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 가톨릭 신부· 추기경·서울 대교구장. 세례명은 스테파노. 경상 북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41년 서울에 있는 동성 상업 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일본 조치〔上智〕 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들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1944년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8·15 광복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다. 1947년 나중에 가톨릭 대학이 된 서울 성신 대학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1951년 졸업한 뒤 사제가 되었다. 안동 천주 교회 주임 신부로 사제 생활을 시작하여, 1953년에서 1955년까지는 대구 대주교의 비서 신부와 재정 부장, 그리고 해성 병원 원장을 지냈다. 1953년에는 대구 교구가 설립되어 그 재단으로 있는 김천시 성의 중· 고등 학교 교장과 김천시 황금동 천주교회의 주임 신부 를 함께 맡기도 하였다. 1956년 10월에는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스터 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공부하고 1964년에 귀국하여, 그 해 6월부터 2년 동안 주간 가톨릭 시보사 사장을 지냈다. 1966년 2월 마산 교구의 주교가 되었으며, 5월에는 교구장의 직책을 맡았다. 1968년 5월에는 서울 대교구장이 되었다. 취임 자리에서 그는, "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 원칙의 태도를 분명하게 밝혔다. 1969년 4월 우리 나라에서는 최초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임명 당시 전세계 추기경 가운데 최연소였다. 1970년에서 1975년까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으로 부임하였으며, 1970년부터 3년 동안은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도 일하였다. 1981년에서 1987년까지 2차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에 부임하였다. 한국 가톨릭계를 위해서뿐 아니라, 아시아 주교 회의와 세계 주교 회의에 참석하여 세계 속에 한국 의 위상을 높이기도 하였다. 1984년 5월에는 100만 신도 가 모이고 교황 바오로 2세가 집전한 가운데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성회를 열었다. 이 때 세계 최초로 교황청 밖에서 행해지는 시성식을 열어, 103위의 우리 나라 순교자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1989년 10월에는 교황과 세계의 가톨릭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로 가톨릭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세계적 행사인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를 열기도 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헌혈 및 안구·장기 등의 기증으로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근본적인 나눔의 실천 운동을 폈으며, 이 운동은 그 뒤로도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1974년 2월 서강 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1977년 5월 미국 노틀담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1988년 11월 일본 조치 대학에서 명예 신학 박사, 1990년 10월 미국 시튼홀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국가의 민주화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도 많은 사목 교서를 발표하였으며, 저서로는 《사회정의》 《평화를 위한 기도》 등의 신앙 수상록이 있다.