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내분과 일본 장수의 반간계(反間計) 등으로 투옥된 충무공 이순신을 구하려 했던 약포
정탁의 상소문. 줄여서 ‘신구차(伸救箚)’로 불린다.
정유재란 발발 직전인
1597년 2월 정치적 내분과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 등의 계략에 빠진 선조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체포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선조는 “이순신은 임금을 무시했고 나라를 저버렸으니 죽여야 마땅하다”면서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므로 형벌을 끝까지 시행할 것”이라고 했다. 신하들 역시 입을 모아 ‘이순신을 벌하라’고 주장하던 시기였다.
예천 출신으로 당시 행지중추부사였던 정탁은 ‘이순신옥사의(李舜臣獄事議·이순신의 옥사를 논하는 상소문)’를 지어 “이순신 같은 자는 얻기가 쉽지 않다”면서 “그가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된다면 적들이 소식을 듣고 서로 축하할 것”이라며 홀로 이순신을 변호했다.
이후 정탁은 보다 자세한 주장과 근거를 담아 내용을 보강한 논구이순신차를 썼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에 대한 감면령이 내려져 논구이순신차를 선조가 받아보진 못했다. 하지만 상소문엔 “이순신의 죄는 극히 엄중하나 또다시 고문을 한다면 생명을 보장하기 어려우니, (이순신이)목숨을 걸고 공을 세울 수 있도록 해달라”는 내용 등, 이순신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 정탁의 주장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당시 영의정으로서 이 상황을 직접 목격한 서애 류성룡은 저서인 ‘징비록(懲毖錄)’에서 “이순신이 옥에 갇히자 임금께서 대신들에게 죄를 논하라고 했으나, 오직 정탁만이 ‘이순신은 명장이니 죽이면 안된다’고 주장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정탁의 상소가 올라간 뒤 선조는 “(이순신의)사형을 감면하라”는 명을 내렸고 이순신은 투옥 후 약 한달만에 옥문을 나와 백의종군(白衣從軍)했다. 이순신의 자리를 맡은 원균의 수군이 칠천량에서 대패하자, 선조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복직시켰다.
이후 이순신은 명량에서 함선 13척을 이끌고 일본 수군 300여척과 싸워 승리해 빼앗긴 제해권(制海權)을 되찾았다. 논구이순신차는 훗날 조선 정조가 충무공의 삶과 업적, 기록 등을 모아 편찬한 문집인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도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