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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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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古朝鮮) 기자 조선(箕子朝鮮) # 고죽국 # 기자동래 # 수이함환뢰 # 식민사관 # 홍산유적
【역사】
(2021.02.17. 12:45) 
◈ 기자동래 및 기자조선의 실체는 무엇인가
[스카이데일리 연재] 주류사학계와 강호사학계의 주장의 차이
1970년대 홍산유적지에서 발견된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두고 한·중의 학자들이 관심을 가진 부분은 기후방정(㠱候方鼎)의 명문(銘文)인 ‘기후(㠱侯)’와 수이함환뢰(首耳銜環罍)의 명문(銘文)인 ‘고죽(孤竹)’이다. 그러나 한·중의 저명한 학자들로 이름난 이들도 이들 청동기명문의 올바른 해석을 하지 못하였다. 이 이유는 첫째, ‘기후(㠱侯)’의 ‘기(㠱)’가 서기전 24세기 오제(五帝)시기의 인명을 나타내는 족휘(族徽)임을 모르고 서기전 12세기의 기자(箕子)로 오인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수이함환뢰(首耳銜環罍)의 명문(銘文)을 ‘고죽(孤竹)’으로 오인(誤認)하였다. 수서(隋書) 배구전(裵矩傳)에는 “고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이었다. 주나라가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했다. 이 조선의 지명은 창려현 일대에는 위만의 왕검성이 있었으며, 고죽국이 있었던 조선현을 의미했다. 왕국유, 부사년 등 중국학자들은 “은(殷)이 망하자 기자는 선조의 땅으로 돌아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해석한 명문(銘文)은 ‘고죽(孤竹)’의 의미가 아니다. 그들은 ‘기자동래설’에 근거하여, 당시 은(殷)을 멸망시킨 후 기자를 방문한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한 사실’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위 명문을 고죽(孤竹)으로 잘못 해석했다.
 
그렇다면 주장하는 ‘기자동래설’의 실상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우리 민족의 최초의 나라를 세운 고조선의 전개과정 중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 체계를 주장하는 주류학계의 일부 인사들이다. 한 학자는 기자조선 대신에 한씨조선을 주장한 반면 다른 학자들은 위의 고조선 전개과정을 주장했다. 반면에 고조선에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부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 식민사관에 깊이 물든 역사계의 주류인 이들은 고조선 중심지를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주장하고 있으며, 그들은 단군신화를 불신하는 관계로 초기 고조선의 기록조차 믿지 않는다. 대신에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우리 역사 인식 체계에 포함시킴으로써 ‘한사군’의 체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B.C. 12세기 전후로 고조선의 국가성립이 이루어졌다고 보았으며 일부 학자들이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에 동조하였다.
 
특히 A씨는 “단군 및 단군조선은 고조선의 국가 권력이 형성되고 난 후에 지배층 사이에서 만들어진 신화 속의 이야기이지 실제의 역사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기자가 중국인이고 우리 문화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해서 우리 역사의 정통성을 해치는 것은 아니며, 고조선의 제도와 문물을 계승·발전시켰다면 위만조선을 고조선사의 연장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노관(盧綰)이 반하여 흉노로 달아나고, 위만(衛滿)이 무리 1000여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옷을 입고, 동으로 달아나 국경을 탈출하여 패수(浿水)를 건너 망명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조선왕 준(準)에게 투항하니 조선의 서쪽 변경의 100리의 땅을 봉하여 지키게 하였지만, 위만은 한병(漢兵)이 쳐들어온다고 거짓 고하고 조선왕 준(準)을 공격하여 빼앗으니 준(準)은 바다를 건너 마한 땅으로 달아나 한왕(韓王)이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위만은 86년 만에 한무제에게 망하였다. 이와 같이 기자와 위만은 고조선 서쪽 변경에 일시적으로 점거하였다가 없어진 존재였는데, 주류 역사계는 고조선의 체계에 이를 포함시켰으며, 반면 강호사학계는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제외하였던 것이다.
 
『사기』 「송미자세가」에는 주(周)무왕이 은(殷)을 멸망시킨 후 기자(箕子)를 방문하여 ‘홍법구주(洪範九疇)’를 묻고 조선에 봉하였다고 했다. 『한서』 「지리지」에는 ‘은(殷)의 도(道)가 쇠하니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가서 백성들에게 예의를 가르치고 누에를 치고 실을 짜도록 하였으며, 낙랑 조선민에게 범금8조를 제정하여 실시하였다’고 했다.
 
이와 같은 중국의 사서(史書)의 왜곡화를 두고 일부 학자는 “환상(幻想)의 기자조선”이라고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조선으로 망명한 후의 기자에 관한 문헌은 없으니, 기자의 역사적 생애는 끝났지만 기자가 간 후, 천여 년이 지난 후 한(漢) 무제(武帝) 때에 이르러 기자에 관한 잡음이 중국의 여러 서적상에 등장하였으니 이는 “한(漢) 무제(武帝)의 문화정책”의 소산이라고 했다.
 
주(周)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지만 신하로 여기지 않았다. 기자는 후에 조선왕이 되었다는 등의 위작(僞作)의 예를 학계 일각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홍법구주(洪範九疇)’는 서전(書傳) 주서(周書)에 ‘무왕이 즉위 13년에 기자를 방문하여 홍범구주를 전수받았다고 하면서 그 내용을 상세히 게재했다’. 이 ‘홍법구주(洪範九疇)’는 이미 천여 년 전 도산국(塗山國) 회의에서 단군의 아들 부루(夫婁)가 우(禹)에게 치수법을 전해준 금관옥첩(金簡玉牒)이다. 주본기(周本紀)의 ‘기자를 주무왕이 방문했다’는 기사는 거짓된 환상(幻想)이며, 『한서』 「지리지」의 기자(箕子) 관련 기사인 “조선의 백성을 교화”라고 서술한 부분도 오류라고 지적하였다. 이미 조선은 서방의 서장족보다 천여 년 앞선 찬란한 문명을 가진 ‘군자지국(君子之國 )· 대인지국(大人之國)’으로 중원의 고대인들이 호칭했다.
 
