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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

◇ 장훈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23권  24권  25권  26권  27권  28권  29권  30권  31권  32권  33권 34권  35권  36권  37권  38권  39권  40권  41권  42권  염상섭

1. 장훈

1
필순의 부친의 신음 소리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하던 이야기를 가다가다 뚝 그치고 시계들을 치어다보며 그만 하면 올 때도 되었는데- 하고 의사를 기다리곤 하였다.
 
2
필순의 아버지는 실상 아무 까닭도 없이 볼모로 붙들려가서 이런 횡액에 걸린 것이다. 병화가 늦기 때문에 공연히 거래를 한 것이지마는 원래 그 축에서는 이 사람을 무능은 하여도 원로격으로 대접하는 터이므로 그 집 속에서는 경애와 같은 곤경은 치르지 않았었다. 묻는 것이 있으면 아는 대로 대답할 뿐이요, '산해진'에서 점방을 보살펴주는 것도 상말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해서 전후 체면 없이 앉았는 것이 아니라, 병화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모르되 그것을 도와주는 셈이라고 병화의 변명도 하여주었다. 병화가 와서 주인과 단둘이 격론을 하고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에 무사히 병화와 함께 풀려 나왔던 것이다.
 
3
나와서도 큰길로 총독부 앞을 돌아만 왔더면 이런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야기가 무사타첩된 데에 마음도 놓였고 밤이 든 터도 아닌데 경무대 앞만 빠지면 바로 거기니 길을 돌 묘리가 없어서 추성문으로 들어서려고 마악 돌층계를 올라서자니까 우선 비쓸하는 놈과 병화가 딱 마주치며 어깨를 서로 스치고 지나쳤던 것이다. 물론 병화는 자기는 자신이 있으나 필순의 아버지를 위해서 잠자코 층계를 올라섰었다.
 
4
"되지 않은 놈, 어디서 빌어먹던 놈이야?"
 
5
주정꾼이 모른 척하고 지나려는 병화의 고작을 낚아채는 바람에 싸움은 시작된 것이다. 컴컴한 속에 어디에 매복을 하였었던지 이것을 군호로 서너 명이 소리도 없이 우중우중 나서는 것을 병화는 벌써 알아차리고 닥치는 대로 집어쳤으나 그러는 동안에 필순의 아버지는 대번에 나가 자빠져서 저 지경이 된 것이라 한다.
 
6
요행히 행인이 오락가락하고 동네에서 뛰어나오고 하여 법석을 하는 통에, 마침 일이 되느라고 필순과 덕기의 일행이 달려들어서 뜯어말려 가지고 온 것이다.
 
7
필순은 삼청동 110번지를 허위단심 겨우 찾아가니, 손님이 금방 나갔다는 말에 일편 마음이 좀 놓이기도 하나 기운이 풀어지며 되돌아 나오려는데, 인력거에서 내린 덕기가 인력거 등불을 앞세우고 원산과 이리저리 집을 찾는 것과 마주쳤던 것이다.
 
8
필순은 세상에 나와서 이때같이 남의 정이 고마운 것을 몰랐고, 이 때같이 덕기에 대하여 감사와 감격에 남 몰래 가슴을 떤 때가 없었다.
 
9
"아무리 술들이 취하고 입을 모으고 헌 계획적 테러기로 대로상에서 광고를 치고 그게 뭔가. 바로 조금 가면 다리 건너 파출소가 있는데, 순사를 부르러 가느니 하고 법석들인가보던데 결국 누워서 침 뱉기 아닌가? 주책없는 것들!"
 
10
이야기 끝에 덕기가 이런 소리를 하니까 부친의 어깨를 주무르고 앉았던 필순은 덕기를 말끔히 치어다본다. 그 눈에는 점점 영채가 돋아오르며 입가에 웃음이 피어오르다가, 눈이 마주치자 찔끔하며 고개를 떨어뜨린다. 자기도 한 마디, 아까 그 컴컴한 골목 속에서 타박타박 나오다가 덕기와 만났을 제의 감격을 이야기하려다가 만 것이다. 입밖에 내느니 보다도 그 기쁨, 그 감격을 가슴 속에 혼자만 깊이 깊이 간직해두는 것이 더 행복스러운 것을 느긋이 느끼는 것이었다.
 
11
의사가 왔다. 그이 시선은 우선 자리보전하고 누운 사람에게로 가더니, 다음에는 뺨이 부풀어오른 경애에게로 갔다. 안팎에 사람이 늘비하고 백만장자의 손자인 덕기가 앉아서 부르는 터이라 도대체 어쩐 영문인지 몰라서 의사는 눈치만 슬슬 보며 환자에게로 다가앉은다.
 
12
"허어, 늑골이 두 개가 상했군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원체 쇠약하신 모양인데, 바로 왼쪽 폐 위가 되어서 허..."
 
