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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부친의 사건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23권  24권  25권  26권  27권  28권  29권  30권  31권  32권  33권  34권  35권  36권  37권  38권  39권  40권  41권 42권  염상섭

1. 부친의 사건

1
"아버니, 그 유서 가지셨에요? 어서 나가야 할 텐데 할아버니 유서가 있어야지요."
 
2
"야아, 나는 나가지만 필순이! 이필순이 나갔에요? 좀 만나게 해 주세요. 때리지는 마세요. 그 여자가 아무 죄도 없는 것은 나도 알아요..."
 
3
"...피스톨요? 몰라요..."
 
4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병이 나면 집으로 가도 좋지요?"
 
5
병인은 이런 헛소리를 연거푸 주워섬기다가 눈을 번쩍 뜨고 휘휘 돌려다보고는 다시 눈을 스르르 감으면서 또 헛소리를 생시보다도 더 또렷하게 되풀이하는 것이다.
 
6
덕기는 경찰부에서 독감이 도진 것을 참고 지냈다. 병을 감추어 가며 참고 있었다. 약을 사다 달라거나 하면 병 핑계나 하려고 엄살하는 듯이 알 것 같아서 도리어 내색도 보이지 않고 근 일주일이나 지내왔었다. 실상은 그보다도 걱정이 태산 같아서 해가에 신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쯤이야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부친의 소식, 금고 속, 집안에서 걱정들 할 것, 필순의 소식, 병화의 고초... 생각하면 몸 아픈 것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7
그러나 집에 잠깐 끌려갔다가 온 뒤로 신열이 부쩍 더하여져서 몸을 제대로 가누고 앉았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훈련원 벌판 같은 유치장 속에서 또 이틀 밤을 새웠다. 그 이튿날 아침에 불려나가다가 유치장 턱에서 쓰러져버린 것을 그대로 끌려갔는데 요행히 고등과장이 부른 것이기 때문에 뒤틀린 눈자위와 말 더듬는 것을 보고 서둘러주어서, 의사를 불러다 뵈고 저희끼리 의논을 하고 한 뒤에 말하자면 고등과장이 책임을 지고 의전 병원으로 옮겨다가 가둔 것이다. 물론 집에는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병원에서는 경찰부의 유치인 하나를 맡아서 치료하는 것이기 때문에 형사는 육장 하나가 와서 머리맡에 지키고 앉았는 것이다. 그 외에는 모친과 아내가 돌려가며 와 있을 뿐이요, 아무에게도 면회를 허락지 않았다. 필순의 부모가 한 병원 속에 있고 필순의 모친이 어제야 소식을 듣고 찾아왔건마는 만나 보이지 않았다. 고식도 이때만은 형사가 고마웠다.
 
8
"...재산 다 없어져서 도리어 시원해요. 어머니! 거리에는 나앉지 않게 할 테니 염려 마세요."
 
9
열에 떠서 이런 잠꼬대로 생시에 수작하듯이 영절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모친은 눈물을 지으며 병인을 흔들었다. 그러나 꿈과 열 속에서 헤매는 병인은 제풀에 눈을 떨어질 때나 떠보았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10
아내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이 벌써 사흘 동안 앉은자리에 형사와 비스듬히 꼭 붙어 앉아서 시중을 들고 간호를 하는 것이다. 매무시 하나 고쳐 매는 일이 없고 세수도 똑똑히 하지 못하였다. 시어머니가 바꾸어 자라고 하여야 꼬박꼬박 졸기는 하여도 팔베개를 하고라도 누워본 일이 없다.. 아이는 이제는 젖 떨어졌으니까 암죽이고 무어고 먹여서 보아달라고 맡겨놓고 와서, 사흘 동안 그림자도 못 보았어야 보고 싶지도 않다. 다만 병인 하나 외에는 하늘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 할 일이라고는 없는 듯이, 일심 정력을 병인의 숨소리와 검온기에 모으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시어머니는 쉬러 가고 친정 모친이 와서 같이 밤을 새워줄 모양이다.
 
