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5 ~ 1940] 독립 운동가. 호는 춘암(春菴)이고,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동학에 가담하여
1894년의
동학 운동 때는 7,000명의 교도를 이끌고 예산, 홍성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융희 2년)에 동학의 도통을 이어 제4대 교주가 되었고, 3·1 운동 때에는
손병희를 도와
천도교측의 독립 투사들에 대한 연락을 맡는 등 민족 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하였다.
그 뒤 천도교에서 교육 사업을 벌이게 되자 보성 학교, 동덕 학교를 운영하는 등 교육 사업에 힘썼다.
3·1운동으로 교단의 재산이 일본에 의해 압수되자 이정화를 통하여 강계교구모금운동을 지시하였다. 결국 박인호는 3월 10일 독립운동자금 모집 혐의로 피검되었으며, 1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수형생활을 마친 박인호는 1922년 1월 18일 다시 교주로 취임하였으나 신구파의 갈등으로 6월 6일 교주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민족운동에의 열정은 계속되었다. 조카 박래원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6·10만세운동에 필요한 제반 지원을 하였으며, 1927년에는 아들인 박래홍을 비롯한 많은 교인들을
신간회에 참여시켜 활동하게 하였다.
또한 지병이 악화되어 활동이 자유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1938년에는 멸왜기도운동(滅倭祈禱運動)을 전개하였다. 멸왜기도운동은 ①교인들의 정신적인 결합을 도모하기 위한 식고문(食告文)을 아침, 저녁 식사 때마다 시행하는 계획과 ②구파의 국권회복의 기회에 대비하여 활동자금을 충당하기 위한 특별 희사금 모집 계획, ③일본을 소멸하여 독립을 기원하는 의지를 담고 있는 멸왜기도문으로 특별 기도를 실시하는 세 가지 계획으로 진행되었다. 이 운동은 황해도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병석에 누워있던 박인호는 멸왜기도운동을 끝으로 1938년 교단의 일을
권동진과
오세창,
최린에게 맡겼다. 그리고는 1940년 4월 3일 86세로 영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