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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활동 ◇
해설   목차 (총 : 42권)     이전 23권 다음
1932년
염상섭
1
삼대(三代)
2
23. 활동
 
 
3
경애가 바커스에서 자정이나 되어 집에 돌아와 보니 병화는 조금 전에 갔다 하고 건넌방의 피혁군은 자는지 문을 첩첩이 닫고 감감하다.
 
4
"주무세요?"
 
5
하고 소리를 쳐보았으나 대답이 없었다.
 
6
혹시 병화와 길이 어긋나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그대로 들어와 자버렸다.
 
7
이튿날 이른 아침에 문도 안 열어놓아서 문을 흔드는 소리에 부엌에서 불을 지피고 있던 모친이 나가 보니 얌전한 처녀애가 보따리를 끼고 덮어 놓고 들어서면서,
 
8
"홍경애 씨 계시죠?"
 
9
하고 묻는다. 모친은 멀뚱히 치어다보다가,
 
10
"들어가 보우."
 
11
하고 문을 지치고 들어왔다.
 
12
"얘, 내다봐라."
 
13
모친이 안방에다 대고 소리를 칠 새도 없이 건넌방에서 먼저 덧문이 펄썩 열리더니 피혁군이 중대강이 같은 시퍼런 머리를 쑥 내밀며,
 
14
"새문 밖에서 오셨수? 이리 주슈."
 
15
하고 보따리를 냉큼 받으면서,
 
16
"춘데 애쓰셨소이다."
 
17
하며 인사를 한다.
 
18
그러나 처녀애는 아무 대답도 없이 머뭇머뭇하고 섰는 양이 주인을 좀 만나 보고 가려는 눈치다.
 
19
"얘, 그저 자니? 손님 왔다."
 
20
모친이 또 한번 소리를 치니까 그제야 머리맡 미닫이를 밀치고 경애가 잠이 어린 눈으로 내다본다.
 
21
"어디서 오셨소?"
 
22
경애는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묻다가,
 
23
"새문 밖에서... 저 김병화 씨께서..."
 
24
하고 필순이 어름어름하는 것을 듣고는 반색을 하면서,
 
25
"예, 예, 어서 들어오슈."
 
26
하고 부리나케 자리 속에서 나온다.
 
27
필순은 곧 가겠다지도 않고 옷 입는 동안을 지체하여 안방문을 열기를 기다려 들어왔다.
 
28
이 처녀는 병화의 부탁도 부탁이려니와 덕기의 편지를 본 후로 경애를 한번 보았으면 하는 호기심이 잔뜩 있던 터인데 이렇게 속히 만나게 될 줄은 의외이었다. 필순은 첫눈에 예쁜 얼굴이라고 생각한 외에 별로 깊은 인상은 갖지 못하였으나, 누구나 자고 난 얼굴이란 볼 수가 없겠건마는 이 여자는 갖추지 않은 얼굴이 그대로도 남의 눈을 끄는 데에 필순은 약간 친숙한 마음까지 일어났다. 방에 들어선 필순은, 방 치장이 으리으리하고 경애가 남자의 고의적삼 같기도 하고 청인의 옷 같기도 한 서양자리옷을 입은 양이, 눈서투르면서도 더 예뻐 보이는 데에 잠깐 일없이 섰었다. 그러나 자기 집 방 속을 머리에 그려보고는 너무나 동떨어진 데에 불쾌와 반감도 생기는 것을 깨달았다.
 
29
-하지만 카페 같은 데 가서 벌어서 이렇게 살면 무얼 하는 건구! 기생이나 다를 게 없지!
 
30
이런 생각을 하니 필순은 도리어 더러운 것 같고 경멸하는 마음이 생긴다. 경멸하는 마음이 생긴다느니보다도 애를 써 경멸하는 마음을 먹어서 자기를 위로하고 부러운 생각을 누르려 하였다.
 
31
"김 선생님, 잘 가 주무셨수?"
 
32
경애는 자기에게 병화 심부름을 온 줄 알고 물었다.
 
