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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재회 ◇
해설   목차 (총 : 42권)     이전 11권 다음
1932년
염상섭
1
삼대(三代)
2
11. 재회
 
 
3
덕기는 사흘 후에 경도로 떠났다. 조부는 점점 더 허리를 꼼짝 못하게 되어 척 늘어져 누워서 똥오줌을 받아내는 터이나 원체가 생병이라 먹을 것은 다 먹고 의사의 말도 한 일주일 있으면 기동하리라고 하니까 조부도 떠나라 하고 학교도 졸업 미처에 너무 빠질 수 없어서 떠나는 것이었다.
 
4
모친은 오늘도 오지 않았다. 그끄저께 덕기가 기별을 하여 문안 겸 왔을 때 시아버지께 어찌나 혼이 났던지 좁은 생각에 암상도 났고 분하고 무서워서 그 전 같으면 날마다 앓는 시아버니 문안을 왔을 텐데 그제 어제 이틀은 덕희만 보내고 자기는 오지를 않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은 와보고 싶건마는 그러면 시아버니가 너는 앓는 아비는 보러 오지 않고 자식이 길 떠난다니까 온 거로구나 하고 또 야단을 만날까보아 안 오고 만 것이다. 저번에 왔을 제 시아버니는 수원집보다 한길 더 뛰며 야단을 쳤었다.
 
5
시아버지더러 얼른 죽으란 년은 쫓아버릴 것이로되 자식들의 낯을 보아서 십분 용서하지만 다시는 오지 말라고 아들에게 예증같이 하는 소리를 며느리에게도 하였었다. 그것은 위례두커녕 수원집이 구린 게 무어냐고 본 일이 있거든 본 대로, 들은 것이 있으면 들은 대로 아뢰바치라는 데는 진땀을 빼었다.
 
6
그렇지 않다는 변명을 요만큼이라도 하려면 꼼짝 못하고 반듯이 누운 영감이 손짓 발짓- 발짓이라느니보다도 어린애처럼 발버둥질을 해가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통에 한마디 핵변도 못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7
"너희 연놈들이 짜고서 나를 어서 죽으라고 기도를 하는고나? 그놈은 하느님한테 기도를 한다더니 너는 산천 기도를 드리니? 너 같은 년이 내 앞에 있다가는 약에 무엇을 타서 먹일지 모르겠다."
 
8
고 어린애처럼 뛰었다. 덕기 모친은 무엇보다도 이 말에 가슴이 선뜻하고 정이 떨어졌다. 아무리 젊은 첩에게 빠져서 그 말을 곧이듣고 그렇다 하더라도 그 이튿날만 되면 역시 웃어른이니 병문안을 갈 것으로되 참 정말 무슨 탓이나 무슨 모해나 만날까 보아 가기가 무섭기도 하였다. 안 할 말로 잠깐 다녀온 뒤로 누가 무슨 짓을 해놓고 자기에게 들씌울지 수원집을 못 믿느니만큼 무서웠다.
 
9
덕기는 이래저래 성이 가시고 또 펀둥펀둥 있어야 소용이 없어서 떠나는 것이다. 저녁때 화개동 집에를 가보니 모친은 할아버니께 억울한 꾸중만 듣고 한마디 변명도 못한 것이 분하다고 울고 앉았고, 사랑에서는 부친이 친구들과 앉았다가,
 
10
"응 떠나니? 하여간 봄방학에는 나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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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냉랭히 대꾸를 하다가 아들이 절을 하려는 것도,
 
12
"얘, 그만 둬라. 어서 가거라."
 
13
하고 절도 안 받으려 하였다.
 
14
너무 신식이 되어서 그런지 하여튼 덕기는 여기를 가나 저기를 가나 쓸쓸하고 순편치가 않았다. 그러나 나오려니까 부친이 마루까지 쫓아나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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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일전에 말하던 술집이라든가 카페라든가가 어디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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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방 안에 들리지 않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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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정통 삼정목예오."
 
18
덕기가 다시 안으로 들어오려니까, 안식구들과 함께 배웅하러 뜰에 나와 기다리던 모친이 사랑문 밑에 섰다가,
 
19
"본정통 삼정목이란 무엇 말이냐?"
 
20
하고 곱게 묻는다. 덕기는 눈을 무심코 찌푸리며,
 
21
"아녜요. 무슨 책사 말예요."
 
22
하고 얼른 들러대었다.
 
23
"경애가 그 근처의 어느 술집에 있다지 않니?"
 
24
모친은 중문 밖까지 쫓아나오며 이제야 생각난 일을 재쳐 물었으나 덕기는 창황중에 무어라 대답할 수 없어서,
 
25
"모르겠어요."
 
26
하고 딱 잡아떼어버렸다.
 
27
모친의 얼굴빛은 변하였다. 떠나는 아들이 섭섭한 것보다도 너까지 한통이 되어서 나만 돌려세우는구나 하는 야속한 생각이 앞을 섰던 것이다.
 
