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다.
1407년(태종 7) 송도(松都 : 개성)의 연빈관(延賓館)을 모방해 서대문 밖에 건립하고 모화루(慕華樓)라고 했다. 1430년(세종 12) 모화관으로 개칭하고, 1433년 개축했는데 남쪽에는 연못이 있고 주위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또 입구에는 영조문(迎詔門)이 있었는데, 중국 사신 설정총(薛廷寵)이 "맞이하는 것에 조서(詔書)도 있고 칙서(勅書)도 있으며, 상을 내리기도 하는데 이름을 영조(迎詔)라 하는 것은 한군데로 치우친 듯하다"고 해 영은문(迎恩門)으로 바꾸었다.
중국 사신이 오면 원접사(遠接使 : 2품 이상)를 의주에 보내고 선위사(宣慰使 : 2품 이상)를 5곳에 보내어 연회를 베풀어 위로했다.
사신이 모화관에 들어가면 왕세자가 그 앞에 나아가 재배례를 행하고 백관도 재배례를 행한다. 그리고 백관은 반을 나누어 먼저 관(館)에 가서 기다린다. 사신이 돌아갈 때는 백관이 모화관 문 밖 길의 왼쪽에 순서대로 늘어섰다가 일시에 재배례를 행하고 전송했다.
청일전쟁 이후 폐지되었다.
1896년(건양 1) 서재필 등이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칭하고
독립협회 사무실로 사용하는 한편 영은문 자리에는
독립문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