33
"예, 그런데 조선옷을 가지고 왔에요."
 
34
경애도 어떤 영문인지를 몰랐다.
 
35
"무슨 옷요? 어디 두었수?"
 
36
"건넌방에요..."
 
37
경애도 필순의 대답을 듣기 전에 그러려니- 하는 짐작은 있었던 것이다.
 
38
경애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 눈치더니, 발딱 일어나서 벽에 걸린 외투를 떼어 파자마(자리옷) 위에다 들쓰며,
 
39
"김 선생님 언제 오신대요?"
 
40
"이제 뒤미처 오실걸요."
 
41
경애가, 잠깐 앉았으라 하고 급히 방문을 열고 나가려니까 필순도 따라 일어서며,
 
42
"두루마기가 짜르면 내가 예서 고쳐드리고 갈 테니 잠깐 입어보시라고 하세요."
 
43
하고 소곤소곤 이른다.
 
44
"뉘 건데요?"
 
45
"집의 아버님 건데 짧을 듯하다세요. 대중을 봐서, 절더러 고쳐놓고 오라고 하셨으니까 짧건 가지고 오셔요."
 
46
경애는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 건넌방으로 건너갔다.
 
47
경애가 건넌방에 들어서며 눈을 크게 뜨고 깔깔 웃으니까,
 
48
"왜? 이상스러워?"
 
49
하고 피혁도 웃으며 빤빤한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다.
 
50
"아주 젊으셨는데. 다른 양반 같애요."
 
51
"그럴까?"
 
52
하고 머리맡 석경을 들어 본다.
 
53
"어디서 깎으셨에요?"
 
54
"수염은 여기서 밀어버렸지마는, 하는 수가 있나. 현저동으로 가서 큰애더러 이발기계를 빌려볼 수 있느냐고 하니까, 얼른 제 동무에게 가서 빌려 가지고 와서 제법 깎아 놓겠지."
 
55
"그 대신 이발료가 일금 일원이면 싼 셈이랄까 비싼 셈이랄까."
 
56
피혁은 픽 웃어버린다. 현저동이란 경애의 외삼촌 집 말이다.
 
57
"일원 아니라 십원이라도 싸지요. 뭇사람이 드나드는 이발소에 가서 별안간 발갛게 깎다가 운수가 사나우려면 그 중에 무에 있을지 누가 안다구... 그래 어젠 어떻게 됐에요?"
 
58
"응, 잘 되었어."
 
59
피혁은 간단히 이렇게만 대답을 하고 한참 무슨 생각을 하다가,
 
60
"거기서 우수리만 날 주고, 나머지는 그대로 저 사람이 달랄 때 내주우."
 
61
하고 이른다.
 
62
경애는 더 캐어 묻지도 않고 잠자코 듣고만 있다.
 
63
"이따, 언제든지 떠날 테니 안 들어오건 떠났나보다 하우. 어머니께는 집으로 내려간다고 할게니 그렇게 알아두고 잘 지내우. 언제 또 만날지 모르지마는 지금 같은 그런 생활은 어서 집어치우고 저 사람을 좀 도와주도록 하우. 감독을 한다든지 감시를 할 수야 없지마는 옆에서 내용 아는 사람이 바라보고 있으면 행동이나 금전에 대해서 한만히 못하게 될 것이요, 또 그런 사람한테 적당한 여성이 있어서 위안도 주고 격려도 해주면 용기가 나는 수도 있으니까, 말하자면 저 사람을 못 믿는 것은 아니나 반은 경애를 믿고 가는 것이오."
 
64
경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65
"그렇다고 둘이 너무 깊어져버려서 일이고 무어고 집어치워버리고 술이나 먹고 떠돌아다니면 큰일이야! 밖에서도 그런 소문은 빠르고 사실이라면 그 때는 참 정말 큰일이니까!"
 
66
피혁은 이런 부탁과 어르는 수작을 찬찬히 일렀다.
 
67
"에이 별걱정 다 하시는군! 그렇게 못 믿으실 지경이면야 어떻게 부탁을 하셨에요."
 