28
덕기가 간 뒤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였다. 화개동 사랑에서는 손들이 그저들 가지 않고 앉았다가 마장판을 벌이었다. 오늘은 금요일이라 여기 모인 사람들은 교회에 볼일들이 없는 판에 눈이 오기 시작하니까 한판 놀자는 생각들이다 누구의 머리에나 끝장에는 청요리 접시라도 나오거늘 가는 '그 집'- 숨은 술집에를 가게 되리라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29
밖은 함박눈이 퍼부어서 삽시간에 하얗게 싸이니 우중충하던 방 안이 도리어 환하여졌다.
 
30
교인들의 놀이라 그러한지 사랑문을 닫아 걸어 버리고 조용히들 앉아서 조름 보양으로 수군수군할 뿐이요, 마장 짝 부딪는 소리만 자그려댄다.
 
31
"내년에도 또 풍년 들겠군. 올해는 대체 눈도 퍽 온다."
 
32
"풍년이라도 들어야지. 조 선생 같으신 분은 머리를 내두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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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따위로 풍년만 들어서 무얼 한담."
 
34
마장과는 딴판으로 이런 수작들을 한다.
 
35
전등불이 들어오자 안에서 주인 밥상이 나왔다. 그러나 아무도 밥상을 거들떠보는 사람은 없었다.
 
36
어멈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골패짝 같은 것이 벌어지면 밥상은 오밤중까지 놓여 있고 청요리를 시키든지 하여 이 추운날 얼른 들어앉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풍성풍성히 사들여서 하다못해 청요리 찌끼라도 남는 것이 있으면 모르겠지만 여기 모이는 손님들은 3대 주린 걸신들인지 접시를 핥아 내놓으니까 조금도 반가울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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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짓상을 다시 들여갔다가 잡술 때 내올까요?"
 
38
식을까 보아 이렇게 물으니까 주인나리는 그대로 두라 하고 자기들끼리 수군수군하더니 아니나다를까, 청요리를 시켜오라고 쪽지를 적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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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문을 꼭 닫아두고 누가 오든지 없다고 해라."
 
40
이 댁 나리는 하느님 앞에서는 누구나 형제 자매지만 집에 들어오면 양반님이라 해라를 하는 것이다. 그건 어쨌든 오늘은 문만 닫는 게 아니라 누가 오든지 따버리라 하는 것이 어멈에게도 처음 듣는 일이요, 이상하였다.
 
41
빚쟁이 오나? 아주 판을 차리고 밤들을 샐 생각인가?- 어멈은 이렇게 생각하였으나 기실은 그 청요리 이름을 적은 쪽지에 배갈 한 근이 적히었기 때문이었다. 설경을 보아가며 한잔 먹자는 판인데 자기네 축 이외의 교회 사람이 찾아오거나 하면 여간 파흥으로 언론이 안 나기 때문이다.
 
42
마장이 두 판째 끝날 때쯤 해서 청요리는 왔다. 어멈이 안에 있었기 때문에 사랑지기가 나와서 문을 열어주었다. 바깥은 깜깜히 어둡고 눈은 아까보다는 뜸하나 그래도 세차게 온다.
 
43
사랑 사람이 안에다 대고 소리를 쳐서 어멈이 소반을 들고 나와서 마루 끝에 놓고 청요리 접시를 써 내놓는다. 방에서는 상 들어올 동안 얼른 끝을 내려고 급히 서두른다.
 
44
그러자 사랑문이 삐걱하며 눈을 밟는 소리가 서벅서벅 난다. 어멈이 돌려다보니 검은 양복쟁이가 뒤에 우뚝 섰다. 깜짝 놀랐다.
 
45
"누구세요?"
 
46
"큰댁 서방님 오시지 않았소?"
 
47
"다녀가셨어요."
 
48
방안에서 순사나 만남 노름꾼 모양으로 금시로 괴괴하여지더니 문이 열리며 눈살을 찌푸린 주인의 얼굴이 앉은 채 나타난다.
 
49
"저올시다."
 
50
하며 양복쟁이는 모자를 벗고 굽실해 보였다.
 
51
"어어, 난 누구라고. 어서 올라오게."
 
52
병화인 것을 알자 주인은 안심한 듯이, 안심뿐만 다니라 반가운 듯이 웃음을 띄우며 일어섰다.
 
53
"아니올시다. 자제가 오늘 떠난다죠? 이리 왔다기에 쫓아왔는데요."
 
54
"응, 벌써 다녀갔는데... 왜 저 집에 없던가?"
 
55
"지금 들렀더니 이리 왔다고 해요."
 
56
"하여간 추운데 어서 올라오게."
 
57
"아니올시다. 가겠습니다."
 
58
하면서도 병화는 교인들 축이 숨어 노는 꼴이 보고 싶은 호기심도 났다.
 
59
"관계치 않아. 추운데 녹여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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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주인은 강권하였다. 속으로는 왜 문간직을 잘못해서 이 사람이 들어오게 하였단 말이냐고 불쾌도 하였으나 음식도 벌어지고 술병도 놓이고 했는데 이 험구가를 그대로 쫓아버려서는 안 되겠다고 한층 더 친절히 하는 것이었으나 또 하나 생각하는 점도 있는 것이다.
 
61
사실인즉 청인놈이 와서 섰는 틈이기에 들어온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 눈을 맞고 문전에서 그대로 뒤통수를 쳤을 것이다. 병화도 권하는 대로 성큼 올라섰다.
 
