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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한 자의 슬픔 ◈
◇ 7 ◇
해설   목차 (총 : 12권)     이전 7권 다음
1919년
김동인
 

1. 7

 
2
이튿날 아침 열시쯤 엘리자베트의 탄 인력거는 서울 성밖에 나섰다.
 
3
해는 떴지마는 보스럭비는 보슬보슬 내리붓고 엘리자베트의 맞은편에는 일곱 빛이 영롱한 무지개가 반원형으로 벌리고 있다.
 
4
비와 인력거의 셀룰로이드창을 꿰어서 어렴풋이 이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엘리자베트는 뜨거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어젯밤에, 남작 부인에게 자기 같은 약한 것에게는 촌이 좋다고 밝히 말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반생 이상을 서울서 지낸 엘리자베트는 자기 둘째 고향을 떠날 때에 마음에 떠나기 설운 생각이 없지 못하였다.
 
5
뿐만 아니라 서울에 자기 사랑 이환이가 있고 자기에게 끝없이 동정하는 남작 부인이 있지 않으냐, 엘리자베트는 부인의 친절히 준 돈을 만져 보았다.
 
6
이렇게 서울에게 섭섭한 생각을 가진 엘리자베트는 몸은 차차 서울을 떠나지만 마음은 서울 하늘에서만 떠돈다. 어젯밤에 밤새도록 잠도 안 자고 내일은 꼭 서울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여, 양심이 싫다는 것을 억지로 그렇게 해결까지 한 그도, 막상 서울을 떠나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만약 자기가 말할 용기만 있으면 이제라도 인력거를 돌이켜서 서울로 향하였으리라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치만 그에게는 그리할 용기가 없었다. 아니, 제일 말하기가 싫었고 인력거꾼에게 웃기우기가 싫었다. 그러는 것보다도, 그는 말은 하고 싶었지만, 마음속의 어떤 물건이 그것을 막았다. 그는 입술을 악물었다.
 
7
인력거는 바람에 풍겨서 한편으로 기울어졌다가 이삼 초 뒤에 도로 바로 서서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장마때 바람은 윙! 소리를 내면서 인력거 뒤로 달아난다.
 
8
엘리자베트의 머리에는, 갑자기 '생각날 듯 생각날 듯하면서 채 생각나지 않는 어떤 물건'이 떠올랐다. 그는 생각하여 보았다. 한참 동안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남작, 그는 가렵고도 가려운 자리를 찾지 못한 때와 같이 안타깝고 속이 타는 고로 살눈썹을 부들부들 떨었다. '남작'이 자기 생각의 원몸에 가까운 것 같고도 채 생각나지 않았다.
 
9
'남작이 고운가 미운가. 때릴까 안을까. 오랠까 쫓을까.'
 
10
그는 한참이나 남작을 두고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탁 눈을 치뜨면서 주먹을 꼭 쥐었다. 이제야 겨우 그 원몸이 잡혔다.
 
11
"재판!"
 
12
그는 중얼거렸다.
 
13
그렇지만 남작을 걸어서 재판하는 것은 엘리자베트에게는 큰 문제에 다름없었다. 남작 부인에게 얻은 위로금이 재판 비용으로는 넉넉하겠지만, 자기를 끝없이 측은히 여기는 부인에게 남편이 잘못한 일을 알게 하는 것은 엘리자베트에게는 차마 못 할 일이다. 이 일을 알면 부인은 제 남편을 어찌 생각할까, 엘리자베트 자기를 어찌 생각할까. 남작 집안의 어지러움―─── 엘리자베트는 한숨을 후― 하니 내쉬었다. 그것뿐이냐, 서울에는 자기 사랑 이환이가 있다. 만약 재판을 하면 그 일이 신문에 나겠고, 신문에 나면 이환이가 볼 것이다. 이환이가 이 일을 알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까, 또 몇백 명 동창은 어떻게 생각할까, 세상은 어떻게 생각할까.
 
14
"재판은 못 하겠다."
 
15
그는 중얼거렸다.
 
