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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한 자의 슬픔 ◈
◇ 11 ◇
해설   목차 (총 : 12권)     이전 11권 다음
1919년
김동인
 

1. 11

 
2
그가 눈을 아무 데로 향하든지 어떤 그림자는 거기 벌려 있었다. 그가 자든지 깨든지 어떤 그림자는 거기서 움직였다. 이렇게 엘리자베트는 사흘을 지냈다.
 
3
그러는 동안 다함이 없는 철학이 감추여 있는 것 같고도 아무 뜻이 없는 헛말 같이도 생각되는 말구가 흔히 무의식히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4
'표본생활 이십 년!'
 
5
그는 이 말을 여러 번 거푸 하였다.
 
6
이렇게 사흘째 되는 저녁, 복거리 낮보다도 더 훈훈 타는 저녁, 등과 사지 맨끝에서 시작하여 짜르륵 온몸에 도는 추위의 쾌미를 역증으로 받으면서 잠과 깸의 가운데서 돌던 엘리자베트는 오촌모의 소리에 놀라 흠칠 하면서 깨었다.
 
7
"왜 그리 앓는 소리를 하냐? (혼자말로) 탈인지 무엇인지 낫지두 않구."
 
8
"아― 유― 죽겠다아― 하아―"
 
9
엘리자베트는 눈을 감은 채로 아주머니의 소리 나는 편으로 돌아누우면서 신음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아프리라 생각하는 데서 나온 아픔밖에는 아픔이 없었다.
 
10
"왜 그래? 참 앓는 너보다두 보는 내가 더 속상하다. 후!"
 
11
오촌모도 한숨을 쉰다.
 
12
"아이구 덥다!"
 
13
오촌모는 빨리 부채를 집어서 엘리자베트를 부치면서 말했다.
 
14
"내 부쳐 줄 것이니 일어나서 이 오미잣물을 마세 봐라."
 
15
오미자라는 소리를 들은 그는 귀가 버썩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오미자를 좋아하던 그는 이불 속에서 꿈질꿈질 먹을 준비를 시작하였다. 오늘은 그의 머리는 똑똑하여졌다. 그림자가 안 보였고 아픔도 덜어졌다.
 
16
오촌모는 자기도 한 숟갈 떠먹어 본 뒤에 권한다.
 
17
"아이구 달다. 자 먹어 봐라."
 
18
엘리자베트는 눈을 뜨고 엎디어서 오미잣물을 마셨다. 새큼하고 단 가운데도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내음새를 가진 오미잣물은 병인인 엘리자베트에게 위에 없는 힘을 주었다. 그는 단숨에 한 사발이나 되는 물을 다 마셔 버렸고 도로 누웠다.
 
19
"맛있지?"
 
20
"네."
 
21
"그런데 어떠냐, 아프기는?"
 
22
엘리자베트는 다만 씩 웃었다. 다 큰 것이 드러누워서 다 늙은 아주머니를 속상케 함에 대한 미안과, 크담한 것이 '읅읅' 앓은 부끄러움이 합하여 낳은 웃음을 그는 다만 감추지 않고 정직하게 웃은 것이다.
 
23
"오늘은 정신 좀 들었냐? 며칠 동안 별한 소릴, 어더런 소릴 하던지?…… 응!…… 응! 무얼 '표분 생울 이십 년'이라던지?"
 
24
"표본생활 이십 년!"
 
25
엘리자베트는 생각난 듯이 무의식히 소리를 내었다.
 
26
"응! 그 소리 그 소리!"
 
27
오촌모도 생각난 듯이 지껄였다.
 
28
"아이 덥다!"
 
29
엘리자베트는 이불을 차 던지고 고함을 쳤다.
 
30
"응, 부쳐 주지."
 
31
어느덧 부채질을 멈추었던 오촌모는 다시 부치기 시작했다.
 
32
속에서 나오는 태우는 듯한 더움과 밖에서 찌르는 무르녹이는 듯한 더위와 사늘쩍한 부채 바람이 합하여, 엘리자베트의 몸에 쪼르륵 소름이 돋게 하였다. 소름 돋을 때와 부채의 시원한 바람의 쾌미는 그에게 졸음이 오게 하였다. 그는 구름 타고 하늘에 올라가는 맛으로 잠과 깸의 가운데서 떠돌고 있었다.
 
33
몇 시간 지났는지 몰랐다. 무르녹이기만 하던 날은 소낙비로 부어 내린다. 그리 덥던 날도 비가 오면서는 서늘하여졌다. 방 안은 습기로 찼다. 구팡에 내려져서 튀어나는 물방울들은 안개비와 같이 되면서 방 안으로 몰려 들어온다.
 