62
방 안 사람들은 새로운 침입자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하던 노름에 팔려 있으나 병화가 보기에는 그 중의 한 사람은 병화도 교회에 출입할 시절에 안면이 있던 사람이다.
 
63
음식상이 들어온 뒤에도 얼마 만에야 끝이 났다. 몇천 끗이니 몇백 끗이니 하고 떠들며 상을 둘러앉을 때 병화는 일어나려 하였으나 주인은 놓아 보내지 않았다.
 
64
정거장으로 나간대도 아직 시간이 멀었고 저녁 전일 것이니 같이 먹자고 하여 주인은 자기 몫을 병화에게 권하였다. 병화도 저녁을 굶고 다니는 것보다는 낫다 하고 넓적넓적 먹기 시작하였다. 술도 순배가 도는 대로 받아먹었다. 안주는 넉넉하지만 술이 적다고 한 병을 더 시켰다. 그에 쫓겨가는 사람처럼 급급히 마시는 것이었다. 술의 풍미를 본다거나 눈오는 밤에 운치로 먹는다느니보다는 어서 취하여버리겠다는 사람들 같았다. 그 점에는 병화도 일반이나 그 뜻이 달랐다.
 
65
"요새 새문 밖 어디 있다지?"
 
66
한참 동안이나 쭈루룩쭈루룩 쩌덕쩌덕하고 부산히 먹기에 입을 벌리는 사람이 없다가 비로소 주인이 병화에게 말을 걸었다. 이 사람이 아들의 친구건마는 상훈은 무관히 할 뿐더러 얼마쯤 친숙하게도 생각하는 한편에 무서워도 하는 것을 여기저기 다니며 떠들어 놓을까 보아 한층 더 관대를 하는 것이었다.
 
67
"그래 무어 버는 것도 없이, 지내는 게 용하이그려. 언젠가 일전에 어르신네는 잠깐 만나 뵈었지만 그러지 말고 댁으로 그만 들어가는 게 어떤가?"
 
68
상훈도 술이 몇 잔 들어가더니 말수가 많아지며 타이른다. 병화는 좌중을 쓱 한 번 둘러보고 나서,
 
69
"여기서처럼 술도 먹고 밥을 먹을 때 기도도 않고 하면 들어가도 좋죠만 집의 아버니는 아편 중독에도 3기가 넘으셨으니까요."
 
70
하고 픽 웃는다. 그네들은 종교를 아편이라 부르는 버릇이 있다.
 
71
병화의 말에 여러 사람은 무색하면서도 반항심이 부쩍 얼굴빛에 나타났다. 상훈도 말이 꼭 막히고 말았다. 사실 그들은 집에서 처자와 밥상 받을 때에는 기도를 하나 지금 여기서는 기도할 것을 잊어버렸다. 청국요리와 술에 대하여는 하느님이 기도를 면제하여준 것같이! 그러니만큼 좌중은 병화를 요놈! 하고 흘겨보는 것이었다.
 
72
"실례입니다만 여러분께서도 언제나 이렇게 노시면 자유스럽고 유쾌하고 평화스럽고 사람된 제대로 사는 맛을 보시겠지요. 시집가는 색시처럼 성적을 하고 눈을 감고 활옷을 버티어 입고 앉았으면 괴로우시겠지요?"
 
73
한 잔 김에 병화는 이렇게 또 역습을 하여보았다.
 
74
"사람이 파탈을 하는 것도 어떤 경우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무상시로 술이나 먹고 취생몽사로 헐개가 느즈러져서야 쓰겠나. 가다가는 긴장한 정신과 생활에 안식을 주려고 이렇게 노는 것도 무방은 하지만..."
 
75
상훈이 반대도 아니요 변명도 아닌 어름어름하는 수작을 하였다.
 
76
"하필 술을 먹고 논다 해서 말씀이 아니라 기분으로나 양심으로 말입니다. 술이나 먹고 마장이나 하고 농세상으로 지내니까 자유스럽고 유쾌하고 평화스러우리라는 그런 타락한 인생관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지금 말씀하신 그 긴장한 정신, 긴장한 생활이란 무엇을 위한 것이었던 것인가를 생각하실 필요가 있겠지요. 종교 생활보다도 더 긴장한 생활, 더 분투의 생활이 있는 것을 생각하셔야지요..."
 
77
병화가 문학 청년같이 도도한 열변을 꺼내놓으려니까 여러 사람은 나중 시킨 술이 왜 안 오냐? 하는 생각들을 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앉았다. 그러자,
 
78
"술이 왔어. 술이 왔어."
 
79
하고 청요릿집 배달이 닫은 문을 흔드는 바람에 방문들을 여닫고 또 한참 부산하였다. 병화는 좀더 자기의 포부도 늘어놓고 좌중 사람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내놓고 싶었으나 이야기할 틈을 탈 수가 없었다.
 
80
음식이 끝나니까 상훈은, 병화를 재촉하듯이 하여 데기로 나와버렸다. 병화는 취하지 않았으나 상훈 생각에는 취한 것 같아서 공연히 여러 사람들에게 쌩이질을 할까보아서 얼른 배송을 내자는 것이었다.
 
81
"마장인가 하는 그따위 고등 유민- 유한 계급의 소일거리 판을 차려놓고 어중이떠중이 모아들이시지 말고 그런 돈을 좀 유리하게 쓰시는 게 어때요?"
 
