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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이일걸의 지식창고 2020.03.31. 17:22 (2020.03.31. 17:22)

고구려의 흔적 고구려산성을 답사하다

 
[스카이데일리 연재] 中, 용담산성의 고구려 유적 파묻고 흔적 지우기 시작
전 년도에 이어 이번(2006년)에도 대전의 간도되찾기운동본부 지회에서 제2차 고구려산성 답사를 안내ㆍ지도 요청이 왔다. 이번 답사 과정은 지난해보다 다르게 기획하였다. 배편을 이용한 5박 6일의 일정이다. 대련(大連)에서 출발하여 요양(遼陽)의 요동성(遼東城) - 심양(瀋陽) - 무순(撫順)의 신성(新城) - 길림(龍潭)의 용담산성(龍潭山城) - 반석(磐石) - 매하구(梅河口) - 유하현(柳河縣) 의 나통산성(羅通山城) - 통화(通化) - 환인(桓仁)의 흘승골성(紇升骨城) - 단동( 丹東) - 대련(大連)으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이번 고구려산성 답사는 고구려의 평양설이 있는 요양의 요동성, 무순의 신성, 유하현의 나통산성, 환인의 흘승골성의 네 개의 성으로 잡았다. 특히 유하현(柳河縣)의 삼원포(三源浦)는 이회영 6형제 일가, 이상룡 일가의 망명지였다. 이들은 1911년 자치단체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한 곳이며, 10년 뒤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은 봉오동ㆍ청산리전투의 주역이 돼 일본군을 크게 이겼다. 이와 같은 항일운동 중심지의 시발점보다도 1712년에 건립된 백두산정계비와 관련된 이 일대의 지리정보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유하현 남쪽에는 휘발하(輝發河)가 매하구시로 관통하여 송화강으로 유입되고 있다. 이 휘발하 상류가 토문하(土門河)인데 요(遼) 시기부터 존재하여『요동지(遼東志)』와『전용지(全遼志)』에 표기되어 왔다는 점이다. 또한 18세기에 제작한 서양고지도인 당빌지도와 본느지도에는 토문하(Tumen)로 표기되었으며, ‘신중국지도첩’의 ‘조선전도’에도 토문하(Toumen)로 표기했다.
 
또한 토문하의 남쪽 산맥은 계림합달령(鷄林哈達嶺)인데 지금의 길림합달령(吉林哈達嶺)이다. 『수도제강(水道提綱)』에는 흥경 동북쪽 160리에 있는 계림합달령(鷄林哈達嶺)에서 토문하가 나온다고 하였다. 그리고 강희제가 치제(致祭)한 장백산(長白山)은 개원(開原) 동쪽이며 심양에서 동북쪽으로 260리에 위치한다고 하였다(嘉慶重修一統志중). 따라서 중국이 본래 이 계림합달령을 장백산으로 불렀으며, 백두산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와 같은 증거는 강희제가 지시한 장백산의 사찰에도 나타난다. 즉 1677년의 각라무묵눌, 1684년의 늑초 등이 답사한 지역은 백두산이 아닌 3도구 일대인 환인지역이었다. 환인 일대에는 동가강이 압록강으로 흘려서 바다로 유입되고 백두산에서 내려오는 압록강보다도 흐르는 물의 수량이 많다. 그러므로 300여년 전 강희제가 인식했던 장백산은 백두산이 아니며, 계림합달령(鷄林哈達嶺)이다.
 
따라서 강희제와 목극등은 백두산 지역의 지형과 비슷한 계림합달령(鷄林哈達嶺)에서 유래하는 토문하의 명칭을 백두산의 오도백하로 옮겨서 토문강으로 변조하였다. 1712년 세칭 백두산정계비를 백두산에 임의로 세우면서 오도백하를 토문강으로 지칭했던 것이다. 이들은 백두산 서쪽의 약 300리의 땅을 더 확보하기 위해, 이와 같이 지리정보에 어두운 조선을 우롱했던 것이다.
 
