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사색 당파 중의 하나. 조선조 14대 선조(宣祖) 때
동인(東人)이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분열됨으로써 형성되었다.
선조 24년(1591년)에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西人)인
정철(鄭澈)이 물러나게 되었을 때, 동인은 정철의 처벌 문제를 둘러싸고 분열되었는데 이때 강경파는 북인이 되고 온건파는 남인이 되었다.
남인에는
우성전(禹性傳)·
유성룡(柳成龍)·
정구(鄭逑)·
이덕형(李德馨)·
정탁(鄭琢)·
이원익(李元翼)·
정경세(鄭經世) 등이 포함되며, 이 중 우성전의 집이 서울 남산(南山) 밑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남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선조 때 조정의 요직을 많이 차지하고 있었으나 광해군 때 북인에게 밀려났으며, 숙종 때에 다시 득세하였다가 1694년을 기점으로 몰락하기 시작하여 경종 이후에는 거의 조정에 등용되지 못하였다.
숙종 때에는
송시열(宋時烈)의 처벌 문제로 같은 남인 사이에 의견이 갈라져 강경파인 청남(淸南)과 온건파인 탁남(濁南)으로 분열되기도 하였다. 청남의 중심 인물은
허목(許穆)이었으며, 탁남의 중심 인물은
허적(許積)이었다.
경종 이후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들은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여 일종의 재야학파(在野學派)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 중에는 남인 출신이 많았다. 남인들은 대체로 국왕권의강화와 소농민의 안정을 추구하는 입장을 지키면서, 국왕보다 사족(士族)의 정치 주도권을 강조하는 서인과 이념적으로 대조되었다.
특히 17세기 이후로는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
정약용(丁若鏞)으로 대표되는 실학파의 한 흐름을 배출하였다. 이들의 업적에는 광범위한 개혁론이 포함되는데, 거기에는 실세한 시기가 많은 데서 기인한 강렬한 현실비판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익이 화폐 유통을 반대한 것, 적서차별 철폐에 대한 소극적 입장, 신분제 극복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 것 등에서 드러나듯이 복고적인 입장도 강하게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