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학교(五山學校)는
1907년 12월 남강(南崗)
이승훈(李昇薰)이 민족운동의 인재와 국민교육의 사표(師表)를 양성할 목적으로 세운 학교이다.
초대교장은
백이행(白彛行)이었으나, 1910년 나부열(羅富悅) 목사를 설립자 겸 교장으로 추대하여 기독교주의 학교로 만들었다. 교사로는 3·1운동 전엔 여준(呂準)·서진순(徐進淳)·
유영모(柳永模)·이택호(李宅鎬)·
염상섭(廉尙燮)·
김억(金億)·이상정(李相定)·진연근(陳演根)·이윤재 (李允宰) 등이 있었다.
이승훈이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의 일원으로 체포되자 오산 학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졌다. 헌병들이 오산 학교에 들어와서 건물에 방화를 하였으며, 당시 교장이던
조만식(曺晩植)은 평양에서 구금되기까지 하였다. 어려움 속에서 운영되던 오산 학교는 1922년 이승훈이 출옥한 이후 오산 학교의 발전에 힘을 기울이면서 다시 안정을 찾았다. 오산 학교는 1926년 오산 고등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오산 학교는 광복 이후 남하하여 1953년 4월 부산에 재건하였다가, 같은 해에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로 이전하였다. 1956년 4월 다시 서울시 용산구 보광동에 신교사를 건설하고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산학교는 예사로운 학교가 아니라, 사관학교·훈련원·정치학교·인문중학교 및 특수모범자 양성소 등을 겸한 학교였다. 소정의 교과과정 외에 남강의 훈화와 직접적 훈도를 통한 민족정신의 고취와 민족성 개조에 치중하게 되었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 조형균(趙衡均)은 이승훈(李昇薰)과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