68
하고 경애는 핀잔을 주듯이 웃는다.
 
69
"그야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마는... 깊이 사귀어보지는 못했지마는, 아이 딴은 쓸 만하기에 부탁한 게 아닌가. 일이란 성패간에 한 번 믿으면 딱 맡겨버리는 것이니까. 하루 이틀 새에 다른 사람 같으면 경솔하달만큼 쓸어 맡기고 가나 그래도 모든 게 염려 안 된달 수야 있나."
 
70
피혁의 말도 무리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71
"아무려니 그까짓 돈 얼마에 타락할 사람도 아니요, 낸들 돈을 먹자면 먹을 데가 없어서 그까짓 것에 허욕이 동해서 일에 방해가 되게 할까요."
 
72
경애 말도 그럴듯하다고 피혁은 속으로 웃었다.
 
73
피혁의 말을 들으면 어제 병화와의 교섭이라는 것은 간단히 끝났던 모양이다.
 
74
피혁이란 이름도 물론 본성명은 아니지만 저기로 나가서 처음에 쓰던 이우삼이라는 이름을 듣자 병화도 그가 누구인 것을 알고 탁 믿는 것이었다. 이우삼이란 이름은 경찰의 '블랙 리스트'에는 물론이요 그동안 몇몇 사람 공판 때마다 재판소 기록에 오르내리던 이름이니만큼 바깥에 있는 사람 중에서는 한 모퉁이의 두목인 것은 사실이요, 따라서 여기 있는 동지간에도 본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이름만은 잘 아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런 관계로 병화는 절대 신임을 하고 앞질러서 무슨 일이든지 맡으마고 나선 것이었다. 피혁만 하여도 경계가 점점 심해 가는 판에 머뭇거리고 있을 형편이 못 되었다. 자기가 맡아 가지고 온 두 가지 일중에 한편 일은 쉽사리 끝나고, 이편 일이 이때껏 미루미루 끌려내려온 것이었다. 물론 속일 알고 보면 한 계통의 한 종류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요, 후일 일이 탄로가 되는 날이면 너도 그런 일을 맡았던? 나도 이런 일을 맡았었다고 저희끼리 놀랄지 모르지마는 지금은 설사 한자리에 자는 내외간일지라도 서로 각각 비밀히 일을 안기고 가려니까 피혁으로서는 힘이 몹시 드는 것이었다.
 
75
하여간 일이 이만큼 무사히 낙착되었으니까 피혁은 피혁대로 불이시각하고 들고 빼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는 피혁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였지마는, 병화의 의견대로 조선옷을 입고 떠나기로 하였다. 그래서 병화는 어젯밤으로 필순의 부친과 의논을 하고 그이의 단벌 출입건을 내놓게 하고 필순의 모친은 밤을 도와서 버선 한 켤레까지 짓게 하여 지금 필순을 시켜 주어 보낸 것이다.
 
76
필순의 부친의 키도 그리 작은 키는 아니나 그래도 두루마기가 작았다. 바지저고리는 그대로 입을 수 있어도 두루마기의 화장과 길이가 껑충한 것은 흉하였다. 흉하다기보다도 남에게 얻어 입은 것이 뻔하여 급히 변장한 것이 눈치 채어질까 보아 안 되었다.
 
77
피혁은 그래도 관계없다고 하였으나, 경애가 가지고 안방으로 건너왔다.
 
78
"시골 사람들은 정갱이에 올라오는 것도 입는데 길이야 괜찮겠지. 화장만 좀 늘였으면 좋겠는데 그대루 두우. 어머니께 고쳐 줍시사 하지."
 
79
경애는 필순에게 보이기만 하고 그대로 못에 걸려 하였으나 필순은 예서 펴 놓고 고치기가 어려우니 가지고 가서 고쳐 오마고 빼앗아서 싸려 한다. 싸겠다거니 말라거니 하며 실랑이를 하는 판에 병화가 후닥닥 뛰어들어온다.
 
