사람들이 담장처럼 늘어섰다.
 
155
그들은 처음에 친척이나 친구인 줄로만 알다가 급기야 부부지간이란 것을 알고는 서로 쳐다보며 큰 소리로,
 
156
"이상하고도 기이하도다. 이것은 하늘이 돕고 귀신이 도왔도다. 일찍이 이런 일은 보지 못했는데 정말 기쁜 일이로다."
 
157
하며 경탄을 않은 사람이 없엇다.
 
158
최척은 집안 소식을 물었다.
 
159
"그 때 저희들은 산중에서 도망하여 강가로 나왔어요. 시아버님과 어머님은 그때까지 무사했어요. 날은 저물고 창황 중에 배를 타느라고 그만 서로 헤어지고 말았어요."
 
160
두 사람은 또 한번 통곡했다. 이 정경을 지켜보는 사람들마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송공이 왜인을 청하여 백금 세 덩이를 주며 옥영이를 사겠다고 나섰다. 왜인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161
"내가 이 사람을 얻은 지 4년이나 흘렀습니다. 그 단정한 거동을 사랑하여 친자식같이 사랑했고, 침식도 함께하며 잠시도 서로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껏 부인인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이제 이런 해후를 보고 하늘과 귀신마저 감동하거늘, 내 비록 완고하고 미련하나 어찌 복석과 같으리요. 어찌 값을 받을수가 있겠소이까."
 
162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열냥의 은자를꺼내어 옥영에게 주며 말했다.
 
163
"4년 동안이나 동거하다가 하루 아침에 이별하게 되니 슬픈 심정을 참을수 없구려. 잃었던 남편을 만리 바다 밖에서 다시 만난 것은 이 세상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오. 내가 욕심을 낸다면 하늘이 벌할 것이오. 부인은 남편에게 돌아가 부디 몸조심하고 행복하게 사시오."
 
164
"주인 영감님의 도움을 입어 다행이 죽지 않고 살아서 남편을 만났으니, 그 베푼 은혜가 이미 깊사옵니다. 더우기 이렇게 많은 돈까지 주시니 어떻게 보답할 길을 모르겠사옵니다."
 
165
옥영은 왜인의 손을 잡고 치사했다. 최척도 왜인에게 극구 사례했다.
 
166
그는 옥영을 데리고 배로 돌아왔다. 이웃 배에서 모두들 찾아와 채단과 금은을 주며 축하했다. 최척과 옥영은 그 사례를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송공은 최척의 부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집 한칸을 마련해 주었다. 그들 부부로 하여금 평안히 살게 했다.
 
167
최척은 난 중에 잃었던 아내를 찾아 한시름 놓았다. 그러나 만리 타국이라 의탁할 곳이 없었으며, 사방을 돌아봐도 친척하나 없었다. 더욱이 늙은 아버지와 어린 자식의 생사를 생각하여 밤낮으로 상심했다. 근심 걱정이 끊어질 날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기만 기원했다.
 
168
항주에 있는 옥영은 판군이 호병에게 전멸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니 남편은 전쟁터에서 횡사헀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밤낮으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죽기를 기양하고 물 한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169
어느 날이었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어루만지며,
 
170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지어다.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후에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로다."
 
171
하고 일깨워 주었다. 잠에서 깨어난 옥영은 몽석을 붙잡고 말했다.
 
172
"내가 포로가 되어 끌려갈 때 물에 빠져 죽으려 하였는데 남원 만복사의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셨다. 그 후 4년 만에 네 아버지를 안남 바다 가운데서 만나지 않았느냐. 이제 내가 죽기로 마음 먹었는데, 또 그 부처님이 나타나셔서 일깨워 주는구나. 이러니 아무래도 네 아버님은 적의 칼을 피했음이 분명하다. 만약 네 아버님이 살아 계시다면, 내 죽어도 오히려 산 것과 다를 바 없으니, 무엇을 원망하리."
 