82
병화는 문간에 나오면서 또 이런 듣기 싫은 소리를 하였다.
 
83
그런 돈을 유리하게 쓰라는 말에 상훈은 일전에 자기 부친더러 유리하게 돈을 쓰라고 하던 말을 생각하면서,
 
84
"누가 마장판을 늘 차려놓고 모나코 왕국을 꾸미겠나마는 올봄에 안동현 갔던 길에 싸니 한 벌 사라고 권하기에 사다가 두었던 것이지..."
 
85
하고 변명을 하고 나서는,
 
86
"김군도 주량이 상당하군. 어디 가서 좀더 자실까?"
 
87
하고 묻는다.
 
88
"손님들을 두고 나오셔서... 어서 들어가십쇼. 저는 정거장에 좀 나가 봐야 하겠습니다."
 
89
"벌서 떠났을걸."
 
90
"지금 곧 나가면 되겠습니다."
 
91
"지금이 몇 신줄 알고 무턱대고 나간다는 것인가. 8시가 넘었네."
 
92
상훈은 시계를 꺼내 보았다.
 
93
"그러지 말고 어디 좋은 데 있거든 가보세."
 
94
실상은 병화를 보내고 한잔한 김에 경애가 있다는 '바커스'라던가 하는 데를 가 보고 싶어서 손님들도 내버려두고 나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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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군데 가 보실까요?"
 
96
병화도 정거장에는 틀렸으니 술이나 먹고 싶었다.
 
97
"어디?"
 
98
안국동 네거리에서 전차를 기다리며 상훈은 물었다.
 
99
"저만 쫓아오셔요."
 
100
하고 전차에 상훈부터 타게 하였다. 병화는 역시 바커스로 끌고 가소 싶었다. 어쩐지 '아이짱(경애)'이라는 모던 걸이 늘 마음에 키이는 것이요, 더구나 일전에 덕기를 데리고 갔을 때에도 이야기를 하다가 다른 손님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덕기에게 끌려오고 말어서 그 후 궁금도 하고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다. 어쨌든 그 여자가 심상한 여자 같지 않아 보이는 것이 병화에게는 호기심을 더 끌게 하는 것이었다.
 
101
상훈은 버커스로 끌고 가나보다 하는 생각을 하며 한편으로는 마침 잘 된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 사람 앞에서 경애가 함부로 굴까보아 겁도 났다. 그보다도 병화가 덕기를 끌고 간 지 며칠 안 되어서 자기가 끌려가는 것이 실답지 못하게 보일 것 같아서 경애에게 창피할 듯하나 또 어떻게 생각하면 아무러면 상관 있겠니 하는 풀어진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어쨌든 한 번 가 본다면 맨송맨송한 얼굴로 가기도 어렵고 또 이런 사람에게 끌려가면 경애가 보기에도 덕기에게 무슨 말을 듣고 일부러 찾아온 것이 아니라 젊은 애에게 술을 사달라고 졸려서 지나는 길에 끌려온 것같이 보일 것이니 도리어 이런 기회에 들여다보고 오는 것이 좋을 것 같기도 하였다. 또 생각하면 실상은 이 사람이 앞장을 서주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같이 나왔던 것인지 자기 마음을 분명히 모른다. 어쨌든 상훈이 온종일 들어앉아서 경애 생각을 하다가 밤이 되거든 한번 가보리라는 작정은 하였던 것이요, 또 지금 그 생각을 술김을 빌려서 실행하게 된 것이다.
 
102
"어디로 갈 텐가?"
 
103
상훈은 전차에서 내려서 끌려가며 시치미를 떼고 불었다. 병화가 무어라나 말을 들어보려는 것이다.
 
104
병화도 일전에 이 사람의 아들이 졸졸 쫓아오면서 대관절 어디를 가느냐고 조바심하던 것을 생각하고는 혼자 웃으며,
 
105
"아무튼지 와보시기만 하십시오그려. 훌륭한 데지요. 경국지색을 보여드릴 테니 그 대신에 하느님의 은총을 감사하실 게 아니라 제게 한턱이나 단단히 내십쇼."
 
106
하고 웃는다.
 
107
"이 늙은 사람에게 미인이 무슨 소용 있나. 허허..."
 
108
"아직 노인도 아니시지만 노인에게는 미인이 따르지 않아 걱정이진 신로심불로람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하하... 하여간 중년 연애란 더 무서운 것이지요."
 
109
하고 병화는 비웃듯이 또 껄껄 웃는다. 상훈은 중년 연애란 더 무서운 것이라는 말을 듣자 속으로 깜짝 놀랐다. 병화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자기를 무슨 욕이나 보리여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겁이 펄쩍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화서 안 간달 수도 없다.
 
110
덕기가 경애의 내력을 이야기하였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식이 미웠다. 이 사람이 다른 데서 듣지 말라는 법도 없다. 어쩌면 경애 자신과 한통이 되어가지고 덕기를 만나보게 하여주고 또 이번에는 자기를 끌고 가서 욕을 보이려거나 욕은 안 보이더라도 무슨 귀정을 내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상훈은 이런 생각을 하니 술이 금시로 깨고 관(푸주)에 들어가는 소같이 바커스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그러나 저희들이 아무러면 나를 어쩌랴 하는 반감을 가지고 상훈은 병화의 뒤를 따라 들어섰다.
 