11
그러나 이런 중에도 야속하고 겁이 나는 것은 헛소리 속에 필순의 논래가 자꾸 나오는 것이다. 어떻게 정이 들었으면 혼돈 천지인 이런 중에도 헛소리로 그런 말을 할까? 그야말로 오매불망이다. 생시에 먹은 마음이 취중에 나온다고, 뼈에 맺히지 않았으면야 그렇게도 간절한 말이 나올까? 아니, 경찰부에서 형사에게 애걸하던 말을 그대로 주워 섬기는 것이 아닌가! 가다가는 정이 떨어지고 앞일이 캄캄하여지는 것 같았다. 재산 없어지고 시앗 보고! 구차살이나 시앗쯤이면 오히려 웃고 넘길 일이지마는, 이혼 문제까지 난다면 이를 어쩌나? 하는 공상을 꼼꼼할 때는 피로한 머릿속에 정신이 홱 들며 눈이 반짝 띄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꿈속 같은 일이요, 설사 그런 일이 닥쳐온다기로 지금 당장 생사가 왔다갔다하는 병인 앞에서 이게 무슨 지각없고 객쩍은 망신이랴 싶어 자기 마음을 가누려는 것이었다.
 
12
아니다. 우리 남편만은 양반의 집 점잖은 장손으로 설마 그럴 리가 있겠니- 이렇게 스스로 안위하려 하였다.
 
13
그래도 사흘 나흘 지나니까, 침대 발치에 걸어놓은 증세표에 분홍 연필로 그어 나가는 줄이 차차 내려가고 하루에도 몇 번씩 올랐다 내렸다하던 고저가 훨씬 줄어들어 잔잔한 물결같이 그리어나가게 되었다.
 
14
독감이란, 속병이 아니니 다른 증세를 끼지 않고 나으려면 금세였다. 그렇게 무섭게 앓던 사람이 열이 내리기 시작하니까, 닷새 엿새 만에는 기동을 하여 일어나 앉게 되고, 곡기를 똑 끊었던 사람이 우유만이라도 목구멍에 넘어가게 되었다.
 
15
집안 사람들은 고맙기는 하나 속히 낫는 것도 반갑지 않았다. 죽으면 데려갈 '사자"처럼 머리맡에 지키고 앉았는 형사에게 살려놓아도 또 빼앗길 것이 겁이 나서 병인이 이만한 분수로만 도리어 좀더 오래 누웠으면 좋겠다고들 생각하였다.
 
16
"이젠 마음을 놓게 되었어도, 보시다시피 원체 약한 애가 앓으며 불려 가서 그 모양이 되어 왔습니다. 이번에는 훨씬 소복이 될 때까지 참아주시도록 말씀 좀 잘해 주셔요."
 
17
모친이 입으로만 간청하지 말고 두셋이 번을 갈아드는 그자들에게 10원 한 장씩이라도 담뱃갑이나 하라고 넌지시넌지시 쥐여 주었더면 좋을 것을, 그럴 수단도 없거니와 내 자식 죽이러 온 사자로만 보이니 무섭고 밉기만 하였다.
 
18
무어라고 보고를 하였는지 이튿날 오후에 불시에 자동차를 가지고 데리러 왔다. 다리가 떨리고 아래가 허전거리는 사람을 인정 사정없이 내 끌어다가 싣고 달아났다.
 
19
그러는 중에도 덕기는 필순 부친의 병실에를 다녀가려고 하였으나 형사들이 듣지 않았다. 다만 간호부를 보내서 필순의 모친을 현관에서 마나 보았다. 필순의 모친도 눈물을 떨어뜨리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고식은 그 꼴이 또 보기 싫었다.
 
20
덕기는 경찰부에 들어가서 이번에는 사법계 주임에게로 갔다.
 
21
"정미소는 조부 유서에 어떻게 처분하라고 씌었던가!"
 
22
첫대에 묻는 것이 이것이었다. 덕기는 의아하였다. 묻는 것이 새판인 것을 보면 그동안 부친이 잡혀와서 정미소 문제가 새로 나왔는가? 혹시는 부친의 행방은 여전히 몰라도 누구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것인가? 어떻게 대답을 하여야 부친에게 유리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사실대로 유서에 아무 말 없었다고 대답하였다.
 
23
"그럼 유언이라도?"
 
24
"유언도 하실 새가 없었지요."
 
25
"그러면 지금 누가 관리하는가?"
 
26
"내가 하지요."
 
27
"부친이 달라면 주려 하는가?"
 
28
"그야 적당한 때 드리려 하였지요."
 
29
"조부가 부친에게 상속한다는 유서를 따로이 써주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던가?"
 