173
몽석은 어머니를 위로하여 말했다.
 
174
"요새 듣자니, 오랑캐들이 명군은 죽었으나 조선 사람들은 탈출했다고 해요. 아버지는 조선 사람이니 틀림없이 도망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부처님의 꿈이 참으로 영험합니다. 그러하오니 어머님은 부디 살아 계셔 아버님 돌아오시기를 기다리소서."
 
175
그러자 옥영은 기운을 차리고 말했다.
 
176
"오랑캐의 소굴이 조선과 인접해 있지 않느냐. 네 아버님이 도망쳤다면, 그 형세를 보아 조선 땅으로 달아났을 것이다. 어찌 만릿길을 건너와 처자를 찾을수 있겠느냐. 나는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다 죽는 한이 있어도 돌아가겠다. 창주로 가다가 국경이나 넘어서 죽는다면, 선영에 묻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면 이역 만리 헤매는 귀신은 면할 수 있지 않겠느냐? 월조는 남쪽에 집을 짓고 호마는 북쪽을 향해 운다 하니, 이제 죽을 날을 앞두고 고향이 그리워지는구나."
 
177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자의하소서."
 
178
몽석은 이렇게 위로했다. 옥영이 말을 이었다.
 
179
"외로운 시아버님, 어머님이며, 어린 아들을 모두 잃고 그 생사조차 알지 못하니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구나. 요새 상인들의 말을 들으니, 왜적이 잡아간 조선 사람을 본국으로 내려보낸다더구나. 이 말이 사실이라면 어찌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않았겠느냐. 네 조부와 부친이 비록 이역 땅에서 죽어 백골이 비 바람에 굴러 다니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선을 누가 돌보겠느냐. 원근 친척들이 난리에 다 죽었다한들, 어찌 한 사람도 살아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 고국으로 돌아가자꾸나."
 
180
"네? 고국으로 돌아가다니요?"
 
181
"그렇다. 너는 배를 사서 준비해라. 여기서 조선까지는 수로로 수천리나 되지만 순풍에 돛만 달면 한달이 못되어 고국 바닷가에 닿을 것이다. 이미 내 마음은 결정됐다."
 
182
이에 몽석은 울며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183
"어머님, 어찌하여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닿기만 한다면야 그 얼마나 다행이겠어요. 그렇다고 만리 창파 험한 바다를 작은 배로는 건널 수 없어요. 풍파하며 교룡과 상어의 습격을 예측할 수 없나이다. 더구나 해적들이 도처에서 때지어 출몰하니 어복에 장사지내기 십상입니다. 어찌하여 생사도 확실히 모르는 아버님만을 생각하셔서 이런 결정을 내리셨어요. 자식이 비록 어리석으나 큰 일을 앞두고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84
홍도가 옆에서 남편의 말을 막으며, 말했다.
 
185
"너무 어머님을 탓하지 마셔요. 어머님의 마음은 이미 결정됐어요. 비록 수화나 해적을 만난다 하더라도 능히 면할 수 있을 거예요."
 
186
하고 옥영은 며느리의 말을 듣고 나서 말했다.
 
187
"수로는 예측하기 어려우나 내 일찍이 많은 경험을 얻었다. 일본에 잡혀 있을 때다. 장사하는 주인을 따라 봄이면 민경 지방에서, 가을에는유구로 다니며 배를 탔다. 산 같은 파도 속에서도 헤어났고 조수의 흐름도 알 수 있다. 선박의 안위며 풍파, 험난도 내가 다 해낼 것이다. 아무리 불행한 일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어찌 벗어날 방편이 없겠느냐."
 
188
이어서 조선 옷과 일본 옷을 만들었다. 며느리로 하여금 양국의 언어를 배우도록 했다. 그리고 몽석에게 주의하기를,
 
189
"배는 오로지 돛대와 노에 달려있으니 견고하게 만들어라. 그리고 지남철은 없어서 안되는 것이니 꼭 마련하도록 해라. 떠날 날은 정해졌으니, 내 뜻을 어기지 말아라."
 