111
함박눈이 오고 푸근한 밤이라, 네 패쯤 앉을 테이블이 꽉 차고 방 안은 운기와 담배 연기로 자옥하였다.
 
112
상훈이 노중에서 꺼내 쓴 노랑알 안경에 김이 서려서 잠깐 동안은 아무것도 아니 보였다. 안경을 벗어서 접어넣으며 난로 앞으로 가려니까,
 
113
"실례의 짓 말아요."
 
114
하고 일본말로 소리를 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귀에 익은 목소리다. 건너다보니 오른편 쑥 들어간 구석에 경애가 틀어박혀서 있다. 술 취한 손님들이 좌우를 막고 앉아서 안 보내려니 경애는 나오겠다느니 하며 실랑이를 하는 거동이다.
 
115
"경애는 병화를 건너다보고,
 
116
"어서 옵쇼..."
 
117
하고 눈웃음을 보이다가 상훈의 늙직하고도 혈색 좋은 얼굴이 뒤미처 나타나자 놀란 눈이 멀뚱하여지며 맥없이 섰다. 너무 의외인지라 저 사람이 여기 올 리가 왜 있나? 하며 자기 눈을 의심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표정 없는 눈이 마주치자 피차에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118
나오려던 경애는 그대로 앉아버리고 말았다. 경애를 시달리던 손님들은 이 편을 둘러보다가 경애가 앉는 것을 보고 '으아' 소리를 치며 환호들 한다. 그러나 병화는 좀 불쾌하였다. 앉을 자리도 없지만 새로 온 사람을 어디 가 비집고 앉게 한다든지 자리가 없으니 가란다든지, 어쨌든 나와서 알선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나오려다가 말고 그대로 앉아 버린다는 것은 괘씸하였다.
 
119
"쥔 없소?"
 
120
하고 병화는 불끈하며 손뼉을 쳤다. 주부가 등뒤에 섰던 것처럼,
 
121
"네에..."
 
122
하고 쓱 나왔다. 손에는 종이로 만든 접시에 거스름돈을 담아들었다.
 
123
바로 여에 앉았는 손들은 돈을 집어들고 일어섰다.
 
124
병화와 상훈은 그 뒤를 물러서 앉았다. 공교롭게도 병화가 경애와 등을 지고 상좌로 앉고 상훈이 마주 보게 되었다. 병화는 앉다가 다시 생각하고 바꾸어 앉자고 하였으나 상훈은 그대로 앉아버렸다. 경애는 여전히 눈도 거들떠보지 않고 일본 손님들과 마구 터놓고 기롱을 하고 있다. 일부러 이편에서 보라는 듯이 유쾌히 깔깔대며 웃는다. '긴샤'인지 홀가분한 일복을 입고 금테 안경을 쓴 양이 생각하였더니보다는 조촐해 보이었다. 그러나 아까 들어올 제 '이랏샤이마시(어서옵시오)' 하고 인사를 하는 어조라든지 지금 손님하고 노는 양을 보니 조선집으로 말하면 갈보요, 일본집으로 말하면 작부나 하등 카페의 여급이라는 것이 틀에 박힌 것 같았다. 상훈은 저절로 눈살이 찌푸리고 어금니에 무에 끼인 것같이 뻐끈했다.
 
125
"그것만 한숨에 켜면 내 상급을 주지."
 
126
경애의 옆에 앉았는 손은 고뿌 술을 먹이지 못해서 애를 쓴다.
 
127
"응? 얼마 탤 테야?"
 
128
손은 지갑을 꺼내서 10원짜리를 빼내어 테이블 위에 놓는다.
 
129
"그럼 먹지!"
 
130
껄껄껄 웃는 소리가 한소끔 왁자히 나다가 잠잠하여진다.
 
131
상훈이 힐끗 돌려다보니 경애는 유리 고뿌를 입에다 대고 턱을 차차차차 쳐들어간다. 고뿌의 노랑 물은 반이나 기울어져 들어간다. 병화도 돌려다보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상훈에게 눈을 준다. 상훈은 얼굴이 검어지며 고개를 떨어뜨리고 앉았다. 한 고뿌가 그뜩한 것은 아니나 한숨에 쭉 마시고 나니까 옹위를 하고 앉았던 일본 손님들은,
 
132
"용하다, 용해!"
 
133
하고 또 한 번 환성이 일어났다. 경애는 얼굴이 빨개지며 생글생글 웃기만 하고 맥이 빠진 듯이 앉았다가 안주로 담배를 붙인다.
 
134
"아이상, 그런 화풀이 술을 먹으면 안 되어요."
 
135
이 편에서 병화가 일본말로 소리를 쳤으나 경애는 못 들은 척하고 한눈을 파고 있다. 병화는 머쓱해서 바로 앉으며 술잔을 들다가,
 
136
"어서 잡숫지요."
 
137
하고 상훈에게 말을 걸었으나 상훈은 손에 든 담뱃불만 들여다보고 무슨 생각에 팔려 있다.
 
