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치 단체.
1896년 7월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등 서구 근대 사상과 개혁 사상을 가진 인사들에 의해 조직되어, 민중을 계몽하고 온 겨레의 자주적 노력으로 자주 독립 과 자유 민권의 성장을 이룩하려고 노력하였다.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관을 지어 그 곳에서 토론과 연설을 중심으로 하는 집회를 자주 열어 국민의 자주 독립 의식을 고취하고, 한글로 된
독립 신문을 발행하여 민중을 계몽하였으며, 영문판도 함께 발행하여 우리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려 하였다.
한편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를 얻어 자주, 민권, 자강 운동을 전개하고자
만민 공동회를 서울 종로에서 개최하여, 개혁안 6조를 결의, 외국에 의존하는 정치를 비판하고 자주적 처지에서 근대적 정치를 펼 것을 정부에 요구하였으며, 나아가 입헌 의회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여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근대적 의회 민주주의 정치 사상을 제창하였다.
자주 독립 사상과 자유 민권 사상, 자강 개혁 사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것은 근대적, 자주적인 국민 의식의 형성에 크게 이바지했고, 뒷날 일제 침략기에 민족 운동을 펼쳐 나갈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자주 독립 사상은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자주 국권을 굳게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그것을 위하여 전통 문화를 계승 발전시킬 것을 역설하였다. 또 나라의 자주 독립과 부강은 국민의 권리 신장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자유 민권 사상으로, 그것을 위해서는 민주주의 사상을 토대로 한 국민의 참정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자강 개혁을 위해 전제 군주제를 입헌 군주제로 바꾸고, 행정 제도와 재정 제도를 근대적으로 바꿀 것과, 무엇보다도 먼저 신교육과 산업 개발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독립 협회의 활동에 대해 정부도 처음에는 그것을 좋게 받아들여 중추원의 개편을 약속하는 등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독립 협회의 급진적 개혁 요구와 세력의 신장에 점차 위협을 느껴, 오히려 독립 협회를 비난하면서 보부상을 중심으로 조직된
황국 협회를 앞세워 그 활동을 탄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단체 사이에 대립과 충돌이 일어나자, 그것을 핑계로 독립 협회를 모함하여 해산시키고 그 간부를 투옥시켰다(
1898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