30
여기 와서 덕기는 깜짝 놀랐다. 부친이 그 동안 법석을 한 것은 큰 금고 속에 있는 조부의 도장을 집어다가 그런 유서를 위조 해 가지려고 그랬던 것인가 보다 하는 짐작이 들었다.
 
31
"아마 그런가 봐요."
 
32
열쇠 분실 사건이 있은 지 벌써 열흘이 넘는다. 병원에서 세상을 모르고 앓는 동안 모두들 어찌 되었는지 궁금한 것은 말할 것 없거니와 부친도 이 속에 잡혀들어와 있는 것이 지금 말눈치로 분명하다.
 
33
"가형사는 검거되었나요? 열쇠가 나왔어요?"
 
34
하고 물으니까 주임은 빙긋이 웃다가,
 
35
"가형사라니? 당신 부친 말야?"
 
36
하며 핀잔을 주고 나서,
 
37
"하여튼 당신 재산의 한 반은 노름 밑천으로 깝살릴 것을 찾았으니 당신네 청년들도 경찰을 원망만 말고 고마운 줄도 알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야 할 거요."
 
38
하고 타이르는 소리를 한다. 덕기는 부친의 일이 애가 쓰이나 우선은 잘 되었다고 반색을 하였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자는 그 말은 무슨 암시를 주는 것인지? 잘만 하면 부친도 무사히 놓일 것 같은 자신이 생긴다. 부친은 조부 생전에 벌써 화개동 집 문서도 잡혀먹고 여기저기 걸린 수월찮은 빚은 노영감 돌아간 뒤로 성화같이 독촉인데 요새로 마장에 더욱 부쩍 몸이 달게 됐다. 첩치가에 덕기가 2000원 내놓고 부친의 저금 4, 5000원도 그럭저럭 부스러뜨리고 나니 하는 수 없이 자기 땅문서로는 노름판에서 아쉰 대로 당장 3000원 빚을 썼으나 그동안 노름 밑천밖에 아니 되고 말았다. 마장에 손속이 없을수록 몸은 달고 빚쟁이는 하나도 입을 틀어막지 못한 이런 막다른 골목이 된 판에, 넘기려는 주식 중매점이 하나 있으니 떠맡자고 꾀고 다니는 자가 나타났다. 귀가 번쩍 띄었다. 회복할 길은 이밖에 없을 성싶은데 하늘이 지시한 것같이 때마침 덕기가 붙들려갔다. 그리하여 무죄 석방이 된대도 3, 4삭이나 일년은 걸리려니 하는 관측을 한 상훈은 체면 여부 없이 불이시각하고 그런 비상 수단을 쓴 것이다.
 
39
그러나 모친의 등쌀만 아니었다면 상훈 혼자기로 손금고 하나 맞은 쇠질을 못 하였을 것은 아니나, 계획을 꾸며놓고도 혹시 손쉽게 열쇠가 손에 들어올 수 있을까 하여 망을 보려고 왔던 그날, 마님의 기세가 하도 험악하고 자기 뱃속을 들여다본 듯이 손금고를 내동댕이를 치며, 이것은 내가 맡는다고 야단을 치는 품이 심상한 수단으로는 도저히 될 성싶지 않아 최후의 수단을 쓴 것이다. 최후 수단이래야 별것이 아니었다. 마장판으로 돌아다니며 판돈이 떼어먹는 늙수그레한 자 하나를 가형사로 내세우쟀던 것인데, 먹을 콩이 났다고 눈이 번해 덤비면서도 정작 금고 묘리는 모른다니, 하는 수 없이 또 한 자 금고를 맡아 써보던 예전 어느 회사의 회계 퇴물 하나를 진권하여 일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40
그리하여 덕기가 열에 떠 아버지 유서를 가졌느냐고 헛소리를 할 동안, 벌써 땅문서도 일부분 현금이 되고 중매점 계약이 된 것이라서 아비 운수가 그뿐이었던지 자식의 재수가 좋았던지 걸려들고 만 것이다.
 
41
그렇지 않아도 경찰부로는 그 유서를 가져다가 보고 나면 덕기에 대한 혐의는 스러져서 석방을 해주는 동시에 마지막으로 상훈을 불러들이려던 판인데, 이런 일을 저질러 놓았으니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든 셈쯤 되었다. 덕기의 입장이 명백하여지면 당연히 치의가 상훈이나 수원집으로 돌아갈 것인데, 상훈은 그것을 미쳐 생각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상훈의 문서 절취 사건은 장훈의 사건이나 중독 사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그리 중대시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간단히 집어치우려는 것이다.
 