80
전신의 신경을 달팽이의 촉각같이 예민하게 하고 앉았던 피혁은 병화의 기색이 좀 다른 것을 보고 병화의 입만 치어다보았다.
 
81
병화는 안방으로 경애를 따라 들어가서 잠깐 수군수군하더니 피혁을 불러들여 갔다. 또 조금 잇다가 경애가 나와서 아이 보는 년을 불러서 부엌 뒤로 끌고 나가더니 현저동 집에 가서 주인 아씨께 잠깐 오시라고 전갈을 해서 뒷문을 열어주어 내보냈다. 뒷문은 그전에 누렁물을 쓸 때에는 열어놓고 썼었지마는, 위에 병원이 서게 되자 우물은 병원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병원 담과 이 집 사이에 토시짝 같은 골짜기가 생긴 뒤부터는 이 뒷문을 열어본 적이 일년에 한두 번 청결 때나 있을까말까한 터이다. 그러나 경애가 이 집에 온 뒤에 꼭 한 번 이문을 긴하게 쓴 일이 있었다. 그것도 상훈과 헤어진 뒤에 한창 달떠 다닐 때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까만 옛날 일이다. 그 남자도 경애 앞에서 스러진 지 오래다. 하여간에 아이 보는 년은 생전 여는 것을 보지 못하던 이 문을 열어 주고 이리로 나가라는 데에 좀 이상한 듯이 주인 아씨의 얼굴을 치어다보았으나 하라는 대로 그리 나와서 전찻길로 빠져 염천교 다리로 향하여 꼬불꼬불 걸어갔다.
 
82
뒤미쳐서 피혁도 이 문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셋째로는 필순이, 가지고 온 것보다도 더 큰 보따리를 끼고 나갔다. 그 동안 10분, 5분씩 격을 두어서 20분밖에는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83
피혁은 병화가 서두르는 바람에 줄이느니 늘이느니 하던 두루마기를 급히 꿰고 병화가 옷과 함께 사보낸 고무신을 신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무슨 일이 있다면 다른 사람은 상관없으나 어린 계집애년의 눈에 띄어서는 큰일이다. 계집애년만 붙들어 가면 그린 듯이 보고 들은 대로 아뢰어 바칠 것이요, 또 만일 잠깐 이년을 치운다 해도 앞문으로 내보냈다가 동구에서 서성대고 있는 사람이 정말 형사일 지경이면,
 
84
"얘, 얘, 너의 집에 지금 누구누구 있던?"
 
85
하고 물어본다든지 하여 일은 단통 당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창졸지간에 생각난 것이 급한 대로 현저동에나 쫓아보내자는 것이었다.
 
86
피혁은 두루마기 위로 속적삼이 허옇게 나오는 두 팔을 귀에 찌르고 정처없이 나섰다. '그 돈의 우수리'라는 300원을 주머니에 넣었으니 가려면 어디든지 갈 것이나 동으로 가나 서로 가나 세상 사람의 눈은 모두 자기의 얼굴만 바라보는 것 같다.
 
87
경애와 병화는 300원을 떼내고 남은 2000원을 신문에 싸서 피혁이 벗어 놓은 양복 외투와 함께 단단히 뭉쳐서 급한 대로 필순을 주어서 '바커스'로 보내 놓고 모친더러는 뒤미처 또 현저동으로 쫓아가서 아이년을 거기 그대로, 붙들어 두라고 이르게 하였다. 아이년이 오다가 붙들려도 아니 될 것이요, 얼마 동안은 그 집에 보내 두는 수밖에 없었다.
 
88
모친은 어쩐 영문인지를 분명히는 몰랐으나, 외국에서 들어온 조카의 신상에 급한 일이 생긴 것인 줄만은 짐작 못하는 게 아니니까 하라는 대로 부리나케 옷을 갈아입고 나섰다. 나서면서도 병화와 젊은것들만 남겨 두고 가는 것은 마음에 꺼림칙하지 않은 거도 아니었다.
 
