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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한 자의 슬픔 ◈
◇ 9 ◇
해설   목차 (총 : 12권)     이전 9권 다음
1919년
김동인
 

1. 9

 
2
재판 전날, 엘리자베트는 오촌모와 함께 서울로 들어와서 재판소 곁 어떤 객줏집에 주인을 잡았다.
 
3
서울을 들어설 때에 엘리자베트는, 한 달밖에는 떠나 있지 않았으되 그렇게 그리던 서울이므로 기쁨의 흥분으로 몸이 죽게 피곤하여져서 부들부들 떨면서 객줏집에 들었다.
 
4
'혜숙이나 만나지 않을까, 이환 씨나 만나지 않을까, S 혹은 부인이나 혹은 남작이나 만나지 않을까.'
 
5
그는 반가움과 무서움과 바람으로 머리를 푹 숙이고 곁눈질을 하면서 아주머니와 함께 거리들을 지나갔다. 할 수 있는 대로는 좁은 길로…….
 
6
그는 하룻밤 새도록 모기와 빈대와 흥분, 걱정 들로 말미암아 잠도 잘 못 자고, 이튿날 낯이 뚱뚱 부어서 제시간에 재판소에 들어왔다.
 
7
아주머니는 방청석으로 보내고 자기 혼자 원고석(原告席)에 와 앉을 때에는, 엘리자베트는 자기도 어찌 되는지를 모르도록 마음이 뒤숭숭하였다. 염통은 한 분(分) 동안에 여든일곱 번이나 뛰놀고 숨도 한 분 사이에 스무 번 이상을 쉬게 되었다. 땀은 줄줄 기왓골에 빗물 흐르듯 흘러서 짠물이 자꾸 눈과 입으로 들어온다. 서울 들어오느라고 새로 갈아입은 엘리자베트의 빈사저고리와 바지허리는 땀으로 소낙비 맞은 것보다 더 젖게 되었다.
 
8
세 분쯤 뒤에 그는 마음을 좀 진정하여 장내를 둘러보았다.
 
9
방청석에는 아주머니 혼자 낯에 근심을 띠고 눈이 둥그래져 서 있었고 피고석에는 남작이 머리를 저편으로 돌리고 있었다.
 
10
남작을 볼 때에 그는 갑자기 죄송스러운 생각이 났다.
 
11
'오죽 민망할까. 이런 데 오는 것이 남작에게는 오죽 민망할까? 내가 잘못했지, 재판은 왜 일으켜? 남작은 나를 어찌 생각할까? 또 부인은……?'
 
12
그는 이제라도 할 수만 있으면 재판을 그만두고 싶었다. 짐짓 자기가 남작에게 져주고 싶기까지 하였다.
 
13
그는 머리를 좀더 돌이켰다. 거기는 남작의 대리인인 변호사가 엄연히 앉아 있었다. 만장을 무시하는 낯으로 자기 혼자만이 재판을 좌우할 능력이 있다는 낯으로 변호사는 빈 재판석을 둘러보고 있었다.
 
14
변호사를 볼 때에 엘리자베트는 남모르게,
 
15
"아!"
 
16
하는 절망의 소리를 내었다. 자기의 변론이 어찌 변호사에게 미칠까, 그의 머리에는 똑똑히 이 생각이 떠올랐다. 남작에 대한 미움이 마음속에 솟아나왔다. 자기를 끝까지 지우려고 변호사까지 세운 남작이 어찌 아니꼽지를 않을까. 그는 외면한 남작을 흘겨보았다.
 
17
판사, 통변, 서기 들이 임석하고 재판은 시작되었다. 규정의 순서가 몇이 지나간 뒤에 원고의 변론할 차례가 이르렀다. 규정대로 사는 곳과 이름 들을 물은 뒤에 엘리자베트는 변론하여야 하게 되었다. 엘리자베트는 벌떡 일어서서 묻는 말에는 대답하였지만 변론은 나오지를 않았다. 재판소가 빙빙 도는 것 같고 낯에서는 불덩이가 나올 것 같았다. 그러다가,
 
18
'이래서는 안 되겠다. 용기를 내어야지.'
 
19
생각할 때에 얼마의 용기는 회복되었다.
 
20
그는 끊었닷 끊었닷 하면서 자기의 청구를 질서 없이 설명하였다.
 
21
"더 할 말은 없냐?"
 
22
엘리자베트의 말이 끝난 뒤에 주석판사가 물었다.
 
23
"없어요."
 
24
엘리자베트는 말이 하기 싫은 고로 겨우 중얼거리고 앉았다.
 
25
'겨우 넘겼다.'
 
26
엘리자베트는 앉으면서 괴로운 숨을 내어쉬면서 생각하였다.
 