16
그렇지만 남작의 미운 짓을 볼 때에는, 엘리자베트는 가만 있지 못할 것같이 생각된다. 자기는 남작으로 인하여 모든 바람과 앞길을 잃어버리지 않았느냐. 자기는 남작으로 인하여 바람과 앞길 밖에 사랑과 벗과 모든 즐거움까지 잃어버리지 않았느냐. 그런 후에 자기는 남작으로 인하여 서울과는 온전히 떠나지 않으면 안 되지 않게 되었느냐. 이와 같은 남작을…… 이와 같은 죄인을…….
 
17
"아무래도 재판은 하여야겠다."
 
18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19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로도 재판을 하여야 할지 안 하여야 할지 똑똑히 해결치를 못하였다. 하겠다 할 때에는 갑(甲)이 그것을 막고, 못 하겠다 할 때에는 을(乙)이 금하였다.
 
20
'집에 가서 천천히 생각하자.'
 
21
그는 속이 타는 고로 억지로 이렇게 마음을 먹고 생각의 끝을 다른 데로 옮겼다.
 
22
이 생각에서 떠난 그의 머리는 걷잡을 새 없이 빨리 동작하였다. 그의 머리는 남작에서 S, 이환, 혜숙, 서울, 오촌모, 죽은 어버이들로 왔다갔다하였다. 한참 이리 생각한 후에 그의 흥분하였던 머리는 좀 내려앉고 몸이 차차 맥이 나면서 그것이 전신에 퍼진 뒤에 머리와 가슴이 무한 상쾌하게 되면서 눈이 자연히 감겼다. 수레의 흔들리 는 것이 그에게는 양상스러웠다.
 
23
조을지도 않은 채 깨지도 않고 근덕근덕하면서 한참 갈 때에 우르륵 우뢰 소리가 나므로 그는 눈을 번쩍 떴다. 하늘은 전면이 시커멓게 되고 그 새에서는 비의 실이 헬 수 없이 많이 땅에까지 맞닿았다. 비 곁에 또 비 비 밖에 비 비 위에 구름 구름 위에 또 구름이라 형용할 수밖에 없는 이 짓은, 엘리자베트에게 큰 무서움을 주었다.
 
24
'저 무지한 인력거꾼 놈이…….'
 
25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26
사면은 다만 어두움뿐이고 그 큰 길에도 사람 다니는 것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툭툭툭툭 하는 인력거의 비 맞는 소리, 물 괸 곳에 비 오는 소리, 외앵 하고 달아나는 장마때 바람 소리, 인력거꾼의 식식거리는 소리, 자기의 두근거리는 가슴 소리─―── 엘리자베트의 떨림은 더 심하여졌다.
 
27
그는 떨면서도 조그만 의식을 가지고 구원의 길이 어디 있지나 않은가 하고 셀룰로이드창을 꿰어서 앞을 내어다보았다. 창을 꿰고 비를 꿰고 또 비를 꿰어서 저편 한 이십 간 앞에 조그마한 방성 하나가 엘리자베트의 눈에 띄었다.
 
28
"아!"
 
29
그는 안심의 숨을 내어쉬었다.
 
30
'저것이 만약?'
 
31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눈을 비비고 반만큼 일어서서 뚫어지게 내어다보았다. 가슴은 뚝뚝 소리를 낸다…….
 
32
어렴풋이 보이는 그 방성에 엘리자베트는 상상을 가하여 보기 시작하였다. 앞집만 보일 때에는 상상으로 뒷집을 세우고 그것이 보일 때에는 또 상상의 집을 세워서 한참 볼 때에 그 방성은 자기가 오촌모의 있는 마을로 엘리자베트의 눈에 비쳤다.
 
33
엘리자베트는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이 흥분하여 피곤하여지고 가슴이 뛰노는 고로 서 있을 힘이 없었다. 가슴과 목 뒤에서는 뚝뚝 소리를 더 빨리 더 힘있게 낸다.
 
34
가뜩이나 더디게 걷던 인력거가 방성 어구에 들어서서는 더 느리게 걷는다…….
 
35
엘리자베트는 흥분한 눈으로 가슴을 뛰놀리면서 그 방성을 보았다. 길에 사람 하나 없다. 평화의 이 촌은 작년보다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작년에 보던 길 좌우편에만 벌려 있던 이십여 호의 집은 역시 내게 상관 있나 하는 낯으로 엘리자베트를 맞는다.
 