42
부장은 손가방 속에서 종이 한 장을 빼내어 펴놓으며,
 
43
"이것이 뉘 필적인가?"
 
44
하고 묻는다. 문제의 조부의 유서다.
 
45
다음에 또 한 장 내놓았다.
 
46
"그럼 이것은?..."
 
47
덕기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처음 것과 같은 날짜로 정미소를 상훈에게 준다는 역시 조부의 유서다. 물론 필적도 같다.
 
48
"조부의 필적입니다."
 
49
분명히 대답하였다.
 
50
"잘못하면 위증죄가 될 것이니 잘 생각해 말해야 해! 조부의 도장은 어디 있었나?"
 
51
"금고 속에 넣어두었는데 아버니가 달라셔서 드렸습니다."
 
52
"언제? 왜 달라던가?"
 
53
"정미소 명의를 고치시느라고 그랬던 것이겠지요."
 
54
"언제 주었어?"
 
55
부친이 언제라 하였는지 말이 외착이 날까봐서 좀 뻥뻥하다. 그러나 수원집에게 태평통 집 문서를 내어줄 때 쓴 일이 있으니까 그 다음으로 대어야 하겠다 생각하고,
 
56
"지난달이던가요?"
 
57
하고 부장의 눈치를 보았다. 부장은 더 추궁하지 않고 옆에 앉았는 부하에게 덮어 놓고 데려오라고 명하니까 부하는 일어나 나갔다.
 
58
-부친을 불러다가 무릎맞춤을 하려나?
 
59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되면 어쩌나 하는 겁을 집어먹고 앉았으려니까 5분도 못 지나서 문이 펄쩍 열리며 부친이 앞장서 들어온다. 돌아다보던 덕기는 목덜미에 칼이나 들어오는 듯이 고개를 덜컥 떨어뜨리며 뛰어 일어났다.
 
60
-이럴 수가 있나!
 
61
하고 덕기는 몸서리가 치어지며 꾸벅 절을 한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유치장에 들어갈 제 끄나풀이란 끄나풀은 다 빼앗기는 법인 것을 덕기도 이번에야 알았지마는 부친은 두루마기도 없이 고름 없는 저고리에 대님을 풀고 허리띠가 없으니까 뚤뚤 말아 오그려 붙들었다. 가짜 형사를 데리고 다녔고, 어떤 형사의 명함을 이용하였다 해서 더 심하게 구는가도 싶지마는 유치장 속에서도 대우가 똑 같지는 않다. 아무러면 이럴 수야 있나? 하고 덕기는 더욱이 마음이 아팠다.
 
62
부장은 잠자코 입가에 조소를 머금으며 상훈을 훑어보다가, 앉기를 기다려서 가방을 열고 문서 뭉치를 꺼내더니 부자의 앞에 내던지며 사실해보라고 하다. 부친은 가만히 고개를 떨어뜨리고 앉았고, 덕기가 한참 만에 펼쳐보았다.
 
63
금고에 넣어둔 땅문서의 반은 될 것 같다. 사실해보나마나 없어진 것이 있기로 지금 와서 어쩌랴마는 그래도 세어 보았다. 그러나 모두 몇 장을 꺼냈던지 모르나 졸망졸망한 것 대엿 장밖에 아니 된다.
 
64
"그 중 너 어머니 것과 네 거 한 장이 축났다. 그 외의 것은 금고 속에 남아 있다."
 
65
부친이 풀없는 소리로 설명을 한다.
 
66
부장은 문서 받은 표를 덕기에게 쓰게 하고 나서 상훈에게 정미소 상속한다는 유서는 언제 받았느냐고 물었다.
 
67
"아버니께서 돌아가실 때 받았습니다. 이 애를 시켜서..."
 
68
하고 덕기를 가리켰다. 덕기가 잘 안다는 표시를 하는 것이 유리할 것 같아서 한 말인데, 부장은 덕기더러,
 
69
"지난달에 금고 속에 있던 도장을 꺼내주어서 명의를 고쳤다 하였지?"
 