13
의사는 덕기의 얼굴을 치어다보며 기색을 살핀다. 덕기가 탐탁하게 뒷배를 보아 주어서 고쳐주려는지 그 기미부터 떠보려는 것이다.
 
14
"허어 그래요? 그럼 댁으로라두 곧 입원할 수 있을까요?"
 
15
덕기가 다가앉는다. 방 안은 긴장하여졌다. 의사는 알아차린 듯이,
 
16
"그게 좋겠죠. 우선 뢴트겐을 좀 봐야 하겠는데, 가까운 의전에 교섭해 볼까요?"
 
17
"어디든지! 보다시피 여기는 착박하구 한시가 급하니까."
 
18
덕기가 동독을 하는 바람에 의사는 몸이 가벼워져서 점방으로 나가 전화를 걸어 본다.
 
19
"밤중이라 뢴트겐은 어려우나 입원은 될 듯합니다. 어떠면 급한 대루 나하구 수술도 되겠죠. 이대루 두면 아무래두..."
 
20
의사는 여러 사람이 열좌하여 있느니만큼 대단한 의협심을 보인다.
 
21
이리하여 병화는 피가 난 턱밑과 손등에 약만 발라 달래서 일어나고, 필순의 부친은 서둘러서 입원을 시키게 하였다.
 
22
의사가 의전 병원에 있었던 관계로 전화로 당직인 친구를 불러내가지고 당장 입원을 시키고 밤을 도와 수술을 하게 되었다. 약관 조덕기의 한 마디 말이지마는 친석지가 된 조덕기의 소개다! 범연할 리가 없다.
 
23
병화도 입원하는 사람을 따라간다고 나섰으나 좌우에서 말려서 주저앉았다. 사실 몸도 아프거니와 필순 모녀가 따라가니까, 경애더러 혼자 집을 보랄 수도 없으니, 자기가 처지는 수밖에 없었다.
 
24
"누웠게. 자네 대신 내 감세."
 
25
덕기가 나서는 것은 의외이었다. 필순 모녀는 마주 보며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나올 듯싶었다. 의사까지 따라 타고 택시는 떠났다. 집에서는 경애가 병화를 간호하며 묵을 차비를 차리었다. 정신을 차리고 조용히 앉으니 이제야 시장기가 든다. 필순의 어머니는 이때껏 아무도 손을 댄 사람이 없는 저녁 밥상을 내놓고 갔으나, 흥분된 끝이라 두 남녀는 저를 들려고도 아니하였다.
 
26
"병원은 어찌 됐누? 전화나 걸어볼까?"
 
27
하고 병화가 일어서니까,
 
28
"그만 두세요. 내가 걸게. 찌개가 식기 전에 어서 잡수세요."
 
29
하고 경애가 앞장을 섰으나, 병화는 가만 있으라 하고 나가서 전화통에 섰다. 경애는 하는 수없이 외투를 들고 나와서 걸쳐두고, 방으로 다시 들어와 찌개를 화로에 놓는다.
 
30
"아무래도 지금 곧 수술을 할 모양이라눈군. 암만해도 좀 가 봐 주어야 하겠는데..."
 
31
전화를 걸고 들어온 병화는 망단해서 밥 먹을 생각도 없어졌다.
 
32
"그렇게 위중하대요?"
 
33
"수술만 하면 별탈은 없다지마는, 까닭 없는 조군이 밤을 샌다는데 내가 가만 있을 수야 있나! 조군은 또 어쨌든, 수술을 한다는데 모른 척할 수 있나."
 
34
"그두 그렇지만 어디 성하슈? 무정해 그런 게 아니라 하는 수 없는 사정이요, 덕기가 있어주마는 데야 당신이 가신다고 수술이 더 잘될 것도 아니요..."
 
35
경애는 아무래도 내보내지는 않을 작정이다.
 
36
"그야 그렇지만 인사가 되겠나."
 
37
"정 하면 내가 대신 갔다 오지. 그건 고사하고 성한 사람들이나 이 추운데 무얼 먹어야지요. 아주 여기서 무얼 시켜 보낼까?"
 
38
"응, 우선 그렇게 하는 게 좋겠지. 먹을 경황들도 없겠지만."
 
39
이번에는 경애가 점방으로 나가서 '소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소바' 집은 여기와 병원 새에 있으니까, 시켜 보내기에 뚝 알맞았다. 그 길에 병원에도 전화를 걸고 덕기를 불러내서 저녁을 시켜 보내니 필순 모녀를 먹이라고 일러 놓았다.
 
40
병화는 경애는 전화를 거는 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필순네를 언제 친하였다고 저렇게 다정히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면 고마웠다.
 
41
"벌써 수술실에 들어갔는데 30분만 하면 끝난다는군. 그리고 다아 간정되면 덕기가 이리 올 테니 아예 야기 쐬고 올 것 없다구!"
 
42
경애는 전화를 끊고 들어와서 이런 소리를 하며 상에 마주 앉는다.
 