36
그 방성 맨 끝, 뫼 바로 아래 있는 엘리자베트의 오촌모의 집에 인력거는 닿았다. 비의 실은 그냥 하늘과 땅을 맞맨 것같이 보이면서 힘있게 쪽쪽 내리쏜다.
 
37
엘리자베트는 인력거에서 내렸다.
 
38
세 시간 동안이나 앉아서 온 그의 다리는 엘리자베트의 자유로 되지 않았다. 그는 취한 것같이 비츨비츨하며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같이 허둥허둥 낮은 대문을 들어섰다. 비는 용서 없이 엘리자베트의 머리에서 가는 모시저고리 치마 구두로 내리쏜다.
 
39
대문 안에 들어선 엘리자베트는 어찌할지를 몰라서 담장에 몸을 기대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40
그때에 마침 때좋게 오촌모가 무슨 일로 밖에 나왔다.
 
41
"아주머니!"
 
42
엘리자베트는 무의식히 고함을 치고 두어 발자국 나섰다.
 
43
오촌모는 늙은 눈을 주름살 많은 손으로 비비고 잠깐 엘리자베트를 보다가,
 
44
"엘리자베트냐."
 
45
하면서 뛰어와서 마주 붙들었다.
 
46
"어떻게 왔냐? 자 비 맞겠다. 아이구 이 비 맞은 것 봐라. 들어가자. 자, 자."
 
47
"인력거가 있어요."
 
48
하고 엘리자베트는 땅에 발이 닿지 않는 것 같은 걸음으로 허둥허둥 인력거꾼에게 짐을 들여오라 명하고, 오촌모와 함께 어둡고 낮고 시시한, 내음새나는 방 안에 들어왔다.
 
49
"전엔 암만 오래두 잘 안 오더니, 어찌 갑자기 왔냐?"
 
50
오촌모는 눈에 다정한 웃음을 띠고 물었다.
 
51
엘리자베트는 진리 있는 거짓말을 한다.
 
52
"서울 있어야 이젠 재미두 없구 그래서……."
 
53
"으응!"
 
54
오촌모는 말의 끝을 높여서 엘리자베트의 대답을 비인(非認)한다.
 
55
"네 상에 걱정빛이 뵌다. 무슨 걱정스러운 일이라도 있냐?"
 
56
'바로 대답할까.'
 
57
엘리자베트가 생각하는 동시에 입은 거짓말을 했다.
 
58
"걱정은 무슨 걱정이요. 쯧."
 
59
엘리자베트는 혀를 가만히 찼다. 왜 거짓말을 해…….
 
60
"그래두 젊었을 땐 남 모르는 걱정이 많으니라."
 
61
'대답할까.'
 
62
엘리자베트는 갑자기 생각했다. 가슴이 뛰놀기 시작한다. 치만 기회는 또 지나갔다. 오촌모는 딴 말을 꺼낸다.
 
63
"그런데 너 점심 못 먹었겠구나. 채려다 주지, 네 촌밥 먹어 봐라. 어찌 맛있나."
 
64
오촌모는 나갔다.
 
65
"짐 들여왔습니다."
 
66
하는 인력거꾼의 소리가 나므로 엘리자베트는 나가서 짐을 찾고 들어와 앉아서, 밖을 내어다보았다.
 
67
뜰 움푹움푹 들어간 데마다 물이 고였고 물 고인 데마다 비로 인하여 방울이 맺혀서 떠다니다가는 없어지고, 또 새로 생겨서 떠다니다가는 없어지곳 한다. 초가집 지붕에서는 누렇고 붉은 처마물이 그치지 않고 줄줄 흘러내린다.
 
68
한참이나 눈이 멀거니 뜰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 오촌모가 밥과 달걀, 반찬, 김치 등 간단한 음식을 엘리자베트를 위하여 차려 왔다.
 