답사단 25명은 8월 12일 오후 5시에 인천항을 출발하여 이튿날 8시에 대련항에 도착했으며, 9시 40분에 하선하여 중형 버스에 승차하여 한식당(正宗韓國料理)으로 향했다. 40분간의 식사 후 11시 40분에 출발하였다. 대련 역 앞의 가로수는 향나무와 포플러 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대련-심양간 고속도로를 이용하였는데 비가 오다가 개였다. 개주(盖州)에 오니 논의 벼가 보인다. 비가 온 후라서 농무가 진하게 끼었다. 오후 5시 경에 동경릉을 지나 요양시 동문 일대를 답사하였다. 여기 요양시에 세칭 요동성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의심이 가는 구석이 많다. 세월의 흐름 속에 성곽은 무너지고 중·일의 역사조작으로 인해 이 성은 요동성이고, 장수왕은 대동강 부근의 평양성으로 천도했다는 것이 우리의 역사교과서 내용이다.
 
이와 같은 조선사편수회가 조작한 역사의 흐름은 아주 치밀해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의 국내성은 집안으로 비정하고 있다. 평양 부근에서 낙랑의 유물을 발견하였다고 조작하여 한사군의 위치도 대동강 일대와 이북지역으로 간주하였다. 우리 역사에 대하여 이와 같은 일제의 철저한 조작에 의한 반도사관의 역사가 완성되었다. 이미 식민사관에 빠진 우리 역사교과서처럼 장수왕이 실제 천도한 후기 고구려 수도는 대동강가의 평양이 아닌 요양이었다는 설과 산서성의 임분 설이 등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요동성의 이름도 다른 지역이 아닐까.
 
요양이 요동성이라면 평지의 성이다. 20세기 초에도 요양 시내의 성벽과 성문이 남아 있었다고 하였다. 동쪽 - 남쪽 - 서쪽 지역은 태자하의 둥근 물 흐름을 해자(垓子) 삼아 성벽을 이용했을 것 같고, 북쪽은 석벽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때의 해자(垓子)였던 호성하(護城河)가 도로 옆에 남아있다. 지금 남은 호성하는 1372년 명 시기에 성 방어와 조운 운수의 목적으로 새로 건설한 것으로 전해지나, 당시 성 주변의 해자를 확장하고 개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평저성인 요동성의 해자는 태자하의 강줄기를 따라 동·남·서쪽까지 자연적인 강의 물을 이용하여 난공불락의 성을 보호하는 해자를 구성하였다.
 
수(隋)와 당(唐)은 요동성을 차지하기 위해 고구려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수양제는 612년에 100만 대군으로, 613년에는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여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645년 5월 당태종 이세민의 화공(火攻) 침략으로 인해 요동성이 함락되어 2만명이 전멸하고 성의 주민들은 포로가 되었다. 당의 이세민이 요동성을 차지한 것은 석 달뿐이었다.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에 참패 후 당의 이세민은 겨우 철수하였지만 몇 달 못가서 죽고 말았다. 우리 답사단은 요(遼) 시기에 쌓은 백탑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정탑시(灯塔市)에 오후 6시에 도착하니 오던 비가 멈추었고, 바로 혼하(渾河)가 나타났다. 심양시의 상징인 백탑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오후 7시에 소흥주점(紹興酒店)에서 저녁을 먹었다. 심양시의 심하구 북첨로에 있는 서심동방주점(瑞心東方酒店)에 짐을 풀었다. 이튿날 7시 40분에 숙소를 출발하여 40분 후 심양 - 무순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하였다. 8시 50분에 무순의 신성(高爾山山城)에 도착하였다. 무순시는 노천탄광으로 유명하며 혼하(渾河)가 도시 중앙을 관통하고 있었다. 신성은 무순시의 북쪽에 있는 약 50미터 높은 산 능선에 위치하여 일자형의 산성으로 보인다. 그 능선에 판축 형식으로 토성을 쌓은 큰 형국의 산성이며 성곽 안이 매우 넓었다. 서편에는 관음사라는 절이 있고, 관음전과 요(遼) 시기 고탑(古塔)도 보인다. 335년에 고국원왕이 신성을 구축하였으며, 동천왕은 관구검의 공격으로 무너진 요동의 영토를 회복하고 신성을 새로 구축하였다.
 