43
병화는 가만히 듣고 만 앉았다가 눈물이 글썽글썽하여졌다. 모든 사람이 가엾고 불쌍하고 그리고 다정하고 고마운 생각을 하면 저절로 창연하면서도 기쁘고 감격에 넘쳐서 눈물이 나는 것이다. 경애의 기구한 신세도 가여웠다. 그 경애가 오늘 자기 때문에 반나절이나 발발 떨며 감금을 당하고 얻어맞고 죽었다 살아난 듯이 고초를 겪은 것을 생각하면, 미안한 것은 둘째요 애처롭다. 또 경애가 지금 이 앞에서 저 시장한 줄도 모르고 도리어 자기를 위로하고 필순 모녀의 걱정을 해 준다. 그 마음부터 귀여우면서 가련한 것이다.
 
44
필순네 세 식구- 현저동 아래턱 오막살이를 면하고 나온 지가 걱정은 않게 되었다고 좋아한 것도 꿈이 되고 남편은 갈빗대가 부러져서 생사가 오락가락한다. 살아나기로 성하게 다니는 꼴을 볼지 알 수가 없는 이 지경을 당한 두 모녀의 마음을 생각하면 측은도 하고 눈물이 아니 나올 수 없다. 또 그 당자는 어떤가! 감옥살이에 지치고 나와서는 허구한 날 굶주리고 들어앉았다가 어쨌든 처자나 굶기지 않게 된다는 바람에 마음에 없는 장삿속을 배우겠다고 터덜거리고 다니다가 죄 없이 뭇매를 맞았으니 그 꼴도 마주 볼 수 없이 가엾고 딱하다.
 
45
덕기- 이 사람은 금고지기다. 그러나 금고지기로 늙지 않겠다고 보채는 배부른 서방이니만큼 그에게도 또 숨은 고통이 있겠지마는, 팔자에 없는 고생을 하느라고 자기 대신 밤을 새워주는 것을 생각하면 어쨌든 고마운 일이다.
 
46
병화는 모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슴에 넘치었다. 분한 끝에 센티멘틀한 기분만이 아니었다.
 
47
"장개석도 결코 나쁜 놈이 아니야. 나쁘기는커녕 그놈의 본심은 오늘 알았어! 알고 보니 그만한 놈도 없어!"
 
48
병화는 젓가락을 들다가 별안간 이러 소리를 혼잣말처럼 중얼중얼한다. 경애는 뭐요? 하는 듯이 고개를 쳐들고 멀뚱히 바라본다. 이 사람이 잠꼬대를 하나? 너무 들볶여서 실성을 했나... 겁도 났다.
 
49
"그게 무슨 소리슈? 장개석이가 어째요?"
 
50
"하하하..."
 
51
이제야 제정신이 든 듯이 웃는다. 병화는 여러 사람들의 심성과 사정을 생각해 보다가 거기 연달아서 무심하고 나온 말이었다.
 
52
"장개석이 몰라? 하하하..."
 
53
또 웃는다.
 
54
"무에 씌셨소? 왜 이리슈?"
 
55
경애는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며 따라 웃지 않을 수 없다.
 
56
"이 때껏 우리를 괴롭히던 장개석이 말이야? 장훈이 말이야!"
 
57
"그 사람이 장훈이래요? 장개석이야?"
 
58
두 사람은 마주 웃었다. 두 두목가는 청년은 조선에는 희성인 장가이었다. 그래서 별명이 장개석이라 한다.
 
59
"그래 장개석이가 어쨌단 말예요?"
 
60
"자식이 의뭉하단 말이야."
 
61
병화는 밥을 두어 젓가락 떼어 넣는다.
 
62
"무에 의뭉해요?"
 
63
경애는 너무나 의외의 소리에 눈이 똥그래진다.
 
64
"우리가 결국 그놈한테 한수 넘어갔어..."
 
65
시장한 줄도 몰랐던 장위를 건드려 놓으니까, 무작정하고 들어오라는 모양이다. 젓가락도 안 드는 경애에게 권하기만 하면서 연해 퍼 넣는다.
 
66
"천천히 잡수세요. 이야기나 해가며..."
 
67
몸 아픈 사람이 체할 것도 걱정이지마는 이야기를 듣기도 경애는 급하였다.
 
68
그러나 병화는 먹기가 급하다. 밥 한 그릇을 후딱 먹고 나는 것을 보고 경애는,
 
69
"에그 체하시겠소."
 
70
하고 애를 쓰면서,
 
71
"그래 이야기를 하세요."
 
72
하고 말뒤를 채친다.
 
73
"무어?"
 
74
잊은 듯이 딴청이다.
 
75
"장개석인가 장훈인가 말예요!"
 
76
"응, 그건 그쯤만 알아두어요."
 
77
"누구를 놀리슈? 못할 말이면야 왜 애초에 꺼냈더란 말씀요?"
 
