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1 ~ 1643] 프랑스의 왕이다.
앙리 4세와
마리 드 메디시스의 아들로 9세의 나이로 1610년에 즉위하였고, 모후의 섭정 기간이 지난 1617년부터 친정을 하게 된다.
친정 이전 섭정 정부의 실정(失政)으로 귀족들이 반항을 시도, 내란의 위험이 생겼으며, 1617년부터 친정(親政)을 하였으나, 국무(國務)보다 음악이나 사냥을 좋아하여 국내의 동요는 그칠 사이가 없었다. 귀족들은 이 기회에 옛 특권을 회복하고자
삼부회 개최를 요구했다. 그러나 국왕측은 삼부회 내부의 대립을 이용하여 이것을 해산시켰다. 그 후 프랑스 대혁명의 전야까지 한 번도 삼부회는 개최되지 않았고, 전제적 정치가 행해지게 되었다.
1624년 당시 추기경
리슐리외를 재상으로 등용하여 점차 국가체제를 정비하였으며, 귀족 세력과
위그노파를 탄압하였다. 부르봉 왕권 절대주의의 기틀을 마련하여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또
30년 전쟁에도 개입하였다.
즉위한 날과 퇴위한 날이 같은 왕이다.
지방의 고등법원의 힘을 제한하기 위해 왕은 권력의 중앙 집권적인 정책을 시작하였다. 그는 상업과 해운, 그리고 진정한 식민지 제국의 건설을 장려하였다.
앙리 4세가 제정한
낭트칙령으로 이룩한 프로테스탄트와의 화해 관계를 깨고 라 로셸을 포위하여 요새를 해체하는 등 재투쟁을 통해
위그노를 탄압하였다. 이런 위그노의 탄압은
낭트칙령을 무효화 시킨
루이 14세의
퐁텐블로 칙령(1685년 10월)으로 이어진다
루이 13세는 1615년 11월 24일,
펠리페 3세의 딸
안 도트리슈와 결혼했다. 같은 가톨릭 국가로서 프랑스와 스페인이 왕실간의 결혼을 통해 서로의 동맹을 공고히 하는 것은 양국의 오랜 전통이었다. 안 도트리슈는 시집온 뒤에도 스페인에서의 관습을 고집하며 프랑스 궁정에 좀처럼 친숙해지지 않았고, 루이 13세 또한 왕비를 불신하여 부부의 관계는 항상 냉랭했다. 그러나 안 도트리슈는 결혼한 지 23년 만에 왕위를 이어받을 아들을 낳아 왕비로서의 의무를 완수했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녀는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