138
화풀이 술을 먹지 말라는 병화의 말이 상훈에게는 또 무심코 들리지 않았다. 암만해도 자기네들의 내용을 알고 비꼬는 것 같았다. 그는 고사하고 대관절 경애가 왜 저렇게 술을 먹는 것인가? 나 때문에 그야말로 화풀이 술을 먹는 것이리라...
 
139
'그렇지 않으면 돈 10원에...?'
 
140
하는 생각을 하니 상훈은 앞이 캄캄한 것 같았다.
 
141
그러나 정말 화풀이 술이라면 고마웠다. 너는 너요 나는 나라는 길에 지나가는 사람같이 생각하면야 저럴 리가 없을 것이라고 상훈은 도리어 고마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미심쩍은 것은 병화와 둘의 사이가 퍽 가까운 모양인 것이다. 말을 걸어도 못들은 척하는 것은 자기 때문일 거이다-고 생각하였다.
 
142
"사람을 이렇게 깔보기야? 아무러면 돈 10원에 팔려서 먹기 싫은 술을 먹었을라구!"
 
143
별안간 경애의 째진 목소리가 방 안에 퍼진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리로 쏠리었다. 만지면 베일 것 같은 10원짜리 지폐가 경애의 손에서 후르르 날아서 땅바닥에 떨어진다.
 
144
"그럼 100원?"
 
145
하고 옆의 청년이 웃는다.
 
146
"흐응! ...100원이면 10원의 열 곱인가! 하하하..."
 
147
경애는 옆의 남자를 멸시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웃고 나서,
 
148
"이건 누구를 큰길가에서 재주 피는 청인으로 알았는가뵈. 하하하... 100원이면 끔찍한 돈이겠지만 어서 집어넣어 두었다가 마누라 '고시마끼(속곳)'라도 사다주시죠! 보너스 푼이나 타서 돈 10원 남았다고 이렇게 쓰다가는 자볼기 맞으시리다!"
 
149
하고 또 커다랗게 웃으며 발딱 일어선다.
 
150
"하하... 걸작, 걸작!"
 
151
하고 좌중은 손뼉을 치며 떠든다. 돈을 내놓은 청년은 도리어 무색해서 설익은 웃음을 띄우고 앉았다가 취중에 무슨 모욕이나 당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별안간 얼굴을 붉히며,
 
152
"사람을 업신여겨두 분수가 있지! 약속을 한 것이니까 약속대로 주는 게 아니냐? 나두 신사다! 돈 10원쯤에 네 따위에게 그런 말 듣겠니?"
 
153
하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나 원체가 이 여자의 환심을 사느라고 한 노릇이라 딴 손님들 보는 데 창피할 것 같아서 허풍을 치는 눈치다.
 
154
"굉장한 호기로군! 지금 세상에 좀 보기 드문 여덟 달 반 치로군!"
 
155
하며 빠져나오다 말고 선 채 깔깔 웃는다. 여러 사람들은 또 손뼉을 치며,
 
156
"히여 히여!"
 
157
하고 웃는다.
 
158
"어디 얼마나 가지고 그러는지 있는 대로 밑천을 다 털어놓아보슈. 그 돈 가지고 한턱 잘 먹읍시다그려! 여러분, 내 한턱 쓸게요."
 
159
경애는 또 찧고 까부는 수작으로 농쳐버린다.
 
160
"옳지 됐다! 됐어! 그래도 우리 아이상은 달라! 아이상 만세! 아이꼬상 예찬!"
 
161
하고들 떠들었다. 숭배하는 미인의 솜씨 있게 돌려대는 말솜씨에 외국청년들은 아주 녹았다. 그 바람에 기껏 노해 보이던 친구도 껄껄 웃고마는 수밖에 없었다.
 
162
"자아, 이렇게 된 바짜에야 우리 대장--우리 여왕으로 모시구 자리를 안 뜰 수 없네. 자네 그 100원 이리 내게. 아이상 갑시다요."
 
163
한 청년이 서둘러댄다. 경애는 생글생글 웃고만 섰다.
 
164
"그렇구말구, 아이상의 그 지게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도 가야 하네! 자아, 돈은 자네들이 쓰구 생색을 내가 냄세."
 
165
또 한 청년은 이런 소리를 하고 경애의 겨드랑이를 낀다.
 
166
"자아, 그럼 가자구!"
 
167
하고 경애는 청년의 팔을 뿌리치고 안으로 쪼르르 들어간다. 병화의 상 앞을 지나다가,
 
168
"미안합니다. 많이 잡숫고 가세요."
 
169
하며 지나가는 인사 한마디만 내던져주었다.
 
170
상훈은 점점 더 모욕을 당한 것 같아서 술을 입에 댈 맛도 없었다.
 
171
경애는 후딱 양장을 차리고 나왔다. 푸근한 털외투에 검정 모자를 삐딱이 쓴 모양이라든지, 두기가 오른 불그레한 얼굴이 아까와는 또 다른 교태가 남자들의 눈을 현황하게 하였다.
 
172
"자아, 어서 나오슈."
 
173
하고 경애는 재촉을 한다.
 
174
"그럼 일찍이 들어와요. 술 먹지 말고... 요새는 왜 이렇게 난봉이 났누."
 
175
주부는 이런 소리를 하였으나 못 나가게 말리지는 않았다. 주인으로서 말리지 못하는 것을 보니 경애가 이 집에 꽉 매인 고용꾼이 아닌 것은 상훈도 짐작할 수 있었다.
 