78
경애는 병화가 그래도 자기를 못 믿고, 어느 한도 이외에는 실정을 토하지 않는 것이 늘 불만이었다.
 
79
병화는 담배만 피우고 앉았다가 가만히 누워버린다. 한 팔은 뻐근하고 속으로 아프고 한 손은 쑤시고 부어올라왔다.
 
80
"여자라고 해서 못 믿으시지만, 그런 것은 구식- 봉건사상이에요! 구태여 알자고 애를 쓰는 것도 아니지마는, 영문을 시원스럽게 알고서나 얻어맞아가며 다녀야지! 그것도 아주 처음부터 내가 관계 안한 것이면 모르지만."
 
81
경애는 토라진 수작을 하며 밥상을 내다놓고 자기 주머니에서 해태표를 꺼내어 화롯불에 뱅뱅 돌려가며 골고루 붙인다.
 
82
똑똑 똑똑... 담배 파우, 담배 파우...
 
83
남자의 목소리다. 눕고 앉고 한 사람은 귀를 세우며 마주 보았다.
 
84
"어렵지만 좀 나가보우."
 
85
말이 떨어지기 전에 경애는 벌써 방문으로 나갔다.
 
86
"무슨 담배예요?"
 
87
안에서 소리를 치며 질러놓았던 조그만 안빗장을 빼니까 빈지짝에 달린 샛문이 밖으로 펄썩 열리며 찬바람이 확 끼치고, 뒤미쳐서 꺼먼 두루마기를 입은 자가 꾸부리고 기어들어온다.
 
88
경애는 머리끝이 쭈뼛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마터면 소리를 칠 뻔하였다.
 
89
거기에 미소를 띠고 우뚝 선 사람은 아까 청요릿집에서 시달리고 족치던 그 무서운 청년이다--지금 병화가 금방 말하던 '장개석'이다. 장훈이다.
 
90
검정 두루마기에 꾀죄죄한 목도리를 비틀어 끼우고 흰 고무신에 중같이 덧버선목이 대님 위로 올라오게 신은 양이 변장한 형사 같으나 분명히 아까 본 그 사람이다.
 
91
사람을 놀리는 듯한 미소를 여전히 머금고 턱으로 안을 가리키며,
 
92
"김군 있나요?"
 
93
하고 제잡담하고 올라가려 한다.
 
94
경애는 아까 병화에게 들은 말이 있는지라 다소 안심은 되나, 이 밤중에 별안간 달려든 것을 보니 그래도 미진한 것이 있단 말인가? 또 작당을 해 오지나 않을까, 하는 의심도 나서,
 
95
"가만히 계시오"
 
96
하고 제지를 하여놓고 밖에 누가 또 있나 없나를 보려고 문을 다시 열려니까, 그 동안에 병화가 부스럭부스럭 일어나 나온다.
 
97
"어서 올라오게."
 
98
병화는 놀라는 기색도 없고 그렇다고 반기는 양도 아니다.
 
99
"응, 마침 잘됐네. 올라갈 건 없고 궁금해서 잠깐 들렸네."
 
100
하고 붕대 처맨 손으로 눈을 주며,
 
101
"과히 다친 데는 없나?"
 
102
하고 웃는다. 아프냐고 물어가며 때리는 사람도 이 세상에는 있는지? 덜 다쳤다면 더 때려주마고 쫓아왔는지? 때려놓고 위문 오기란 술 먹여놓고 해장 가자 부르러 오기보다도 더 친절한 일인지?... 병화의 대답이 또 요절을 하겠다.
 
103
"나는 그만하면 겨우 연명은 되네마는, 이 동무(필순의 부친)는 갈빗대가 단 하나 부러졌다네."
 
104
하고 병화는 손가락 하나를 쳐들어 보인다.
 
105
"허허..."
 
106
'장개석'군은 염치 좋게 너털웃음을 내놓더니,
 
107
"그래 누워 있나?"
 
108
하고 묻는다.
 
109
"부러진 갈빗대는 두면 무얼 하나? 성이 가시다구 아주 빼내버리려 갔네."
 
110
"허허허..."
 
111
또 허허허...다.
 
112
"자네 소위증 안 나나? 가는 길에 의전 병원에 들러보게. 지금쯤 오려 내놨을 테니 물고 가서 쟁여를 먹든 구워를 먹든..."
 
113
병화도 빙긋대 보인다.
 
114
"허허허... 자네 노했나?"
 
115
"노할 거야 있나마는 어린애들을 시켜서 늙은이를 그게 무슨 짓인가?"
 
116
병화는 눈을 찌푸리고 입을 삐쭉해 보인다.
 
117
"게다가 백정놈들 모양으로 연장까지 가지구!"
 
118
"여보게 xx사 사람 들으리! 하지만 이 세상 놈들 쳐놓고 어떤 놈은 인백정 아닌가?"
 
