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 초기인 1394년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 간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의 세계를 시정해 달라고 명나라에 주청하였던 사건.
1390년 이성계 의 정적이었던 이초와 윤이가 명나라로 피신하여 이성계를 제거할 목적으로 그를 모함하였다. 즉, 공양왕이 고려 왕실의 후손이 아니라 이성계의 인척이며, 함께 공모하여 명나라를 치려한다고 꾸며댔다. 또한, 이성계의 정적에 불과하였던
이인임을 이성계의 선조라 주장하였는데, 이 내용은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기록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394년 명나라의 사신을 통해 처음으로 조선에 알려졌는데, 조선 왕조의 합법성과 왕권 확립을 중시하던 건국 초기에는 매우 민감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리고 명나라에서는 이성계의 종계 문제를 빌미로 조선을 복속시키려고까지 하였다. 이에 조선은 명나라 사신 이 귀국하는 편에 이성계의 22대 가계 기록을 적은 변명 주문을 지어 보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명나라의 반응이 없자, 1403년 11월에 다시 이인임의 가계와 이성계의 가계 를 자세히 기록한 주청문을 보냈다.
하지만 명나라는 명태조의 유훈이 《대명회전》에 기록되었다는 이유로 《만력회전》의 중수본에 변명 사실을 부기하는 데 그쳐 이후 중종 반정의 합법성을 강조하는 데에도 심각한 외교상의 문제로 대두되었다.
중종 13년에는 주청사 이계명이 《대명회전》에서 '이인임과 그의 아들 이성계'를 언급하는 기록이 남아 있음을 알고 이를 보고하자, 중종은 남관· 이자 등을 보내 개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의 무종은 이를 개정하지 않았다. 그 후 1529년에 《대명회전》이 중찬되리라는 소식을 듣고 예부에 주청하여 다시 한 번 개정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1563, 1573년, 1575년, 1581년에 걸쳐 주청사를 보내 개정의 주장을 계속하였으나, 명나라에서는 《대명회전》 중찬 때 조선의 주장을 부록하겠다는 약속만을 하였다. 이에 대해 다시 이이가 강력한 개정을 주장하여
1584년에
황정욱이 명나라로 건너가 《대명회전》의 조선 관계 기록의 수정안 등본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어
1588년에는 주청사
유흥이 명나라로 건너가 신종의 칙서와 함께 중수된 《대명회전》 가운데 조선 관계 부분 1질을 받았다. 그리고 선조는 종계 개정을 고하는 제사를 지내고 대사를 베풀었다.
그 후
1589년에는 성절사
윤근수가 《대명회전》 전부를 받아옴으로써 근 200여 년 간이나 계속되던 종계 변무에 대한 양국의 외교 문제 가 일단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