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인종 때
최윤의 등 17명이 왕의 명령으로 예로부터 전해내려오던 '예'나 '의'에 대한 것을 수집하고 확인하여 모아서 50권으로 엮은 책.
이 책은 조선 초기까지 남아서 《
고려사》 '예지'를 편찬할 때 중요한 자료가 되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해동문헌총록》에 보면 우리 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예의와 당나라의 예의 를 참고로 해서 왕실과 백관의 의례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규보가 진양공이라는 벼슬에 오른 최이를 대신하여 지은 《신인상정예문발미》를 보면, 최윤의 등이 엮은 《상정예문》이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책장이 떨어지고 글자가 깨져 내용을 참고하기 어렵기 때문에 최이의 선친인 최충헌으로 하여금 짜맞추게 하여 2부를 작성한 다음, 1부는 예관에게 보내고 1부는 자기 집에 두었다. 그런데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로 도읍을 옮길 때 예관이 급하게 오느라고 가지고 오지 못하여 최충헌 소장본만 남게 되었다. 이것을 쇠붙이를 녹여 활자로 만들어 28부를 찍어 여러 관사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1234년과 1241년 사이로 추측된다.
쇠붙이를 녹여 활자로 만들고, 먹물이 묻기 힘든 쇠붙이에 먹물을 묻혀 인쇄를 하는 주자 인쇄 는 어려운 기술인데, 이를 쉽게 만들어 책을 찍어 냈다면 이미 강화 천도 이전에 주자 인쇄가 발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상정고금예문》은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