27
피고의 변론할 차례가 되었다. 변호사는 일어서서 웅장한 큰 소리로, 만장을 누르는 소리로, 장내가 웅웅 울리는 소리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28
원고의 말은 모두 허황하다. 그 증거가 어디 있는가? 있으면 보고 싶다. 잉태하였다 하니 거짓말인지도 모르거니와, 설혹 잉태하였다 하여도 그것이 남작의 자식인 증거가 어디 있는가? 자기 자식이니까 떨어뜨리려고 병원에 데리고 갔다 원고는 말하지만, 주인이 자기 집에 가정교사가 병원에 좀 데려다 달랄 때 데려다 줄 수가 없을까? 피고가 자기 일이 나타날까 저퍼서 원고를 내어쫓았다 원고는 말하지마는 다른 일로 내어보냈는지 어찌 아는가? 원고는 당시에는 학교에도 안 가고 가정교사의 의무도 다하지 않고 게다가 탈까지 났으니, 누구가 이런 식객을 가만 두기를 좋아할까? 어떻든 원고에게는 정신이상이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29
엘리자베트는 변호사가 '원고의 말은 허황하다' 할 때에 마음이 뜨끔하였다. '남작의 자식인지 어찌 알까' 할 때에 가슴에서 '툭' 하는 소리를 들었다. 병원 이야기가 나올 때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에는 어찌 되는지 몰랐다. 청각은 가졌지만 듣지는 못하였다. 다만 둥둥 하는 사람의 말소리가 한 백 리 밖에서 나는 것같이 들렸을 뿐이고 아무것도 의식지를 못하였다. 유도에 목 끼운 때와 같이 온몸이 양상스러워지는 것이 구름을 타고 하늘을 떠다니는 것 같았다.
 
30
그가 바롯 의식상태로 들기 비롯한 때는 판사가 '더 할 말이 없느냐'고 물을 때이다.
 
31
판사의 묻는 말을 똑똑히 알아듣지 못하고 또 말하기도 싫은 엘리자베트는 다만,
 
32
"네."
 
33
하고 대답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런 뒤에는 그의 눈앞에는 검은 물건이 왔닷갔닷 움직움직하는 것만 보였다. 무엇인지는 똑똑히 알지 못하였다.
 
34
한참 있다가 판결은 났다. 원고의 주장은 하나도 증거가 없다. 그런 고로 원고의 청구는 기각한다.
 
35
이 말을 겨우 알아들은 엘리자베트는 가슴에서 두 번째 '툭'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뒤에는 정신이 아득하여지고 말았다.
 
36
몇 시간 동안을 혼미상태로 지낸 후에 겨우 정신이 좀 드는 때는 그는 이상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껌껌한 그 방은 사면 침척(尺) 두 자밖에는 안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방은 들썩들썩 움직인다.
 
37
'흥 재미있구나!'
 
38
그는 생각하였다.
 
39
그렇지만 이와 같은 한가한 생각이 그의 머리에 오랫동안 머물지를 못하였다. 높이 세 치, 길이 다섯 치쯤 되는 조그만 구멍으로 자기 아주머니가 보일 때에 엘리자베트는 펄떡 정신을 차렸다. 그때야 그는 자기 있는 곳은 보교(步轎) 안이고, 벌써 아주머니의 집에 다 이르렀고, 아까 판결받은 것이 생각났다.
 
40
보교는 놓였다.
 
41
엘리자베트는 우덕덕 보교에서 뛰어내리다가 꼬꾸라졌다. 발이 저린 것을 잊고 뛰어내리던 그는 엎드러질 수밖에는 없었다.
 
42
"에구머니!"
 
43
아주머니는 엘리자베트가 또다시 기절을 한 줄 알고 고함을 치며 뛰어왔다.
 
44
엘리자베트는 '죽어라' 하고 발이 저린 것을 참고 일어서서 뛰어 방 안에 들어와 꼬꾸라졌다.
 
45
그는 울음도 안 나오고 웃음도 안 나왔다. 다만,
 
46
'야단났구만, 야단났구만.'
 
47
생각만 하였다.
 
48
그렇지만 어디가 야단나고 어떻게 야단났는지는 그는 몰랐다. 다만, 어떤 큰 야단난 일이 어느 곳에 있기는 하였다.
 
49
오촌모가 들어와 흔드는 것도 그는 모른 체하고 다만 씩씩거리며 엎디어 있었다.
 
50
'야단, 야단.'
 
51
그의 눈에는 여러 가지 환상이 보인다. 네모난 사람, 개, 우물거리는 모를 물건, 뫼보다도 크게도 보이고 주먹만하게도 보이는 검은 어떤 물건, 아주머니, 연필─―── 이것이 모두 합하여 그에게는 야단으로 보였다.
 
52
오촌모가 펴준 자리에 누워서도 그는 이런 그림자들만 보면서 씩씩거리며 있었다.
【원문】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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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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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인(金東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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