70
상훈은 부장이 자기에게부터 물어준 것을 다행히 생각하였다. 아들놈이 아무리 분하기로 아비를 징역시키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니, 자기의 대답이 여간 엉터리 없는 수작일지라도 덕기가 이 자리에서 모두 거짓말이라고 적발은 아니할 것인즉, 일은 도리어 피었다고 기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달에 도장을 주었다고 대답을 벌써 해둔 모양이니, 상훈의 말과는 외착이 났다. 이제는 꼼짝할 수 없이 다 늙게 용수를 쓰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상훈은 눈앞이 팽팽 돌았다.
 
71
부장은 부자가 얼굴이 벌개서 얼이 빠져 앉았는 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껄껄 웃는다. 원체 이 사람은 짓궂이 이 늙은 신사를 욕을 보이고 놀림감을 만들고 시달려 주려는 악의를 가진 것 같아 보인다. 더구나 교인이라면 머리를 내두르는 터이라, 상훈이 교인이요 예전부터 사회에서 무어나 해보려던 사람이니만큼, 밉게 보던 차에 이번 일을 보고 이런 때 단단히 곯려주려는 것이었다.
 
72
부장은 또다시 부하더러 첩을 불러들이라고 명하였다. 의경이 소리부터 휘뚝휘뚝하는 구둣소리를 내며 들어온다. 웬일인지 이 여자는 수갑을 아니 채웠으나 이 여자까지 공모자로 잡혔던가? 하고 덕기는 놀랐다.
 
73
형사는 덕기를 사이에 두고 상훈과 격리시켜서 의경을 앉히었으나 덕기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74
"이 속에 얼마 들었어?"
 
75
부장은 앞에 놓였던 조그만 트렁크를 밀치며 묻는다. 덕기는 아까부터 그 가방도 부친의 것인가 하였지마는, 알고 보니 그 속에는 돈이 든 모양이다. 모친의 땅을 팔았거나 잡힌 돈일 것이다.
 
76
"2300원이지요."
 
77
의경은 조금도 겁내는 기색도 없이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덕기는 액수가 적은 것을 듣고 잡혔구나 생각하였다.
 
78
"3500원에 잡혔다고 하지 않았나?"
 
79
"예, 선변 350원 떼고 평양 가서 용쓰고 하였습니다."
 
80
부장은 열쇠 꾸러미까지 가방에서 꺼내 던지며 덕기더러,
 
81
"이것은 아직 여기 맡아둘 것이로되 보관하는 수속도 귀치않고 해서 우선 문서와 함께 내 주는 것이야."
 
82
하고 또 영수증을 쓰라 한다. 덕기가 영수증을 쓰는 동안에 부장은 의경을 놀리는 어조로 사담처럼 문초를 한다.
 
83
"본마누라의 땅을 잡혀서 큰돈을 쥐여주니까, 영감이 한층 더 정이 들고 고마웠겠지?"
 
84
덕기는 귀를 막고 싶었다.
 
85
"하하하... 좋지 않을 것도 없지요마는 잠깐 맡은 것이지, 어디 나더러 쓰라는 것이던가요?"
 
86
조금도 걱정하는 빛이 없이 생글생글 웃어가며 대거리를 한다.
 
87
"네가 졸라서 이런 짓을 시킨 거지?"
 
88
"조르긴, 큰마나님이 땅을 가졌는지 하늘 조각을 베어 가졌는지 누가 알기나 해요? 영문도 모르고 놀러 가자니까 끌려갔었지요."
 
89
"그럼 왜 하고많은 문서 중에 큰마누라 몫부터 없애게 하였나? 나 먹긴 작고 그대로 두기는 배가 아프고 하니까 그것부터 없앱시다 하고 옆에서 한 마디 충동였지?"
 
90
"모르죠. 큰 것은 잡을 사람도 살 작자도 안 나서니까 그동안 부비 쓴다고 작은 것을 골라서 잡혔다니까 그런가보다 하였지요."
 
91
부장의 묻는 수작이 옭아넣도록만 음흉하게 슬슬 돌려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의경은 말끝을 잡힐까보아 정신을 바짝 차리는 모양이다.
 
92
부장은 슬쩍 다시 농치면서,
 
93
"이왕이면 느긋한, 그 속에서 큼직한 것 하나를 떼어가질 일이지? 저렇게 환귀본처하는 걸 보면 분하고 아깝지?"
 
94
하고 또 껄껄 웃는다.
 