119
'장개석'군은 코웃음을 치다가,
 
120
"하여간 미안하이. 그렇게까지는 하지 말라고 단속을 하였건만 그예 그렇게 되고 말았네그려. 하나 지난 일을 어쩌나. 자아, 난 가네. 어떻게 됐나 궁금해서 잠깐 들른걸세. 아까 내 말대로 오해는 결코 말게."
 
121
장훈은 훌쩍 나가버렸다.
 
122
옆에 섰던 경애는 어이가 없어 말이 아니 나왔다. 이 사람들이 참 정말 실성들을 하였단 말인가? 자기네 딴은 운치 있는 농세상으로 알고 있는 짓들인가? 서로 약은 체를 하고 서로 딴죽을 걸어 넘기는, 패를 쓰는 것이란 말인가? 귓구멍이 막힐 노릇이다.
 
123
"사람이 죽네 사네 하는데 그것들이 희락요? 무엇들요?"
 
124
경애는 문을 단단히 잠그고 들어와 앉으며 시비를 한다.
 
125
"저도 겁이 났든지 애가 쓰이든지 해서 위문을 온 모양이지."
 
126
병화는 번 듯이 누우며 웃어버린다.
 
127
"꼬락서니 하고 할 일이 무척 없는가봐. 사람 죽여놓고 초상 치러 주러 다닐 놈 아닌가! 그게 고작 한다는 일이야?"
 
128
경애는 분하고 미워 죽는 모양이다.
 
129
"그런 게 아니야. 제 딴은 나를 위해서 기밀비를 먹었다고 소문을 내놓은 것이라서, 젊은 애들이 들고 일어나서 너무 날뛰니까 끌어간 것이오. 손찌검을 하지 말라구 당부한 것도 사실은 사실인 모양이야."
 
130
"어림없는 소리두 퍽 하우. 면에 못 이겨서두 그렇구 뒷일이 무서워두 그렇게 말한 거지. 누가 내가 시켰다고 할까. 또 돈만 해두 하필 경무국 기밀비만 돈일까. 정말 당신 일을 위해서 헛소문을 내어준다면 친구가 대어준 것이라든지, 하고많은 말에 꼭 기밀비 문제를 꺼낼 게 무어란 말씀요?"
 
131
"응, 그런 게 아니지. 피혁이가 여기 들어와서 실상은 나보다도 장훈이를 먼저 만난 건 사실인 모양이야. 장훈이의 말은 이렇거든- 어디서 뉘게 얼마를 주었는지 나는 안다. 아는 사람은 주고받은 사람 외에 두 사람이 있다. 홍경애와 자기다. 그런데 그 돈으로 별안간 홍경애와 반찬 가게를 열었으니, 둘이 먹어버리고 입 쓱 씻으면 그만인 줄 아냐?- 장훈이의 첫째 문제가 이거란 말이야."
 
132
먹어도 소리도 없이 슬금슬금 먹어버리거나 뒤떠들고 가게를 벌이고 하면 당국에서나 동지간에 기밀비가 아니면 밖에서 들어온 돈이라고 단통 떠들 것이니, 그러고 보면 남의 일까지 방해될 것이다. 벌써 냄새를 맡았는지도 알 수가 없다. 턱 걸리기만 하며 이따 어떻게 될지, 내일 어떻게 될지 마음을 놓고 일을 할 수가 없다. 병화가 붙들려 들어가서 피혁의 사건이 단서가 난다면 장훈도 단박에 경을 치는 판이다. 그러고 보니 첫째는 장훈 일파와
 
133
읍각부동이라는 것을 저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 전기를 절연체로 막아 버리듯이 딱 끊어버리면 장훈에게 불똥이 튀어올 리는 없다. 또 만일 외국에서 들어온 때문에 시비가 난 것을 당국이 노려보더라도 얻어맞은 놈이 먹었다 할 것이요, 때린 놈은 못 얻어 먹은 분풀이를 나 것이라 할 것이니, 장훈에게는 유리한 발뺌이 될 것이다. 장훈은 앞질러서 변명을 해두자는 것이다.
 
134
둘째는 김병화를 반성시키자는 것이니, 계집에게 빠져서 그렇든지 돈에 팔려서 그렇든지간에 둔마된 투쟁욕을 각성시키고 회복시키자는 것이다. 또 그리 함으로 말미암아 타락해가는 다른 동지에게 볼모를 보이고 징계를 하는 방부제로 쓰자는 것이다.
 