89
경애와 병화는 우선 한숨 돌리고 마주 앉았으나 모든 것이 애가 쓰이고 무간 족으로만 눈이 갔다.
 
90
그는 고사하고 돈과 피혁의 양복을 필순의 집으로 가지고 가세하였다가 거기서 위태할지 몰라서 바커스로 가서 기다리라고 집을 일러주기는 하였는데, 거기 역시 또 어떨지 겁이 난다.
 
91
경애는 이때까지 파자마에 외투를 입은 채 옷도 갈아입을 새가 없었다. 세수도 하기 싫었다. 그대로 병화와 마주 앉아서 담배만 빡빡 피우고 있다. 아무도 입을 벌리는 사람은 없으나 똑같은 불안과 그 불안을 어떻게 모면할까를 궁리하고 앉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에 어떻게 대답을 하겠다는 것을 공론하지 않아도 피차의 생각은 똑 같았다.
 
92
"제발 덕분에 무사히 넘어서야지 붙들리는 날이면 우리도 납작해지는 판이구려."
 
93
경애는 아직도 남의 일처럼 웃는다.
 
94
"하는 수 있나. 그건 고사하고 바커스에 어서 가보아야 할 텐데. 내가 나가다가는 뒤를 밟히지 않을까? 나두 뒷문으로나 빠져 나갈까."
 
95
하며 병화는 웃는다.
 
96
"큰일날 소리! 그랬다가는 정말 야단나게! 앞으로 버티고 나가다가 붙들리면 붙들리구 말면 말지 그야말로 하는 수 있나."
 
97
경애 말을 듣지 않아도 그렇기는 그렇다. 뒷문으로 새어나간 줄을 알기만 하면 의혹을 더 낼 것이니 달아난 사람도 곧 뒤쫓기게 될 것이다.
 
98
"그런데 정말 형사를 가지구 그러는지? 제 방귀에 놀라서 그러는 것은 아니오?"
 
99
"제 방귀에 어째요? 말버릇 얌전하다!"
 
100
병화는 커다랗게 탄하면서,
 
101
"궁금하거든 좀 나가보구려."
 
102
하고 핀잔을 준다.
 
103
경애는 발딱 일어나서 나간다. 반쯤 열린 문을 닫는 척하고 내다보니 문소리가 씩걱씩걱 나니까 고개를 이리로 휙 돌리더니 다시 외면을 하고 누구를 기다리는 것처럼 길 밖을 내다보고 섰다.
 
104
경애는 말만 듣던 것과 달라서 딱 마주보니 가슴이 뜨끔하다.
 
105
"있어, 있어! 어떡하면 좋아요?"
 
106
나갈 때까지와 들어와서가 다르다.
 
107
"왜, 보니까 겁이 나지!"
 
108
"겁은 무슨, 죄졌나! 당신이나 벌벌 떨지 마우."
 
109
피차에 이런 실없는 소리나 하여 목줄띠에 닥친 불안과 공포를 서로 위로하려 하였다.
 
110
"이로너라..."
 
111
잠깐 있으려니 밖에서 소리를 치며 꼭 지친 문을 밀치고 우중우중 들어오는 구둣소리가 난다. 경애와 병화는 가슴이 덜컥하는 한순간이 지니니까 숨이 저절로 돌아나오며 마음이 제대로 가라앉는다. 머리끝까지 화끈 솟아올랐던 피가 쭉 내려앉는 것 같다. 중문간에서 환도가 절그럭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나면서,
 
112
"주인 있소?"
 
113
하고 소리를 친다.
 
114
경애가 마루 끝으로 나섰다.
 
115
"호구조사요. 홍경애가 누구요?"
 
116
장부를 손에 펴든 순사가 마룻가에 와서 서며 집 안을 휙 돌려다본다.
 
117
"나예요."
 
118
"이소사는?"
 
119
순사는 장부를 다시 들여다보며 묻는다.
 
120
"우리 어머님이세요."
 
121
"정례는?"
 
122
"딸년예요."
 
123
"애 아버지는 없소?"
 
124
"없에요."
 