남송 범엽(范曄)이 지은 『후한서』에는 기자를 조선왕이 된 것 같이 기록하고, 기자(箕子)와는 상관없는 조선왕 준(準)을 기자의 40세손으로 만들었다. 위(魏)의 어환(魚豢)이 쓴 위략(魏略)에는 기자(箕子)의 후손을 조선후(朝鮮侯)로 만들고 주(周)왕조의 충신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후 당(唐) 고종은 중원 본토와 만주의 지명을 압록강 이내로 옮겼다. 즉 평양을 낙랑, 대동강을 패수, 압록강을 마자수, 용천을 서안평이라 하였다. 고려(高麗) 시기에는 모화사상이 급증하였는데, 한인(漢人)들이 왜곡시킨 ‘기자조선’을 받아들여 환상적으로 발전시킨 이는 이승휴의 『제왕운기』, 김일연의 『삼국유사』, 『당서(唐書)』 동이열전, 『삼제도회(三才圖會)』, 『요·금사지리지』 『대명일통지』이다. 반면, 정약용은 ‘지금 기자를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였으며, 신채호와 정인보는 기자조선을 부인했다.
 
이와 같이 왜곡된 기자동래 및 기자조선의 실체가 밝혀졌는데도 불구하고 대릉하 유역의 객좌현 부근에서 발견된 청동기 유물과 관련시킨 국내학자는 B씨다. 그는 “대릉하 유역에서 발견된 은말주초 교장갱에서 발견된 출토된 명문인 기후(㠱侯) 외에도 20여 씨족들의 족징(族徵)을 보고” 기자집단으로 오인하였다. 또한 “서기전 12~11세기에 발해연안의 대릉하 유역에서, 주(周) 세력으로부터 밀려난 은(殷) 왕족인 기자를 대표로 하는 은유민(殷遺民)에 의해 기자조선이 건국되었으며, 점차 은말주초의 문화 형태를 유지하면서 기자조선 고유의 특징적인 문화를 형성하여 발전하였을 것이다”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이 기자조선은 오랫동안 북경 일대의 연(燕)에 대응하여 지속하였으며, 연의 팽창으로 요서 2천리를 내주고 요동반도와 한반도 서북부로 밀려났었다. 이와 같이 B씨는 기자조선은 기자의 동주(東走) 이후 서기전 2세기 초의 조선왕 준(準)에 이르기 까지 거의 천년을 이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B씨의 이와 같은 주장의 오류는 세 가지이다. 첫째, 대릉하 유역인 객좌현의 홍산유적지에서 발견된 청동기의 비정과 명문(銘文)의 해석에 오류를 범했다. 객좌현에서 발견된 청동기를 이학근 등 중국학자들은 기자가 생존했던 은(殷) 말인 서기전 12세기로 비정하였으며, 둘째는 명문(銘文)인 기후(㠱候)를 기자(箕子)로 오인하였으며, 수이함환뢰(首耳銜環罍)의 명문(銘文)을 ‘고죽(孤竹)’으로 오인(誤認)했다. B씨 역시 중국학자들의 주장을 따랐을 뿐이다.
 
셋째는 B씨는 왜곡된 중국 문헌을 맹신하여 부사년(傅斯年), 함허자(涵虛子)의 기록과 『사기』, 『상서』의 홍법(洪範)조가 왜곡되었음을 모르고 인용했다.
 
이와 같은 B씨가 범한 오류를 반복하고 있는 이는 C씨가 있다. 그의 저서 『단군과 고조선사』에서는 객좌현 일대에서 발견된 일련의 청동기 유물에 새겨진 명문(銘文)인 기후(㠱候)와 이에 대한 비정시기와 해석을 중국학자들의 주장에 동의했다. 따라서 C씨는 기후(㠱候)와 고죽국의 실재와 결부시켜, 고죽의 세력이 대릉하 유역까지 미쳤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D씨도 B씨와 같은 오류를 범하였다. 그가 펴낸 서적에서는 객좌현 북동촌에서 발견된 기후(㠱候)의 명문을 기자조선과 연관시켜 기후(箕侯)와 고죽(孤竹)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2004년에 출간한 『단군, 만들어진 신화』에서도 ‘대릉하 유역의 청동기 저장갱과 기자조선’을 기술하면서 청동기 명문과 기자조선을 관련시키고 있다.
 
이와 같이 홍산유적지인 객좌현에서 발견된 청동기의 주조시기의 비정과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대한 해석에 대한 중국학계의 오류로 인해 국내 역사학계가 비판 없이 추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결국 이와 같은 요인으로 인해 우리 역사의 고조선사마저 왜곡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대한 대응책이 시급함을 느낄 수 있다.
고조선(古朝鮮) 기자 조선(箕子朝鮮) # 고죽국 # 기자동래 # 수이함환뢰 # 식민사관 # 홍산유적
【역사】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 숨겨진 허구의 기자조선, 평양비정의 실상
• 기자동래 및 기자조선의 실체는 무엇인가
• 홍산유적지 청동기 명문(銘文)의 실체를 분명히 밝힐 때다
【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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