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8 ~ 1591] 자는 경상(景祥), 호는 삼송당(三松堂)이다. 학문 행의로 인근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1573년(선조 6) 성균 진사 이후 서당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니, 문인이 70여 인이었다. 학봉
김성일, 백담
구봉령 등과 교분이 있었다.
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기자전참봉(箕子殿參奉) 남기(南麒)이다. 경전을 널리 읽고 의리를 탐색하여 여러 번 향시(鄕試)에 장원하여 명성이 자자했다.1573년(선조 6)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1등 4위에 합격했으나 후진교육을 낙으로 삼아 가르치니 많은 선비가 운집하여 성취한 사람이 많았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조목(趙穆)·
김성일(金誠一) 등과 교류하였다. 퇴계가 지어 준 ‘再行視陶山南洞’이라는 시가 있다.
수서(水西)
박선장(朴善長)은 제자이자 사위인데, 선장이 10세 때 어머니를 따라 경상도 영천(榮川: 지금의 榮州)에 있는 외가에 내려가 남몽오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605년(선조 38)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7위에 급제하여 행 경상도사(行慶尙都事)를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를 추증받았다.
1676년(숙종 2)에 세워진 기영사(耆英祠)에 진사 송계(松溪) 금인(琴靭)·생원 도은(陶隱) 권호신(權虎臣)·사위 박선장과 함께 제향되었다. 기영사는 1766년(영조 42)에
구만서원으로 승격했고,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奉化邑) 화천리(花川里)에 있다.
형 남몽구(南夢龜)와 동생 남몽원(南夢黿), 남몽타(南夢鼉), 남몽별(南夢鼈), 남몽규(南夢虯), 남몽벽(南夢鼊)이 있다.
일찍이 퇴계 문하에 출입하니, 퇴계 이황이 시를 지어 보낸 적이 있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즐거움은 젓대소리 부는 것 같으니인자로움이란 낱알 쭉정이 같은 게 아니리그대를 위해 노래를 지었으나 보여주진 못했으니한 삼태기에 쓸어 넣어 버리지는 마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