135
셋째는 기밀비를 먹었다고 소문을 내놓아야 장훈 일파와 충돌이 일어날 이유가 생기기도 하지마는 한편으로는 병화에 대한 경찰의 의혹이 엷어질 것을 생각한 것이다. 기밀비란 한 군데서만 나오는 것도 아니지마는 저희끼리도 어느 구멍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특별한 사건이 생기지 않으면 세상에서 떠드는 대로 그런가보다 하고 내버려두거나 도리어 저의 끄나풀로 이용하려 드는 것이다. 사실 지금 병화가 이용당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이용이 된대도 설마 피혁이 다녀갔다는 것까지 알려 바칠 리가 없겠고, 또 만일 병화가 무슨 일을 은근히 한다면 당국의 주의가 엷어지느니만큼, 일시 오해를 받는 것이 성이 가시기는 해도 도리어 편한 점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만일의 경우에 병화의 뒷길을 터 주자는 것이다.
 
136
물론 장훈은 제 비밀을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장훈의 말은 간단하였었다.
 
137
"자네 그 돈 내게 주게."
 
138
장훈은 맡긴 돈처럼 만나는 길로 손을 내밀었다.
 
139
"돈이 무슨 돈인가?"
 
140
"두말 말고 내놓게. 반찬 가게 하라고 준 것도 아니요, 홍경애 용돈 쓰라고 준 것도 아니니까."
 
141
"자네 언제 내게 돈 맡겼나?"
 
142
장훈은 아물 말 안하고 벽장에서 뚤뚤 뭉친 봇짐을 꺼내서 툭 던지며,
 
143
"그럼 이걸 사가게!"
 
144
하였다.
 
145
"무언가?"
 
146
"무어나마나 풀어보게그려. 그 값어치는 될 게니."
 
147
병화가 안 펴보니까 장훈이 폈다. 검정 두루마기와 구두 한 켤레와, 그리고 조그만 백통 권총 한 자루.
 
148
"이 두루마기 눈에 익겠네 그려?...이 구두도 보았겠네그려?"
 
149
장훈은 셋째로 권총을 가리키며,
 
150
"이것은 자네가 쓰자는 것은 아니었으나 자네가 이것도 안 사간다면 그 값에 자네 목숨을 내가 사겠네. 그 대신 그 돈은 홍경애에게 유산으로 주면 그만 아닌가!"
 
151
이 때의 장훈의 입가에는 그 독특한 쌀쌀한 미소가 떠올라 왔었다.
 
152
"알았네! 그러나 지금 사지는 못하겠네. 돈으로 사지는 못하겠네."
 
153
"무엇으로 사겠나..."
 
154
"목숨으로!"
 
155
"그럼 자네 지금 하는 일은 무언가?"
 
156
"보호색! 사람에게도 보호색은 필요한 걸세."
 
157
두 사람의 문답은 간단 명료하였다.
 
158
"그럼 두 말 안 하네. 이 두루마기와 구두만 해도 자네가 변장을 시켜서 내보낸 증거는 확실하니까, 아무리 변심을 하는 한이 있어도, 후일 자네 입으로 탄로는 못시키렷다? 자네만 아니라 두루마기 임자며 그 딸 그 아내... 여러 사람이 엇갈렸으니까! 그러기에 내가 이렇게 한만히 자네게 보이는 것일세..."
 
159
"어쨌든 어서 집어넣게. 그리고 자네가 가지고 있는 것은 위험하니 잘 처치를 하게."
 
160
아까 삼청동에서 만나서 한 이야기는 이것뿐이었다.
 
161
병화가 장훈과 만나던 일장 설화를 듣다가 경애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162
"그런데 그이가 게다가 벗어놓고 갔을까?"
 
163
하고 눈만 깜박거린다.
 
164
"두루마기가 원체 작아서 장훈이 것과 바꿔 입었더군. 그때 바로 서울을 떴을 줄 알았더니, 어디 가서 앉아서 장훈이까지 만나고 간 거야."
 
165
경애는 고개를 끄덕여만 보인다.
 
166
피혁은 경애집에서 달아날 때, 병화가 사다가 준 고무신이 대가래 같아서 걷기 어렵기도 하고, 급한 판에 조선 버선을 바꿔 신고 하기가 거추장스러워서 그대로 신던 구두를 신고 갔는데, 그것도 장훈에게 벗어 맡기고 간 모양이다. 그러나 육혈포가 웬 것인지? 그것만은 장훈도 그 다음 말을 안 하였다.
 
167
장훈은 언제 무슨 일로 가택수색을 당할지 모르니까, 두루마기와 구두는 집에서 입고 끌던 것이요, 무기만 다른 데 감추어두었던 것을 찾아다가 오늘 활극에 잠깐 쓴 것이었다.
 
168
"제가 정말 그러면야 부하를 시켜서 사람을 죽도록 패기까지 할 거야 무어 있겠소?"
 
169
경애는 그래도 미심쩍었다.
 
170
"그렇지 않아도 헤어질 때 혹시 그놈들이 가만 있지 않을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은근히 일러주더군."
 
171
"참, 당신두 왜 이렇게 어림이 없으슈? 뒤로 일러주기까지 할 테면야 부하를 그리 못하게 말릴 게 아니겠소."
 