69
엘리자베트는 점심을 먹은 뒤에 또 뜰을 내어다보기 시작하였다. 뜰 한편 구석에는 박 넌출이 하나 답답한 듯이 웅크러뜨리고 있었다.잎 위에는 빗물이 고여 있다가 바람이 불 때마다 잎이 기울어지며, 고였던 물이 땅에 쭈루룩 쏟아지는 것이 엘리자베트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그 잎들 아래는 허옇고 푸른 크담한 박 하나가 잎이 바람에 움직일 때마다 걸핏걸핏 보였다.
 
70
박 넌출 아래서 머구리가 한 마리 우덕덕 뛰어나왔다. 본래부터 머구리를 무서워하던 엘리자베트는 머리를 빨리 돌렸다. 머구리에게 무서움을 가지는 동시에 엘리자베트의 머리에는 아깟걱정이 떠올랐다.
 
71
그는 낯을 찡그리고 한숨을 후 내어쉬었다.
 
72
이것을 본 오촌모는 물었다.
 
73
"왜 그러냐? 한숨을 다 짚으면서…… 네게 아무래두 걱정이 있기는 하구나."
 
74
엘리자베트는 마음이 뜨끔하였다. 그러면서도, 이 기회 넘겼다가는…….
 
75
"아주머니!"
 
76
그는 흥분하고 떨리는 소리로 오촌모를 찾았다.
 
77
"왜, 왜 그러냐? 이야기 다 해라."
 
78
"서울은 참 나쁜 뎁디다그려……."
 
79
엘리자베트는 울기 시작하였다.
 
80
"자, 왜?"
 
81
"하―아!"
 
82
엘리자베트는 울음이 섞인 한숨을 쉬었다.
 
83
"아 왜 그래?"
 
84
"아― 어찌할까요."
 
85
"무엇을 어찌해. 자 왜 그러느냐?"
 
86
"난 죽고 싶어요."
 
87
엘리자베트는 쓰러졌다.
 
88
"딴소리한다. 왜 그래? 자 이야기해라."
 
89
오촌모는 얼른다.
 
90
엘리자베트는 끊었다 끊었다 하면서 무한 간단하게 자기와 남작의 새를 이야기한 뒤에, 재판하겠단 말로 말을 끝내었다.
 
91
"너 같은 것이 강가(姜家) 집에……."
 
92
엘리자베트의 말을 들은 오촌모는 성난 소리로 책망하였다.
 
93
괴로운 침묵이 한참 연속하였다. 아주머니의 책망을 들을 때에 엘리자베트는 울음 소리까지 그쳤다.
 
94
한참 뒤에, 오촌모는 엘리자베트가 불쌍하였던지 이제 방금 온 것을 책망한 것이 미안하였던지 말을 돌린다.
 
95
"그래두 재판은 못 한다. 우리는 상것이고 저편은 양반이 아니냐?"
 
96
아직 채 작정치 못하고 있던 엘리자베트의 마음이 이 말 한마디로 온전히 작정되었다. 그는 아주머니의 말을 우쩍 반대하고 싶었다.
 
97
"재판에두 양반 상놈이 있나요?"
 
98
"그래두 지금은 주먹 천지란다."
 
99
엘리자베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양반 상놈 문제에 얼토당토 않은 주먹을 내어놓는 아주머니의 무식이 그에게는 경멸스럽기도 하고 성도 났다. 그렇지만 그 말의 진리는 자기의 지낸 일로 미루어 보아도 그르달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재판은 꼭 하고 싶었다.
 
100
"그래두 해요!"
 
101
"그리 하고 싶으면 하기는 해라마는……."
 
102
"그럼 아주머니!"
 
103
"왜."
 
104
"이 동리에 면소가 있나요?"
 
105
"응 있다. 무엇 하려구?"
 
106
"거기 가서 재판에 대하여 좀 물어 보아 주시구려……."
 
107
"싫다야…… 그런 일은."
 
108
"그래두…… 아주머니까지…… 그러시면……."
 
109
엘리자베트의 낯은 울상이 되었다. 이것이 불쌍하게 보였던지 오촌모는 면서기를 찾아갔다.
 
110
이튿날 엘리자베트는 남작을 걸어서, 정조 유린에 대한 배상 및 위자료로서 5천 원, 서생아(庶生兒) 승인, 신문상 사죄광고 게재 청구 소송을 경성지방법원에 일으켰다.
【원문】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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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인(金東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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