190
했다.
 
191
몽석은 어머니 앞을 물러나오자 아내를 책망했다.
 
192
"어머님은 여생을 돌보지 않고 만번 죽을 곳으로만 가시려고 하시니... 돌아가신 아버님은 그만이거니와, 살아있는 어머님 마저 어느 땅에 묻고 싶어서 찬성하는거요? 어찌 생각이 그리도 깊지 못하오."
 
193
"어머님은 지성으로 계획하신 것입니다. 말로만 다툴 수는 없는 것 아니어요. 이제 만류한다 하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될까봐 찬성했어요. 순순히 따라 나서는 것이 좋아요. 제 근심스런 심정이야 오죽 하겠어요."
 
194
수일 후였다. 옥영 일행은 배를 띄워 조선을 향해 떠났다. 며칠을 가다가 산같은 파도를 만나 한 무인도에 표착하게 되었다. 이 무인도에 해적이 나타나 금은 보화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옥영이 나서서 중국말로,
 
195
"우리는 명나라 사람인데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왔다가 풍파를 만나 이 지경이 되었으니 무슨 보화를 가졌겠읍니까?"
 
196
하면서 살려 달라고 간청했다. 해적들도 사정을 살피다가 다만 배만 빼앗아 저희 배 뒤에 달고 사라졌다.
 
197
해적들이 사라지자 옥영은 눈물을 거두면서 말했다.
 
198
"필시 저 놈들은 해랑적이 분명하다. 내가 알기로는, 저 놈들은 중국과 조선 사이를 출몰하면서 약탈만 할 뿐 죽이지를 않는다는구나. 내가 아들의 말을 듣지 않고 무모하게 나왔다가, 하늘이 돕지 않아 끝내 이런 낭패를 당했구나. 배마저 잃었으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199
"어머님 이럴 때 일수록 용기를 가지셔야 합니다."
 
200
"저 넓은 바다를 날아갈 수도 없고 뗏목으로 갈 수도 없었으나, 아들과 며느리가 나 대문에 죽게 되었으니 이것이 한이로다."
 
201
옥영은 이렇게 말하면서 며느리를 붙잡고 통곡했다. 그 울음이 어찌나 처절했던지 바위 언덕을 떨치고 굽이치는 물결에 닿으니, 바다도 슬퍼하고 귀신도 신음하는 것 같았다. 옥영은 절벽으로 올라가 바다로 몸을 던지려 했다. 이때 아들과 며느리가 붙들어 뜻을 이루지 못하자, 몽석에게 말했다.
 
202
"너희가 나를 죽지 못하게 하니 어느 때를 기다리느냐? 양식도 사흘 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 양식이 떨어지기를 기다린단 말이냐. 그럴 바에야 일찌감치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
 
203
"양식이 떨어진 뒤에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사는 데까지 살아 봅시다. 그 새 어떤 도움이 생길지 알 수 있나요?"
 
204
몽석은 어머님을 부축하여 바위산을 내려왔다. 바위 틈에서 웅크리고 잤다. 날이 밝았다. 옥영이 며느리에게 말했다.
 
205
"내가 기운이 빠지고 정신이 없어 잠시 조는 사이였다. 부처님이 또 나타나 전과 같이 일러 주시니 정말 이상하구나."
 
206
세 사람은 함께 염불을 외며 기원했다.
 
207
"부처님, 대자비하신 부처님! 저희를 돌보아 주시옵소서. 저희를 보살펴 주옵소서!"
 
208
기원했다.
 
209
이틀이 지났다. 저 먼 수평선에서 한 돛단배가 다가오고 있었다. 몽석이 놀라며, 옥영이 보고 말했다.
 