신성의 북쪽에는 부여성, 바로 남쪽의 혼하 변에는 현성, 남쪽 심양에는 개모성, 동쪽에는 남소성이 위치하여 고구려성 중에서도 신성은 방어 전략상 중요한 성이다. 수(隋)와 당(唐)의 고구려 침략 통로 중 북로의 목표는 신성이었다. 신성 앞에서 여행객에게 구걸하는 장애인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 답사단은 짧은 시간 내에 신성 내부를 빠르게 답사 후 버스에 승차하였다. 부근에 있는 ‘만족자치현’을 지났다.
 
무순시의 좌우 산들이 단정한 모습이며, 들에는 옥수수가 무성하였다. 북쪽이 높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마을도 보인다. 11시 20분에 철령(鐵嶺)시에 도착하였다. 제법 깨끗한 도시로 보인다. 고려시기에 서북 국경이 심양 - 철령 - 장춘 - 선춘령 공험진으로 이어졌는데도, 일제의 조선사편수회는 철령을 함경남도의 함흥 일대로 조작하여 고려의 국경선을 의주 - 함흥선으로 축소 왜곡시켰다. 12시 30분에 휴게실에 도착하여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다시 출발하니 서남쪽에 위안보진이 보이고 높은 산들이 나타났다. 4차선의 심양 - 하얼빈 고속도로다. 옥수수 밭과 낮은 구릉이 연이어 있다. 창도진 이후 산들은 낮은 구릉으로 변했다. 구릉 속에도 마을이 나타났다.
 
사평시를 지나치고 심양 - 장춘간(285km) 고속도로를 달렸다. 장춘 외곽 고속도로를 지나서 오후 4시에 길림시의 용담산성에 도착하였다. 길림시는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송화강이 지나가고 있다. 용담산성은 이 송화강 변의 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구려의 북쪽 국경을 지키는 요새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산성이었다. 특히 용담산성은 송화강 변 북쪽에 위치한 산성으로 길림시 일대를 모두 살필 수 있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더구나 송화강 서남쪽의 2,5㎞에는 동단산 산성이 위치하여 용담산성을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 용담산성의 답사는 13년만에 두 번째다.
 
용담산성은 고구려가 부여를 정복한 후 광개토대왕 시기(4세기 말)에 축조한 것으로 부여성으로 비정된다. 길림지역은 부여의 중심 지역이었다. 성은 돌과 황토를 혼합하여 축조하였으며, 성의 둘레 길이는 2396미터이다. 1993년 답사 때에는 중국이 추진한 동북공정의 실상들이 용담산성의 안내판에도 왜곡되었다고 언론에 알려졌다. 중국 정부는 용담산성의 고구려의 유적을 파묻고 동물원을 없애지 않는 등 고구려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 답사 당시 왼편의 용봉사(龍鳳寺)에서 고대악기의 연주 소리가 들렸는데 이 연주조차 없어진 것 같다. 그때 청(淸)시기에 만들었진 사찰이니 아마 전해져 오는 전통 악기 소리로 나에게 매우 익숙한 리듬으로 들렸다. 혹시 저 악기소리가 고구려 시기부터 전해진 전통적인 소리인지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우리 일행은 용담산성의 제일 높은 고지에 올라 길림시를 우회하여 도도히 북으로 흐르는 송화강을 조망할 수 있었다. 하산하면서 용담산성의 천지(天池)를 구경하였다.
 
용담산성의 천지는 내가 답사한 고구려 산성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52.8m x 25.7m, 깊이 9.06m)였다. 또한 한뢰(旱牢, 직경10.6m, 깊이 2~3m)라고 하는 돌로 축조한 원형의 음식물 창고가 있었다. 아마 용담산성에 주둔한 병사들의 수도 매우 많았을 것으로 보였다. 이천년 세월에도 굳굳하게 버틴 용담산성과 송화강의 푸른 물에 호연한 기운을 받은 답사단은 매하구시를 향해 길을 재촉하여 오후 10시가 넘어 매하구빈괸(梅河 口賓館)에 도착하였다. 내일은 나통산성(羅通山城)을 답사할 예정이다.
【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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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