125
"어디 갔단 말요?"
 
126
"돌아갔에요."
 
127
"그래 세 식구뿐이란 말요?"
 
128
"예..."
 
129
순사는 장부를 접어 들고 또 한번 이리저리 휘휘 둘러보다가,
 
130
"이 구두는 뉘 거요?"
 
131
하고 축대에 놓인 허술한 구두를 가리킨다.
 
132
"손님의 것예요."
 
133
"방문을 좀 열어보슈."
 
134
경애는 깔깔 웃으면서,
 
135
"호구조사하는데 손님 선도 보세요?"
 
136
하고 안방 문을 열어젖뜨리니까 병화가 모자를 쓴 채 앉았다가 헤헤 웃어 보이며 일어나 나온다. 순사는 병화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면서,
 
137
"호구 조사는 유행병 때문에 하는 거니까요."
 
138
하고 변명을 하면서 건넌방을 열어보아도 좋으냐고 묻는다.
 
139
"아무도 없에요. 열어보세요."
 
140
순사는 건넌방 앞창을 열고 두리번두리번 자세히 본다. 그러나 거기에는 낡은 구식 이층장과 자리가 쌓여 있고, 반짇고리니 다듬잇돌이니 요강이니 하는 모친의 세간이 깨끗이 치워놓였을 뿐이다. 순사는 다시 부엌으로 가서 기웃하면서,
 
141
"어머니는 안 계시우?"
 
142
하고 묻는다.
 
143
"요 앞에 나가셨에요. 장안에 무어 사려구... 그런데 이 겨울에 유행감기도 전염병처럼 취체를 하나요?"
 
144
경애는 생글생글 웃으며 오름 박듯이 물었다.
 
145
"누가 압니까. 하라니까 할 뿐이지요. 그런데 댁에는 이외에 다른 식구는 없소? 부리는 아이년이구 행랑 사람이구?"
 
146
순사는 웬일인지 비로소 얼굴빛을 펴며 놓은 낯으로 묻는다.
 
147
"아무도 없에요."
 
148
"조용해 좋소그려. 방해되어 미안하우."
 
149
순사는 젊은 남녀만 있는 것을 빈정대듯이 이런 소리를 하고 싱긋하며 나가 버렸다.
 
150
병화의 뒤를 쫓던 그 형사가 앞 파출소의 순사를 들여보낸 모양이었다. 그것도 병화의 얼굴을 아는 형사가 이 근처를 아침저녁으로 순행을 하다가 어제 깊은 밤에 병화가 무심히 파출소 앞을 지나는 것을 보았는데 오늘도 이른 아침에 이 근처에서 눈에 띄니까 뒤를 밟아 온 것이다. 저희의 소굴이 이리로 옮겨 왔나? 혹은 병화의 집이 자기 관내로 떠나왔나 하여 다만 그런 단순한 의미로 쫓아본 것이었으나 문패도 똑똑히 붙이지 않고 국세조사 때에 붙인 쪽지에 이소사라고만 쓰인 것을 보고 한참 동정을 보다가 파출소로 가서 순사에게 물어보고는 대신 들여보낸 것이다. 아까 경애가 문간에 나가서 본 사람은 형사는 아니었다. 제 방귀에 놀란 사람은 실상 경애이었다.
 
151
경애와 병화도 그만 짐작을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정복 순사를 들여보낸 것을 보면 피혁을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닌 듯도 싶다. 만일 그렇다면 형사가 언제든지 달려들 것이 아닌가? 혹은 새벽녘에 자는 것을 에워싸고 들어와서 잡았을 것이다.
 
152
그러나 어쨌든 아슬아슬하였다. 이렇게 된 다음에는 어차피 경애도 주의 인물이 되기는 하였지마는, 그들이 둘의 연애관계로만 생각한다면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또 어느 때 정말 형사가 달려들지 피차에 내놓고 말은 안 하나 마음이 놓이지를 않아서 바늘방석에 앉았는 것 같다. 어쨌든 우선 병화라도 나가 보고 싶었다.
 