95
"징역하게요?"
 
96
"아무러면 징역 안하나!"
 
97
"내가 왜 해요? 무슨 죄가 있다구? 여필종부니까 가자면 가고 오자면 올 뿐으로 딸려다닌 것까지 죈가요?"
 
98
"옳은 말이야. 여필종부이기에 남편이 감옥에 들어가니까 아내도 따라 들어가야지. 헛허허!"
 
99
취조실 안의 칼날 같은 서리는 녹고 어느덧 봄바람이 부는 듯 하였다. 그러나 남편이 감옥 간다는 말에 모두들 뜨끔하였다. 주임은 별안간 상훈을 보고 어조가 달라지며,
 
100
"...영감 나이 몇이오? 50은 되었겠구려? 불혹지년도 지내지 않았소? 글 거꾸로 배웠구려! 아들 보기 부끄럽지 않소?"
 
101
하고 호통을 한다. 젊은 자기는 이런 첩 하나 없는 것이 심사가 난다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30이 좀 넘은 자식 같은 새파란 젊은애에게 이런 욕을 보고 앉았는 부친이 가엾고 밉고 분하고 절통하다.
 
102
"이립지년밖에 안 되는..."
 
103
하고 부장은 그 능갈친 조선말로 글자나 안다는 자랑인지 연해 문자를 써 가며 아들은 있거나 말거나 준절히 나무란다.
 
104
"나 같은 젊은 놈이 난봉을 피운다면 욕을 하면서도 그래도 마음잡을 날이 있거니 하고 용서도 하겠지마는, 이거야 늦게 배운 도적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어디 영감 생전에 마음잡을 날 있겠소?"
 
105
덕기는 쥐구멍이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106
그러나 상훈은 요 방자스런 놈이--하는 분기에 떠서 부끄러운 생각도 뉘우치는 마음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욕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107
"원체 난봉 자식이 아비 죽기를 죄는 법이니까 이번 중독 사건도 당신의 짓이라고 우리는 인정하우...?"
 
108
부장은 중독 사건- 죄명으로 독살 미수 사건은 수원집 일파에게 지목을 하고 거의 단서를 잡게 되었지마는, 이렇게 한번 딱 얼러보았다.
 
109
"모두 내가 잘못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시기도 용혹무괴이겠지마는, 결단코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110
상훈은 여기 와서는 기가 막혀서 말이 아니 나왔으나, 하는 수 없이 허리를 굽히고 말을 낮추어서 애원하였다.
 
111
"그럼 무어란 말야? 재산을 자식에게 뺏기게 되니까, 그따위 천하에 무도한 짓을 한 거지?"
 
112
주임은 소리를 버럭 지른다. 상훈은 고개를 떨어뜨리고만 앉았다.
 
113
"또 이 틈을 타서 재산을 훔쳐다가 팔고 잡히고 한 것은 제 죄가 무서우니까 붙들리기 전에 멀리 만주로 뛰려던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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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을 두고 이때껏 받은 취조에 있는 대로 다 설명을 하였건마는, 또 새판으로 얼러대는 것이다. 부친은 잠자코 앉았고 덕기는 말을 가로채었다가 야단이나 만나지 않을까 겁이 났으나 한마디 변명을 아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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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아닙니다. 빚에 졸리시는 조건이 있어서 곧 현금을 드리려 했었는데 별안간 제가 이리로 들어오게 되니까 예금 통장을 꺼내다가 쓰시려던 것이 이렇게 된 것이겠지요. 도대체 손금고 열쇠를 집에 두고 다니거나 예금 통장을 손금고 속에 넣어두었더면 이 지경은 아니 되는 것을, 통장과 도장은 안에 맡겨 두고 또 어머니께서는 감기가 심하시고 야단을 치시니까 이렇게 되었나 봅니다. 그 외에는 아무 일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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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는 지금껏 부친이 왜 그랬을까를 곰곰 생각하던 그대로를 이야기하였다. 주임은 가만히 듣다가 그럴듯하던지 별로 탄하지도 않고 형사더러 덕기를 고등계로 데려가라고 명한다. 덕기는 부친을 이대로 앉혀놓고 차마 일어설 수 없으나, 하는 수 없이 열쇠 꾸러미와 땅문서며 돈을 집어넣고 끌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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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三代) [제목]
 
염상섭(廉想涉) [저자]
 
1932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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