210
"저런 배는 아직 본 적이 없으니 걱정이 됩니다."
 
211
"어디? 우리는 이제 살았구나. 저 배는 조선 배가 틀림없다."
 
212
모두 한복으로 급히 갈아 입었다. 언덕으로 올라가 옷을 벗어 흔들었다. 배가 가까이 다가와 닻을 내렸다. 뱃사람이 나서며,
 
213
"당신들 어떤 사람들이오? 이 고도에 살고 있소?"
 
214
하고 큰소리로 물었다. 옥영이 조선말로 대답했다.
 
215
"우리는 본래 한양의 사족이었어요. 나주로 내려가다가 졸지에 풍파를 만나 배가 전복되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고 우리만 정신을 차려 부서진 판자 조각을 타고 여기까지 표류해 왔습니다."
 
216
뱃사람은 듣고 불쌍히 여겼다. 밧줄을 내려 배에다 태워주며,
 
217
"이 배는 통제사의 무역선이오. 갈 길이 정해져 한양으로는 갈 수 없소."
 
218
했다. 마침내 순천에 이르러 정박했다. 세 사람을 뭍으로 내리게 했다.
 
219
때는 경신년이였다. 옥영은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지름길을 따라 대엿새 만에 남원에 이르렀다. 마을이 왜적에게 불타 없어졌으니 많이 변화했으리라 짐작이 들었다. 옛 집을 찾아보려고 만복사를 찾아 나섰다. 금교에 이르러 성곽을 바라보니 옛날이나 다름이 없었다.
 
220
옥영은 아들을 돌아보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221
"저 집이 바로 너의 아버님의 옛 집이란다. 지금은 누가 들어가 살고 있는지 모르나, 찾아가 하룻밤 신세지면서 자세히 물어보자꾸나."
 
222
어느듯 옛 집에 당도했다. 최척은 버드나무 밑에서 사람들과 담소하고 있는 중이었다. 옥영이 그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바로 남편이었다. 보자 며느리가 일시에 달려들며 울음이 터졌다. 한바탕 울음 바다가 되었다. 최척도 곧 알아보고 대성 통곡하며 말했다.
 
223
"몽석 어멈이 살아오다니.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224
몽석은 이 말을 듣자 달려나와 얼굴도 모르는 어머님을 끌어안고 흐느꼈다. 온 가족이 상봉하는 그 광경은 가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서로 붙들고 늘어지며 방으로 들어갔다. 심씨는 밤이 깊어 정신이 없다가 딸이 살아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기절했다. 옥영이 끌어안고 갖은 정성을 다하니 얼마 후에 깨어났다. 최척은 진공을 불러,
 
225
"오늘에야 온 가족이 상봉을 하는구려."
 
226
하면서 홍도를 불러 인사시켰다. 죽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상봉했으니, 고금 천하에 다시 이와 같이 신기하고 극적인 일이 있을수 없었다.
 
227
이 소문은 일시에 사방으로 퍼졌다. 구경군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더구나 험난을 뚤고 나온 옥영과 홍도의 자초 지종을 듣고는 무릎을 치며 찬탄해 마지 않았다. 다투어 가며 그런 이야기를 이웃과 이웃으로 전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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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영이 남편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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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이 오늘이 있게 된 것은 오로지 부처님의 음덕이옵니다. 이제 와서 보니, 만복사가 황폐해지고 부처도 파괴되어 없어져서 의지하고 불공을 드릴 곳 조차 없습니다. 우리가 어찌 그냥 앉아만 있으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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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음식을 갖추어 폐사로 올라갔다. 주위를 깨끗이 하고 지성껏 제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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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최척과 옥영은 위로는 부모를 받들고 아래로는 자녀를 돌보면서, 남원부 동쪽에 있는 옛 집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원문】최척전 (崔陟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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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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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위한(趙緯韓) [저자]
 
  1621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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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1년 (광해군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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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3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