153
나중에 바커스에서 만나기로 하고 병화는 필순을 만나러 바커스로 갔다. 길을 돌아서 아무쪼록 호젓한 데로만 골라 갔다. 뒤에서 따르나 안 따르나를 보려는 것이었다.
 
154
결국 따르는 사람은 없었다. 도리어 이상하다는 불안을 느끼면서 앞에서 또 한 번 주의를 해보고 들어섰다.
 
155
우중충한 속에 덩그러니 혼자 앉았던 필순은 반기며 일어선다. 얼었다 녹은 얼굴이 발갛게 피었으나 난롯불은 이제야 반짝거린다.
 
156
"퍽 기다렸지?"
 
157
"응, 복장 입은 놈이 하나 다녀갔지만 상관없어. 어서 집으로 가지."
 
158
하고 병화는 필순을 재촉해 보내려다가,
 
159
"잠깐 가만 있어."
 
160
하고 양복을 훌훌 벗고 갈아입은 후에 보자기에는 자기 양복만 다시 싸서 준다.
 
161
"가다가 종로로 돌아서 아무 양복집에나 갖다두고 뜯어진 것을 말짱히 꿰매고 고쳐 노라고 해 주게. 조금 비싸더라도 그대로 맡겨 두고 가요. 영수증은 받고... 혹시 집에도 누가 와 있으면 안 될 거니까 어디 다녀오느냐거든 공장에 가다가 배가 아파 다시 왔다고 하든지 잘 말해요."
 
162
병화는 이렇게 이르고 뒤로 빠지는 문을 열어주었다.
 
163
피혁의 양복을 그대로 지기 방에 갖다두면 혹시 가택수색을 당할지 모르니까 아주 자기가 입어버린 것이요, 자기 양복도 필순이 가지고 돌아가다가 어찌 될지 몰라서 처치를 하고 가게 한 것이었다.
 
164
주인 방은 그저 잘 리도 없는데 여전히 조용하다.
 
165
남은 외투를 쌀 신문지를 한 장 얻으려고 소리를 쳐보아야 감감하다. 방문을 두드리다가 열려니까 주부는 그제야 밖에서 뒷문으로 들어온다. 손에는 반찬거리를 사들었다.
 
166
"웬일예요. 이렇게 일찍들..."
 
167
하고 주부는 인사를 하다가,
 
168
"그 색시는 갔습니다그려?"
 
169
하고 홀 안을 돌아다본다.
 
170
"내 누이라우. 양복을 이리 갖다놔두라고 했는데... 너무 일찍이 미안하외다. 한데 이거 좀 맡아두슈."
 
171
하고 외투를 들어서 주부에게 준다.
 
172
그 속에는 2000원을 10원짜리와 100원짜리로 섞어 싼 뭉치가 들어 있다.
 
173
주부는 받아들다가 주머니 속에 무엇이 묵직하고 처지는 것 같으니까,
 
174
"여기 무에 들었기에 이렇게 무거워요? 벤또바꼬?"
 
175
하고 웃는다.
 
176
"에, 벤또. 그대로 넣어두슈."
 
177
병화는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대꾸를 하여두고 물이 더워졌거든 술이나 좀 데워 달라고 청한다.
 
178
주부는 외투를 자기 방에 갖다가 걸어놓고 술부터 데울 자비를 한다.
 
179
외투도 여기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왕이면 어떤지를 분명히 몰라서 아직은 여기 앉아서 경애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180
두 시간이나 넘은 뒤에 경애가 겨우 왔다. 물론 별일은 없으나 모친이 돌아와서 아침을 차리고 나오느라고 그렇게 늦은 모양이다.
 
181
"오늘 일은 어떻게 그럭저럭 넘어갔다지마는 이젠 주의해요. 여기마저 발이 달려왔다가는 큰일이니까. 이젠 만날 것두 없구 좀 덜어져 지냅시다."
 
182
경애는 이런 소리를 하였다.
 
