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이탈리아의 국가 통일· 독립 운동. 이탈리아어로 '부흥'이라는 뜻이며, 이 운동의 최대 공로자 카부르 백작이 1847년에 발간한 신문 《이르 리소르지멘토》에서 유래한다.
리소르지멘토는 이탈리아인의 민족 의식을 일깨운 이념 운동이자 문학 운동으로, 이탈리아의 여러 나라들을 외국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정치적 통일을 이룩한 여러 정치적 사건을 일으켰다. 리소르지멘토 에 대한 평가로는 자유주의의 승리로 보는 입장이 있으며, 대중과 함께하는 데 실패한 귀족과 부르주아의 혁명이라는 비판도 있다.
혁명의 시작
18세기 말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1796~1815)의 영향으로 인하여 개혁을 표방한 진보주의적인 단체가 성립되었으나 스스로 혁명을 실현할 힘은 갖지 못하였고,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봉건제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구체제가 부활되어, 북·중부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지배, 남부에서는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나폴레옹을 대신하여 이탈리아의 주인이 되었던 오스트리아 재무 장관 메테르니히는 이탈리아의 통일 정신과 입헌 사상, 자코뱅주의를 말살할 것을 계획했는데, 복귀한 이탈리아의 여러 군주는 모두 이를 받아들였다. 이에 대해 입헌 자유주의 운동이 프리메이슨에서 일어난 비밀 결사를 통하여 비합법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후, 19세기에 들어 일어났던 일련의 운동이 리소르지멘토의 출발점이 되었다. 즉, 1820~1821년 중남부에서는
카르보나리당, 북부의 피에몬테에서는 페데라티당이라는 비밀 결사가 나폴리와 피에몬테에서 혁명을 일으켰고, 1831년에는 파르마·모데나·볼로냐에서도 카르보나리당의 혁명적 반란이 있었지만, 모두 오스트리아군의 개입으로 진압되었다.
또 1833~1845년에는 국가의 의사가 국민에 의해 결정되는 정치인 공화제의 실현에 의한 이탈리아 민족의 재생이라는 목표를 내건
G. 마치니의 '
청년 이탈리아당'의 운동이 일어났다. 청년 이탈리아당은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교육 을 통하여 민족 의식을 자각한 민중 봉기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북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주요 도시에 지부를 세우고 마치니의 지도로 1830년대에 여러 차례 봉기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1848년 해산되었다. 이와 같은 혁명과 반란의 기운은 모두 실패로 끝났으나, 카르보나리당 과 마치니의 물결은 리소르지멘토에 있어서 민주주의파라고 할 수 있으며, 도시의 급진적 부르주아를 기반으로 하였다.
그 후, 1840년대에는 온건 자유주의적인 부르주아와 개화적인 귀족들로 구성된 자유주의파가 나타났다. 이들은 이탈리아 여러 나라의 연방화에 의한 통일의 달성과 외국 세력의 배제를 목표로 하였는데, 이탈리아의 근대화가 독립과 통일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여론을 배경으로 형성되었다.
1846년 자유주의적인 경향을 가진 교황
피우스 9세가 즉위한 것이 이들 자유주의파에게 희망을 주게 되어 교황을 맹주로 하는 연방만이 민족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는 네오겔프주의가 성립하였으며, C. 발보와 M.T. 다젤리오에 의해 정치적 온건주의가 완성되었다.
통일 전쟁
1848년 1월 시칠리아에서 헌법 제정을 요구하는 자유주의 및 공화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시칠리아 국왕은 그 요구를 들어 주게 되었고, 그러자 혁명은 각지로 크게 파급되었다. 그 결과 시칠리아· 토스카나·피에몬테에서 헌법이 제정되었다.