176
4,5인의 주정꾼을 몰고 나가는 경애의 뒷모양을 상훈과 병화는 멀거니 바라보고만 앉았을 수밖에 별수가 없었다. 닭 쫓던 개의 상판이었다.
 
177
그 한 패가 나가니까 한구석이 텅 빈 듯이 별안간 쓸쓸하여졌다.
 
178
"그 누구들이오?"
 
179
병화가 주인을 보고 물었다.
 
180
"여기 다니시는 은행축들예요. 재미있는 젊은이들이죠."
 
181
"퍽 친한가보군요?"
 
182
"아뇨. 공연히 오늘은 해망이 나서 그러지요. 이제 곧 오겠지요."
 
183
"곧 오거나 말거나..."
 
184
병화는 이런 소리를 하면서 모처럼 왔다가 모시를 당하는 것이 분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였다.
 
185
"일 보는 사람을 손님들이 마구 끌고 나다녀도 가만 내버려두우? 카페 같은 데서는 그렇게 못하지?"
 
186
상훈의 말은 경관의 시비 비슷하게 들렸다.
 
187
주부는 말똥히 이 처음 보는 남자를 쳐다보다가,
 
188
"아무러면 어떻습니까? 그 사람은 내가 부리는 사람도 아니요, 내 친구예요."
 
189
하고 좀 아니꼽다는 기색이면서도 휘갑을 친다.
 
190
아무려나 더 앉았기는 싫었다. 욕보러 애를 써온 것 같아서 다만 분하였다. 두 사람은 선뜻 일어섰다.
 
191
"왜 그러세요? 미인이 없어서 그러십니까?"
 
192
하고 주부가 놀리듯이 웃는 것도 못마땅하였다.
 
193
두 사람은 그 옆 카페로 가서 술을 또 먹었다. 상훈은 이번에야말로 화풀이 술을 기껏 먹으려고 판을 차린다. 자식의 친구인 병화가 있거나 말거나 체면 없이 계집애들을 주물러 터뜨릴 듯이 떠듬거리는 일본말을 반씩반씩 해가며 갖은 추태를 부리는 양을 보고 병화도 어이가 없었다. 이 사람이 이러다가도 내일이면 교당에 가서 '아아멘'을 부르려니 하는 생각을 하면 미운 증이 지나쳐서 흠씬 놀려주고도 싶었으나, 그래도 친구의 부친이라 웃고만 앉았을 수밖에 없었다.
 
194
11시나 넘어서 카페에서 겨우 떨어져나왔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이것저것 다 잊어버렸던 것 같던 사람이 거리로 나오니까 또 바커스로 가자고 발론을 한다.
 
195
"여보게, 우리 다시 한 번 가세. 고 계집애에게 그런 푸대접을 받고 다네 낯이 깎이지 않나?"
 
196
상훈은 다소 혀 꼬부라진 소릴 하나 그래도 꿋꿋하였다.
 
197
"가시죠. 내 체면이 깎인다는 것보다도 그 계집애 손이라도 한번 못 만져 보시고는 댁에 가서 잠이 아니 오시겠지요?"
 
198
하고 병화는 놀리면서 바커스로 끌고 들어갔다.
 
199
"그까짓 년, 세상에 계집이 그밖에 없겠나마는 그 애가 조선년이라지?"
 
200
"그래요. 하지만 자제하고 매우 친한 모양인데 선생께선 마구 못하십니다.
 
201
병화는 무어라나 들어보려고 장난으로 이런 소리를 해보았다.
 
202
"무어? 어째?"
 
203
상훈은 코웃음을 치며 시치미를 떼었다.
 
204
"왜 실망을 하셨습니까?"
 
205
병화는 또 냉소를 한다.
 
206
"실망은 내가 왜 실망을 해? 나는 지금 자네의 결혼이라도 시켜 주려는 판인데..."
 
207
상훈은 이런 분수에 닿지 않는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도 경애가 없이 흥이 빠져 한다.
 
208
주부는 술을 내오고 나서, 어느덧 자정이 가까워 오니까 문을 걸어 버린다.
 
209
"그런 여자가 저 같은 빈털터리에게 눈이나 거들떠보겠습니까?"
 
210
병화는 상훈의 농담이 결코 듣기 싫은 것도 아니었다.
 
211
"아까 못 보았나? 돈 10원이고 100원이고 그까짓 돈 보고 하기 싫은 일 하겠느냐고 뽐내던 말을 들으면 돈에는 더럽지 않은 위인인 모양이니 안심하게."
 
212
"글쎄 그럴까요? 그럼 부디 잘 주선만 해주십쇼. 하하하..."
 
213
하고 웃어버렸다.
 
214
"사막에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될 때... 임이시여..."
 
215
자정이 넘으니까 이 좁은 거리의 발자취도 드물어지고 점점 가까워지는 유행창가 소리가 유난히 요란스럽게 들려온다. 그 중에서도 째진 억지의 목소리가 도드라지게 들리자 병화와 상훈 둘이만 앉았는 옆에서 주정받이를 하고 있던 주부는 눈살을 찌푸리며,
 
216
"주정뱅이들이 또 몰려오는군! 하지만 길거리에서 저게 무슨 짓들이야."
 
