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2 ~ 1392] 자(字)는 징수(澄叟)이고, 호는 이유헌(理猷軒)이며, 고려 충숙왕 후원년(1332년)에 문훤공(文喧公)
신용희(申用羲)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27세에 쌍둥이 형
백청(伯淸)과 동방급제(同榜及第)하였다.
그가 40세 때인 신해년(辛亥年, 1371년) 겨울에 「
역대전리가(歷代轉理歌)」를 짓고, 그 이듬해 영해(寧海) 인량촌(仁良村)에 퇴귀(退歸)하였으나, 우왕(禑王) 4년(1378년)에 나아가서 이부상서(吏部尙書), 대광첨의(大匡僉議), 판문하부(判門下府), 당상판사(堂上判事), 평산부원군(平山府院君) 등이 되었으며, 때때로 임금 앞에서 이 노래를 창주(唱奏)하였다고 한다. 거관(居官)한 지 일개월에 시정(時政)의 어수선함을 알고 봉정산(鳳停山) 아래 은거하니 이색(李穡)은 봉정재(鳳停齋)라는 현액(懸額)을 써주었다고 한다.
임신년(壬申年, 1392년)에 왕조가 바뀜을 듣고 동향통곡(東向痛哭)하고 드디어 동해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