172
"응, 그렇게만 나하고 수군거린 뒤에 당장 표변을 해서 도리어 말리면 그 놈의 기밀비인가를 둘이 나누어 먹기로 타협이 되었다고 부하들이 들고 일어날 테니까, 장훈이 역시 암만 부하라고 그 당장에는 어찌 하는 수 없거든. 그뿐 아니라 장훈이로서는 어느 때든지 육박전이 한번 나서, 우리 둘 새는 영영 갈라섰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자는 것이거든! 그래야 서로 일을 하기가 편하고 나 역시 기밀비를 먹고 반동분자로 회에서 제명을 당하였다는 소문이 나는 것이 해롭지 않은 판에 도리어 잘된 셈이지. 당신하구 필순이 어른만은 좀 가엾게 되었지마는..."
 
173
"좀만! 요행 나는 갈빗대만 안 부러졌을 뿐이지 그런 봉변은 난생 처음이니까!"
 
174
하고 경애는 암만해도 분해서 핀잔을 준다.
 
175
"그는 그렇다 하고, 아무러면 당장 칼부림이 날 줄 알면서 멍텅구리처럼 어슬렁어슬렁 이 밤중에 그 무서운 길로 들어서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요?"
 
176
"그렇지 않아도 돌아올까 하다가 그놈들 주정꾼을 마침 만났는데, 그놈들도 오늘 그 일에 한통속일 줄야 알았나, 애초에 나를 부르러 온 놈들 역시 테러배(폭력단)들이기에 걸렸고나 하는 생각은 하였어도 장훈이가 시킨 것일 줄은 천만 의외이었거든! 딱 가보니 그놈이겠지."
 
177
"에이 듣기 싫소! 그 천치 같은 얼빠진 소리 그만허구 정신 좀 차려요. 장가에게 한수 넘어갔다지만 한수는커녕 두 수 세 수... 나중에는 몇백 수나 넘어갈지? 참 수났소!"
 
178
경애는 열이 나서 퍼붓고 코웃음을 친다.
 
179
"왜?"
 
180
"왜가 뭐예요! 안팎 벽을 치고 알로 먹고 꿩으로 먹고 하자는 수작 뻔하지! 그래도 정신이 덜 나신 게로구려?"
 
181
경애는 혀를 찬다.
 
182
"설마..."
 
183
병화는 자신 없는 눈초리로 빙그레하며 눈을 껌벅거리고 천장만 바라보다가,
 
184
"그럼 그 두루마기고 권총이고는 어디서 났더람?"
 
185
하고 경애의 얼굴을 귀엽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구하며 치어다본다.
 
186
"그리게 알로 먹고 꿩으로 먹는단밖에! 그이(피혁)는 벌써 반죽음은 되어서, 지금쯤 어느 유치장 속에든지 끙끙 앓아 누웠을 것이요. 장가야 말로 그 신이야 넋이야 하는 기밀비를 먹어도 상당히 먹었을 게지!"
 
187
"설마..."
 
188
"설마가 사람 죽여요! 이 밤이 못 새어서 오토바이 한패가 달려들 테니 두고 보슈!"
 
189
경애는 입술을 뾰족해서 내던지듯이 핀잔을 준다.
 
190
"결단코 그럴 리 없지!"
 
191
병화도 마음이 오락가락하였으나 조금 있다가 용기를 뽐내어서 단연히 이렇게 한 마디하였다. 그러나 경애는 귓가로 듣는다.
 
192
"어쨌든 오늘 예서 주무시지 맙시다."
 
193
"별소리를! 정 그렇게 마음이 안 뇌거든 집으로 가서 자구려."
 
194
병화가 도리어 핀잔을 준다.
 
195
"당하면 같이 당하지! 2집에 가서 자면 마찬가지 아닌가?"
 
196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전화가 따르르따르르 하고 불만 환한 점방에서 울린다.
 
197
"병원에선가?"
 
198
경애의 입으로는 이런 소리를 하였으나 도깨비 이야기 한 뒤에 밖에 나갈 때처럼 가슴이 설레며 머리가 으쓱해졌다.
 
199
"긴상 있습니까?"
 
200
전화통을 떼어든 경애의 얼굴은 해쓱하여졌다. 일본말 발음이 조선 사람 같지 않기 때문이다.
 
201
"누구세요? 왜 그러세요?"
 
202
경애의 혀는 뻣뻣하여졌다.
 
203
"나는 금천이올시다."
 
204
경애도 상점을 벌인 뒤로 이 사람을 몇 번 만나서 안다. 그러나 부전부전히 인사할 경황도 없어 그대로 수화기를 앞턱에 놓고 뛰어들어갔다.
 
205
"누구? 금천이?"
 
206
병화는 누운 채 묻는다.
 
207
"어떻게 하시려우? 없다고 할까?"
 
208
경애는 놀란 기색을 감추려 하였다.
 
209
"받지!"
 