183
"그야 그렇지만 이젠 볼일 다 봤다는 말씀이시군? 무슨 말을 그렇게 야멸치게 하누? 하루 한 번씩이라도 안 만나고야 견디나."
 
184
병화는 비로소 바짝 죄었던 마음이 풀린 듯이 유쾌한 웃음을 터뜨려놓는다.
 
185
"만나서는 무얼 해요. 이젠 당신이 형사 같구 형사가 당신 같구..."하며 경애도 웃는다.
 
186
"유일한 동지요. 유일한..."
 
187
병화는 말끝을 끊고 또 웃어버린다.
 
188
"으응..."
 
189
하고 경애는 눈을 흘기다가 또 같이 웃어버렸다. 당면한 걱정이 덜리니까 새삼스러이 더 가까워진 것 같고 행복스러운 애욕이 부쩍 머리를 드는 것이었다. 경애도 내심으로는 마찬가지였다.
 
190
"어쨌든 이동 좌담회를 하루 두어 번씩만 열어봅시다."
 
191
병화의 발론이다.
 
192
"이동 좌담회구 뭐구 술두 이제 그만해요. 그이도 가면서 퍽 염려를 합디다."
 
193
"무어라구? 술 때문에?"
 
194
"술두 술이지마는 돈을 객쩍게 쓸 것도 걱정이요, 우리가 너무 친할까 보아서도 걱정이요..."
 
195
"허허허... 너무 친하면 어떻게 친한 건구?"
 
196
병화는 커다랗게 웃고 만다. 그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경애는 좀 알 수 없어서 한 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병화는 아직 세상에 물들지 않은 새파란 젊은 의기에 그까짓 돈 몇 천 원에 욕기가 난다든지 일에 비겁하기야 하랴--하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197
"참 그런데, 이때껏 잊어버린 게 있군."
 
198
병화도 무슨 생각을 하다가 별안간 눈을 번쩍이며 말을 꺼낸다.
 
199
"조군이 떠날 때 이 집 주인이 알아봐달라구 부탁하던 오정자라나 하는 일본 여자, 지금 감옥에 들어가 있다더군."
 
200
"그렇다나 봐요. 그런데 덕기한테서 그런 말은 왜 당신한테루 기별을 해 왔어요?"
 
201
"삼단논법으로 당신도 빨갱이가 되었을까 봐 애가 쓰인다구..."
 
202
하며 병화는 웃어버리다가,
 
203
"주인은 아마 빨갱인 모양이지?"
 
204
하고 묻는다.
 
205
"한 서너 잔 먹으면 발개질 때도 있지만 워낙 안 먹으니까 늘 하얗지."
 
206
경애는 웃지도 않고 시치미를 뗀다.
 
207
"어쨌든 이 집 주인이 주목을 받지는 않겠지?"
 
208
하고 다진다.
 
209
"아아니 왜?"
 
210
"주목을 받으면야 나두 올 수 없고 당시도 얼른 그만두어버리는 게 좋으니까 말이지. 당분간은 대근신을 해야지 않소."
 
211
경애는 그렇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별안간 발을 빼는 것도 문제이었다.
 
212
"어쨌든 돈을 쓰고 다니거나 하면 그것도 의심받기 쉬우니까 주의를 해야 해요."
 
213
경애는 병화가 요새 유행하는 마르크스 보이처럼 돈푼 생기면 금시로 헌털뱅이를 벗어버리고 말쑥이 거들고 다닐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으나 또 한 번 주의를 해두는 것이었다.
 
214
"별 걱정 다 하는군! 그런데 그 돈을 얻다 맡기면 좋겠소?"
 
215
"참 얻다 두겠소? 날 주슈. 내 처치를 해놓고 보고만 할게. 당신이 가지고 있으면 당장 발각되어요."
 
216
"외투 속에 넣어서 주인 방에 걸어놓았는데 어떡하든지 하구려."
 
217
"잘 됐군, 그대루 둬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말하지."
 
218
병화는 조금 더 앉았다가 간밤에 잠을 잘 못 자서 좀 가서 눕겠다고 하품을 연발하면서 일어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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