한편,
파리의 2월 혁명,
빈의 3월 혁명이 일어나자, 자국 내의 사정이 어려워졌고 이탈리아의 혁명에 손을 쓰기 어렵게 되었다. 3월에는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있었던 베네치아와 밀라노에서도 오스트리아에 대한 반란을 계기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인 카를로 알베르트는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선전 포고를 하였다. 토스카나와 나폴리 정부도 이에 호응하여 제1차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전쟁이 일어났다. 각지에서 의용군들이 전투에 참여하였으나 내부의 알력으로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였고, 게다가 교황 피우스 9세의 배반과 이탈리아 여러 나라의 분열로 결국 오스트리아에 패하고 말았다.
1849년 다시 전쟁을 일으켰으나 패하고 카를로 알베르트는 책임을 지고 물러났으며, 이와 함께 그 동안에 성립하였던 로마 공화국과 토스카나 공화국도 오스트리아에 의하여 붕괴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승리에 따라 이탈리아 여러 나라에는 구체제가 부활하였고, 그 중에서 주권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사르데냐 왕국에만 남게 되어 1948년의 헌법을 이어갔다. 피에몬테에는 이탈리아 각지로부터 망명자가 모이게 되어 이탈리아의 온건 자유주의 세력의 중심을 이루었다.
1850년 C.B. 카부르가 사르데냐 왕국의 총리가 되자 그는 영국 의 자유 무역 정책을 채택하고 재정 개혁에 노력하면서 외교 정책에 의한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힘썼다. 또 크림 전쟁(1853~1856)에 파병하여 사르데냐의 지위를 높이고 이탈리아 문제를 국제적으로 문제화하여 사르데냐 왕국이 유럽 여러 나라의 지원을 얻어야 한다고 내세웠고, 특히 프랑스와 연합하여 왕국 정규군만으로 대(對) 오스트리아 전쟁을 치를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플롬비에르 밀약에 의해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연합하여 1859년 4월에 대오스트리아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사르데냐·프랑스군은 승리를 거두고, 7월에는 롬바르디아를 병합하였다.
또 중부 이탈리아 의 파르마·모데나· 토스카나 대공국(大公國) 등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투표를 실시하여 이듬해 6월에 합병한 후 승인을 얻기 위하여 사르데냐 왕국은 프랑스에 니스와 사부아를 떼어 주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세력은 사르데냐의 왕국 중심주의에 반대하여 독자적인 운동을 전개하려 하였다.
통일 국가의 완성
1859년 말부터 시칠리아에서 시작하였던 나폴리의 부르봉 왕조에 대한 투쟁에 호응하여
G. 가리발디에 의한 의용군의 원정이 이루어졌다. 시칠리아에서의 반란은 가리발디에게 구실을 제공하였고 마침내 반란 세력과 손잡은 그는 카부르의 정책에 거세게 항의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독자적인 해방을 목표로 하여 의용군을 이끌고 1860년 시칠리아섬의 거의 전역을 평정한 후, 남부 이탈리아로 곧바로 진출하였다.
카부르는 날로 커지는 가리발디의 세력이 전체 이탈리아 를 지배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온건파와 국민 협회의 조직을 이용하여 은밀히 견제하고 1860년 9월에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사르데냐의 정규군을 남부에 파견하였다.
이 군대가 중부 이탈리아의 움브리아· 마르케를 점령한 후에 나폴리로 진군한 결과 가리발디는 남부 이탈리아를 국왕에게 바치게 되었다. 10월 남부 이탈리아의 투표 결과, 이들 지역은 사르데냐 왕국에 병합되었고, 움브리아· 마르케도 병합되었다. 이리하여 이탈리아의 국가 통일은 사르데냐 왕국의 주도하에 일단 완성되었다.
1861년 3월 토리노에서 열린 새 의회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초대 이탈리아 왕으로 선언하고 1848년의 피에몬테 헌법을 이탈리아 왕국의 헌법으로 정함으로써
이탈리아 왕국이 시작되었다.
또 회수하지 못했던 영토 베네토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전쟁 후인 1866년에, 라치오 지방은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 중인 1870년에 합병되어 이탈리아의 통일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