210
하고 병화는 낑낑 일어난다. 경애도 없다고 한들 소용없을 것을 돌려 생각하였다.
 
211
"허허, 용하게 아셨구려?..."
 
212
"아--니, 손등을 좀 다쳤지만..."
 
213
"무얼 취해서들 그런 거지요..."
 
214
"글쎄--하하하... 그렇게 흔한 기밀비면야 나 같은 놈도 좀 주었으면 고마울 일이지만 핫하하..."
 
215
저편에서 껄껄 웃는 소리도 수화기 옆에 붙어 섰는 경애에게까지 들린다.
 
216
"내일 아침 9시? 예, 가지요. 그러나 거기서 잴 필요야 없지요? 아무쪼록 깨어서 내보내 주시지요."
 
217
"예--, 그럼 내일 뵙지요. 안녕히 주무십쇼."
 
218
전화는 탁 끊었다. 병화의 '하하하'가 연발되면서부터 경애도 얼굴을 펴며 따라서 상긋하고 섰다가, 전화통에서 떨어지자 병화의 성한 손에 매달리듯이 붙들며,
 
219
"내일 오래요?"
 
220
하고 묻는다.
 
221
"응, 그런데 그 취한 패가 붙잡혔다는구먼!"
 
222
"어떻게서?"
 
223
"모르지. 그런데 궐자가 나를 놀리는데, 기밀비를 혼자만 먹지 말고 한턱 낼 일이지 동냥도 아니 주고 쪽박 깨뜨리는 셈으로 때려만 주었느냐는군."
 
224
"헌데 그놈들이 경찰서에까지 가서 기밀비 논래를 한 게지."
 
225
"그야 취중에 오죽들 쌌을라구. 그러나 오늘은 유치장에 재고 안 내보낸다는데."
 
226
"고소해라!"
 
227
경애는 자기 감정을 과장하여 입으로는 이런 소리를 해도, 유치장에서 잔다는 것이 그렇게 고소할 것까지는 없었다.
 
228
그러나 내일 왜 오라나 그것이 경애에게는 또 걱정이었다. 당장 와서 데려가지 않는 것을 보면 사건을 중대시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기는 하나, 어디로 뛸 염려가 없으니까 슬며시 늦춰 주어 놓고 거동을 보아가며 차츰차츰 옭아 넣으려는 술책이나 아닐까, 경애는 그것이 걱정이었다. 병화도 그런 염려가 아주 없지는 않으나 경애를 안위시키느라고도 도리어 경애의 신경과민을 웃어 주었다.
 
229
덕기는 자정 가까워서 전화만 걸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늦기도 하였지마는 경애와 단둘이만 있는 데 오기가 싫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수술한 경과는 양호하다 한다.
 
230
흥분과 혼란과 신음 속에서 밤을 드새고 나서 신새벽에 병화는 경애만 남겨 두고 병원으로 달아났다. 병 위문도 급하고 손등의 붕대도 갈아 매야 하겠지마는 9시에는 경찰서에 출두할 것이 커다란 일이었다.
 
231
오늘은 가게도 못 열었다. 며칠 안 되는 터에 안 열어서는 안 되었으나, 사람도 없고 자고 나니까 손이 쑤시고 저려서 빈지부터 여는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병화가 나서자 필순이 달려들었다.
 
232
아침밥 후에 모친과 교대하기로 하고 가게를 내려온 것이다.
 
233
병화는 길에서 만나서 역시 가게를 쉬자고 하였으나, 필순은 들어오는 길로 가게를 부랴부랴 내었다. 경애도 벗고 나서 한몫 거들었다.
 
234
"선생님은 나 혼자만 맡겨두는 게 미안하다고 그러시지마는, 안 열면 되나요. 단골도 있고 한데, 이런 때일수록 할 건 제대루 해야지요."
 
235
필순은 이런 소리를 한 제 경애는 필순이 다시 한 번 치어다보였다. 고맙기도 기특하다고.
 
236
"한 시간만 견습을 하면 나 혼자도 볼 수 있으니 물건 값부터 가르쳐 주고 병원에 어서 가 보우."
 
237
"천만에요, 나 무얼 아나요."
 
238
두 여자는 다른 걱정을 다 잊어버린 듯이 깔깔대어가며 의초 좋게 가게를 보았다. 조금 있으려니 원삼이 터덜터덜 온다. 병화가 가다가 오늘만 일을 보아달라고 불러 보낸 것이다. 원삼은 오는 길로 벗어부치고 달려 들었다.
 
239
"이래봬두 무어든지 할 줄 압니다. 밥두 짓구 국두 끓이구 배달을 나가라시면 자전거도 탈 줄 압니다. 그러나 여기 서방님같이 사람은 치고 다닐 줄 모릅니다."
 
240
원삼은 여자들을 웃겨가며 빗자루부터 들고 나서 서둘러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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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三代) [제목]
 
염상섭(廉想涉) [저자]
 
1932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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