34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어느덧 역한 내음새 나는 모기장이 그를 덮었고 그의 곁에는 오촌모가 번뜻 누워서 답답한 코를 구르고 있었다. 위에는 불티를 잔뜩 앉히고 그 아래서 숨찬 듯이 할락할락하는 석유 램프는 모기장 밖에서 반딧불같이 반짝거리며 할딱거리고 있었다.
 
35
'가는 목숨으로라도 살아지는 껏 살아라.'
 
36
그 램프는 소곤거리는 것 같다.
 
37
엘리자베트는 일어나서 요강을 모기장 밖에서 들여왔다.
 
38
한참 타고 앉았다가 '악' 소리를 내고 그는 엎으러졌다. 가슴은 뛰놀고 숨도 씩씩하여졌다. 마음은 무한 설렁거렸다. 맥도 푹 났다.
 
39
한참 엎디어 있다가 그는 생각난 듯이 벌떡 일어나서 요강을 내어놓고 번갯불과 같이 빨리 그 속에 손을 넣어서 주먹만한 핏덩이를 하나 꺼내었다.
 
40
'내 것.'
 
41
그의 머리에 번갯불과 같이 이 생각이 지나갔다.
 
42
그의 머리에는 모순된 두 가지 생각이 일어났다.
 
43
'내 것.'
 
44
참 자식에 대한 사랑이 그 핏덩어리에게 일어났다.
 
45
'이것 때문에…….'
 
46
그는 그 핏덩이에 대하여 무한한 미움이 일어났다.
 
47
'이것도 저 아니꼬운 남작의 것, 나는 이것 때문에…….'
 
48
이 두 가지 생각의 반사작용으로 그는 핏덩이를 힘껏 단단히 쥐었다. 거기는 미움이 있고 사랑이 있었다.
 
49
그는 그 핏덩이를 씹어 먹고 싶었다. 거기도 미움이 있고 사랑이 있었다.
 
50
그는 그것을 쥔 채로 드러누웠다. 맥이 나서 앉아 있을 힘이 없었다.
 
51
드러누운 그에게는 얼토당토 않은 딴 생각이 두어 가지 머리에 났다. 이것도 잠깐으로 끝나고 잠이 들었다.
 
52
이삼 푼의 잠이 그를 슬치고 지나간 뒤에 그는 눈을 번쩍 뜨면서 무의식히 중얼거렸다.
 
53
"표본생활 이십 년!"
 
54
그 다음 순간 그에게는 별한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55
'약한 자의 슬픔!'
 
56
'천하에 둘도 없는 명언이루다.'
 
57
그는 생각하였다.
 
58
그는 이 문제를 두고 논문 비슷이, 소설 비슷이 하나 지어 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는 생각하여 보았다.
 
59
자기의 설움은 약한 자의 슬픔에 다름없었다. 약한 자기는 누리에게 지고 사회에게 지고 '삶'에게 져서, 열패자(劣敗者)의 지위에 이르지 않았느냐?! 약한 자기는 이환에게 사랑을 고백지 못하고 S와 혜숙에게서 참말을 듣지 못하고 남작에게 저항치를 못하고 재판석에서 좀더 굳세게 변론치를 못하여 지금 이 지경을 이르지 않았느냐?!
 
60
'그렇지만 이것은 밖이 약한 것이다. 좀더 깊이, 안으로!'
 
61
그는 생각하였다.
 
62
자기의 아직까지 한 일 가운데서 하나라도 자기게서 나온 것이 어디 있느냐? 반동(反動) 안 입고 한 일이 어디 있느냐? 남작 집에서 나온 것도 필경은 부인이 좀더 있으라는 반동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 병원 안에 들어간 것도 필경은 집으로 돌아올 전차가 안 보임에 있지 않으냐? 병원으로 향한 것도 그렇다. 재판을 시작한 것은? 오촌모가 말리는 반동을 받았다! 모든 일이 다 그렇다!
 
63
"이십세기 사람이 다 그렇다!"
 
64
그는 힘있게 중얼거렸다.
 
65
"어떻든…… 응! 그렇다! 문제는 '이십세기 사람'이라고 치고, 첫줄을 '약한 자의 슬픔'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줄을 '현대 사람의 다의 약함'으로 끝내자."
 
66
그는 자기 짓던 글을 생각하고 중얼거렸다.
 
67
'표본생활 이십 년이란 구는 꼭 넣어야겠다.'
 
68
그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글을 속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69
이리 짓고 저리 지어서, 이만하면 완전하다 생각할 때 그는 마지막 구를 소리를 내어서 읽었다.
 
70
"현대 사람 다의 약함!"
 
71
그런 다음에는 그의 머리에 한 공허가 생겼다. 그 공허가 가슴으로 퍼질 때에 그는 맥이 나고 발끝과 손끝에서 그 공허가 일어날 때에 그는 눈을 감았다. 눈이 무한 무거워졌다. 그 공허가 온몸에 퍼질 때에 그는 '후―' 숨을 내어쉬면서 잠이 들었다.
【원문】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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