217
하고 주부는 문을 열려고 마주 나간다. 벌써 가게는 들이고 이 두 손님도 보내려고 애를 쓰고 있는 판이라 주정꾼들이 문 밑에 와서 소리를 딱 그치며 문을 통통통 두드리며 하도 법석을 하니까, 주부는 문을 열었으나,
 
218
"가게는 들였에요. 내일 또 오세요."
 
219
하고 문을 가로막으며 대지르고 들어오겠다는 손들을 내미는 모양이다.
 
220
경애는 거기서 아랑곳도 안하고 여전히 '아라비아 노래'인가 하는 것을 콧노래 삼아 하면서 주부가 길을 터주는 데로 들어오다가 환한 불 밑에 두 남자가 고주가 되어서 청승맞게 마주 앉았는 것을 보자 경애는 웬일인지 눈물이 핑 돌았으나 취중에도 그것을 감추려고 소리를 한층 더 높여서 하던 노래를 계속하며 테이블 새로 댄스를 하고 한 바퀴 돌더니 병화에게로 와락 달려들어서 무심히 앉았는 사람의 팔을 홱 낚아 잡아일으키니 부엌방석 같은 남자의 머리가 어느덧 여자의 가슴에 싸였다. 경애는 유착한 남자의 몸을 질질 끌면서 여전히 춤을 추며 테이블 새로 돈다.
 
221
"정신 좀 차려요. 두부로 빚어 만든 사내도 다아 보겠다! 곤냐꾸(족편 같은 일본 음식)처럼 왜 이 모양이야?"
 
222
하고 경애는 눈물을 감추고 병화의 대강이를 장갑 낀 조그만 주먹으로 쥐어박고 나서 깔깔 웃다가 다른 소리를 같은 곡조로 꺼내며 맴을 돈다.
 
223
"...이운 달이 또 여즈러졌으니 해 뜨면 못 볼까봐 동틀 머리까지 지키고 앉었나? 해 뜨면 못 볼 게니 눈이 시도록 보아라... 턱을 괴고 앉았는 꼴 기구망측지상이로구나... 하하하... 하하하..."
 
224
무당 넋두리하듯 입에서 나오는 대로 노래를 만들어보다가 경애는 커다랗게 웃으며 남자를 탁 떠밀고 오뚝 서다가 취한 사람이 나가자빠지려는 걸 보자 얼른 가서 다시 얼싸안으며,
 
225
"에구 가엾어라. 우리 큰둥이를 누가 그랬단 말이냐?"
 
226
하구 어미가 자식 어루만지듯이 등을 두드리다가 입을 쪽쪽 맞춘다.
 
227
상훈은 일거일동을 바라만 보고 있다가 무심코 실소를 하며 외면을 하였다.
 
228
그러자 밖에서 이때껏 실랑이를 하고 있던 주정뱅이가 주부가 안으로 잠그고 두 손으로 버티고 섰는 것을 떼어밀고 쏟아져들어왔대야 두 사람밖에 아니 되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아까 10원짜리를 내놓던 청년이다.
 
229
두 일본 청년은 한가운데 들어와서 딱 버티고 두 남녀가 끼고 섰는 것을 보자 눈에 쌍심지가 뻥치면서,
 
230
"흥... 잘들 노는구나! 그래서 우리를 따돌려세우려는 거로구나! 이제 알았더니 또 한가지 영업하는 게 있구나!(밀매음을 시킨다는 말이다) 훌륭한 음식점 취체 위반이다! 어디 해보자..."
 
231
하고 두 청년은 겨끔내기로 떠들어댄다. 경애는 그래도 못 들은 척하고 공중 매달려 다니는 병화를 끼고 좁은 속에서 밀고 나갔다. 끌고 뒷걸음을 쳤다 하며 춤추는 형용을 하다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232
"시끄럽게 왜들 이래? 찰거머리처럼 무얼 먹겠다고 쫓아다니는 거야? 어서 그만 가 자요."
 
233
하고 몰풍스럽게 소리를 친다.
 
234
"무어 어째? 그래두 못 떨어지겠어?"
 
235
"무슨 상관, 남이 어쩌든지 이건 제 집이나 가지고 윽살리 듯 하네! 어서 집에 가봐요... 마누라가 어떤 놈하고 이렇게 끼고 맴을 돌지 모를 게니! 그 때 할 소리를 미리 여기서 연습을 해보는 게로군 또 보여 줄까?"
 
236
하고 경애는 또다시 병화에게 입을 맞추는 형용을 한다. 형용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참 정말 맞춘다. 병화는 싫다고도 할 수 없고 좋아서 헤에 할 수도 없으나 좋지 않을 것도 없다.
 
237
"누구를 놀리는 거냐? 더러운 것들! 파출소에 고발할 테다."
 
238
술이 취한 젊은 애들이 몇 달을 두고 다니다가 결국에 이런 꼴을 보는 것도 분한데 골을 올려주니 눈에 불이 나는 것이다. 더구나 이때까지 서너 시간을 같이 놀면서 수십 원 돈을 쓰고도 손 한 번 만져보지 못하던 '여왕'이 다른 조선 남자에게 키스를 하다니 해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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